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을 너무 많이 잔 것 같습니다. 오늘 밤도 철야겠군요. ========================= 달려라 달려 =============================== 아직 미신적인 신앙과 주술이 존재하는 때. 서양적인 배경의 어느 도시. 어두운 무대 위로 잔잔하게 울리는 철수의 바이올린 연주가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새벽녘의 새소리를 연상시키는 밝고 경쾌한 연주. 무대는 철수를 중심으로 조금씩 밝아졌다. 탁자 위에 식빵 하나와 찻잔이 놓여있는 조촐한 공간. 무대가 완전히 밝아지고 철수의 연주가 끝나갈 때 즈음 선희가 등장했다. 선희 -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곡이네. 철수 - 일어났어? 선희 - 자기가 깨워 놓구... 철수 - 오늘부터 일 나간다고 했잖아. 곧 테이블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놓여있던 빵과 커피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희 - 요 앞 병원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철수 - 간호사 일이야? 선희 - 아니, 그냥 파출부 같은 건가봐. 철수 -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으면... 선희 - 또, 또, 또... 그런 소리 하지 말라니까. 자기 연주는 누가 뭐래도 최고야. 아직 세상이 그걸 알아주진 않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화려하게 빛날 날이 올 거야.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선희는 철수의 어깨를 뒤에서 부드럽게 두 손으로 감쌌다. 장소는 바뀌어 병원 응접실. 낡은 흔들의자를 삐걱거리며 앉아있는 나와 그 앞에 놓인 소파에 불안하게 앉아있는 선희. 뭔가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에 금방이라도 의자 옆으로 쓰러질 듯 삐딱하게 의자에 묻혀있는 내 모습은 어쩐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선희 - 저.... 그럼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박사 - ...... 선희 - .... 선생님? 다시 불러 봐도 아무 대답이 없는 내 모습에 조심스레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살피는 선희. 그 순간, 난 흔들리던 의자를 멈추고 줄에 걸린 인형처럼 고개를 덜커덕 돌려 그녀를 마주보았다. 선희 - .....!! 박사 - ,,,,, 혹시..... 요리를 할 수 있나요?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갈 뻔한 선희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난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선희 - 예... 어느정도는... 박사 - 그럼 우선.... 아무거나 만들어 주겠어요? 고기 말고.... 야채 같은 걸로. 선희 - ..... 그 다음은요? 박사 - 글쎄요. 아무튼 지금은 배가 고프군요. 난 다시 흔들의자를 앞뒤로 천천히 삐걱거리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 밖에 일은 어찌돼도 상관없다는 듯한 내 반응에 잠시 눈치를 살피던 선희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뒤돌아 밖을 향하려는 순간 난 다시 의자를 멈추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박사 - ... 잠깐만. 선희 - 예? 박사 - 이름이 뭐라고 했죠? 선희 - ..... 아..... 전..... 선희라고 하는데요. 박사 - 선희.... 선희라.... 여기선 은하라고 하죠. 선희 - 예? 왜.... 왜요? 박사 - ...... 그쪽이 부르기 편하니까요. 선희 - 아..... 네. 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선희는 어딘가 미심쩍은 듯 힐끔힐끔 박사를 돌아보며 무대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무대에서 퇴장하고 잠시 후 무대 반대편에서 천사와 악마가 등장했다. 악마 - 휘이- 어디서 저런 여자를 데리고 왔어? 박사 - ........ 신경 쓰지 마. 악마 - 이런, 우리 사이에 그러기야? 이거 섭섭한 걸. 경망스럽게 내 주위를 맴돌며 나불나불 이야기를 늘어놓는 악마. 악마 - 어떻게 할 건데? 응? 박사 - 아무것도.. 아무 것도 안 해. 악마 - 킥킥..... 그래? 정말로? 정말 아무 짓도 안 할 거란 말이야? 천사 - 그만해! 이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 악마의 이죽거림을 보다 못한 천사가 그를 일갈했다. 한창 신이 나서 내 주위를 맴돌던 악마는 그녀의 목소리에 휙 뒤를 돌아보더니 건들건들 그녀에게 걸어갔다. 