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알약(14)-

임마누엘2006.04.22
조회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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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다면..



“ 그래서? 그 이사가 너보고 사귀자고 해? ”

“ 아니... 말이 되니~? 그게.. ”

“ 왜 말이 안 돼?  머.. 승우씨랑 닮았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사라는 직급이면    너. 정말 땡 잡은 거다~ 요즘 같이 취직하기 힘들어서 자기애인 취업되는 거나 걱정하고    있는 다른 연인들보다야 낫지.  안 그래? ”

“ 농담 그만해. 나 심각하단 말야. ”

“ 야~ 심각할 게 뭐 있어. 네가 좋다는 거잖아. 조금 튕기다가. 못 이기는 척 받아줘. ”

 

 

선우의 갑작스런 행동에도 놀랐던 수현은 선우의 선전포고도 걱정거리가 되기만 했다. 이사랑 연결되면 아주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이 생겨 날 텐데. 그 모든 걸 어떻게 견디란 말인지. 직장상사인 이사가 자신에게 고백 비슷한 선전포고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딱 잘라버리기도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지 않은가. 고민이 되어서 그래도 가장 친한 친구인 경미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더니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경미 때문에 머리가 더 아파온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의 회사생활은 그리 평탄치 않을 것이라는 거다. 그 때 수현의 핸드폰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가 발신번호에 뜬다. 누굴까.

 

 

“ 여보세요? ”

“ 바로 이 번호 저장해요. ”

전화를 걸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용건이 있는 건지. 어떠한 부연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이 번호를 저장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뿐일 것이다.

‘ 에티켓이라는 단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

“ 예. 알겠습니다. 이사님. 어쩐 일이시죠? ”

“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

 

점점. 이 남자 뻔뻔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너무나 직접적인 의사표현의 가끔은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다. ‘이사님’이라는 말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수현에 귀에 다가가서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경미. 작지만 살짝 들려오는 그 남자의 목소리는 괜찮아 보였다. 바로 입 모양으로 말한다.

 

[ 목소리는 멋있네. ]

 

안 그래도 막무가내인 이 남자와 통화를 하는 것도 벅찬데 또 한 번 부추기는 경미 때문에 한 숨이 나온다. 그런데  그 소리가 상당히 컸다.

 

 

“ 나랑 통화하면서 한 숨은 왜 쉽니까? ”

“ 네? 아... 옆에 친구가 장난을 쳐서요. 하..하.. ”

“ 옆에 친구 있어요? 거기 어디에요? ”

“ 여기가 어딘지 아시면 오시려고요? ”

“ 당연하죠. ”

“ 네? 하...”

 

안 되겠다는 듯이 경미가 수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전화를 대신 받는다.

 

“ 안녕하세요? 수현씨 친군데요. 여기가 어디냐면요. 명동역 근처에 있는 까페거든요. 오실    때까지 안가고 기다릴게요. ”

경미의 폭단 선언에 기겁을 하고는 다시 핸드폰을 다시 가져온다.

“ 여..여보세요? 저기 친구가 장난친 거거든요.? 이제 막 갈 거에요. 여..여보세요? 여보세     요? 이사님? 하..하.. ”

“ 왜 그래? ”

“ 끊겼어. 전화가. ”

“ 뭐? 하하하. 내 말 듣자마자 명동으로 달려오나 보다. 우와~ 진짜 재미있다. 그 사람. ”

 

 

정말일 것이다. 경미의 말이. 그 사람이라면 지금 쯤 명동으로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마주치는 것도 불편한데 밖에서까지 만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핸드백을 들어 일어서려는 수현을 경미가 붙잡아 다시 앉힌다.

 

“ 야~ 너 너무 매너 없다. 오고 있을 텐데 그냥 가버리면 어떻해? ”

한숨을 크게 쉬고는 자리에 앉는 수현. 그리고 30분 뒤에 다시 울리는 수현의 핸드폰. 아까 그 번호다. 벌써 도착했다는 것인가.

