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수현은 평소보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기계처럼 일어났다. 옥탑 방이라 다른 집 보다는 따듯하게 지내지 못 하는 이유도 있고 혼자서 자취하고 있으니 최대한 세금은 줄여가면서 아껴야 했다. 유난히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을 정도로 쌀쌀한 집안 공기 때문에 수현은 자신과의 싸움을 벌어야만 했다. 이내 일어나라는 쪽이 싸움에서 이겨 기계처럼 일어나긴 했지만 온 몸을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욱신거림을 수현은 잠깐 느낄 수 있었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던 터라 오늘은 버스타고 학교로 오는 길도, 자신에게 인사를 해주는 것만 같은 아침 햇살도, 지나치는 나무들도, 반갑지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두껍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교과 교재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갔고 수업 준비를 했다. 학생들이 한 두 차례 몰려 들어오더니 그 뒤를 이어 교수가 들어왔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는데도 아직 강의실에 도착하지 않은 경미가 걱정이 되었는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낸다. 문자를 보낸 지 한 참이 되었는데도 답문이 없자 경미를 걱정하는 수현. 그 때 강의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일체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경미였다. 몰래 들어와 앉으려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최대한 숙이고 있었던 몸을 펴고 교수와 학생들을 향해 귀엽게 웃고 있었다. 교수를 향해서는 한번만 양해해 달라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 경미학생 맞죠? ”
“ 네 . 교수님. ”
“ 들어와 자리에 앉으세요. ”
“ 네.. ”
좀 전까지만 해도 느리고 조용한 걸음으로 천천히 오던 경미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고 조용하던 강의실 안에 명쾌하게 울려 퍼졌다. 수현의 옆자리에 앉는 경미. 수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더니 경미의 책상으로 건네는 수현.
[ 어떻게 된 거야? 문자 보냈는데 답문도 없고. 오늘도 학교 못 오는 줄 알았어.]
수현이 건넨 수첩의 글을 읽고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으나 소리가 조금 컸다는 걸 느꼈는지 주위를 살피며 표정관리를 했고 수첩에 무언가 적어서 다시 수현에게 수첩이 되돌아 왔다.
[ 미안 .미안. 할머니 병원에서 잤거든. 근데 하필 늦잠을 자버린 거야. 아버지가 차 태워주신다는 걸 지하철이 더 빠를 것 같아서 마다하고 왔는데 은근히 시간이 걸리더라. 오늘 나 완전 뛰었잖아. 그래서 문자 온지도 몰랐어. ㅋㅋㅋㅋ]
2
공강 시간이라 휴게실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는 수현과 경미. 수현은 무언인가 계속 얘기해주고 경미는 즐거운 듯 흥미 있는 표정으로 수현의 말에 집중한다.
“ 그래서...? 네가 뭐라고 했는데? ”
“ 종이 주면서 학과랑 학년이랑 이름 적어달라고 했지.”
“ 우와~ 최수현. 새로운 모습 발견~ 너..은근히 그 남자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
“ 얘가 정말..저번에도 그런 말 하더니. 또 그러네.. 아니야. 그런 거.. ”
“ 왜~ 남자들이 여자한테 작업 걸어 올 때 그런 비슷한 방법 잘 사용하잖아. ”
“ 야~ 내가 남자도 아니고. 무슨 작업이야.. ”
“ 이봐~ 너 이상하다니까. 내가 웃자고 하는 말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 ”
“ 아니라니까. ”
장난이라는 것을 알지만 오늘 만큼은 경미의 장난도 반갑지가 않았다.
“ 그래서 너의 소중한 만 연필은 돌려받은 거야? ”
“ 응.. 돌려받았어. 내가 시간이 없어서 찾으러 못 갔더니 그 사람이 가지고 커피숍으로 찾아 왔더라고. ”
“ 직접 가지고 왔다고? 이 거 이 거 네가 아니고 그 남자가 너한테 뿅 간 거 아니야? 하하하 친절하기도 하셔라. ”
“ 맞아. 친절한 사람인 것 같기는 했어. 그날 비 왔었는데 내가 우산 없는 거 기억하고 다시 커피숍으로 우산 들고 왔더라고. ”
“ 우산을 들고 다시 찾아와 ? 이야~ 매너 좋다. 소개 좀 시켜주라. 그 남자. 하하하. ”
“ 진심이야? 정말 소개시켜줘? 연락처 아는데 알려줄까? ”
“ 야~ 내가 농담한다고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되니~ 너도 날 닮아가는 거 같아. 헤헤헤 ”
“ 근데 경미야. 오늘 날씨 좀 많이 춥지? ”
“ 오늘? 그래? 난 모르겠는데. 추워? ”
“ 그래? 나만 추운가? 몸도 살짝 무겁네. ”
“ 너 감기 오려는 건가 부네. 약은? ”
“ 약은 무슨, 오늘 아침부터 그런 건데. 약도 자주 먹는 거 안 좋다고 해서 참아야지. ”
“ 그래. 우선 따듯하게 하고 다니고. 약은 될 수 있음 안 먹는 게 더 좋으니까. ”
역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은 경미뿐이다.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시고 가장 힘들 때 옆에서 위로해주고 힘이 되어준 소중한 친구 경미에겐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지내온 경미는 보통 부유하게 자라 자기중심적이고 너무 자만함의 빠져 있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랐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하며 똑똑하다는 것은 공통점이 있었지만 적어도 경미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고 마음이 참 따듯한 친구였다. 수현은 경미가 가끔 돌이가신 부모님이 자신에게 보내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강의를 듣는 수현의 이마의 주름이 두 줄 잡히는 것을 경미는 발견했다. 그리고 평소 땀이 많이 나지 않는 수현의 이마의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것도. 수업이 끝나고 서둘.러 다른 강의실로 움직이려고 부산하게 짐을 챙기는 수현의 팔목을 잡아끌고 황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황 교수의 방 앞에 도착해서 노크를 하고 들어간다.
“ 오랜만이구나. 경미야. ”
“ 네.. 교수님 제가 요즘 뜸했죠? 헤헤. ”
“ 수현이도 왔네. 무슨 일이니? ”
“ 아.. 다름이 아니라 이번 시간이 교수님 강의시간인데요. 수현이가 감기에 걸렸나 봐요. 아침부터 열도 심하고 현기증도 난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병원 문 닫기 전에 병원 다녀 올 수 있게 조퇴를 해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
경미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조퇴라는 단어가 나오자 토끼 눈으로 경미를 바라보는 수현. 그런 수현의 팔을 살짝 찌르는 경미. 잠자코 있으라는 뜻이다.
“ 그래? 수현이 얼굴을 보니 많이 아픈 것 같구나. 출석 인정해 줄 테니. 병원가보고 푹 쉬도록 해. 요즘 감기는 잘 안 낫는다고 하더라.”
