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이 보낸 메일은 딱 한 줄이었다 '하루동안 애인이 되어 주세요' 약속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했다. 그녀는 벌써 나와 있었다 "일찍 나오셨군요" 그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이원영씨?" 미소로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묻는다 "어떻게... 저인줄 알아 보셨죠?" "짧은 커트 머리의 매력적인 여인은 한 명밖에 없던걸요" 그녀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제가 그런 모습일 줄... 어떻게 아셨어요?" 서빙하는 아가씨가 메뉴판을 놓고 간다. 메뉴판을 펼치면서 말을 이었다 "단 한 줄의 메일이더군요. 하룻동안 애인이 되어 달라는..." "......"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이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입니다. 다시 말해 남자는 야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지만 여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자 를 지배합니다. 보편적으로 남자는 야망을, 여자는 사랑을 선택하죠. 여자에게 있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다른 어느 것보다 비교우위에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영원히 계속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애인의 존재가 단 하루 만 필요하다는 것은...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애인이란 존재를 기대하지 않겠다, 잊고 살겠다... 이런 마음이겠죠" "......" "이렇게 모진 마음을 먹는 이유는 대부분 사랑했던 사람을 잊어야 하는 경우일 때 입니다. 자신의 확고한 뜻을 스스로에게 인식하기 위해, 그리고, 현재까지의 삶에 서 벗어나기 위해 대부분 자신의 외모에 변화를 주게 마련인데 그것이 보통 머리 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머리가 짧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외모가 매력적일 거라는 예상은 어떤 근거였죠?" "하루가 됐건 일년이 됐건 애인 관계가 되려면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야 합니다. 처음 본 남녀가 호감을 갖기 위해선 성품이나 인격보다 우선적으로 외모를 보게 되죠. 물론, 지현씨의 경우엔 제 외모가 어떻게 생겼느냐는 상관 없으셨겠죠. 이젠 잊어야 하는 사람과 있었던 추억을 마지막으로 동행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 니까요. 그러나, 상대에게 이런 제안을 할 때엔 상대의 눈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비추게 될 지 한번쯤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외모에 자신없는 사람일수록 부연설 명이 길어지죠. 난 어떻게 생겼으니 기대는 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지현씨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꼈거나 아니면 전혀 염두하지 않았을 테죠. 상대방에게 자신의 외모가 어떻게 비칠지 생 각하지 않는 여성은 대부분 평균 이상의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 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지현씨를 알아 본 겁니다" "그랬군요..." 여운에 잠겨 있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하고 메뉴판을 접었다 "전 코코아로 하겠습니다. 지현씨는?" 그녀의 얼굴에 잠시 야릇한 표정이 스쳐갔다 "제가 뭘 시킬 거 같으세요?" "하하. 글쎄요" "한 번 분석해 보세요" 장난스러운 질문인 듯 했으나 말 속에 칼이 있었다. 그녀가 품은 칼로 인해 이 질문 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아마, 오늘 하루 전체의 신뢰에 대한 마지막 통과이리라... "관상보다는 수상(손금)이, 수상보다는 족상이, 족상보다는 심상이 중요하지만, 심상은 결국 관상에 나타납니다.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 간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지현씨 외모는 기본적으로 남만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감추고 스스로 이지적인 모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겠죠... 낭만적인 심성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헤이즐넛을 마실테고, 이지적인 모습을 강조 한다면 블루마운틴 타입을 선호할 듯 합니다" 그녀의 얼굴에 알듯말듯한 미소가 스쳐갔다 "전 블랙커피를 마셔요" 의외였다. 블랙커피라니... "블랙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예전엔 헤이즐넛을 즐겨 마셨어요" "......" "그 사람이 블랙을 마셨거든요... 그 뒤로는 블랙만 마셔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모습이란... 과연 그녀는 오늘 하루로 모든 걸 정리할 수 있을까... "뭐 드릴까요?" 서빙하는 아가씨가 묻는다.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코코아 한 잔하고... 블랙 커피 두 잔 부탁 합니다" 그녀가 또 눈을 크게 뜬다. 왜 세 잔이나 시키냐는 뜻일게다 "이왕 하는 대타 노릇 확실하게 해야 되잖습니까" "아... 