낮동안 하늘을 뒤덮은 채 후덥지근한 공기만 짓눌러대던 먹장구름은 한 밤이 되어서 물꼬를 터뜨렸다. 때를 기다린 듯 거세게 내리 붓던 비가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흐린 하늘은 쉬이 그칠 기미도 없이 찔끔찔끔 빗줄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가늘고 축축한 안개비에 달도 뜨지 않은 밤은 괜시리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병영을 지키는 보초병들도 그 불길한 밤을 느끼고 있었다.
" 젠장맞을! 차라리 올 것이면 퍼부을 것이지...."
중년의 남자는 볼 일을 보고 돌아오며 다른 보초병들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보초병이 그의 불만을 웃는 낯으로 받아주며 담배를 내밀었다.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부싯돌을 찾으려고 품을 뒤적이면서 중얼거렸다.
" 이런 날은 마누라 껴안고 한 바탕 뒹굴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 지긋지긋한 잔소리쟁이 마누라도 이런 날엔 간절하구만...."
그 농에 다른 두 보초병이 킬킬거렸다. 그 중 나이가 어려 앳띠기까지한 젊은이가 더 큰 소리로 웃어대자, 담배를 건넨 뒤 불까지 친절하게 붙여주던 남자가 퉁을 놓았다.
" 아이고, 저도 사내라고 뭘 좀 안단 표정일세?"
" 에이, 선배님은! 이래뵈도 따르는 계집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젊은이는 사내의 자존심을 짓밟히자 우스갯소리 삼아 받아쳤다. 그들은 담배로 적적한 밤을 달래며 계속 진한 농짓거리를 이어갔다. 그들 모두가 암묵적으로 심상치않은 날씨가 주는 불길함과 긴장을 몰아내기로 합의한 듯 농담을 이어가는데 필사적이었다.
거센 바람이 한 번 몰아치면서 나뭇잎들이 생짜로 떨어져 우스스 바람에 실려 왔다. 바람은 젖은 나뭇잎을 초소의 기둥과 지붕에 내동댕이 치고는 스쳐갔다. 아무리 하늘이 울고 있고 해가 떠난지 오래라지만 도저히 여름같지않은 한기마저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너무나 조용하였다. 군막에서 나오는 이들은 전혀 없었고 심지어 밤의 생물들마저 자신들의 영역인 한 밤을 포기하고 잠든 것 같았다. 아니, 어떤 공포에 질려 더 싶은 어둠으로 숨어든 것 같았다.
서서히 질퍽한 농담이 사그라들자 선배 보초병들은 젊은이에게 첫 경험을 졸랐고 참을 수 없을만치 두려운 밤의 기운에 겁이 나던 젊은이는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입담이 좋은 젊은이의 이야기로 서서히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잠시 그들은 불길한 밤의 눈초리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하지만 젊은이의 이야기가 절정에 달할 즈음 그는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방금 무엇인가가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어떤 것이 빠른 속도로 그들을 스쳐지났다. 젊은 보초병은 심장이 내려앉을 듯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는 두려운 마음을 겨우 다잡으며 등 뒤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등 뒤는 초소에서 켠 등불조차 닿지 않을 정도의 짙은 어둠뿐이었다. 그는 낮게 한 숨을 내어쉬며 안도했다. 그리고 겁 먹었던 자신을 감추려는 듯 애써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고 다시 돌아서며,
젊은이는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두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빠져나갈 도리는 없었다. 그의 눈에는 숨이 끊어져 축 늘어진 두 남자의 목을 양 손에 움켜쥔 채 막 그 중 한 명의 머리를 쩍 벌린 입 속으로 집어넣고 있는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 비치고 있었다. 그 괴물은 탐욕스럽게 먹이를 입 속에 넣으며 다섯개의 튀어나온 눈으로는 젊은 보초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실린 시선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이미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더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지 못하고 굶주린 수라족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음울한 빗줄기가 내리는 깊은 밤, 어둠과 불안의 하늘을 등지고 소리없이 몰려든 십 만 수라군들이 거침없이 천계의 땅으로 달려드는 장면이었다.