경미의 말 빨과 예의 있는 말투로 부탁하는데 안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황 교수의 방을 나와 문 앞에 선 경미는 승리의 표정을 하고 있었고 아직도 어리둥절한 수현은 멍하게 경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라고. 너 아프잖아. ”
“ 하하.. 나 못 쉬어. 알면서 그래... ”
“ 교수님께 허락도 맡았잖아. ”
“ 수업을 안 들어간다고 해도 수업 끝나고 커피숍 알바 가야지. ”
“ 야~ 무슨 소리야? 이렇게 아픈데 오늘도 알바를 가겠다는 거야? ”
“ 참을 만 해~ 그리고 오후는 내가 담당이라 내가 안 가면 안 돼. 그것도 약속인데. ”
“ 에이~ 알았어. 오늘 그 알바 내가 너 대신 할게. 그러면 되는 거지? 약속도 지키고 너도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일석이조네 뭘~ ”
항상 경미는 이렇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수현을 챙기고 감동시킨다. 경미의 성화에 못 이겨 수현은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3
바쁘게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는 경미.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바쁘게 일하느라 핸드폰 진동을 느끼지 못하고 한참 지난 뒤에야 부재중 전화가 2통이나 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커피숍 밖으로 나가서 확인을 해보니 집이었다.
‘ 엄마겠군. 언제 들어 오냐는 전화였을텐데. 그래도 전화는 해드려야겠지? ’
신호가 가고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낫 익은 목소리에 여자가 받았다.
“ 경미니? ”
“ 네. 엄마. 전화 하셨어요? ”
“ 언제 쯤 들어오니? ”
“ 오늘은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오늘 선배들이랑 회식 있거든요.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요. ”
알았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고 안도의 숨을 쉬는 경미. 수현을 대신해서 지금 이 시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가 아시면 약간의 잔소리를 하시기 때문에 가끔은 이런 거짓말을 하곤 한다. 나름대로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좀 전 보다는 한가해 진 커피 안은 잔잔한 피아노 음악 선율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어서 은근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손님 들어오는 종소리가 들리고 어떤 남자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어서 오세요. ”
저번처럼 너무 일찍 이 곳에 와서 카운터에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와서는 그녀가 없을까봐서 오늘은 어제 보다 조금 늦은 7시에 왔는데 있어야 할 그 곳에, 그 자리에 그녀 대신 처음 보는 여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자 승우는 내심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수현이 안내해준 창가 자리에 또 앉아 두리번거리는 승우. 혹시나 있을까 해서. 그러나 역시 없었다. 그 여자는. 오늘은 이름을 물어 보리라 ...다짐하고 왔는데. 또 허탕을 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승우는 괜히 약이 오른다.
“ 주문하시겠어요? 손님? ”
“ 저기요. 아르바이트 하시는 분이 바뀌신 것 같네요? ”
“ 아~ 그거요? 그 친구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제가 대신 하는 거에요. ”
“ 아파요? 어디가요? 많이 아픈가요? ”
“ 네? 음.. 감기에요. 하하. 그런데 수현이를 아세요? ”
“ 아~ 수현.. 이름이 수현이였군요. 수현. ”
이 사람. 뭐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뚱하다. 알바 생이 바뀐 것을 금방 알아채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짜고짜 어디가 아픈 건지 많이 아픈 건지. 묻다니.
그래서 아는 사람인가 해서 물어봤더니 수현이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는 듯하다. 누구지 이 사람? 영문을 모르겠는 경미가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무언가 해명을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는 승우.
“ 수현씨 친구 분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승우 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우연하게 수현씨를 알게 된 사람이에요.”
“ 한..한승우?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아~ 혹시.. 만 연필? ”
“ 아시는 군요? 예.. 제가 만 연필 맞습니다. ”
“ 아~ 그렇군요. 안 그래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반가워요. ”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토록 서슴없이 악수를 청하는 여자는 처음 보는 지라 약간은 당황했지만 티 안내고 악수하는 승우. 이런 모습을 보는 민섭은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번에도 만 연필이 등장을 하고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만 연필이라는 주제가 하나 던져지면 원래 친한 사이였던 것처럼 행동하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이들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건지. 아직도 감을 못 잡겠는 민섭. 경미가 민섭의 옆 자리에 앉고 두 사람은 만 연필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사건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민섭에게 설명해준다. 그제 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세 사람은 즐겁게 대화한다.
4
어제 경미의 성화의 못 이겨 집으로 가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어 버린 수현은 오늘 아침 햇볕이 옥탑 방 창문 사이로 들어올 때까지 깨지 않고 쉬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어제보다 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학교로 향했다. 누가 보아도 아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현을 경비 아저씨가 발견하고는 걱정스런 말투로 묻는다.
“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
“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 헤헤 ”
“ 요새 날씨는 워낙 이랬다. 저랬다 해서 관리 잘 해야 하는데. 몸 관리 잘해. ”
“ 네 아저씨. ”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수현. 매일 매일 열심히 일하던 수현이 오늘 만큼은 꾀를 부리고 싶을 정도로 몸이 나른하고 귀찮아 진다.
“ 그래도 해야지. 아자~ ”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코 깃이 차갑다. 대 걸레로 바닥 청소를 하려고 하는 그 때. 누군가 들어오는 문소리가 난다.
“ 지금 이 시간에는 대출, 반납 안하는데요. ”
“ 아침 먹었어요? ”
어디서 들었던 낫 익은 목소리의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였다. 한. 승 .우 .
“ 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
“ 수현씨 아침 먹었나 해서요? ”
“ 네? 제가 아침 먹었는지가 궁금해서 오셨다고요? 아참.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
“ 뭐.. 이래저래..어떻게 하다 보니까요. 아침 먹었어요? ”
“ 아니요. 별 생각 없어서요. ”
“ 에이~ 그러면 안돼요. 감기 걸렸을 때는 뭐든지 잘 먹어야 한다고요. ”
“ 네? 제가 감기 걸린 건 어떻게 아셨어요? ”
“ 글쎄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
당황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는 수현을 보는 승우는 마냥 재미있기만 하다. 수현 자신은 잘 모르겠지만 당황하거나 놀랐을 때 수현의 표정은 정말 귀엽다.
“ 잘 됐네요. 아침 안 먹었다니. 나랑 같이 할래요? ”
“ 네? 저기요. 별 생각 없어서 안 먹었다니까요. ”
“ 그래도 안돼요. 먹어야지~ 내가 죽 사왔어요. 입 맛 없을 때 먹을 만 할 거예요. ”
정말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알고 지낸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가 아침부터 도서관으로 찾아와서는 같이 아침을 먹자고 한다. 더구나 감기 걸린 자신을 위해서 죽을 사오고 자신을 걱정 하고 있다는 것이다.
“ 한 승우씨. 원래 이렇게 친절해요? ”
“ 네? ”
“ 원래 이렇게 모든 사람들한테 친절하냐구요. ”
“ 하하하하하하하. 모든 사람들한테는 아니죠. 특별한 사람한테만 친절하죠. ”
“ 특별한 사람? 전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요. ”
“ 아니요. 당신은 나한테 충분히 특별해요. 이걸로 대답이 됐나요? 자아~ 그럼 이제 아침 먹죠?”