그러시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코코아는 왜 시키셨어요?" "전 블랙은 너무 써서 못 마십니다. 코코아 타 마실 겁니다" 처음으로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는 말씀드릴 생각이 없었는데... 이미 다 알고 계시는군요" 그녀는 머그컵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 남자를 잊으려고 해요... 잊혀지지 않지만...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이젠 잊으려고 해요..." "......" "저 내일 유학 가요... 오늘 마지막으로 그와 숨쉬던 발자취를 되집어 보고 내일이 오면 미련없이 떠날 거에요... 그리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 "......" "여기 나오기 전에 거울을 보면서 제게 말해 줬어요... 지현아... 오늘만큼은 그를 그리워해도 돼...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구... 그러나... 그건 오늘만이야... 오늘만 생각하고 내일부턴 잊어야 돼... 그래야 돼..." 머그컵을 꼭 쥔 그녀의 손이 떨리는가 싶더니 눈물이 컵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나를 데리고 처음으로 간 곳은 노래방이었다 "그 사람하고 처음 만나서 간 곳이 노래방이었어요" 그와 처음 갔던 노래방을 가야 된다면서 그녀는 삼십 분 이상 거리를 뒤지고 다녔다 "저기에요!" 노래방 건물은 새로 지은 건물들 사이에 다 쓰러져 가는 분위기로 웅크리고 있었다 "[우랄라 노래방]이라... 노래방 이름이 상당히 심오하군요" "원래는 '울랄라 노래방' 인데 'ㄹ'자가 떨어졌나 봐요" "......" 음침한 작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그 남자는 왜 좋은 노래방 놔 두고 이런 곳을 왔답니까?" "좋은 곳은 장사 잘 되니까 이런데 와서 매상 올려 줘야 된다고 했어요" "흐음... 멋진 사고 방식의 사나이군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이런데가 한가해서 구석진 방에서 뭔 짓을 해도 방해 안 한다고 해서 왔다고 고백 하더라구요" "흐음... 그것도 나름대로 멋진 사고 방식..." "-_-+" "흠흠... 들어 갑시다" 주인 할아버지는 구석 음침한 곳의 방으로 우릴 안내했다 "한 시간 넣어 주십시오" "젊은 사람들이 한 시간 가지고 되나" 할아버지는 느끼한 표정을 지어 보이시며 두 시간을 넣어 주셨다 "방에 불 꺼 줄 테니까 편하게 놀아. 불 켜지면 오분 뒤에 인검 나온다는 뜻이야" 조명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방 안엔 모니터의 불빛만 빛나고 있었다. 낯선 분위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부지런히 노래책을 뒤지고 있었다 "흠흠... 여긴 서비스가 너무 좋은데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여긴 신곡이 없거든요" 그녀가 건네는 노래책을 뒤져보니 과연 신곡이 없었다. 어차피 팔십년대 가요밖에 모르는 내겐 신곡이 있건 없건 별 의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가 최신곡에 버젓이 있다는 건 좀 심한 듯 하다 "그 사람은 노래방 오면 제일 먼저 이걸 불렀어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전주가 나온다 생각했는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 그녀는 일절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부르고, 이절부터는 나와 손 잡고 불렀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사절이 다 끝났음에도 그녀는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놓기 위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쳐다보는 걸 느낀 그녀는 손을 놓으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난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옛날에 애국가 부르면서 눈물 흘린 적 있었어요" "아... 언제요...?" "국민학교 때 애국가 사절까지 못 외운다고 선생님한테 존나게 맞았었습니다. 그 때 참 많이 울었죠..."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곤 배를 잡고 숨도 못 쉬고 웃더니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유머작가세요?" 나도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 "유머작가인줄 모르셨습니까?" 그녀는 다시 배를 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두 시간 동안 무슨 노래를 해야할까 걱정했건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이문세의 노래들(사랑이 지나가면, 난 아직 모르잖아요. 깊은 밤을 날아서, 그대와 영원히 등)과 유재하의 지난 날, 사랑하기 때문에, 박정운의 오늘 같은 밤이면, 먼 훗날에 등등 부를 노래가 한 두곡이 아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부를 때엔 그녀는 이주노, 난 양현석이 되어서 미친듯이 춤을 추며 광란의 괴성을 질러댔다. 엔딩곡은 그룹 코리아나의 '손에 손 잡고'를 손 잡고 불렀다 노래방 다음은 영화관이었다. 테크노마트의 CGV에 들려 영화 한편을 보았다 영화를 보고 밖을 나오니 이미 어둑컴컴해져 있었다 "우리 이젠 좀 멀리 가요" 그녀는 나를 끌고 차량 대여소를 갔다. 거기서 BMW 스포츠카를 대여했다 "이걸 나보고 운전하라는 겁니까?" "운전 면허증 있으시잖아요" "외제차는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괜찮아요. 