악마 - 이봐, 너도 봤으면 알 거 아냐? 그 여자 얼굴을 보라고, 얼굴만이야? 목소리, 표정, 하는 짓까지 비슷하잖아? 천사 -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거야?! 악마 - 뭘 어쩌다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킥킥. 천사와 악마가 실컷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난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앞으로 숙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뇌했다. 난 정말로 뭘 어쩌려는 걸까? 선희 - 저.... 요리 다 됐는데요. 그 때, 무대에서 퇴장했던 선희가 다시 돌아왔다. 재빨리 무대 반대편으로 사라지는 천사와 악마. 난 지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며 몸을 일으켰다. 박사 - ....아.... 고마워요. 선희 - 입에 맞으실까 모르겠네요. 박사 - 음.... 아주 맛있어요. 좋아요. 선희 -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부턴 뭘..... 박사 - 음..... 그냥 그쪽 소파에 앉아있어요. 선희 - 아..... 저 밖에 청소라도.... 박사 - 그냥 앉아있으라니까요. 선희 - 아...... 예. 주춤주춤 의자에 앉는 선희를 보며 난 헤벌쭉- 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주 만족스러워 보이는, 동시에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웃음을.... 잠시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다시 배경은 철수와 선희의 집. 손으로 이마를 집은 채 불편한 얼굴로 앉아있는 선희에게 철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하지만 그도 오늘 하루가 그리 순탄하진 못했는지 얼굴 곳곳에 멍이 들어있다. 철수 - 오늘....어땠어? 사람들은 친절해? 선희 - 모르겠어....... 그냥..... 좀 이상한 사람 같아. 철수 - 왜? 선희 - 갑자기 이름을 은하라고 하자고 하질 않나... 처음엔 요리를 해오라고 하더니 그 이후론 계속 앞에 앉혀 놓는 거야. 지루하면 책이나 보라면서 책도 가져다주고... 나중엔 자기가 차도 타다 주더라고. 선희는 여전히 이마를 짚은 채 오늘 하루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도저히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 듯 중간 중간 도리질까지 쳐가며.... 철수 - 내가 들어도.... 그건 좀 이상한 걸. 아니다 싶으면 그냥 관둬버려. 선희 - 이미 월급까지 선불로 받았는걸. 그것도..... 봐봐, 이만큼이나.... 철수 - 응.....? 에에에? 이렇게 많이? 선희 - 도무지 무슨 생각인 질 모르겠어. 우선은.... 며칠 더 나가 보려고. 자기는 오늘.... 꺄악! 얼굴이 왜 그래?! 월급이 들어있는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은 그녀는 그제야 뒤늦게 멍투성이인 철수의 얼굴을 발견하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수 - 아, 아무것도 아냐. 발을 좀 헛짚어서.... 선희 - 거짓말! 이게 무슨 넘어진 상처야! 철수 - 정말 별 거 아니야. 그냥.... 오늘 자리를 좀 잘못 잡아서 그곳 사람들이랑 좀 다퉜어. 말은 다퉜다고 하지만 흠신 두들겨 맞고 온 게 분명한 그의 모습. 선희는 아랫입술을 꽉 다져 물며 눈물을 참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철수 - 그래도 돈은 안 뺏겼다? 그 때 앞에 있는 건 좀 가져갔지만... 선희 - 바보야! 그게 무슨 소용이야! 철수 - 괜찮아, 내일부터 그쪽에 안 가면 되지 뭐.... 선희 - 바보야.... 바보야.... 원망스러운 듯 철수의 가슴을 두드리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선희. 철수가 슬며시 그녀의 어깨를 보듬으며 무대는 다시 어두워졌다. 곧 배경은 아무것도 없는 뒷골목으로 변했다. 그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는 두 남자. 바로 덩치와 어깨였다. 어깨 - 크하하, 그 때 그 새끼 표정 봤냐? 얼마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곧 죽을 것 마냥 울고불고 하는 꼬라지는.. 덩치 - 난 그 놈 예전에 한 번 봤을 때부터 싫었다니까. 기생오라비 같은 게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면서 낑깡낑깡 시끄러워서 원...... 아무래도 이 둘의 정체는 낮에 철수에게 텃세를 부린 고마운 깡패들인 듯 그들은 한참동안 안군의 모습을 흉내내가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왁자한 그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축 늘어진 가운을 직직 끌고 등장한 나. 