“ 여보세요? ”

“ 명동역인데. 어디쯤이에요? ”

“ 제가 나갈게요. ”

 

핸드백을 챙겨 경미와 까페를 나와 명동역으로 향한다. 명동역에서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는 선우를 발견하고 두 사람은 선우에게 다가간다.

“ 안녕하세요? 수현이 친구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

“ 아. 예 안녕하세요. ”

“ 저는 오늘 집에 일찍 들어 가봐야 해서 저는 들어갈 거구요. 수현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    세요. 수현아. 나. 간다. 그럼. ”

“ 야.. 경미야~ ”

 

 

경미가 떠나자 선우는 수현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운전한다. 그리고는 한강 고소부지에서 내린다. 조금은 늦은 시간이니 무엇을 먹기에도 그렇고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쉬고 싶었던 선우는 수현에게 어디가고 싶냐는 질문 한마디 없이 항상 자신이 정하고 데려간다. 차에서 내린 선우를 뒤 따라 수현도 차에서 내려 오랜만에 한강을 구경한다.



2

 말로만 듣던 이사라는 그 남자를 직접 보고는 경미 역시 놀랬다. 수현이 착각하고 흔들릴 정도의 닮은 외모를 보고는. 생김새는 비슥했으나 풍기는 이미지는 달랐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승우는 편안하고 포근한 이미지였으니. 그러나 그 남자는 조금은 딱딱하고 틀에 맞춰진 느낌이 들었다. 승우와 너무 닮은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제는 수현이 승우를 잊고 다른 사랑을 시작하기를 원하는 경미는 최대한 적극적으로 밀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다.



 3

 한강 고수부지를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아무 말이 없어 조금 어색할 뿐 남들이 볼 때는 아름다운 선남선녀였다.

 

“ 나랑 연애할래요? ”

 

역시 이 남자는 사람을 놀래게 하는 재주가 있음에 틀림없다. 뜬끔 없이 아무 말도 안하고 걷기만 하다가 처음 꺼내는 말이 “ 연애할래요? ” 라니..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수현. 침작하자. 어떤 말로 이 남자에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는 수현.

 

“ 전. 사랑하는 사람있어요 ”

“ 사궈요? 그 사람이랑 ”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이긴 하지만 선우의 빠른 질문에 할 말을 잃은 수현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선우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수현에게 조금 놀랐으나 겉으로는 내색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강한 선우였으니 그럴 만하다.

 

“ 사귀지는 않는가보군. 그럼 됐어요. 시간은 많으니까. ”

“ 저..저기요. 이사님. ”

“ 임자가 없는 거라면 됐다고요. 옆에 아무도 없는 건 맞죠?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옆자리는 비워져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그 옆자리가 채워져 있었기에.

“ 누군지는 몰라도 고백하지도 못할 사랑이라면 그거 버리고 나한테 와요. ”

“ 하...하.....”

“ 나한테 오면 나는 그 사랑 줄 수 있으니까. 그 사람처럼 혼자 놔두지 않을 테니까. ”

“ 이사님. 사랑해보셨어요? 아니. 해보지 못하셨겠죠. 그러니까.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쉽     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거고요. ”

“ 사랑경험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럼 당신이 나한테 그 대단한 경험. 할 수 있게 해주면 되    겠네. 나한테 와요. ”

“ 이것 보세요. 한 승우이사님. 사랑은 떼를 쓴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내가 사    랑한다고 그 사람도 날 사랑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사랑은 강요하는 게     아니라고요. ”

 

 

좀 전부터 붉어지고 있는 수현의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보드라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이 눈을. 그래. 수현을 매장에서 봤을 때 자신을 잡고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와도 같이 지금도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수현을 안아 버리는 선우.