사고나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 차를 몰고 경부 고속도로로 나왔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부산으로 가요" 시계를 보니 저녁 일곱시였다 "지금가면 새벽에나 도착할텐데요" "이백 키로로 달리면 금방 가요" "끼이익!!" 그녀의 말에 급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갓길에 댔다. 그녀 놀라서 날 쳐다본다 "왜 멈추세요?" "저보고 이백 키로로 밟으라는 말씀입니까?" "그 사람도 항상 이백 키로씩 밟았어요" "전 백 키로 이상은 절대 안 밟습니다" "왜요? 사고날까봐요?" "사고나는 건 겁나지 않는데 기름값은 겁납니다. 그렇게 달리면 오백원짜리 동전을 바닥에 뿌리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름값 걱정 마세요. 모든 경비는 제가 다 댈께요" "그 돈은 돈 아닙니까. 그렇게 달리나 천천히 가나 결국 비슷하게 들어갑니다" "알았어여..." 그녀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그리곤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부르르릉!" 다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부르르릉!!" 밟으면 밟는대로 올라가는 속도... 차들이 옆으로 쉭쉭 지나친다 "지현씨" "네" 풀 죽은 목소리다 "고개 들어서 몇 키로인지 봐봐요" 풀 죽어 있던 그녀는 계기판을 보고 놀라며 소리쳤다 "어머! 이백 킬로네요!" 동그랗게 커져 있을 그녀의 눈이 보고 싶었지만 전방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을 떼면 우린 고속도로가 아닌 요단강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이젠 소원 풀었습니까?" "근데... 괜찮으세요... 저 때문에..." "괜찮습니다. 뭐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근데요..." "네?" "그 사람은요... 이렇게 운전하면서 오른손으론 저를 안아 주었거든요" "......" "저기여...?" "......" "말씀이 없으시네요...?" "......" 부산에 도착하니 자정이 조금 지났다 "자, 이제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우리... 오늘 여기서 자고 가요" "끼이이익!!" "어머! 놀래라!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부릉~~~" 그 사람과 묶은 곳이 해운대라고 한다. 해운대의 웨스턴 조선비치 호텔로 갔다 "여기 아닌데요" 그랜도 호텔과 파라다이스 호텔로 연이어 데리고 갔다 "이렇게 좋은 데는 아니었어요" 외제 스포츠카 몰고 왔었다길래 특1급 호텔에 묶은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다 한급 낮춰 1급 호텔로 갔다 "여기 말고 또 없어요?" "3급 호텔이 있긴 합니다만..." "호텔 말고는 없어요?" "... 호텔에서 안 묶었습니까?" "호텔 아니에요. 여관이었던 거 같은데..." "......" "또 말씀이 없으시네요" "아닙니다... 그냥... 그런데... 외제차를 몰고 와서 여관에서 묶었습니까...?" "네..." "외제차를 여관 주차장에다 놔 두고요?" "네..." 해운대쪽의 여관이란 여관을 다 뒤졌다. 약 삼십 분을 뒤졌을까... "찾았어요!" 그녀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와이키키 여관] 그녀는 눈빛을 초롱초롱 반짝거리며 말했다 "맞아요 와이키키 여관! 그 때 여관 이름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요" 그녀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샤워 한다고 욕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살짝 걸터 앉으니 '들썩' 하고 소리가 났다. 별 생각없이 '들썩들썩'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한다 문을 열어주니 주인 아주머니였다 "벌써부터 들썩 거리는 소리가 나서 노크까지 했네" 주인 아주머니가 웃으며 수건 두 장과 일회용 칫솔, 요쿠르트와 계란을 놓고 나갔다 그녀가 수건을 몸에 두르고 밖으로 나온다 "여긴 계란도 줍니까?" 그녀가 계란을 톡톡 까면서 말한다 "옥수수도 줬던 거 같아요" "......" 그녀는 침대에 누었다 그녀가 눕자 침대가 들썩 거렸다 "땅바닥 차갑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밑에 두 장 까실래요?" "벌써 두 장 깔았습니다" "네..." 바닥에 누운 지 십 분여가 지났다 "뭐하세요?" "형광등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요?" "형광등이 어둡게 보일까 해서요" "켜진 형광등도 어둡게 보일 수 있나요?" "형광등은 교류에 의한 발생한 전자들이 기체분자에 부딪힐 때 발생하는 자외선을 이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짧은 순간이지만 빛이 연속적으로 나오지 못하고 발광과 꺼짐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꺼짐의 순간을 이용해서 어둡게 보시겠다는 말씀이세요?" "빛이 도달하는 시간 때문에 어둡게 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결국 불가능한 거네요?" "그렇죠" "......" 바닥에 누운 지 삼십여 분이 지났다 "바닥... 차갑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그 사람은 바닥이 차갑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여름이라서 괜찮습니다" "그때도 여름이었어요" "......" "그 사람은 저를 꼭 안아만 준다고 약속하고 침대로 올라왔어요" "그렇군요" "올라오세요... 그리고... 안아 주세요" "제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군요" "안아만 주는 건데도... 많이 바라는 건가요?" "안아만 주는 거니까 많이 바라는 거죠" "......" 그녀가 품에 안겨서 말한다 "삶은 왜 고통스러울까요?" "삶은 고통스러운 게 아닙니다. 