5
조금은 따듯해지는 날씨 덕분인지 수현이 감기는 거의 나아가는 듯 했다. 그 날 이후로 승우와는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만 연필을 찾기 위해 승우를 일주일동안 그렇게 찾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하루에 두 세 번씩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니 말이다.
마주 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는 승우를 보면서 솔직히 수현은 부담스러웠다. 그런 과도한 친절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자기 자신이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무 잘 알고 자신의 처지 또한 너무 잘 알기도 하기에 남자라는 존재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게다가 이 남자. 생각보다 너무 적극적이지 않은가. 이틀의 한번 꼴로 수현이 일하는 시간에만 승우는 도서관을 찾아 책을 빌렸고 커피숍에도 자주 가는 편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경미 또한 모든 상황이 재미있기만 하다.
“ 수현아. ”
“ 응? ”
“ 우리 오늘 나이트 갈까? ”
“ 뭐? 나이트? 하하하..농담이지? ”
“ 농담 아니야. 우리 성인 된지도 일년이 넘었는데. 나이트도 한번쯤은 가줘야지~ ”
“ 됐어. 성인이 뭐 그렇게 대단하거라고. ”
“ 대단 한거야~ 너 몰랐구나? 우리 한번만 가보자~ 응? ”
“ 왜 안하던 짓을 하려고 해? 갑자기 무슨 나이트야? 그리고 난 바쁘잖아. 시간도 없어. ”
“ 커피숍 알바 끝나고 가도 돼~ 나이트는 밤늦게까지 하잖아. 오늘 한번 가보자 응? ”
오늘따라 안하던 행동을 하는 경미가 이상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떼쓰는 경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주문 받고 서빙을 하면서도 벌써 한 시간째 쫒아 다니면서 조르는 통에 결국 가겠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현을 의자에 앉히는 경미. 가방에서 미니 가방을 꺼내고 그 곳에서는 갖가지 화장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쏟아지는 화장품을 보고는 눈치 채고 수현이 기겁을 하자 수현의 손을 저지하고 터프하게 제압한다.
“ 가만히 있어. 난 네가 화장한 모습 진짜 보고 싶었단 말야. 이럴 때 아니면 네가 언제 화장을 하겠어? 안 그래? ”
“ 나 화장 안 해봐서 잘 몰라. 그리고 안 어울릴 거야. ”
“ 누가 너더러 화장하래? 내가 해준 다구. 예쁠 거야. 기대해~ ”
능숙한 손놀림으로 수현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경미. 경미는 한번쯤은 자신이 멋 낼 줄도 모르는 너무 수수해서 탈인 친구 수현을 직접 꾸며 주고 싶었다. 혼자 힘으로 대학합격하고 학비에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친구라 자신에게 투자하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경미는 항상 마음이 아팠다. 30분쯤 지났을까. 눈을 떠 거울을 보라는 경미의 말에 겨울을 보고는 수현 자신도 놀랐다. 자신의 얼굴이 아닌 것만 같았다.
“ 어때? 내 솜씨 죽이지? ”
“ 나..아닌 것 같아. ”
“ 하하하하 최수현 답다. 정말~ 화장한 얼굴을 보고 처음에 하는 말이 그런 말이야? ”
“ 어색해. 진짜 어색해. ”
“ 수현아. 이 옷도 입어봐. 너한테 잘 어울릴 거야. ”
“ 옷? 옷도 있어? 너무 거창하다. ”
경미가 건네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수현을 보면서 경미가 즐거워한다.
“ 내 친구 최수현. 정말 예쁘다. 시집가도 되겠어? ”
“ 뭐어~? 나이트 가자고 이렇게 꾸며주고선 시집가도 되겠다고? ”
“ 하하.. 하긴 그러네. 좀 앞뒤가 안 맞는다. 그치? ”
택시를 잡아타고 어딘지 모를 지역으로 가더니 금 새 모든 밤거리가 번쩍번쩍 거리는 거리에 둘을 내려놓고 택시가 떠난다. 난생 처음 와보는 이런 분위기에 거리. 어색하기만 한 수현. 어색하기는 경미도 마찬가지지만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경미.
“ 수현아. 이런 곳에서는 당당하게 걸어야 한 대. 고개를 좀 빳빳히 들고 도도하게 걸으면 남자들이 쉽게 못 대한다더라. ”
“ 정말 여기 들어 갈거야? ”
“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야지. ”
6
경영학과 선 후배들 간에 회식이 있어 나이트를 찾은 승우와 민섭. 그리고 다른 경영학과 사람들. 큰 테이블에 앉아서 술잔을 부딪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도 않아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던 승우였다. 다른 사람들은 스테이지로 나가서 춤도 취고 즐겁게 노는데 승우만 테이블을 지키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본 경영학과 여자 후배가 승우를 억지로 잡아끌어 무대로 데리고 나왔고 같이 춤추기를 유도했다. 데리고 나온 후배가 무안해 할까봐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추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화려하게 돌아가는 불빛 속에서 그리고 조금은 어두운 밝기 속에서 사람들은 온몸으로 열을 방출해 내고 있었다. 이제는 슬슬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뒤 돌아 서는데 승우에 눈에 포착된 낫 익은 얼굴이 있었다. 경미였다. 여기서 경미를 만난 게 신기하고 반갑기도 해서 가까이 가려고 한 발을 옮기는데 경미 앞에는 일행이 있는 듯 했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내 일행이 수현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놀라 토끼눈으로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승우. 낮에만 보던, 화장 끼 전혀 없던, 꾸밈이 거의 없던 수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은 화장도 한 것 같았고 입고 있는 옷도 하얀 실크의 단아한 원피스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치마 길이가 비교적 짧았다. 지금까지 느꼈던 매력과는 조금의 차이가 있었고 수수한 이미지에서 약간은 수줍은 듯한 섹시함이 묻어 나오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그렇게 수현을 보자 마치 얼음이 되어 버린 것처럼 온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이에 어떤 여자 꽤나 울릴 것 같은 잘 생긴 남자가 서서히 수현에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하나 분위기와는 안 맞는 게 있다면 수현은 나이트에 처음 왔다는 것을 몸으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색한 웃음. 움직임. 계속해서 얼굴을 만지는 버릇이며 여자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선수들이 보기에 간만에 새로운 물고기였을지도 모른다.
서서히 수현에게로 춤을 취면서 접근하는 이름 모를 그 남자. 게다가 수현에게 더욱 더 몸을 밀착 시킨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수현에게도 달려가려고 했으나 승우에 손을 잡아끄는 여자 후배.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승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민정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적극성을 보여주며 승우를 유혹한다. 그러나 승우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수현에게 접근하는 선수로 보이는 그 남자를 떼어내고 싶은 생각 밖에는 없다.
경미가 아무리 가자고 졸랐어도 이곳을 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후회하고 있는 수현. 좀 전부터 처음 보는 이 남자가 자꾸만 자신에게 다가와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이는데 소름이 끼치는 수현.