" 으흐....."
지국천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달래려는 듯 등을 펴고 의자 등받이에 뒷통수를 갖다대었다. 하지만, 어제부터 시작된 두통은 쉬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목은 뻐근하고 가슴은 무척 갑갑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되짚어 보았다.
끔찍한 일이 닥쳤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제 오전의 일이었다. 지국천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서재에 있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그 시간이 책을 읽기에 좋은 시간이라 지국천은 여름이면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한창 봄일 즈음 따서 잘 말린 꽃송이로 우려낸 차를 마시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무척 이른 시간이라 동방성은 부지런한 사람들만이 깨어 하루를 준비할 뿐,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아침의 고요를 찢으며 급하디 급한 말발굽 소리가 뛰어들어왔다. 전령은 절차를 밟을 여유도 없이 저지하는 이들을 밀치고 서재 입구까지 들이닥쳐 숨 넘어갈 듯 외쳐댔다.
" 전하!! 급한 전갈이옵니다. 계시옵니까?"
그 빠르고 다급한 말투에 지국천은 자신의 오전 휴식이 철저히 깨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지국천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차를 담은 잔이 넘어지더니 또르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하필이면 컵은 카펫을 벗어나 돌바닥에 떨어져내리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 퍼석!!"
서재에 들어선 전령은 예를 올리면서 깨져버린 잔에 불길한 시선을 붙박았다. 지국천에게 옮겨온 전령의 시선은 두려움에 질려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믿을 수 없는 사태를 보고했다.
수라족이 도솔천 북동쪽 변방을 넘었다는 소식이었다. 막 공격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전방을 지키던 동방군의 최초 군사방어선이 무너지고 이후 세 개의 군대가 전멸했다고 그는 전했다. 수라족의 수중에 백 여개나 되는 부락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지국천은 다리가 휘청하여 책상 모서리를 집고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지국천은 머리가 찡 울리는 고통을 느끼며 소리질렀다.
" 어째서 이제서야 보고를 한단 말인가! 삼군이 전멸하고 백여개의 부락을 뺏기다니!! 그리 될 동안 장수들은 무엇을 하고 이제서야 내게 보고를 한 단 말이냐!!"
큰 소리 내는 법이라곤 좀처럼 없는 지국천도 이런 사태에선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것이 삼군의 방어선이 뚫렸다는 것은 도솔천의 10분의 1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땅이 침략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라족의 단순공격이 아니라 엄연히 침략행위였고 전쟁의 시작이었다. 놀라움과 충격으로 노기를 띤 채 몸을 떠는 지국천 앞에서 전령은 마치 자신이 죄인인 듯 바닥에 엎드리며 통곡을 했다.
" 전하! 소식을 늦게 전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본 군에서도 이 사실을 오늘 새벽에 알게 되었나이다. 즉시 바람처럼 달려와 전하께 소식을 전하는 것이옵니다..."
지국천은 할 말을 잃었다. 삼 군이 전멸할 때까지 이 소식을 아는 이가 없었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전령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전했다. 그의 이야기는 처참한 비극이었다.
아직까지 어둠이 짙게 내려있는 새벽에 동위군의 파수꾼들은 멀리서 말 한 마리가 그리로 달려오는 것을 목격하고는 바짝 긴장을 했다. 하지만 달려오는 말 위에서 펄럭이는 것은 분명 같은 동방군 소속이자 동위군의 전방에 배치되어있는 동성군의 깃발이었다. 그들은 얼른 문을 열었지만 말이 안으로 들어서자 곧 경악을 하고 말았다. 비상 나팔이 울리고 장수들은 곧장 대장군의 천막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긴장하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둘러쌓고 있는 가운데 누워있는 피투성이의 남자는 바로 달려 들어 온 말 등에 죽은 듯 타고 있던 동성군의 연락병이었다. 남자의 온 몸은 물어뜯긴 이빨 자국이 선명했고 떨어져나간 살점에서 흘러나온 피로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었는지 그는 상처로 증명하고 있었다. 게다 그의 왼쪽 다리에 매달린 것에 장수들은 몸을 치떨었다. 그것은 수라괴물의 잘린 팔이었다. 얼마나 독기를 품고 달려들었는지 괴물은 팔이 잘려나가면서도 그 손을 풀지 않고 날카로운 손톱이 연락병의 살에 파고든 채, 그 팔의 부분이 매달려있었다. 연락병은 마지막으로 경련을 일으키더니,
" 수..라..족이..수..수...어마어마한...."