희노애락이 반복되는 겁니다" "반복된다구여... 그런데 왜 제겐 기쁨과 즐거움이 없고 슬픔만 있는 걸까요..." "형광등의 원리와 같습니다. 희노애락은 반복되지만 슬픔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이 안 보이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은 희노애락이 반복되지만 지현씨 처럼 슬프게 사는 사람도 있고, 기쁘고 즐겁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즐겁고 기쁘게 살 수 있을까요?" "마음 먹기에 따라 달렸습니다" "그 남자와 이 곳에서 두 번을 잤어요" "......"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잤고... 그가 군대 가기 바로 전 날에 잤어요..." "......" "이렇게 꼭 안아 주면서 말했어요. 2년 2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 그녀가 머리를 묻고 있던 왼쪽 가슴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정확히 3주 후에 연락이 왔어요..." "......" "국군병원으로 갔는데... 벌써 싸늘하게 식어 있더라구요..." "......" 그녀의 목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전 약속을 지켰어요... 2년 2개월을 기다렸거든요" "......" "아니에요. 전 약속을 안 지켰어요... 4년을 기다렸거든요..." "......" "이젠 기다리지 않을 거에요... 그 누구도... 기다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증오 할 거에요..." "......" 그녀의 몸 전체가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저도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스스로 잔인해지지 않으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 "인간은 스스로 괴롭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행복하고 기쁘다가도 '내가 이래선 안 되지' 하며 과거의 슬픈 기억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그리곤 우울해집니다. 슬픈 기억이라는 건 꺼내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낼 수 없는 상자라고 생각합니다" "......" "그 상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십시오. 즐거운 것을 보면 즐거워 하십시오. 괴로운 기억은 다시 꺼내지 마십시오. 스스로 잔인해지지 않아도 됩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고..." "그러면... 정말 좋을까요? 좋은 것만 보면 좋은 건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좋은 것은 상대적입니다. 좋은 것이 좋기 위해선 슬픔이 있어야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가끔은 슬퍼해도 좋습니다. 즐겁기 위해서라도 가끔 슬퍼해도 좋습니다" "그럼... 제게 남은 슬픔을 꺼내 봐도 좋은 건가요?... 그 남자를... 완전히 잊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잊지 말고 꼭 기억 하십시오. 다만, 지금은 꺼내 보지 마십시오. 나중에, 너무 바쁘고 행복도 슬퍼할 겨를도 없을 때... 그 때 꺼내 보십시오. 그러면 다시 행복 해질 겁니다" "그럼... 지금은... 나 마지막으로 그 사람 생각해도... 되죠...?" 그렇게 말한 뒤, 그녀의 몸이 격정적으로 떨려오기 시작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그 남자 말입니다" "......" "제가 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남자인데 말입니다" "네?" "그러니까... 적극적이고 공격적이고 능동적이고... 그러니까 제 말은..." "말씀하세요" "정말... 끌어 안고만 잤습니까?" "그렇게 약속했죠. 안고만 잔다고요" "네..." "그러나 약속을 어겼죠" "역시 그렇군요" "그런 약속은 지키기 힘든가요?" "고양이한테 생선 맡겨놓고 먹지 말라고 약속해 보십시오. 약속 지키나 안 지키나" "그럼 제가 안아만 달라고 말한 건 정말 무리한 요구였네요?"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그럼... 그 요구 취소할께요" "......" "불 끌까요?" "......" 다음날 그녀와 부산 공항으로 향했다. 시간이 늦어 비행기로 서울에 올라가야 했다 "이제 헤어지면 앞으로 다시 볼 일이 없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녀는 예의 보조개가 깊숙히 들어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일은 언제까지 하실 거에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 그녀가 품에 안겨 들어왔다. 그리곤 조용히 속삭였다 "평생 잊지 못할 거에요..." 이내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가는 그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 공항을 빠져 나왔다 차를 끌고 서울로 향하면서 하늘을 바라 보았다 그녀가 탔을 비행기를 바라보며 잠깐 눈을 감고 기도를 하였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다... 진심으로... <EPISODE 1... END> 13
[이원영 러브닷컴] - 일일애인 편
의뢰인이 보낸 메일은 딱 한 줄이었다
'하루동안 애인이 되어 주세요'
약속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했다. 그녀는 벌써 나와 있었다
"일찍 나오셨군요"
그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이원영씨?"
