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45화> 검은색

바다의기억2006.04.17
조회10,964

월요일입니다.

 

허허, 이제 6시간 있으면 출근이군요.

 

낮잠을 어설프게 자버렸더니

 

아직도 눈이 또랑또랑...

 

이 사태를 어찌할지.

 

======================== 밤 새고 그냥 가야하나 ==========================

 

연극 준비가 마무리 될 때를 즈음해


학교는 개강을 했다.


보통 이맘때면


저글링처럼 몰려다니며 선배를 벗겨먹으려 드는


신입생들 밥을 사주느라


등골이 휘어야 정상이겠지만....


이미 동기들로부터 소외당해


새내기 배움터나 신입생 환영회마저 놓쳐버린 난


지금까지 후배들로부터


단 한 번의 연락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마 이번 신입생 중


내 존재자체를 아는 녀석도 없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다른 부원들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던 난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홍보연극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다.



연극부 홍보 공연

=메피스토펠레스의 단검=

공연일시 01.03.XX

주연 : 로맨티스트 안. 프린세스 민아. 닥터 기억.



전체적으로 검은 바탕에


손을 마주잡고 서있는 안군과 민아를


내가 싸늘한 눈빛으로 돌아보고 있는 포스터.


본래 주연에도 사이코 기억이라고 적힐 예정이었지만


그건 좀 불쌍하다는(?) 유니와 회계의 도움으로


간신히 닥터로 고쳤다.



이 포스터를 볼 때마다


=결국 이기는 건 나야= 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안군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마치 이 모습이 현실이 될 것만 같은 기분.



이대로... 괜찮은 걸까.



기둥마다 포스터를 붙이며


도서관을 공대로 향하는 길.


건물 중앙에 있는 굵은 기둥에 포스터를 붙이고 있을 때


기둥 반대편에서 아주 먼 옛날에 들어본 것 같은


낯익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 - 야, 연극부에서 공연한다는 데?


?? - 그러네, 어?! 이거 기억이 아냐?


?? - 이런 젠장! 이제 좀 살만하다 했더니!


?? - 우리 또 숨어 지내야 하는 거야?


?? - 이럴 때가 아니야! 녀석이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



......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목소리들의 주인공은


지난 연극 때 나에게 티켓을 강매 당했던


친구1,2,3 등으로 불리는 녀석들인 것 같다.



?? - 그게 누군데 그래요?


?? - 그런 놈이 있어, 정말 악마 같은 녀석이....


??

-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사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지.



?? - 00학번 선배예요?


?? - 아, 나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 01학번 신입생들도 같이 있는 건가.


그것 참 잘된 일이로군.



신입생들과 오붓한 첫대면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난 주변을 지나는 인파에 숨어 녀석들에게 접근했다.



친구1

- 보나마나 이번에도 칼을 들고 쫓아와서


한 장에 5만원짜리 티켓을 강매할 거야.



기억 - 그럴 수가...


친구2 - 시범 케이스로 두세 명은 죽을지 몰라.


기억 -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놈이..


친구3 - 너희들도 조심해! 딱 이렇게 생긴.....



일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친구3의 손가락을 따라 나에게로 향했다.



......... 반가워, 친구들.



친구3 - 으아아악!! 기, 기억아!


친구1 - 하. 하. 하. 하. 오. 랜. 만. 이. 네?



나를 보자마자 혼비백산해서


후배들 뒤로 숨는 녀석들.


내가 어쩌다 이런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는 몰라도


딱히 슬퍼하거나 화낼 일은 아닌 것 같다.



친구2 - 그... 티켓 팔러 다니는 거야?


친구3 - 이, 이번에도 오천 원인가?


친구1

- 이런, 기억이가 주연이라니


이거 안 살 수가 없겠는 걸?



친구2

- 그러게, 아무래도 깔끔하게


2 장은 사야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이전에 자기들끼리 한 말이 있어서 그런지


순순히 티켓을 사겠다고 나서는 녀석들.


이 기세를 몰아 조금만 협박하면


자기들도 후배들 앞에 험한 꼴은 보고 싶지 않을 테니


한 사람당 세 장씩은 팔 수 있을 것 같지만....



기억

- 안타깝게도... 이번 연극은


신입생 모집을 위한 거라 무료다.


쿡쿡쿡쿡.... 다음을 기약하지.



난 그렇게 녀석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포스터를 마저 붙이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


내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흠칫 떨던 녀석들의 반응.