그것이 연락병의 최후의 한 마디었다.
대장군은 즉시 발 빠른 척후병을 동성군의 구역으로 보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돌아온 척후병들은 하나같이 하얗게 질린 채 자신들이 본 끔찍한 상황을 보고했다.
짓밟힌 동성군 쪽의 상황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척후병들이 목격한 것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자랑스런 동료들의 시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이었고 동성군의 병사들은 이제 형체를 잃고 뒹구는 붉은 고깃덩어리 밖에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수라족들은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개걸스럽게 먹어대고 있었는데 구역질이 날만큼 끔찍했다. 수라족이 뼈를 씹는 소리에 귀를 막아야 될 지경이었고 참다못한 몇 척후병들은 그대로 토해냈다. 수라족들은 그래도 배가 고픈지 전우의 시신을 앞에 두고 서로 먹겠다 싸우며 결국 서로를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대장군은 비장한 얼굴로 비상을 선포하고 전 군에 경계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재빨리 전령들을 사방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렇게 사태보고를 받은 지국천은 소름이 끼쳤다. 가까이 있는 군대마저 모르게 잠식하여 들어와 전방을 지키는 삼 군을 전멸시킨 수라족의 철저함과 민첩함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실력이었다. 그들은 공격 시 군대 간의 연락병까지 제거할만큼 기민했다. 그들 하나가 가진 야수의 재빠름과 목표로 삼은 것은 반드시 잡고마는 집요함을 동방군이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국천은 생각을 끝내고 일어서며 서랍 속에서 두통약을 한 알 더 꺼내 삼켰다. 밖으로 나서니 제황성으로 향할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 사태는 더 이상 혼자 해결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천제를 만나기로 했다. 천제와 상의하면 이 앞뒤가 막힌 상황을 뚫고 나갈 방도가 있으리라 그는 믿었다. 하지만동시에 그는 자신의 무능함에 수치를 느꼈다.
범천이 죽고 자신이 사령관을 맡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령관이었던 범천이 죽자 지국천은 그 자리에 세울만한 마땅한 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들 중에 유능한 장수들도 많았지만 군권을 전적으로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군권은 통치의 실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우 범천은 항상 지국천의 뜻을 잘 알고 받들며 한 번도 도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왕인 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였고 또한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은 완벽한 장군이었다. 결국 지국천은 사령관의 자리를 되가져오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는 지금과 같았다. 마치 지국천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공개하듯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지국천의 열등의식은 심한 두통으로 나타났다.
마차에 오르는 지국천의 걸음이 힘겨웠다. 무겁게 자리를 잡고 앉자, 시종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런데 곧이어 마차가 출발하는 대신, 시종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하....왕자전하께서 동행하시겠다 오셨습니다."
지국천은 그 순간 왕자에 대한 관념이 잡히지 않았다. 누굴 말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죽은 아들이라 여기고 살아온 습관이었다. 하지만 설무랑이 떠오르며 정신이 번쩍 드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경망스럽게 열리고 설무랑이 마차에 올랐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설무랑은 예복 정장을 차려 입고 있었고 지국천은 아버지의 본능으로 의젓하게 장성한 모습의 아들에 새삼 찡한 감격을 느꼈다. 하지만 설무랑은 지국천이 그런 감격에 제대로 젖을 틈도 주지 않고 도전적인 말투로,
" 입성하신다기에 따라나섰습니다."