미소로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묻는다
"어떻게... 저인줄 알아 보셨죠?"
"짧은 커트 머리의 매력적인 여인은 한 명밖에 없던걸요"
그녀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제가 그런 모습일 줄... 어떻게 아셨어요?"
서빙하는 아가씨가 메뉴판을 놓고 간다. 메뉴판을 펼치면서 말을 이었다
"단 한 줄의 메일이더군요. 하룻동안 애인이 되어 달라는..."
"......"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이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입니다. 다시 말해
남자는 야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지만 여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자
를 지배합니다. 보편적으로 남자는 야망을, 여자는 사랑을 선택하죠. 여자에게
있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다른 어느 것보다 비교우위에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영원히 계속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애인의 존재가 단 하루
만 필요하다는 것은...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애인이란 존재를 기대하지 않겠다, 잊고 살겠다...
이런 마음이겠죠"
"......"
"이렇게 모진 마음을 먹는 이유는 대부분 사랑했던 사람을 잊어야 하는 경우일 때
입니다. 자신의 확고한 뜻을 스스로에게 인식하기 위해, 그리고, 현재까지의 삶에
서 벗어나기 위해 대부분 자신의 외모에 변화를 주게 마련인데 그것이 보통 머리
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머리가 짧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외모가 매력적일 거라는 예상은 어떤 근거였죠?"
"하루가 됐건 일년이 됐건 애인 관계가 되려면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야 합니다.
처음 본 남녀가 호감을 갖기 위해선 성품이나 인격보다 우선적으로 외모를 보게
되죠. 물론, 지현씨의 경우엔 제 외모가 어떻게 생겼느냐는 상관 없으셨겠죠.
이젠 잊어야 하는 사람과 있었던 추억을 마지막으로 동행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
니까요. 그러나, 상대에게 이런 제안을 할 때엔 상대의 눈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비추게 될 지 한번쯤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외모에 자신없는 사람일수록 부연설
명이 길어지죠. 난 어떻게 생겼으니 기대는 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지현씨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꼈거나
아니면 전혀 염두하지 않았을 테죠. 상대방에게 자신의 외모가 어떻게 비칠지 생
각하지 않는 여성은 대부분 평균 이상의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
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지현씨를 알아 본 겁니다"
"그랬군요..."
여운에 잠겨 있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하고 메뉴판을 접었다
"전 코코아로 하겠습니다. 지현씨는?"
그녀의 얼굴에 잠시 야릇한 표정이 스쳐갔다
"제가 뭘 시킬 거 같으세요?"
"하하. 글쎄요"
"한 번 분석해 보세요"
장난스러운 질문인 듯 했으나 말 속에 칼이 있었다. 그녀가 품은 칼로 인해 이 질문
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아마, 오늘 하루 전체의 신뢰에 대한 마지막
통과이리라...
"관상보다는 수상(손금)이, 수상보다는 족상이, 족상보다는 심상이 중요하지만,
심상은 결국 관상에 나타납니다.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 간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지현씨 외모는 기본적으로 남만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감추고
스스로 이지적인 모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겠죠...
낭만적인 심성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헤이즐넛을 마실테고, 이지적인 모습을 강조
한다면 블루마운틴 타입을 선호할 듯 합니다"
그녀의 얼굴에 알듯말듯한 미소가 스쳐갔다
"전 블랙커피를 마셔요"
의외였다. 블랙커피라니...
"블랙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예전엔 헤이즐넛을 즐겨 마셨어요"
"......"
"그 사람이 블랙을 마셨거든요... 그 뒤로는 블랙만 마셔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모습이란...
과연 그녀는 오늘 하루로 모든 걸 정리할 수 있을까...
"뭐 드릴까요?"
서빙하는 아가씨가 묻는다.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코코아 한 잔하고... 블랙 커피 두 잔 부탁 합니다"
그녀가 또 눈을 크게 뜬다. 왜 세 잔이나 시키냐는 뜻일게다
"이왕 하는 대타 노릇 확실하게 해야 되잖습니까"
"아... 그러시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코코아는 왜 시키셨어요?"
"전 블랙은 너무 써서 못 마십니다. 코코아 타 마실 겁니다"
처음으로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는 말씀드릴 생각이 없었는데... 이미 다 알고 계시는군요"
그녀는 머그컵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 남자를 잊으려고 해요... 잊혀지지 않지만...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이젠
잊으려고 해요..."
"......"
"저 내일 유학 가요... 오늘 마지막으로 그와 숨쉬던 발자취를 되집어 보고 내일이
오면 미련없이 떠날 거에요... 그리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
"......"