쿡쿡쿡.... 나쁘지 않은 걸.




그리하여 연극 당일.



김씨 - 오징어! 땅콩! 콜라, 사이다, 팩소주 있어요!


허씨 - 꽃! 사탕! 맥주병! 마음대로 던지세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입구 근처에 진을 치고


장사판을 벌이고 있는 김씨와 허씨.


바가지로 폭리를 취하는 게 아닌데다


새치기를 막아주는 효과도 있었기에


회계는 그들의 장사를 허용하고 있었다.



연출 - 덩치 분장 끝났지? 박군 이리 와.


박군 - 저 아직 옷 입어야 하는데요.


연출

- 넌 인마 좀 빠릿빠릿하게 못하냐?


빨리 옷 갈아입고, 어깨 이리 와.



분장을 비롯한 준비가 한창인 무대 뒤.


시끌벅적한 바깥에 비하면


오히려 대기실 안이 더 차분한 느낌이었다.



민아 - 기분 어때?


기억 - 음.... 괜찮아. 넌?


민아

- 난 너무 두근거려.


이렇게 큰 데서 공연하는 건 오랜만이거든.



신입생 홍보라는 명분과


무료입장이라는 엄청난 어드밴티지로 인해


이번 연극엔 엄청나게 많은 수의 관객이 몰렸고


공연장 또한 그에 부족하지 않은 대강당이었다.


만약 이 강당이 가득 찬다면


800 명이나 되는 사람이


우리 공연을 보기 위해 왔다는 소리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얼마 안 되겠지만...



기억 - 잘할 수 있을 거야.


민아 - 응....



난 가만히 옆에 앉은 민아의 어깨를 안아


내 몸에 기댔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난 민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뒤


등 뒤에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민아 - 저기.... 기억아.


기억 - 응?


민아 - 아.... 아냐. 아무것도.



그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을 생각하기엔...... 어쩐지 피곤하다.


머리가 너무 무겁다.



공연을 바로 앞에 두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마음.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자리한


미혹에서 비롯한 회의감이었다.



민아 - ..... 분장해줄까?


기억 - 나야 고맙지.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는 그녀의 제안.


그녀는 곧 분장사에게로 가


메이크업 베이스를 포함한


기본 화장품 몇 가지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가 꼼꼼하게 베이스를 먹이는 동안


난 잠시 망설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기억 - ..... 나랑 연극할 때 무슨 생각해?


민아 - 응? 무슨 말이야?


기억

- 그러니까.... 내가 연기하는 걸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어?


아니면 같이 연습하는 동안이나...



민아

- 음..... 글쎄. 딱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기억이는... 음.... 검은색 같아.



검은색이라..... 별로 좋은 이미지는 아니다.


물론 난 검은색 옷을 즐겨 입고


검은색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건 단지 색깔을 맞춰입는 게 귀찮아서일 뿐...


그 색 자체가 주는 인상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검은색은 탐욕스러운 색깔이다.


모든 빛을 집어삼킨....



민아

- 왜... 흰 바탕에 글씨를 쓰면


노란색이나 연두색 같은 건 잘 안 보이잖아?


그런데 기억이가 있으면....


그런 색깔 하나하나가 다 돋보여.


그림에 윤곽선을 그려놓은 것처럼


모든 게 굉장히 선명해져.


그래서 난... 기억이랑 연기하는 게 굉장히 즐거워.



기억 - ..... 그렇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그녀의 감상에


복잡하던 머릿속이 오름차순으로 Sort 된 것 같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네가 즐겁다면.... 그걸로 됐어.



회계 - 오.... 기억이, 느낌이 팍 사는데?


분장 - 그러게요, 더 손 볼 것도 없겠는데요?



민아가 한 분장을 보면서


저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역할이 역할이니 만큼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연출

- 앞으로 기억이 분장은


그냥 민아 네가 전담하는 게 낫겠다.


러브러브 파워 메이크업! 하면서...



민아 - 아이 참, 뭐예요 그게~.


연출 - 하하.... 그런데 너 왜 아직도 맨얼굴이냐?


민아 - .... 아차!!



내 분장을 해주는 데 열중해서


자기 분장을 잊어버린 민아는


서둘러 분장사에게 뛰어갔다.


그래도 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잠시 후, 연출의 멘트와 함께


무대의 막이 올랐다.



연출

- 레이디기디기디기딕엔디스~


엔 줴루줴루줼줼줴룰 뭬~엔.


웰컴 투 아월 쀄스뛰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