 

“ 아....알았어. 내가 말실수 했어. 그러니까 그런 슬픈 눈 하지마. ”

 

 수현의 슬픈 눈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덩달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는 울리지 않으리라. 이 여자가 자신을 웃게 해준 만큼 자신도 이 여자 웃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이 여자가 울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파오니까.



4

 바쁘게 움직이는 개발 기획팀 사무실. 프린트 출력에 복사하느라 정신없는 수현은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 때문에 알 수 있었다. 평소 조용한 사무실의 분위기였다면 자신의 뱃속에서 나는 소리가 들릴까봐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모두가 부산하게 움직여 잡음 소리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 따라 소회가 너무 잘 돼서인지 다른 날 보다 배가 고프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 때 과장의 자리에서 전화벨이 울렸고. 대화를 하더니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 수현씨. 지금 급히 강남점 JD 백화점 매장을 좀 돌아보고 와야겠어요. ”

“ 매장에요? ”

“ 과장님.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점심은 먹어야죠. ”

“ 근데 어쩌지? 지금이 가장 한가할 때라서 지금 와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쪽 담당자가.”

“ 네. 그럴게요. 점심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

“ 그래. 수고해~ ”

 

파일과 핸드백을 들고 사무실을 나오는 수현. 아직도 배에서는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른다.

‘ 배에서 밥 달라고 난리네. 빨리 끝내고 어련히 챙겨 먹을 텐데. ’

 

 회사 건물을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다가 바로 머리를 살짝 친다. 강남점 JD백화점은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걸어가기에는 조금 멀고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너무 가깝고 게다가 마땅히 버스도 없어서 택시를 타고 가야했다. 그러나 그런 택시비로 돈을 낭비하느니 걸어서 가면 교통비 절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걷기로 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가다가 점심시간에 맞춰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과장님의 말씀이 생각나 점점 뛰어 가기 시작한다. 정장 차림에 높은 구두까지 신고는 뛰려니 쉽지만은 않다. 겨우 백화점 앞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수현의 얼굴은 약간 땀에 젖어 있었다. 4층에 여성 의류 매장에서 내린 수현은 온통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디자인된 옷을 구경하면서 한 브랜드 안으로 들어간다.

 

“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

“ 아~ 안녕하세요. JD개발 기획팀에 최수현 입니다. 매장에서 잘 나가는 옷을 좀 볼 수       있을까요? ”

“ 성함이. 최수현님 맞으시죠? ”

“ 네? 아..네.. ”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직원은 잠시 후 옷 한 벌을 가지고 수현에게로 돌아왔다.

“ 이건가요? 빨리 검토해보고  다시 가져올게요. ”

“ 검토해 보시기 전에 한 번 입어보세요. ”

“ 네? ”

“ 눈으로 검토해보시는 것보다 직접 입어보시면 더 검토하기 쉽잖아요. ”

“ 아~ 그렇긴 하지만. 어떻게 그래요. ”

“ 한 번 입어보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

 

 

 직원에 손에 이끌려 타의실로 들어간 수현은 하는 수 없이 직원에게 건네받은 옷을 입는다.

입고 타의실에서 나와 거울을 보는 수현. 이런 옷은 처음 입어 본다. 연한 분홍 투비스 였다. 너무 화려한 장식 없이 순수하고 단아한 수현의 이미지를 그대로 독보이 하는 옷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옷에 감탄하고 있을 때.

 

“ 이 분홍색 투비스에는 이 구두와 핸드백이 잘 어울립니다. 한 번 신어보시죠? ”

구두와 핸드백까지 합세하니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 아주 잘 어울리는 군. ”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는 수현. 아니나 다를까 역시 수현의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한 선 우 였다.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다시 타의실로 들어가려는 수현의 팔을 잡고는 웃어 보이는 선우.