"여기 나오기 전에 거울을 보면서 제게 말해 줬어요... 지현아... 오늘만큼은 그를
그리워해도 돼...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구... 그러나...
그건 오늘만이야... 오늘만 생각하고 내일부턴 잊어야 돼... 그래야 돼..."
머그컵을 꼭 쥔 그녀의 손이 떨리는가 싶더니 눈물이 컵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나를 데리고 처음으로 간 곳은 노래방이었다
"그 사람하고 처음 만나서 간 곳이 노래방이었어요"
그와 처음 갔던 노래방을 가야 된다면서 그녀는 삼십 분 이상 거리를 뒤지고 다녔다
"저기에요!"
노래방 건물은 새로 지은 건물들 사이에 다 쓰러져 가는 분위기로 웅크리고 있었다
"[우랄라 노래방]이라... 노래방 이름이 상당히 심오하군요"
"원래는 '울랄라 노래방' 인데 'ㄹ'자가 떨어졌나 봐요"
"......"
음침한 작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그 남자는 왜 좋은 노래방 놔 두고 이런 곳을 왔답니까?"
"좋은 곳은 장사 잘 되니까 이런데 와서 매상 올려 줘야 된다고 했어요"
"흐음... 멋진 사고 방식의 사나이군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이런데가 한가해서 구석진 방에서
뭔 짓을 해도 방해 안 한다고 해서 왔다고 고백 하더라구요"
"흐음... 그것도 나름대로 멋진 사고 방식..."
"-_-+"
"흠흠... 들어 갑시다"
주인 할아버지는 구석 음침한 곳의 방으로 우릴 안내했다
"한 시간 넣어 주십시오"
"젊은 사람들이 한 시간 가지고 되나"
할아버지는 느끼한 표정을 지어 보이시며 두 시간을 넣어 주셨다
"방에 불 꺼 줄 테니까 편하게 놀아. 불 켜지면 오분 뒤에 인검 나온다는 뜻이야"
조명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방 안엔 모니터의 불빛만 빛나고 있었다. 낯선 분위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부지런히 노래책을 뒤지고 있었다
"흠흠... 여긴 서비스가 너무 좋은데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여긴 신곡이 없거든요"
그녀가 건네는 노래책을 뒤져보니 과연 신곡이 없었다. 어차피 팔십년대 가요밖에
모르는 내겐 신곡이 있건 없건 별 의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가 최신곡에 버젓이 있다는 건 좀 심한 듯 하다
"그 사람은 노래방 오면 제일 먼저 이걸 불렀어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전주가 나온다 생각했는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
그녀는 일절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부르고, 이절부터는 나와 손 잡고 불렀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사절이 다 끝났음에도 그녀는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놓기 위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쳐다보는 걸 느낀 그녀는 손을 놓으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난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옛날에 애국가 부르면서 눈물 흘린 적 있었어요"
"아... 언제요...?"
"국민학교 때 애국가 사절까지 못 외운다고 선생님한테 존나게 맞았었습니다.
그 때 참 많이 울었죠..."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곤 배를 잡고 숨도 못 쉬고 웃더니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유머작가세요?"
나도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
"유머작가인줄 모르셨습니까?"
그녀는 다시 배를 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두 시간 동안 무슨 노래를 해야할까 걱정했건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이문세의 노래들(사랑이 지나가면, 난 아직 모르잖아요. 깊은 밤을 날아서, 그대와
영원히 등)과 유재하의 지난 날, 사랑하기 때문에, 박정운의 오늘 같은 밤이면,
먼 훗날에 등등 부를 노래가 한 두곡이 아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부를 때엔 그녀는 이주노, 난 양현석이 되어서 미친듯이 춤을 추며 광란의 괴성을
질러댔다. 엔딩곡은 그룹 코리아나의 '손에 손 잡고'를 손 잡고 불렀다
노래방 다음은 영화관이었다. 테크노마트의 CGV에 들려 영화 한편을 보았다
영화를 보고 밖을 나오니 이미 어둑컴컴해져 있었다
"우리 이젠 좀 멀리 가요"
그녀는 나를 끌고 차량 대여소를 갔다. 거기서 BMW 스포츠카를 대여했다
"이걸 나보고 운전하라는 겁니까?"
"운전 면허증 있으시잖아요"
"외제차는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괜찮아요. 사고나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
차를 몰고 경부 고속도로로 나왔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부산으로 가요"
시계를 보니 저녁 일곱시였다
"지금가면 새벽에나 도착할텐데요"
"이백 키로로 달리면 금방 가요"
"끼이익!!"