“ 저..저기요.. 전 이만 테이블로... ”
“ 이름이 뭐에요? ”
“ 네? 아니..저기요. 전.. ”
“ 머릿결이 예쁘네요. 난 긴 생머리 좋아하는데. ”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는 막무가내의 이 남자. 매너라곤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조금은 상한 수현. 그런 수현의 마음을 눈치 채고 경미는 수현을 데리고 자신들의 테이블로 돌아간다. 테이블로 돌아온 수현은 당황스럽고 왠지 모를 창피함을 숨기고자 테이블에 있던 맥주를 들이켰다.
“ 수현아? ”
너무 갑작스럽고 놀라서 맥주를 마시는 수현을 보고 말리지도 못한 경미. 술을 못하는 수현이 걱정스럽다. 수현은 맥주잔에 있던 맥주를 반잔이나 비웠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경미는 수현에게 물을 건네며 마시라며 먹여준다.
“ 너 괜찮겠어? 술도 못하는 애가.”
“ 응. 괜찮아. 헤헤헤헤. ”
“ 뭐야? 너 설마. 벌써 취한거야? ”
“ 아니.. 나 안취했어. 헤헤헤헤. ”
“ 아이구. 취했네 뭘~ 술 다 깨고 가야겠다. 풋. ”
“ 경미야. 나 화장실.~ 화장실~~화장실 가고 시포~”
“ 하하하하하 너 취하면 애교 부리는구나? 하하 저기 오른쪽 통로 나가다보면 있어. 혼자 갈 수 있겠어? 같아 갈까? ”
“ 그럼..그럼.. 다녀올게. ”
비틀거리며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가는 수현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승우는 따라 나섰다. 비틀거리는 수현을 좀 전에 무대에서 접근했던 그 남자가 부축했다.
“ 응? 누구세요? ”
“ 하하. 술 취했어요? 아까 같이 춤췄는데 우리? 하하. 오늘 밤 나랑 즐겁게 지내볼래요?”
“ 네? 뭐라구요? 에이~ 헤헤헤헤헤. ”
“ 가자고. 나랑 ~ 좋지? ”
수현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자 수현이 뿌리치려 했으나 뿌리쳐지지 않았다.
“ 어디가요? 나 화장실 가는 건데? 거기 가는 거에요? ”
“ 완전 취했네. 이 여자. 그래도 뭐 귀여우니까. 하하.”
수현을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는 찰나의 뒤 따라온 승우가 그 남자의 팔을 잡았다.
“ 술의 취한 여자한테 뭐하는 겁니까? ”
“ 당신은 또 뭐야? 상관 말고 가던 길 가시지. ”
승우는 수현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이 보호할 수 있는 거리에 두고 남자가 잡고 있던 수현의 팔과 분리 시켰다.
“ 뭐야 ? 당신? 이 여자 알아? ”
“ 이 여자 애인입니다. 됐습니까? ”
“ 에이.. 뭐야. 임자 있었어? 퇴~ ”
승우가 나타나 방해하자 기분 상했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나는 그 남자. 승우의 몸에 기대고 있던 수현이 발의 힘이 없는지 쓰러지려고 할 때 수현의 허리를 덥석 안아 쓰러지지 않도록 잡았다.
“ 수현씨. 괜찮아요? 이봐요. 수현씨? ”
“ 응? 누구? 누구지? ”
“ 하하..한승우에요. ”
“ 한...한...아~~ 만 연필~ 맞죠?
“ 하하 그래요 ..만 연필 맞아요. ”
“ 아니다. 한승우...승우... 안녕? 안녕 승우? 헤헤헤 ”
술에 취한 수현의 모습은 보통 일반 사람들이 취해서 실수하는 그런 건 아니었다. 목소리가 애교 섞인 코맹맹이 소리였고 계속해서 웃었고 친근하게 반말을 하면서 말하고 있는 이 여자.. 너무나 사랑스럽다.
수현이 화장실 가서 너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경미가 화장실 가는 통로로 나왔는데 배치된 의자에 앉아 있는 수현과 승우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현은 앉아 있다기보다는 거의 승우에게 기대고 누워 있었다.
“ 승우씨? 어머 여기서 다 만나네요? 어떻게 된 거에요? ”
“ 자세한건 가면서 설명해드릴게요. 우선 수현씨 집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잠시만 계세요. 안에 가서 간다고 말 좀 하고 나올 게요. ”
“ 아....네... ”
수현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경미에게 기대게 하고는 다시 시끄러운 안으로 들어가는 승우. 이내 옷과 짐을 들고는 다시 나온 승우.
“ 경미씨 이 가방 좀 들어 주시겠어요? ”
“ 네? 아..네.. ”
승우가 들고 있던 가방과 옷, 수현과 경미의 짐까지 경미가 들고 의자가 누워있는 수현을 승우는 번쩍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승우는 자신의 차에 수현을 뒷 자석에 태우고 자신의 옷으로 덮어 주었다.
“ 경미씨 . 앞에 타시죠. ”
수현의 집까지 가는 동안에 승우는 있었던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고 그 설명을 다 듣고 난 경미는 수현에게 미안한 마음에 한참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수현의 집에 도착해서 뒷 자석에서 수현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옥탑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수현을 눕히고 마루로 나왔더니 경미가 오렌지주스를 한잔 건넨다.
“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힘드셨죠? ”
“ 집이 어디세요? 많이 늦었는데 태워다 드릴게요. ”
다시 승우의 차안. 어색한 두 사람.
“ 놀라셨죠? 수현이의 그런 모습. ”
“ 아... 조금요. 처음엔 못 알아봤으니까요. ”
“ 제가 가자고 졸랐어요. 수현이 오늘 화장도 처음 해보고 그런 곳도 처음 가봤거든요. ”
“ 아... 화장한 모습을 보니까 조금은 다른 이미지이던데요? ”
“ 수현이 좋아하시죠? ”
경미의 노골적인 질문에 순간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찾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잠적이 흐르고 솔직하게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에.
“ 네.. 좋아합니다. 많이요. ”
“ 솔직하셔서 보기 좋네요. 수현이는 지금껏 남자라는 건 돌아가신 아버지 밖에 모르고 살았던 애예요. 오래되고 낡은 만 연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이기 때문이죠. 이런 말 하면 제가 조금 자존심이 상하지만...”