가운의 일부분처럼 밑으로 쳐져있는 두 팔과 앞으로 굽은 어깨는 목 뒤쪽 어딘가를 꿰어 천장에 매달아 놓은 것 같은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깨 - 어, 뭐야 저놈은..... 어이! 이봐! 박사 - ...... 나말인가. 어깨 - 그래, 너. 누구 마음대로 여길......헉?! 일상적인 통행료 징수를 위해 박사에게 접근하는 어깨, 하지만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목엔 큼직한 주사기가 박혔다. 쭈-욱 약이 혈관을 타고 흘러가는 동안 주사기 바늘 부분을 움켜잡고 경련하는 어깨.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덩치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 - 어어어억...... 어깨가 눈을 뒤집고 쓰러지는 사이 근처에서 각목하나를 주워든 덩치가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덩치 - 이...이야아아!! 난 높게 떨어지는 각목을 흐느적 피해 소매 속에 감춰뒀던 대형메스를 꺼내들었다. ‘푹, 푹!’ 그리고 두 번의 짧은 유린. 덩치의 옷 속에 숨겨둔 물감 주머니가 터지면서 새빨간 잉크가 바닥으로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덩치 - 아.... 아아아아....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다 주저앉은 덩치는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난 그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돌린 후 나직이 중얼거렸다. 박사 - 쿡쿡쿡....... 내가 두렵나? 덩치 - 아..... 아아아아..... 박사 - 나도 내가 두려워. 푸직-. 소름끼치는 효과음이 들리며 무대 위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지익- 지익- 지익- 그리고 몹시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어슴푸레 조명이 돌아왔을 때 무대 위에 남은 것은 길게 늘어진 붉은 혈흔뿐이었다.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46화> 메피스토의 단검1막
낮잠을 너무 많이 잔 것 같습니다.
오늘 밤도 철야겠군요.
========================= 달려라 달려 ===============================
아직 미신적인 신앙과 주술이 존재하는 때.
서양적인 배경의 어느 도시.
어두운 무대 위로
잔잔하게 울리는 철수의 바이올린 연주가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새벽녘의 새소리를 연상시키는 밝고 경쾌한 연주.
무대는 철수를 중심으로 조금씩 밝아졌다.
탁자 위에 식빵 하나와 찻잔이 놓여있는 조촐한 공간.
무대가 완전히 밝아지고
철수의 연주가 끝나갈 때 즈음
선희가 등장했다.
선희 -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곡이네.
철수 - 일어났어?
선희 - 자기가 깨워 놓구...
철수 - 오늘부터 일 나간다고 했잖아.
곧 테이블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놓여있던 빵과 커피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희 - 요 앞 병원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철수 - 간호사 일이야?
선희 - 아니, 그냥 파출부 같은 건가봐.
철수 -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으면...
선희
- 또, 또, 또... 그런 소리 하지 말라니까.
자기 연주는 누가 뭐래도 최고야.
아직 세상이 그걸 알아주진 않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화려하게 빛날 날이 올 거야.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선희는
철수의 어깨를 뒤에서 부드럽게 두 손으로 감쌌다.
장소는 바뀌어 병원 응접실.
낡은 흔들의자를 삐걱거리며 앉아있는 나와
그 앞에 놓인 소파에 불안하게 앉아있는 선희.
뭔가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에
금방이라도 의자 옆으로 쓰러질 듯
삐딱하게 의자에 묻혀있는 내 모습은
어쩐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선희 - 저.... 그럼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박사 - ......
선희 - .... 선생님?
다시 불러 봐도 아무 대답이 없는 내 모습에
조심스레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살피는 선희.
그 순간, 난 흔들리던 의자를 멈추고
줄에 걸린 인형처럼
고개를 덜커덕 돌려 그녀를 마주보았다.