지국천은 설무랑의 유들유들한 웃음에 다시금 심기가 불쾌해졌다. 설무랑의 웃음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지국천은 모욕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다소 엄하게 말했다.
" 유흥을 즐기러 가는 자리가 아니다.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
설무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기분나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 동방군의 명예가 달린 일 아니옵니까? 천제전하께서 믿고 계셨을터인데 수라족에게 짓밟힐 때까지 손도 쓰지 못했으니, 천제전하의 실망이 크시겠습니다. 크게 노하실 것입니다. "
지국천은 머리가 쿵 울렸다. 설무랑은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동방군이 어떤 궁지에 몰렸는지는 물론이며, 설무랑의 비밀스런 눈빛으로 보아 그는 그 이상의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국천은 그제서야 확신했다. 앞에 앉아있는 이 남자,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이 사내가 이번 사태에 개입이 되어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 너.....!!"
지국천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설무랑은 그 알 수 없는 미소 띈 얼굴에 여유를 보이며 그의 말을 막아섰다.
" 더이상 동방군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당신도 바라는 바가 아니지 않아? 그래서 내가 가려는거야."
지국천은 숨이 턱 막혔다. 설무랑은 싸늘한 눈초리로 지국천의 붉게 열이 오른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끝냈다.
" 내가 그 발칙한 수라족의 목을 치겠다고 천제에게 말하도록 하지. 이 정도면 내가 지금 제황성에 가야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싶은데? 아비가 못한 일을 아들이 수습한다. 그럴 듯 하잖아?"
지국천은 자신이 결코 이 무서운 아들을 이길 수 없으리라 예감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설무랑이 아니었다.
==정말 오랜만이지요? 이제 설무랑이 본격적으로 칼을 빼 들려고 합니다. 3월 한 달 일에 치이다보이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죄송! ^^ 꽃 구경은 하고 오셨는지요.
초율(礎律) 제 84화
참으로 기분 나쁘게 내리는 비였다.
낮동안 하늘을 뒤덮은 채 후덥지근한 공기만 짓눌러대던 먹장구름은 한 밤이 되어서 물꼬를 터뜨렸다. 때를 기다린 듯 거세게 내리 붓던 비가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흐린 하늘은 쉬이 그칠 기미도 없이 찔끔찔끔 빗줄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가늘고 축축한 안개비에 달도 뜨지 않은 밤은 괜시리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병영을 지키는 보초병들도 그 불길한 밤을 느끼고 있었다.
" 젠장맞을! 차라리 올 것이면 퍼부을 것이지...."
중년의 남자는 볼 일을 보고 돌아오며 다른 보초병들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보초병이 그의 불만을 웃는 낯으로 받아주며 담배를 내밀었다.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부싯돌을 찾으려고 품을 뒤적이면서 중얼거렸다.
" 이런 날은 마누라 껴안고 한 바탕 뒹굴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 지긋지긋한 잔소리쟁이 마누라도 이런 날엔 간절하구만...."
그 농에 다른 두 보초병이 킬킬거렸다. 그 중 나이가 어려 앳띠기까지한 젊은이가 더 큰 소리로 웃어대자, 담배를 건넨 뒤 불까지 친절하게 붙여주던 남자가 퉁을 놓았다.
" 아이고, 저도 사내라고 뭘 좀 안단 표정일세?"
" 에이, 선배님은! 이래뵈도 따르는 계집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젊은이는 사내의 자존심을 짓밟히자 우스갯소리 삼아 받아쳤다. 그들은 담배로 적적한 밤을 달래며 계속 진한 농짓거리를 이어갔다. 그들 모두가 암묵적으로 심상치않은 날씨가 주는 불길함과 긴장을 몰아내기로 합의한 듯 농담을 이어가는데 필사적이었다.