경미의 얘기를 듣던 승우는 경미가 무슨 말을 할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4년 지기 친구인 저한테도 만 연필을 맡긴 적이 없었어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으니까요. 처음에 승우씨한테 세탁 비를 담보로 만 연필을 맡겼다는 말을 듣고는 의아해했죠. 도대체 어떤 사람이 길래 그 소중한 물건을 맡겼을까..하고 얼굴도 모르는 승우씨가 그 땐 참 궁금했어요. 만나고 나서 보니 수현이가 아버지의 만 연필을 맡길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승우씨라면 수현이한테 좋은 사람이 되어줄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승우씨 편이라는 거예요. 나도 둘이 잘 되도록 도울게요. ”
어느 새 경미에 집에 도착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경미를 확인하고는 승우도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많은 것을 얻은 날이다. 수현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수현의 집도 알았고. 수현의 베스트 프랜드인 경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 뜻 깊은 날이다. 내일 부터는 지금보다 더 수월해 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연애소설) -알약(4) -
*
- S p e c i a l P e r s o n
1
알람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수현은 평소보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기계처럼 일어났다. 옥탑 방이라 다른 집 보다는 따듯하게 지내지 못 하는 이유도 있고 혼자서 자취하고 있으니 최대한 세금은 줄여가면서 아껴야 했다. 유난히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을 정도로 쌀쌀한 집안 공기 때문에 수현은 자신과의 싸움을 벌어야만 했다. 이내 일어나라는 쪽이 싸움에서 이겨 기계처럼 일어나긴 했지만 온 몸을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욱신거림을 수현은 잠깐 느낄 수 있었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던 터라 오늘은 버스타고 학교로 오는 길도, 자신에게 인사를 해주는 것만 같은 아침 햇살도, 지나치는 나무들도, 반갑지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두껍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교과 교재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갔고 수업 준비를 했다. 학생들이 한 두 차례 몰려 들어오더니 그 뒤를 이어 교수가 들어왔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는데도 아직 강의실에 도착하지 않은 경미가 걱정이 되었는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낸다. 문자를 보낸 지 한 참이 되었는데도 답문이 없자 경미를 걱정하는 수현. 그 때 강의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일체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경미였다. 몰래 들어와 앉으려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최대한 숙이고 있었던 몸을 펴고 교수와 학생들을 향해 귀엽게 웃고 있었다. 교수를 향해서는 한번만 양해해 달라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 경미학생 맞죠? ”
“ 네 . 교수님. ”
“ 들어와 자리에 앉으세요. ”
“ 네.. ”
좀 전까지만 해도 느리고 조용한 걸음으로 천천히 오던 경미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고 조용하던 강의실 안에 명쾌하게 울려 퍼졌다. 수현의 옆자리에 앉는 경미. 수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더니 경미의 책상으로 건네는 수현.
[ 어떻게 된 거야? 문자 보냈는데 답문도 없고. 오늘도 학교 못 오는 줄 알았어.]
수현이 건넨 수첩의 글을 읽고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으나 소리가 조금 컸다는 걸 느꼈는지 주위를 살피며 표정관리를 했고 수첩에 무언가 적어서 다시 수현에게 수첩이 되돌아 왔다.
[ 미안 .미안. 할머니 병원에서 잤거든. 근데 하필 늦잠을 자버린 거야. 아버지가 차 태워주신다는 걸 지하철이 더 빠를 것 같아서 마다하고 왔는데 은근히 시간이 걸리더라. 오늘 나 완전 뛰었잖아. 그래서 문자 온지도 몰랐어. ㅋㅋㅋㅋ]
2
공강 시간이라 휴게실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는 수현과 경미. 수현은 무언인가 계속 얘기해주고 경미는 즐거운 듯 흥미 있는 표정으로 수현의 말에 집중한다.
“ 그래서...? 네가 뭐라고 했는데? ”
“ 종이 주면서 학과랑 학년이랑 이름 적어달라고 했지.”
“ 우와~ 최수현. 새로운 모습 발견~ 너..은근히 그 남자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
“ 얘가 정말..저번에도 그런 말 하더니. 또 그러네.. 아니야. 그런 거.. ”
“ 왜~ 남자들이 여자한테 작업 걸어 올 때 그런 비슷한 방법 잘 사용하잖아. ”
“ 야~ 내가 남자도 아니고. 무슨 작업이야.. ”
“ 이봐~ 너 이상하다니까. 내가 웃자고 하는 말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 ”
“ 아니라니까. ”
장난이라는 것을 알지만 오늘 만큼은 경미의 장난도 반갑지가 않았다.
“ 그래서 너의 소중한 만 연필은 돌려받은 거야? ”
“ 응.. 돌려받았어. 내가 시간이 없어서 찾으러 못 갔더니 그 사람이 가지고 커피숍으로 찾아 왔더라고. ”
“ 직접 가지고 왔다고? 이 거 이 거 네가 아니고 그 남자가 너한테 뿅 간 거 아니야? 하하하 친절하기도 하셔라. ”
“ 맞아. 친절한 사람인 것 같기는 했어. 그날 비 왔었는데 내가 우산 없는 거 기억하고 다시 커피숍으로 우산 들고 왔더라고. ”
“ 우산을 들고 다시 찾아와 ? 이야~ 매너 좋다. 소개 좀 시켜주라. 그 남자. 하하하. ”
“ 진심이야? 정말 소개시켜줘? 연락처 아는데 알려줄까? ”
“ 야~ 내가 농담한다고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되니~ 너도 날 닮아가는 거 같아. 헤헤헤 ”
“ 근데 경미야. 오늘 날씨 좀 많이 춥지? ”
“ 오늘? 그래? 난 모르겠는데. 추워? ”
“ 그래? 나만 추운가? 몸도 살짝 무겁네. ”
“ 너 감기 오려는 건가 부네. 약은? ”
“ 약은 무슨, 오늘 아침부터 그런 건데. 약도 자주 먹는 거 안 좋다고 해서 참아야지. ”
“ 그래. 우선 따듯하게 하고 다니고. 약은 될 수 있음 안 먹는 게 더 좋으니까. ”
역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은 경미뿐이다.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시고 가장 힘들 때 옆에서 위로해주고 힘이 되어준 소중한 친구 경미에겐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지내온 경미는 보통 부유하게 자라 자기중심적이고 너무 자만함의 빠져 있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랐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하며 똑똑하다는 것은 공통점이 있었지만 적어도 경미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고 마음이 참 따듯한 친구였다. 수현은 경미가 가끔 돌이가신 부모님이 자신에게 보내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강의를 듣는 수현의 이마의 주름이 두 줄 잡히는 것을 경미는 발견했다. 그리고 평소 땀이 많이 나지 않는 수현의 이마의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것도. 수업이 끝나고 서둘.러 다른 강의실로 움직이려고 부산하게 짐을 챙기는 수현의 팔목을 잡아끌고 황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황 교수의 방 앞에 도착해서 노크를 하고 들어간다.
“ 오랜만이구나. 경미야. ”
“ 네.. 교수님 제가 요즘 뜸했죠? 헤헤. ”
“ 수현이도 왔네. 무슨 일이니? ”
“ 아.. 다름이 아니라 이번 시간이 교수님 강의시간인데요. 수현이가 감기에 걸렸나 봐요. 아침부터 열도 심하고 현기증도 난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병원 문 닫기 전에 병원 다녀 올 수 있게 조퇴를 해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
경미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조퇴라는 단어가 나오자 토끼 눈으로 경미를 바라보는 수현. 그런 수현의 팔을 살짝 찌르는 경미. 잠자코 있으라는 뜻이다.
“ 그래? 수현이 얼굴을 보니 많이 아픈 것 같구나. 출석 인정해 줄 테니. 병원가보고 푹 쉬도록 해. 요즘 감기는 잘 안 낫는다고 하더라.”