“ 어딜 가는 거야? ”

“ 그..그냥. 한 번 입어 본 거에요. 다시 갈아입으려고 했어요. ”

“ 누가 물어봤나? 예쁜데 뭐 하러 번거롭게 다시 갈아입어? 이대로가 좋은데. ”

“ 내 옷이 아니니까 다시 갈아입는 건 당연 한거죠. 이사님. 저 오늘은 바쁘거든요. ”

 

다시 선우의 손을 뿌리치려고 힘을 주자 선우는 더 힘을 주어 수현의 팔을 놓지 않는다.

 

“ 내가 당신보다 백배는 더 바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빨리 먹고 들어가자고. ”

그러더니 수현의 팔을 잡고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너무 놀라서 말도 못하고 끌려 왔지만 너무 예우가 없다는 생각에 버럭 화를 내는 수현.

“ 지금 뭐 하시는 거에요? 저 지금 근무 중이라고요. ”

“ 우리 회사 그렇게 옹졸한 회사 아니거든? 직원들 점심시간까지 뺏어 가면서 일 시키지는    않는다고. 배고프니까 밥 먹겠다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나? ”

“ 이...이사님은 저랑 입장이 많이 다르잖아요. ”

“ 다 왔네. 내리자고. ”

 

수현과 선우가 내린 곳은 12층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미리 예약한 곳으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선우와는 달리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물쭈물하게 걸어가는 수현의 모습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테이블에 앉은 수현의 표정은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역시나 막무가내인 이 남자의 행동이 아직도 신경 쓰이는 수현.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 없이 음식을 먹는다.

 

“ 어제는 내가 미안했어. 앞으로 말조심하도록 노력하지. ”

선우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이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 본적이 없었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고치겠다며 노력하겠다는 말을 해 본 적 또한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 앞에서는 이런 말들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오고 있어서 말을 꺼내 놓고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선우.

“ 이런 말씀 주제넘겠지만 아무리 이사님이라도 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근무 중인 직원     을.. 그것도. 물어 보지도 않고...데리고 오시는 게 어딨어요? 일 빨리 끝내고 회사 들어가    서 점심 먹으려고 했는데. ”

“ 모르고 있었어? ”

“ 뭘요? ”

“ 뭐야..정말 모르고 있었어? 내가 일부러 백화점 매장으로 불러낸 거? ”

“ 네? 그게 ..무슨... ”

“ 당신이랑 점심 같이 먹으려고 부른 건데. 당신이 매장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건 당초부터    없었다고. ”

“ 뭐라고요? 하..하.. ”

“ 어제 일 미안해서 같이 밥 먹고 그리고..선물..선물을 사주고 싶었어. 이왕이면 예쁜 옷으 로. 매장

둘러보다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당신이 입으면 참 잘 어울릴 것 같았거든. ”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숙이는 선우의 모습을 보는 순간 수현은 웃음이 나온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백화점을 나오는 두 사람. 자신의 차를 타고 가라는 선우에 말에도 거절하는 수현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회사 근처이기 때문에 행동 가지를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사를 하고 가려고 하자 수현의 팔을 다시 붙잡는 선우.

 

“ 이거.. ”

“ 이게 뭐예요? ”

“ 대일 밴드. ”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수현을 위해 설명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 아까 보니까 발 뒷굼치가 많이 까졌던데. 이거라도 붙이라고. 갈게. ”

대일밴드를 건네주고 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수현은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저 남자 생각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5

 한 회장의 저택.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우가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한 회장을 본다.

 

 

“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

“ 요즘 회사일이 많으냐?  ”

“ 네. 조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 그래.. 미국에서 승우가 들어온다더구나. ”

승우가 돌아온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선우. 아직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만들지 못한 이때에 승우가 돌아오면 자신이 불리하다.

 

 

“ 언제..언제 들어온다고 합니까? ”

“ 다음 달 11일에 들어온다더구나. ”

“ 그렇군요. 예. 알겠습니다. 올라가 볼게요. ”

“ 그래. 쉬거라. ”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선우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한 달 뒤라.