거센 바람이 한 번 몰아치면서 나뭇잎들이 생짜로 떨어져 우스스 바람에 실려 왔다. 바람은 젖은 나뭇잎을 초소의 기둥과 지붕에 내동댕이 치고는 스쳐갔다. 아무리 하늘이 울고 있고 해가 떠난지 오래라지만 도저히 여름같지않은 한기마저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너무나 조용하였다. 군막에서 나오는 이들은 전혀 없었고 심지어 밤의 생물들마저 자신들의 영역인 한 밤을 포기하고 잠든 것 같았다. 아니, 어떤 공포에 질려 더 싶은 어둠으로 숨어든 것 같았다.
서서히 질퍽한 농담이 사그라들자 선배 보초병들은 젊은이에게 첫 경험을 졸랐고 참을 수 없을만치 두려운 밤의 기운에 겁이 나던 젊은이는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입담이 좋은 젊은이의 이야기로 서서히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잠시 그들은 불길한 밤의 눈초리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하지만 젊은이의 이야기가 절정에 달할 즈음 그는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방금 무엇인가가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어떤 것이 빠른 속도로 그들을 스쳐지났다. 젊은 보초병은 심장이 내려앉을 듯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는 두려운 마음을 겨우 다잡으며 등 뒤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등 뒤는 초소에서 켠 등불조차 닿지 않을 정도의 짙은 어둠뿐이었다. 그는 낮게 한 숨을 내어쉬며 안도했다. 그리고 겁 먹었던 자신을 감추려는 듯 애써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고 다시 돌아서며,
" 방금...."
그 찰나에 젊은이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커진 눈에는 공포에 질린 눈동자만 얼어붙어있었다.
" 허...허....커어어억!"
젊은이는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두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빠져나갈 도리는 없었다. 그의 눈에는 숨이 끊어져 축 늘어진 두 남자의 목을 양 손에 움켜쥔 채 막 그 중 한 명의 머리를 쩍 벌린 입 속으로 집어넣고 있는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 비치고 있었다. 그 괴물은 탐욕스럽게 먹이를 입 속에 넣으며 다섯개의 튀어나온 눈으로는 젊은 보초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실린 시선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이미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더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지 못하고 굶주린 수라족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음울한 빗줄기가 내리는 깊은 밤, 어둠과 불안의 하늘을 등지고 소리없이 몰려든 십 만 수라군들이 거침없이 천계의 땅으로 달려드는 장면이었다.
" 으흐....."
지국천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달래려는 듯 등을 펴고 의자 등받이에 뒷통수를 갖다대었다. 하지만, 어제부터 시작된 두통은 쉬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목은 뻐근하고 가슴은 무척 갑갑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되짚어 보았다.
끔찍한 일이 닥쳤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제 오전의 일이었다. 지국천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서재에 있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그 시간이 책을 읽기에 좋은 시간이라 지국천은 여름이면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한창 봄일 즈음 따서 잘 말린 꽃송이로 우려낸 차를 마시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무척 이른 시간이라 동방성은 부지런한 사람들만이 깨어 하루를 준비할 뿐,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아침의 고요를 찢으며 급하디 급한 말발굽 소리가 뛰어들어왔다. 전령은 절차를 밟을 여유도 없이 저지하는 이들을 밀치고 서재 입구까지 들이닥쳐 숨 넘어갈 듯 외쳐댔다.
" 전하!! 급한 전갈이옵니다. 계시옵니까?"
그 빠르고 다급한 말투에 지국천은 자신의 오전 휴식이 철저히 깨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지국천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차를 담은 잔이 넘어지더니 또르르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하필이면 컵은 카펫을 벗어나 돌바닥에 떨어져내리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 퍼석!!"
서재에 들어선 전령은 예를 올리면서 깨져버린 잔에 불길한 시선을 붙박았다. 지국천에게 옮겨온 전령의 시선은 두려움에 질려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믿을 수 없는 사태를 보고했다.
수라족이 도솔천 북동쪽 변방을 넘었다는 소식이었다. 막 공격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전방을 지키던 동방군의 최초 군사방어선이 무너지고 이후 세 개의 군대가 전멸했다고 그는 전했다. 수라족의 수중에 백 여개나 되는 부락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지국천은 다리가 휘청하여 책상 모서리를 집고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지국천은 머리가 찡 울리는 고통을 느끼며 소리질렀다.