경미의 말 빨과 예의 있는 말투로 부탁하는데 안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황 교수의 방을 나와 문 앞에 선 경미는 승리의 표정을 하고 있었고 아직도 어리둥절한 수현은 멍하게 경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라고. 너 아프잖아. ”
“ 하하.. 나 못 쉬어. 알면서 그래... ”
“ 교수님께 허락도 맡았잖아. ”
“ 수업을 안 들어간다고 해도 수업 끝나고 커피숍 알바 가야지. ”
“ 야~ 무슨 소리야? 이렇게 아픈데 오늘도 알바를 가겠다는 거야? ”
“ 참을 만 해~ 그리고 오후는 내가 담당이라 내가 안 가면 안 돼. 그것도 약속인데. ”
“ 에이~ 알았어. 오늘 그 알바 내가 너 대신 할게. 그러면 되는 거지? 약속도 지키고 너도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일석이조네 뭘~ ”
항상 경미는 이렇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수현을 챙기고 감동시킨다. 경미의 성화에 못 이겨 수현은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3
바쁘게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는 경미.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바쁘게 일하느라 핸드폰 진동을 느끼지 못하고 한참 지난 뒤에야 부재중 전화가 2통이나 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커피숍 밖으로 나가서 확인을 해보니 집이었다.
‘ 엄마겠군. 언제 들어 오냐는 전화였을텐데. 그래도 전화는 해드려야겠지? ’
신호가 가고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낫 익은 목소리에 여자가 받았다.
“ 경미니? ”
“ 네. 엄마. 전화 하셨어요? ”
“ 언제 쯤 들어오니? ”
“ 오늘은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오늘 선배들이랑 회식 있거든요.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요. ”
알았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고 안도의 숨을 쉬는 경미. 수현을 대신해서 지금 이 시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가 아시면 약간의 잔소리를 하시기 때문에 가끔은 이런 거짓말을 하곤 한다. 나름대로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좀 전 보다는 한가해 진 커피 안은 잔잔한 피아노 음악 선율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어서 은근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손님 들어오는 종소리가 들리고 어떤 남자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어서 오세요. ”
저번처럼 너무 일찍 이 곳에 와서 카운터에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와서는 그녀가 없을까봐서 오늘은 어제 보다 조금 늦은 7시에 왔는데 있어야 할 그 곳에, 그 자리에 그녀 대신 처음 보는 여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자 승우는 내심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수현이 안내해준 창가 자리에 또 앉아 두리번거리는 승우. 혹시나 있을까 해서. 그러나 역시 없었다. 그 여자는. 오늘은 이름을 물어 보리라 ...다짐하고 왔는데. 또 허탕을 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승우는 괜히 약이 오른다.
“ 주문하시겠어요? 손님? ”
“ 저기요. 아르바이트 하시는 분이 바뀌신 것 같네요? ”
“ 아~ 그거요? 그 친구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제가 대신 하는 거에요. ”
“ 아파요? 어디가요? 많이 아픈가요? ”
“ 네? 음.. 감기에요. 하하. 그런데 수현이를 아세요? ”
“ 아~ 수현.. 이름이 수현이였군요. 수현. ”
이 사람. 뭐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뚱하다. 알바 생이 바뀐 것을 금방 알아채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짜고짜 어디가 아픈 건지 많이 아픈 건지. 묻다니.
그래서 아는 사람인가 해서 물어봤더니 수현이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는 듯하다. 누구지 이 사람? 영문을 모르겠는 경미가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무언가 해명을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는 승우.
“ 수현씨 친구 분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승우 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우연하게 수현씨를 알게 된 사람이에요.”
“ 한..한승우?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아~ 혹시.. 만 연필? ”
“ 아시는 군요? 예.. 제가 만 연필 맞습니다. ”
“ 아~ 그렇군요. 안 그래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반가워요. ”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토록 서슴없이 악수를 청하는 여자는 처음 보는 지라 약간은 당황했지만 티 안내고 악수하는 승우. 이런 모습을 보는 민섭은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번에도 만 연필이 등장을 하고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만 연필이라는 주제가 하나 던져지면 원래 친한 사이였던 것처럼 행동하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이들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건지. 아직도 감을 못 잡겠는 민섭. 경미가 민섭의 옆 자리에 앉고 두 사람은 만 연필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사건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민섭에게 설명해준다. 그제 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세 사람은 즐겁게 대화한다.
4
어제 경미의 성화의 못 이겨 집으로 가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어 버린 수현은 오늘 아침 햇볕이 옥탑 방 창문 사이로 들어올 때까지 깨지 않고 쉬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어제보다 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학교로 향했다. 누가 보아도 아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현을 경비 아저씨가 발견하고는 걱정스런 말투로 묻는다.
“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
“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 헤헤 ”
“ 요새 날씨는 워낙 이랬다. 저랬다 해서 관리 잘 해야 하는데. 몸 관리 잘해. ”
“ 네 아저씨. ”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수현. 매일 매일 열심히 일하던 수현이 오늘 만큼은 꾀를 부리고 싶을 정도로 몸이 나른하고 귀찮아 진다.
“ 그래도 해야지. 아자~ ”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코 깃이 차갑다. 대 걸레로 바닥 청소를 하려고 하는 그 때. 누군가 들어오는 문소리가 난다.
“ 지금 이 시간에는 대출, 반납 안하는데요. ”
“ 아침 먹었어요? ”
어디서 들었던 낫 익은 목소리의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였다. 한. 승 .우 .
“ 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
“ 수현씨 아침 먹었나 해서요? ”
“ 네? 제가 아침 먹었는지가 궁금해서 오셨다고요? 아참.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
“ 뭐.. 이래저래..어떻게 하다 보니까요. 아침 먹었어요? ”
“ 아니요. 별 생각 없어서요. ”
“ 에이~ 그러면 안돼요. 감기 걸렸을 때는 뭐든지 잘 먹어야 한다고요. ”
“ 네? 제가 감기 걸린 건 어떻게 아셨어요? ”
“ 글쎄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
당황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는 수현을 보는 승우는 마냥 재미있기만 하다. 수현 자신은 잘 모르겠지만 당황하거나 놀랐을 때 수현의 표정은 정말 귀엽다.
“ 잘 됐네요. 아침 안 먹었다니. 나랑 같이 할래요? ”
“ 네? 저기요. 별 생각 없어서 안 먹었다니까요. ”
“ 그래도 안돼요. 먹어야지~ 내가 죽 사왔어요. 입 맛 없을 때 먹을 만 할 거예요. ”
정말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알고 지낸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가 아침부터 도서관으로 찾아와서는 같이 아침을 먹자고 한다. 더구나 감기 걸린 자신을 위해서 죽을 사오고 자신을 걱정 하고 있다는 것이다.
“ 한 승우씨. 원래 이렇게 친절해요? ”
“ 네? ”
“ 원래 이렇게 모든 사람들한테 친절하냐구요. ”
“ 하하하하하하하. 모든 사람들한테는 아니죠. 특별한 사람한테만 친절하죠. ”
“ 특별한 사람? 전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요. ”
“ 아니요. 당신은 나한테 충분히 특별해요. 이걸로 대답이 됐나요? 자아~ 그럼 이제 아침 먹죠?”