선희 - .....!!
박사 - ,,,,, 혹시..... 요리를 할 수 있나요?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갈 뻔한 선희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난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선희 - 예... 어느정도는...
박사
- 그럼 우선.... 아무거나 만들어 주겠어요?
고기 말고.... 야채 같은 걸로.
선희 - ..... 그 다음은요?
박사 - 글쎄요. 아무튼 지금은 배가 고프군요.
난 다시 흔들의자를 앞뒤로 천천히 삐걱거리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 밖에 일은 어찌돼도 상관없다는 듯한 내 반응에
잠시 눈치를 살피던 선희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뒤돌아 밖을 향하려는 순간
난 다시 의자를 멈추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박사 - ... 잠깐만.
선희 - 예?
박사 - 이름이 뭐라고 했죠?
선희 - ..... 아..... 전..... 선희라고 하는데요.
박사 - 선희.... 선희라.... 여기선 은하라고 하죠.
선희 - 예? 왜.... 왜요?
박사 - ...... 그쪽이 부르기 편하니까요.
선희 - 아..... 네.
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선희는 어딘가 미심쩍은 듯 힐끔힐끔 박사를 돌아보며
무대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무대에서 퇴장하고 잠시 후
무대 반대편에서 천사와 악마가 등장했다.
악마 - 휘이- 어디서 저런 여자를 데리고 왔어?
박사 - ........ 신경 쓰지 마.
악마 - 이런, 우리 사이에 그러기야? 이거 섭섭한 걸.
경망스럽게 내 주위를 맴돌며
나불나불 이야기를 늘어놓는 악마.
악마 - 어떻게 할 건데? 응?
박사 - 아무것도.. 아무 것도 안 해.
악마
- 킥킥..... 그래? 정말로?
정말 아무 짓도 안 할 거란 말이야?
천사 - 그만해! 이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
악마의 이죽거림을 보다 못한 천사가 그를 일갈했다.
한창 신이 나서 내 주위를 맴돌던 악마는
그녀의 목소리에 휙 뒤를 돌아보더니
건들건들 그녀에게 걸어갔다.
악마
- 이봐, 너도 봤으면 알 거 아냐?
그 여자 얼굴을 보라고, 얼굴만이야?
목소리, 표정, 하는 짓까지 비슷하잖아?
천사 -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거야?!
악마 - 뭘 어쩌다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킥킥.
천사와 악마가 실컷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난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앞으로 숙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뇌했다.
난 정말로 뭘 어쩌려는 걸까?
선희 - 저.... 요리 다 됐는데요.
그 때, 무대에서 퇴장했던 선희가 다시 돌아왔다.
재빨리 무대 반대편으로 사라지는 천사와 악마.
난 지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며 몸을 일으켰다.
박사 - ....아.... 고마워요.
선희 - 입에 맞으실까 모르겠네요.
박사 - 음.... 아주 맛있어요. 좋아요.
선희 -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부턴 뭘.....
박사 - 음..... 그냥 그쪽 소파에 앉아있어요.
선희 - 아..... 저 밖에 청소라도....
박사 - 그냥 앉아있으라니까요.
선희 - 아...... 예.
주춤주춤 의자에 앉는 선희를 보며
난 헤벌쭉- 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주 만족스러워 보이는,
동시에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웃음을....
잠시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다시 배경은 철수와 선희의 집.
손으로 이마를 집은 채 불편한 얼굴로 앉아있는 선희에게
철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하지만 그도 오늘 하루가 그리 순탄하진 못했는지
얼굴 곳곳에 멍이 들어있다.
철수 - 오늘....어땠어? 사람들은 친절해?
선희 - 모르겠어....... 그냥..... 좀 이상한 사람 같아.
철수 - 왜?
선희
- 갑자기 이름을 은하라고 하자고 하질 않나...
처음엔 요리를 해오라고 하더니
그 이후론 계속 앞에 앉혀 놓는 거야.
지루하면 책이나 보라면서 책도 가져다주고...
나중엔 자기가 차도 타다 주더라고.