" 어째서 이제서야 보고를 한단 말인가! 삼군이 전멸하고 백여개의 부락을 뺏기다니!! 그리 될 동안 장수들은 무엇을 하고 이제서야 내게 보고를 한 단 말이냐!!"
큰 소리 내는 법이라곤 좀처럼 없는 지국천도 이런 사태에선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것이 삼군의 방어선이 뚫렸다는 것은 도솔천의 10분의 1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땅이 침략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라족의 단순공격이 아니라 엄연히 침략행위였고 전쟁의 시작이었다. 놀라움과 충격으로 노기를 띤 채 몸을 떠는 지국천 앞에서 전령은 마치 자신이 죄인인 듯 바닥에 엎드리며 통곡을 했다.
" 전하! 소식을 늦게 전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본 군에서도 이 사실을 오늘 새벽에 알게 되었나이다. 즉시 바람처럼 달려와 전하께 소식을 전하는 것이옵니다..."
지국천은 할 말을 잃었다. 삼 군이 전멸할 때까지 이 소식을 아는 이가 없었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전령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전했다. 그의 이야기는 처참한 비극이었다.
아직까지 어둠이 짙게 내려있는 새벽에 동위군의 파수꾼들은 멀리서 말 한 마리가 그리로 달려오는 것을 목격하고는 바짝 긴장을 했다. 하지만 달려오는 말 위에서 펄럭이는 것은 분명 같은 동방군 소속이자 동위군의 전방에 배치되어있는 동성군의 깃발이었다. 그들은 얼른 문을 열었지만 말이 안으로 들어서자 곧 경악을 하고 말았다. 비상 나팔이 울리고 장수들은 곧장 대장군의 천막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긴장하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둘러쌓고 있는 가운데 누워있는 피투성이의 남자는 바로 달려 들어 온 말 등에 죽은 듯 타고 있던 동성군의 연락병이었다. 남자의 온 몸은 물어뜯긴 이빨 자국이 선명했고 떨어져나간 살점에서 흘러나온 피로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었는지 그는 상처로 증명하고 있었다. 게다 그의 왼쪽 다리에 매달린 것에 장수들은 몸을 치떨었다. 그것은 수라괴물의 잘린 팔이었다. 얼마나 독기를 품고 달려들었는지 괴물은 팔이 잘려나가면서도 그 손을 풀지 않고 날카로운 손톱이 연락병의 살에 파고든 채, 그 팔의 부분이 매달려있었다. 연락병은 마지막으로 경련을 일으키더니,
" 수..라..족이..수..수...어마어마한...."
그것이 연락병의 최후의 한 마디었다.
대장군은 즉시 발 빠른 척후병을 동성군의 구역으로 보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돌아온 척후병들은 하나같이 하얗게 질린 채 자신들이 본 끔찍한 상황을 보고했다.
짓밟힌 동성군 쪽의 상황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척후병들이 목격한 것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자랑스런 동료들의 시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이었고 동성군의 병사들은 이제 형체를 잃고 뒹구는 붉은 고깃덩어리 밖에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수라족들은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개걸스럽게 먹어대고 있었는데 구역질이 날만큼 끔찍했다. 수라족이 뼈를 씹는 소리에 귀를 막아야 될 지경이었고 참다못한 몇 척후병들은 그대로 토해냈다. 수라족들은 그래도 배가 고픈지 전우의 시신을 앞에 두고 서로 먹겠다 싸우며 결국 서로를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대장군은 비장한 얼굴로 비상을 선포하고 전 군에 경계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재빨리 전령들을 사방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렇게 사태보고를 받은 지국천은 소름이 끼쳤다. 가까이 있는 군대마저 모르게 잠식하여 들어와 전방을 지키는 삼 군을 전멸시킨 수라족의 철저함과 민첩함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실력이었다. 그들은 공격 시 군대 간의 연락병까지 제거할만큼 기민했다. 그들 하나가 가진 야수의 재빠름과 목표로 삼은 것은 반드시 잡고마는 집요함을 동방군이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국천은 생각을 끝내고 일어서며 서랍 속에서 두통약을 한 알 더 꺼내 삼켰다. 밖으로 나서니 제황성으로 향할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 사태는 더 이상 혼자 해결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천제를 만나기로 했다. 천제와 상의하면 이 앞뒤가 막힌 상황을 뚫고 나갈 방도가 있으리라 그는 믿었다. 하지만동시에 그는 자신의 무능함에 수치를 느꼈다.