5
조금은 따듯해지는 날씨 덕분인지 수현이 감기는 거의 나아가는 듯 했다. 그 날 이후로 승우와는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만 연필을 찾기 위해 승우를 일주일동안 그렇게 찾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하루에 두 세 번씩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니 말이다.
마주 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는 승우를 보면서 솔직히 수현은 부담스러웠다. 그런 과도한 친절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자기 자신이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무 잘 알고 자신의 처지 또한 너무 잘 알기도 하기에 남자라는 존재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게다가 이 남자. 생각보다 너무 적극적이지 않은가. 이틀의 한번 꼴로 수현이 일하는 시간에만 승우는 도서관을 찾아 책을 빌렸고 커피숍에도 자주 가는 편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경미 또한 모든 상황이 재미있기만 하다.
“ 수현아. ”
“ 응? ”
“ 우리 오늘 나이트 갈까? ”
“ 뭐? 나이트? 하하하..농담이지? ”
“ 농담 아니야. 우리 성인 된지도 일년이 넘었는데. 나이트도 한번쯤은 가줘야지~ ”
“ 됐어. 성인이 뭐 그렇게 대단하거라고. ”
“ 대단 한거야~ 너 몰랐구나? 우리 한번만 가보자~ 응? ”
“ 왜 안하던 짓을 하려고 해? 갑자기 무슨 나이트야? 그리고 난 바쁘잖아. 시간도 없어. ”
“ 커피숍 알바 끝나고 가도 돼~ 나이트는 밤늦게까지 하잖아. 오늘 한번 가보자 응? ”
오늘따라 안하던 행동을 하는 경미가 이상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떼쓰는 경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주문 받고 서빙을 하면서도 벌써 한 시간째 쫒아 다니면서 조르는 통에 결국 가겠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현을 의자에 앉히는 경미. 가방에서 미니 가방을 꺼내고 그 곳에서는 갖가지 화장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쏟아지는 화장품을 보고는 눈치 채고 수현이 기겁을 하자 수현의 손을 저지하고 터프하게 제압한다.
“ 가만히 있어. 난 네가 화장한 모습 진짜 보고 싶었단 말야. 이럴 때 아니면 네가 언제 화장을 하겠어? 안 그래? ”
“ 나 화장 안 해봐서 잘 몰라. 그리고 안 어울릴 거야. ”
“ 누가 너더러 화장하래? 내가 해준 다구. 예쁠 거야. 기대해~ ”
능숙한 손놀림으로 수현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경미. 경미는 한번쯤은 자신이 멋 낼 줄도 모르는 너무 수수해서 탈인 친구 수현을 직접 꾸며 주고 싶었다. 혼자 힘으로 대학합격하고 학비에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친구라 자신에게 투자하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경미는 항상 마음이 아팠다. 30분쯤 지났을까. 눈을 떠 거울을 보라는 경미의 말에 겨울을 보고는 수현 자신도 놀랐다. 자신의 얼굴이 아닌 것만 같았다.
“ 어때? 내 솜씨 죽이지? ”
“ 나..아닌 것 같아. ”
“ 하하하하 최수현 답다. 정말~ 화장한 얼굴을 보고 처음에 하는 말이 그런 말이야? ”
“ 어색해. 진짜 어색해. ”
“ 수현아. 이 옷도 입어봐. 너한테 잘 어울릴 거야. ”
“ 옷? 옷도 있어? 너무 거창하다. ”
경미가 건네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수현을 보면서 경미가 즐거워한다.
“ 내 친구 최수현. 정말 예쁘다. 시집가도 되겠어? ”
“ 뭐어~? 나이트 가자고 이렇게 꾸며주고선 시집가도 되겠다고? ”
“ 하하.. 하긴 그러네. 좀 앞뒤가 안 맞는다. 그치? ”
택시를 잡아타고 어딘지 모를 지역으로 가더니 금 새 모든 밤거리가 번쩍번쩍 거리는 거리에 둘을 내려놓고 택시가 떠난다. 난생 처음 와보는 이런 분위기에 거리. 어색하기만 한 수현. 어색하기는 경미도 마찬가지지만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경미.
“ 수현아. 이런 곳에서는 당당하게 걸어야 한 대. 고개를 좀 빳빳히 들고 도도하게 걸으면 남자들이 쉽게 못 대한다더라. ”
“ 정말 여기 들어 갈거야? ”
“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야지. ”
6
경영학과 선 후배들 간에 회식이 있어 나이트를 찾은 승우와 민섭. 그리고 다른 경영학과 사람들. 큰 테이블에 앉아서 술잔을 부딪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도 않아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던 승우였다. 다른 사람들은 스테이지로 나가서 춤도 취고 즐겁게 노는데 승우만 테이블을 지키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본 경영학과 여자 후배가 승우를 억지로 잡아끌어 무대로 데리고 나왔고 같이 춤추기를 유도했다. 데리고 나온 후배가 무안해 할까봐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추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화려하게 돌아가는 불빛 속에서 그리고 조금은 어두운 밝기 속에서 사람들은 온몸으로 열을 방출해 내고 있었다. 이제는 슬슬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뒤 돌아 서는데 승우에 눈에 포착된 낫 익은 얼굴이 있었다. 경미였다. 여기서 경미를 만난 게 신기하고 반갑기도 해서 가까이 가려고 한 발을 옮기는데 경미 앞에는 일행이 있는 듯 했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내 일행이 수현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놀라 토끼눈으로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승우. 낮에만 보던, 화장 끼 전혀 없던, 꾸밈이 거의 없던 수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은 화장도 한 것 같았고 입고 있는 옷도 하얀 실크의 단아한 원피스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치마 길이가 비교적 짧았다. 지금까지 느꼈던 매력과는 조금의 차이가 있었고 수수한 이미지에서 약간은 수줍은 듯한 섹시함이 묻어 나오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그렇게 수현을 보자 마치 얼음이 되어 버린 것처럼 온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이에 어떤 여자 꽤나 울릴 것 같은 잘 생긴 남자가 서서히 수현에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하나 분위기와는 안 맞는 게 있다면 수현은 나이트에 처음 왔다는 것을 몸으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색한 웃음. 움직임. 계속해서 얼굴을 만지는 버릇이며 여자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선수들이 보기에 간만에 새로운 물고기였을지도 모른다.
서서히 수현에게로 춤을 취면서 접근하는 이름 모를 그 남자. 게다가 수현에게 더욱 더 몸을 밀착 시킨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수현에게도 달려가려고 했으나 승우에 손을 잡아끄는 여자 후배.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승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민정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적극성을 보여주며 승우를 유혹한다. 그러나 승우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수현에게 접근하는 선수로 보이는 그 남자를 떼어내고 싶은 생각 밖에는 없다.
경미가 아무리 가자고 졸랐어도 이곳을 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후회하고 있는 수현. 좀 전부터 처음 보는 이 남자가 자꾸만 자신에게 다가와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이는데 소름이 끼치는 수현.