그녀의 말에 급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갓길에 댔다. 그녀 놀라서 날 쳐다본다
"왜 멈추세요?"
"저보고 이백 키로로 밟으라는 말씀입니까?"
"그 사람도 항상 이백 키로씩 밟았어요"
"전 백 키로 이상은 절대 안 밟습니다"
"왜요? 사고날까봐요?"
"사고나는 건 겁나지 않는데 기름값은 겁납니다. 그렇게 달리면 오백원짜리 동전을
바닥에 뿌리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름값 걱정 마세요. 모든 경비는 제가 다 댈께요"
"그 돈은 돈 아닙니까. 그렇게 달리나 천천히 가나 결국 비슷하게 들어갑니다"
"알았어여..."
그녀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그리곤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부르르릉!"
다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부르르릉!!"
밟으면 밟는대로 올라가는 속도... 차들이 옆으로 쉭쉭 지나친다
"지현씨"
"네"
풀 죽은 목소리다
"고개 들어서 몇 키로인지 봐봐요"
풀 죽어 있던 그녀는 계기판을 보고 놀라며 소리쳤다
"어머! 이백 킬로네요!"
동그랗게 커져 있을 그녀의 눈이 보고 싶었지만 전방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을 떼면 우린 고속도로가 아닌 요단강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이젠 소원 풀었습니까?"
"근데... 괜찮으세요... 저 때문에..."
"괜찮습니다. 뭐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근데요..."
"네?"
"그 사람은요... 이렇게 운전하면서 오른손으론 저를 안아 주었거든요"
"......"
"저기여...?"
"......"
"말씀이 없으시네요...?"
"......"
부산에 도착하니 자정이 조금 지났다
"자, 이제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우리... 오늘 여기서 자고 가요"
"끼이이익!!"
"어머! 놀래라!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부릉~~~"
그 사람과 묶은 곳이 해운대라고 한다. 해운대의 웨스턴 조선비치 호텔로 갔다
"여기 아닌데요"
그랜도 호텔과 파라다이스 호텔로 연이어 데리고 갔다
"이렇게 좋은 데는 아니었어요"
외제 스포츠카 몰고 왔었다길래 특1급 호텔에 묶은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다
한급 낮춰 1급 호텔로 갔다
"여기 말고 또 없어요?"
"3급 호텔이 있긴 합니다만..."
"호텔 말고는 없어요?"
"... 호텔에서 안 묶었습니까?"
"호텔 아니에요. 여관이었던 거 같은데..."
"......"
"또 말씀이 없으시네요"
"아닙니다... 그냥... 그런데... 외제차를 몰고 와서 여관에서 묶었습니까...?"
"네..."
"외제차를 여관 주차장에다 놔 두고요?"
"네..."
해운대쪽의 여관이란 여관을 다 뒤졌다. 약 삼십 분을 뒤졌을까...
"찾았어요!"
그녀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와이키키 여관]
그녀는 눈빛을 초롱초롱 반짝거리며 말했다
"맞아요 와이키키 여관! 그 때 여관 이름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요"
그녀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샤워 한다고 욕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살짝 걸터 앉으니
'들썩' 하고 소리가 났다. 별 생각없이 '들썩들썩'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한다
문을 열어주니 주인 아주머니였다
"벌써부터 들썩 거리는 소리가 나서 노크까지 했네"
주인 아주머니가 웃으며 수건 두 장과 일회용 칫솔, 요쿠르트와 계란을 놓고 나갔다
그녀가 수건을 몸에 두르고 밖으로 나온다
"여긴 계란도 줍니까?"
그녀가 계란을 톡톡 까면서 말한다
"옥수수도 줬던 거 같아요"
"......"
그녀는 침대에 누었다
그녀가 눕자 침대가 들썩 거렸다
"땅바닥 차갑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밑에 두 장 까실래요?"
"벌써 두 장 깔았습니다"
"네..."
바닥에 누운 지 십 분여가 지났다
"뭐하세요?"
"형광등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요?"
"형광등이 어둡게 보일까 해서요"
"켜진 형광등도 어둡게 보일 수 있나요?"
"형광등은 교류에 의한 발생한 전자들이 기체분자에 부딪힐 때 발생하는 자외선을
이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짧은 순간이지만 빛이 연속적으로 나오지 못하고
발광과 꺼짐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꺼짐의 순간을 이용해서 어둡게 보시겠다는 말씀이세요?"
"빛이 도달하는 시간 때문에 어둡게 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결국 불가능한 거네요?"
"그렇죠"
"......"
바닥에 누운 지 삼십여 분이 지났다
"바닥... 차갑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그 사람은 바닥이 차갑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여름이라서 괜찮습니다"
"그때도 여름이었어요"
"......"