 

‘그러면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은 남은 거군. ’



5

 요즘 아이디어 개발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수현은 며칠 째 야근 중이다. 직원들이 다 돌아간 사무실에서 야근 중인 수현. 그 때 전화가 울린다. 선우다.

 

 

“ 네. 이사님. ”

“ 오늘도 야근인가? ”

“ 네. ”

“ 저녁은 먹고 해야지. 나도 지금 회산데 같이 먹지?

“ 전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이사님 맛있게 드세요. ”

“ 끼니 굶는 게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 건데. 내가 사무실로 갈 테니까 기다라고~. ”

 

 

언제나 이런 식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은. 하지만 요즘 들어 수현은 이런 선우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다.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선우의 내면에 있는 따듯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상당히 냉정해 보이고 예의 없어 보이고 제 멋대로 인 모습이 강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잠시 후 노크도 없이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우. 항상 이런 식이다. 어디를 들어 갈 때 노크를 하고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높은 직급에 있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노크를 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와야 하는 상황이 훨씬 더 많은 테니 이런 행동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 나가자~ ”

선우가 잡아끄는 손에 이끌려 회사를 나온 수현. 회사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수현을 바라보며 선우가 묻는다.

“ 오늘은 수현이가 먹고 싶은 거 말해봐. 오늘은 그걸로 먹자. ”

“ 먹고 싶은 거요? ”

“ 응. 뭐든지 사 줄 테니까.  말해봐. ”

“ 떡볶이요. ”

“ 떡볶이? 그... 길 다란 가래떡을 빨갛게 무친.. 그거 말하는 건가? ”

 

 

떡볶이를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우의 표현에 웃음이 나오는 수현. 아마 이 남자 떡볶이라는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한 듯하다. 알고는 있지만 떡볶이라는 단어에 순간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다. 잠시 고민하던 선우가 다시 묻는다.

 

“ 그거.. 떡볶이. 어디서 파는 건데? ”

“ 시장이요. 시장에서 팔아요. ”

“ 시장? 뭐. 그래.. 가자고~ 수현이가 앞장서서. ”

 

수현을 따라서 재래시장으로 나온 선우는 가끔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사람 많고 길을 좁은 시장 안을 거닐며 어색해 하고 있었다. 이내 어디론가 들어가 버리는 수현을 따라 선우도 들어간다. 작고 조금은 지저분한 곳이었는데 음식이 있는 것을 보니 음식점인 것 같았지만 인테리어가 잘 되지 않았고 환경도 그리 깨끗해보이지는 않아서 당황한다.

 

“ 여기서 먹겠다는 건가? 여기서? ”

“ 네~ 왜요? ”

“ 다른 곳은 없어? 좀 더 깨끗한 곳은. ”

“ 조용히 말해요. 아주머니가 들으시겠어요. 여긴 대부분 이런 곳이 많아요. 그래도 떡볶이    맛은 일품이라고요. 아주머니. 여기 떡볶이 2인 분 이랑요. 튀김 2천원워치 섞어주세요. ”

아직도 어색해 하는 선우는 보는 수현도 재미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린다. 곧 주문했던 떡볶이가 나오고 수현이 갑자기 일어나 컵에 물을 따라 온다.

 

 

“ 그걸 왜 수현이가 따라와? 알아서 해줄 텐데. ”

“ 하..하하하하하. ”

“ 왜..왜 웃고 그래? ”

“ 이사님. 저길 보세요. 셀프라고 써있죠? 물 정도는 우리가 떠서 먹는 거라고요. ”

“ 손님한테 떠먹으라니. 서비스가 엉망이군. ”

“ 작게 말해요. 아주머니 들으시겠어요. 원래 이곳은 이런 규칙이 있는 거라고요. 이런 말이    괜히 있겠어요? 로마에 가면 그 나라 법에 따르라.. ”

 

 

그리고는 수현이 포크를 들고 떡볶이를 찍어 입안으로 넣는다.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수현을 보다가 조금은 꺼림직 하지만 입 안으로 넣는 선우. 생각보다 맛은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 까지 고급음식만 먹던 선우는 이런 곳에서 이런 음식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을 때와는 달리 너무나 행복해 하면서 먹는 수현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떡볶이를 다 먹고 일어서는 수현과 선우.