“ 저..저기요.. 전 이만 테이블로... ”
“ 이름이 뭐에요? ”
“ 네? 아니..저기요. 전.. ”
“ 머릿결이 예쁘네요. 난 긴 생머리 좋아하는데. ”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는 막무가내의 이 남자. 매너라곤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조금은 상한 수현. 그런 수현의 마음을 눈치 채고 경미는 수현을 데리고 자신들의 테이블로 돌아간다. 테이블로 돌아온 수현은 당황스럽고 왠지 모를 창피함을 숨기고자 테이블에 있던 맥주를 들이켰다.
“ 수현아? ”
너무 갑작스럽고 놀라서 맥주를 마시는 수현을 보고 말리지도 못한 경미. 술을 못하는 수현이 걱정스럽다. 수현은 맥주잔에 있던 맥주를 반잔이나 비웠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경미는 수현에게 물을 건네며 마시라며 먹여준다.
“ 너 괜찮겠어? 술도 못하는 애가.”
“ 응. 괜찮아. 헤헤헤헤. ”
“ 뭐야? 너 설마. 벌써 취한거야? ”
“ 아니.. 나 안취했어. 헤헤헤헤. ”
“ 아이구. 취했네 뭘~ 술 다 깨고 가야겠다. 풋. ”
“ 경미야. 나 화장실.~ 화장실~~화장실 가고 시포~”
“ 하하하하하 너 취하면 애교 부리는구나? 하하 저기 오른쪽 통로 나가다보면 있어. 혼자 갈 수 있겠어? 같아 갈까? ”
“ 그럼..그럼.. 다녀올게. ”
비틀거리며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가는 수현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승우는 따라 나섰다. 비틀거리는 수현을 좀 전에 무대에서 접근했던 그 남자가 부축했다.
“ 응? 누구세요? ”
“ 하하. 술 취했어요? 아까 같이 춤췄는데 우리? 하하. 오늘 밤 나랑 즐겁게 지내볼래요?”
“ 네? 뭐라구요? 에이~ 헤헤헤헤헤. ”
“ 가자고. 나랑 ~ 좋지? ”
수현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자 수현이 뿌리치려 했으나 뿌리쳐지지 않았다.
“ 어디가요? 나 화장실 가는 건데? 거기 가는 거에요? ”
“ 완전 취했네. 이 여자. 그래도 뭐 귀여우니까. 하하.”
수현을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는 찰나의 뒤 따라온 승우가 그 남자의 팔을 잡았다.
“ 술의 취한 여자한테 뭐하는 겁니까? ”
“ 당신은 또 뭐야? 상관 말고 가던 길 가시지. ”
승우는 수현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이 보호할 수 있는 거리에 두고 남자가 잡고 있던 수현의 팔과 분리 시켰다.
“ 뭐야 ? 당신? 이 여자 알아? ”
“ 이 여자 애인입니다. 됐습니까? ”
“ 에이.. 뭐야. 임자 있었어? 퇴~ ”
승우가 나타나 방해하자 기분 상했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나는 그 남자. 승우의 몸에 기대고 있던 수현이 발의 힘이 없는지 쓰러지려고 할 때 수현의 허리를 덥석 안아 쓰러지지 않도록 잡았다.
“ 수현씨. 괜찮아요? 이봐요. 수현씨? ”
“ 응? 누구? 누구지? ”
“ 하하..한승우에요. ”
“ 한...한...아~~ 만 연필~ 맞죠?
“ 하하 그래요 ..만 연필 맞아요. ”
“ 아니다. 한승우...승우... 안녕? 안녕 승우? 헤헤헤 ”
술에 취한 수현의 모습은 보통 일반 사람들이 취해서 실수하는 그런 건 아니었다. 목소리가 애교 섞인 코맹맹이 소리였고 계속해서 웃었고 친근하게 반말을 하면서 말하고 있는 이 여자.. 너무나 사랑스럽다.
수현이 화장실 가서 너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경미가 화장실 가는 통로로 나왔는데 배치된 의자에 앉아 있는 수현과 승우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현은 앉아 있다기보다는 거의 승우에게 기대고 누워 있었다.
“ 승우씨? 어머 여기서 다 만나네요? 어떻게 된 거에요? ”
“ 자세한건 가면서 설명해드릴게요. 우선 수현씨 집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잠시만 계세요. 안에 가서 간다고 말 좀 하고 나올 게요. ”
“ 아....네... ”
수현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경미에게 기대게 하고는 다시 시끄러운 안으로 들어가는 승우. 이내 옷과 짐을 들고는 다시 나온 승우.
“ 경미씨 이 가방 좀 들어 주시겠어요? ”
“ 네? 아..네.. ”
승우가 들고 있던 가방과 옷, 수현과 경미의 짐까지 경미가 들고 의자가 누워있는 수현을 승우는 번쩍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승우는 자신의 차에 수현을 뒷 자석에 태우고 자신의 옷으로 덮어 주었다.
“ 경미씨 . 앞에 타시죠. ”
수현의 집까지 가는 동안에 승우는 있었던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고 그 설명을 다 듣고 난 경미는 수현에게 미안한 마음에 한참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수현의 집에 도착해서 뒷 자석에서 수현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옥탑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수현을 눕히고 마루로 나왔더니 경미가 오렌지주스를 한잔 건넨다.
“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힘드셨죠? ”
“ 집이 어디세요? 많이 늦었는데 태워다 드릴게요. ”
다시 승우의 차안. 어색한 두 사람.
“ 놀라셨죠? 수현이의 그런 모습. ”
“ 아... 조금요. 처음엔 못 알아봤으니까요. ”
“ 제가 가자고 졸랐어요. 수현이 오늘 화장도 처음 해보고 그런 곳도 처음 가봤거든요. ”
“ 아... 화장한 모습을 보니까 조금은 다른 이미지이던데요? ”
“ 수현이 좋아하시죠? ”
경미의 노골적인 질문에 순간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찾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잠적이 흐르고 솔직하게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에.
“ 네.. 좋아합니다. 많이요. ”
“ 솔직하셔서 보기 좋네요. 수현이는 지금껏 남자라는 건 돌아가신 아버지 밖에 모르고 살았던 애예요. 오래되고 낡은 만 연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이기 때문이죠. 이런 말 하면 제가 조금 자존심이 상하지만...”
경미의 얘기를 듣던 승우는 경미가 무슨 말을 할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4년 지기 친구인 저한테도 만 연필을 맡긴 적이 없었어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으니까요. 처음에 승우씨한테 세탁 비를 담보로 만 연필을 맡겼다는 말을 듣고는 의아해했죠. 도대체 어떤 사람이 길래 그 소중한 물건을 맡겼을까..하고 얼굴도 모르는 승우씨가 그 땐 참 궁금했어요. 만나고 나서 보니 수현이가 아버지의 만 연필을 맡길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승우씨라면 수현이한테 좋은 사람이 되어줄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승우씨 편이라는 거예요. 나도 둘이 잘 되도록 도울게요. ”
어느 새 경미에 집에 도착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경미를 확인하고는 승우도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많은 것을 얻은 날이다. 수현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수현의 집도 알았고. 수현의 베스트 프랜드인 경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 뜻 깊은 날이다. 내일 부터는 지금보다 더 수월해 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