"그 사람은 저를 꼭 안아만 준다고 약속하고 침대로 올라왔어요"
"그렇군요"
"올라오세요... 그리고... 안아 주세요"
"제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군요"
"안아만 주는 건데도... 많이 바라는 건가요?"
"안아만 주는 거니까 많이 바라는 거죠"
"......"
그녀가 품에 안겨서 말한다
"삶은 왜 고통스러울까요?"
"삶은 고통스러운 게 아닙니다. 희노애락이 반복되는 겁니다"
"반복된다구여... 그런데 왜 제겐 기쁨과 즐거움이 없고 슬픔만 있는 걸까요..."
"형광등의 원리와 같습니다. 희노애락은 반복되지만 슬픔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이 안 보이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은 희노애락이 반복되지만 지현씨
처럼 슬프게 사는 사람도 있고, 기쁘고 즐겁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즐겁고 기쁘게 살 수 있을까요?"
"마음 먹기에 따라 달렸습니다"
"그 남자와 이 곳에서 두 번을 잤어요"
"......"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잤고... 그가 군대 가기 바로 전 날에 잤어요..."
"......"
"이렇게 꼭 안아 주면서 말했어요. 2년 2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
그녀가 머리를 묻고 있던 왼쪽 가슴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정확히 3주 후에 연락이 왔어요..."
"......"
"국군병원으로 갔는데... 벌써 싸늘하게 식어 있더라구요..."
"......"
그녀의 목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전 약속을 지켰어요... 2년 2개월을 기다렸거든요"
"......"
"아니에요. 전 약속을 안 지켰어요... 4년을 기다렸거든요..."
"......"
"이젠 기다리지 않을 거에요... 그 누구도... 기다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증오
할 거에요..."
"......"
그녀의 몸 전체가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저도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스스로 잔인해지지 않으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
"인간은 스스로 괴롭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행복하고 기쁘다가도 '내가 이래선 안
되지' 하며 과거의 슬픈 기억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그리곤 우울해집니다. 슬픈
기억이라는 건 꺼내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낼 수 없는 상자라고 생각합니다"
"......"
"그 상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십시오. 즐거운 것을 보면 즐거워 하십시오. 괴로운
기억은 다시 꺼내지 마십시오. 스스로 잔인해지지 않아도 됩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고..."
"그러면... 정말 좋을까요? 좋은 것만 보면 좋은 건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좋은 것은 상대적입니다. 좋은 것이 좋기 위해선 슬픔이 있어야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가끔은 슬퍼해도 좋습니다. 즐겁기 위해서라도 가끔 슬퍼해도 좋습니다"
"그럼... 제게 남은 슬픔을 꺼내 봐도 좋은 건가요?... 그 남자를... 완전히 잊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잊지 말고 꼭 기억 하십시오. 다만, 지금은 꺼내 보지 마십시오. 나중에, 너무
바쁘고 행복도 슬퍼할 겨를도 없을 때... 그 때 꺼내 보십시오. 그러면 다시 행복
해질 겁니다"
"그럼... 지금은... 나 마지막으로 그 사람 생각해도... 되죠...?"
그렇게 말한 뒤, 그녀의 몸이 격정적으로 떨려오기 시작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그 남자 말입니다"
"......"
"제가 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남자인데 말입니다"
"네?"
"그러니까... 적극적이고 공격적이고 능동적이고... 그러니까 제 말은..."
"말씀하세요"
"정말... 끌어 안고만 잤습니까?"
"그렇게 약속했죠. 안고만 잔다고요"
"네..."
"그러나 약속을 어겼죠"
"역시 그렇군요"
"그런 약속은 지키기 힘든가요?"
"고양이한테 생선 맡겨놓고 먹지 말라고 약속해 보십시오. 약속 지키나 안 지키나"
"그럼 제가 안아만 달라고 말한 건 정말 무리한 요구였네요?"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그럼... 그 요구 취소할께요"
"......"
"불 끌까요?"
"......"
다음날 그녀와 부산 공항으로 향했다. 시간이 늦어 비행기로 서울에 올라가야 했다
"이제 헤어지면 앞으로 다시 볼 일이 없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녀는 예의 보조개가 깊숙히 들어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일은 언제까지 하실 거에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 그녀가 품에 안겨 들어왔다. 그리곤 조용히 속삭였다
"평생 잊지 못할 거에요..."
이내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가는 그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 공항을 빠져 나왔다
차를 끌고 서울로 향하면서 하늘을 바라 보았다
그녀가 탔을 비행기를 바라보며 잠깐 눈을 감고 기도를 하였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다... 진심으로...
<EPISODE 1...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