선희는 여전히 이마를 짚은 채
오늘 하루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도저히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 듯
중간 중간 도리질까지 쳐가며....
철수
- 내가 들어도.... 그건 좀 이상한 걸.
아니다 싶으면 그냥 관둬버려.
선희
- 이미 월급까지 선불로 받았는걸.
그것도..... 봐봐, 이만큼이나....
철수 - 응.....? 에에에? 이렇게 많이?
선희
- 도무지 무슨 생각인 질 모르겠어.
우선은.... 며칠 더 나가 보려고.
자기는 오늘.... 꺄악! 얼굴이 왜 그래?!
월급이 들어있는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은 그녀는
그제야 뒤늦게 멍투성이인 철수의 얼굴을 발견하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수 - 아, 아무것도 아냐. 발을 좀 헛짚어서....
선희 - 거짓말! 이게 무슨 넘어진 상처야!
철수
- 정말 별 거 아니야.
그냥.... 오늘 자리를 좀 잘못 잡아서
그곳 사람들이랑 좀 다퉜어.
말은 다퉜다고 하지만
흠신 두들겨 맞고 온 게 분명한 그의 모습.
선희는 아랫입술을 꽉 다져 물며
눈물을 참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철수
- 그래도 돈은 안 뺏겼다?
그 때 앞에 있는 건 좀 가져갔지만...
선희 - 바보야! 그게 무슨 소용이야!
철수 - 괜찮아, 내일부터 그쪽에 안 가면 되지 뭐....
선희 - 바보야.... 바보야....
원망스러운 듯 철수의 가슴을 두드리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선희.
철수가 슬며시 그녀의 어깨를 보듬으며
무대는 다시 어두워졌다.
곧 배경은 아무것도 없는 뒷골목으로 변했다.
그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는 두 남자.
바로 덩치와 어깨였다.
어깨
- 크하하, 그 때 그 새끼 표정 봤냐?
얼마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곧 죽을 것 마냥 울고불고 하는 꼬라지는..
덩치
- 난 그 놈 예전에 한 번 봤을 때부터 싫었다니까.
기생오라비 같은 게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면서
낑깡낑깡 시끄러워서 원......
아무래도 이 둘의 정체는
낮에 철수에게 텃세를 부린 고마운 깡패들인 듯
그들은 한참동안 안군의 모습을 흉내내가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왁자한 그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축 늘어진 가운을 직직 끌고 등장한 나.
가운의 일부분처럼 밑으로 쳐져있는 두 팔과
앞으로 굽은 어깨는
목 뒤쪽 어딘가를 꿰어 천장에 매달아 놓은 것 같은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깨 - 어, 뭐야 저놈은..... 어이! 이봐!
박사 - ...... 나말인가.
어깨 - 그래, 너. 누구 마음대로 여길......헉?!
일상적인 통행료 징수를 위해 박사에게 접근하는 어깨,
하지만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목엔 큼직한 주사기가 박혔다.
쭈-욱 약이 혈관을 타고 흘러가는 동안
주사기 바늘 부분을 움켜잡고 경련하는 어깨.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덩치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 - 어어어억......
어깨가 눈을 뒤집고 쓰러지는 사이
근처에서 각목하나를 주워든 덩치가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덩치 - 이...이야아아!!
난 높게 떨어지는 각목을 흐느적 피해
소매 속에 감춰뒀던 대형메스를 꺼내들었다.
‘푹, 푹!’
그리고 두 번의 짧은 유린.
덩치의 옷 속에 숨겨둔 물감 주머니가 터지면서
새빨간 잉크가 바닥으로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덩치 - 아.... 아아아아....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다 주저앉은 덩치는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난 그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돌린 후 나직이 중얼거렸다.
박사 - 쿡쿡쿡....... 내가 두렵나?
덩치 - 아..... 아아아아.....
박사 - 나도 내가 두려워.
푸직-.
소름끼치는 효과음이 들리며
무대 위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지익- 지익- 지익-
그리고 몹시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어슴푸레 조명이 돌아왔을 때
무대 위에 남은 것은 길게 늘어진 붉은 혈흔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