 

 

“ 오천 원 입니다. ”

“ 오천 원 이요. 네..네? 오천 원 이요? ”

“ 네. 오천 원 입니다. ”

지갑을 확인하는 선우는 수표밖에 없었다. 십 만원권 수표를 꺼내려고 하자 수현이 막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고 나간다. 어리둥절한 선우는 수현을 따라 음식점을 나온다.

“ 왜 그런 거야? ”

“ 뭘요? ”

“ 내가 사준다고 했잖아. ”

“ 아~ 그거요? 이사님. 이런 곳에서 수표를 꺼내시면 안 되죠. 수표를 꺼내시면 거슬러 줄    돈이 없을 텐데. 오늘은 제가 쏘는 거에요. 그 동안 너무 얻어먹어서. ”

 

아직도 어리둥절했지만 수현이 돈을 냈다는 게 별로 내키지는 않는 선우. 다시 회사로 돌아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두 사람. 선우는 수현의 눈치를 본다.

“ 아직도 할 일 많이 남았나? ”

“ 한 시간 정도면 마무리 될 것 같아요. ”

“ 그래? 그럼 한 시간 뒤에 다시 사무실로 올게. ”

“ 왜요? 또 저녁 먹게요? ”

“ 내가 돼지인 줄 착각하는 거야? 집에 데려다 줄 거야. ”

 

 

7층에서 먼저 내리는 수현은 간단한 묵례로 선우에게 인사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한 번만 뒤를 돌아봐줄까 해서 엘리베이터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려보지만 이내 벽 속으로 숨어 버리는 수현의 모습. 아쉬운 표정을 하고는 닫기 버튼을 누른다. 사무실로 돌아온 수현은 하던 일을 계속해서 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다.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회의시간에 의견을 내 볼 생각으로.

 한 시간 후에 어김없이 수현의 핸드폰은 울렸다. 발신 번호를 보지도 않고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은 정말 칼 같은 사람이니.

 

 

“ 네. 이사님. ”

“ 끝났지? 지금 회사 앞에서 차대기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내려와. 날씨도 더    운데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

“ 네.. ”

 

 

 짐 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온다. 회사 앞에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던 선우가 수현을 보자 손을 흔든다. 자신이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칠 까봐 그러는 것이겠지만 그 시간에 회사 주변에는 사람들도 걸어 다니지 않았다.

 

 수현이 운전석 옆 좌석에 탔고 안전벨트를 매려고 했으나 또 쉽게 되지 않아 끙끙거리는 것을 보고 선우는 대신 매주려고 수현에게 다가간다. 다시 몸이 밀착되는 두 사람. 가까이서 보는 수현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매력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수현에게 얼굴을 다가가는 선우. 다가오는 선우의 얼굴을 보면서 승우의 얼굴이 생각나는 수현. 자신이 사랑하던 승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이나 닮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볼 자신이 없었다. 자꾸만 이 사람을 승우라고 착각하는 자신이 싫어서. 눈을 감아버린다. 그런 수현의 마음을 모르는 선우는 점점 더 가까이 수현에게 다가가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서로의 입술이 닿으려고 할 때 수현의 손을 감싼 선우의 손에서 무엇인가 느껴진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 이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수현의 어깨가 느껴진다.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해진 선우는 수현을 자신의 품안으로 감싸 안았다.

 

“ 미안.. 미안해. 내가 너무 성급했어. 미안해. ”

 

 

눈을 감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멈추지 못한 수현은 자신을 질책하고 또 질책한다. 지금 자신을 안고 있는 이 남자는 직장상사이자 회사에서는 높은 직급에 있는 이사이거늘. 이 남자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이 남자 품에 안겨서도 다른 남자가 그리워 울 수밖에 없는 자신을 원망하는 수현.