범천이 죽고 자신이 사령관을 맡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령관이었던 범천이 죽자 지국천은 그 자리에 세울만한 마땅한 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들 중에 유능한 장수들도 많았지만 군권을 전적으로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군권은 통치의 실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우 범천은 항상 지국천의 뜻을 잘 알고 받들며 한 번도 도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왕인 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였고 또한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은 완벽한 장군이었다. 결국 지국천은 사령관의 자리를 되가져오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는 지금과 같았다. 마치 지국천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공개하듯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지국천의 열등의식은 심한 두통으로 나타났다.
마차에 오르는 지국천의 걸음이 힘겨웠다. 무겁게 자리를 잡고 앉자, 시종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런데 곧이어 마차가 출발하는 대신, 시종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하....왕자전하께서 동행하시겠다 오셨습니다."
지국천은 그 순간 왕자에 대한 관념이 잡히지 않았다. 누굴 말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죽은 아들이라 여기고 살아온 습관이었다. 하지만 설무랑이 떠오르며 정신이 번쩍 드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경망스럽게 열리고 설무랑이 마차에 올랐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설무랑은 예복 정장을 차려 입고 있었고 지국천은 아버지의 본능으로 의젓하게 장성한 모습의 아들에 새삼 찡한 감격을 느꼈다. 하지만 설무랑은 지국천이 그런 감격에 제대로 젖을 틈도 주지 않고 도전적인 말투로,
" 입성하신다기에 따라나섰습니다."
지국천은 설무랑의 유들유들한 웃음에 다시금 심기가 불쾌해졌다. 설무랑의 웃음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지국천은 모욕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다소 엄하게 말했다.
" 유흥을 즐기러 가는 자리가 아니다.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
설무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기분나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 동방군의 명예가 달린 일 아니옵니까? 천제전하께서 믿고 계셨을터인데 수라족에게 짓밟힐 때까지 손도 쓰지 못했으니, 천제전하의 실망이 크시겠습니다. 크게 노하실 것입니다. "
지국천은 머리가 쿵 울렸다. 설무랑은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동방군이 어떤 궁지에 몰렸는지는 물론이며, 설무랑의 비밀스런 눈빛으로 보아 그는 그 이상의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국천은 그제서야 확신했다. 앞에 앉아있는 이 남자,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이 사내가 이번 사태에 개입이 되어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 너.....!!"
지국천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설무랑은 그 알 수 없는 미소 띈 얼굴에 여유를 보이며 그의 말을 막아섰다.
" 더이상 동방군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당신도 바라는 바가 아니지 않아? 그래서 내가 가려는거야."
지국천은 숨이 턱 막혔다. 설무랑은 싸늘한 눈초리로 지국천의 붉게 열이 오른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끝냈다.
" 내가 그 발칙한 수라족의 목을 치겠다고 천제에게 말하도록 하지. 이 정도면 내가 지금 제황성에 가야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싶은데? 아비가 못한 일을 아들이 수습한다. 그럴 듯 하잖아?"
지국천은 자신이 결코 이 무서운 아들을 이길 수 없으리라 예감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설무랑이 아니었다.
==정말 오랜만이지요? 이제 설무랑이 본격적으로 칼을 빼 들려고 합니다. 3월 한 달 일에 치이다보이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죄송! ^^ 꽃 구경은 하고 오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