 4

 출근 시간이라 지하철이고 버스며 도로며 정신없이 움직인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이 시간. JD 개발 기획팀 사무실에도 출근하는 직원들로 아침부터 생기가 돈다. 시계 바늘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든 직원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한 자리에 아직까지 비어 있다. 현정의 옆자리인 수현의 자리이다. 입사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각해본 적 없던 수현이 9시가 되도 나타나지 않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짓더니 핸드폰을 꺼내서 수현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는 가지만 받지는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세 번씩이나 연속 전화를 걸어보지만 여전히 신호만 지루하게 가고 있을 뿐이다. 포기하고 끊으려던 순간.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보통 전화를 받으면 “여보세요” 라고 하면서 받을 텐데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먼저 말을 꺼내는 현정.

 

 

“ 여보세요? 수현씨? 수현씨? ”

전화를 받은 것이 맞는지 다시 핸드폰을 확인하는 수현. 시간이 가는 것을 확인한다.

“ 수현씨? 내 말 들려요? 안 들려요? ”

“ 혀..현..정씨....”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현이다. 그러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 수현씨?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

“ 모...몸이 안 좋아..요... 어떻..하죠? 몸이..”

“ 많이 아픈 것 같네..? 약은 먹었어요? 회사 일은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집에서 푹 쉬어요.  그 동안 계속 야근하느라 병났나 보네. 내가 과장님께는 말씀 드릴게요. 쉬세요~ ”

 

전화가 끊겼고 핸드폰을 닫지도 못한 채 쓰러져 정신을 잃는 수현.



5

 결국 수현을 울리고만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던 수현. 성급했던 자신의 행동의 놀라 눈물을 흘린 것이리라. 출근해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선우는 수현에게 전화를 하고 싶으나 어제 일이 생각나 쉽게 전화를 걸지 못한다.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벌써 10번째.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핸드폰의 저장된 수현의 번호 단축키를 누른다. 전화를 받으면 수현에게 다시 한 번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러나 신호가 한참을 가고 있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어제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일부러 안 받는 건가? ’

 

다시 한 번 해보지만 여전히 받지 않자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책상으로 내팽겨 친다. 어제 일이 미안한 마음이 드는 선우. 그리고 그 핸드폰이 수현인 마냥 다시 들어 핸드폰의 상태를 살피는 선우. 다행이 망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다시 수현에게 전화를 건다. 여전히 받지 않자 성격 급한 선우가 전화기를 든다

 

 

“ 개발 기획팀으로 전화 연결해줘요. ”

“ 네. 이사님. ”

잠시 후 개잘 기획팀으로 전화 연결이 되었고 현정이 그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개발 기획팀입니다. ”

“ 최수현씨 자리에 있습니까? ”

“ 최수현씨요? 아.. 오늘 결근했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

“ 결근이요? 왜요? ”

“ 몸이 아파서 결근했습니다. 무슨 일로 수현씨는 찾으시나요? ”

“ 아.. 아닙니다. 그럼. ”

 

자신의 말만 하고는 바로 끊어 버리는 선우. 수현이 아파서 결근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아절부절 못하는 선우. 다시 전화기를 든다.

 

 

“ 개발 기획팀의 최수현씨 입사 기록 있죠? 가져다주세요. ”

“ 예. 알겠습니다. ”

15분 뒤 노크를 하고 사무실 문을 열고 송 비서가 들어왔고 손에는 서류가 들려 있었다.

“ 말씀하신 최수현씨 입사 기록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

“ 고마워요. 그만 나가보세요. ”

“ 아..예 알겠습니다. ”

 

 

송 비서가 건네주고 간 수현의 입사 기록을 보는 선우 등본을 보고 수현의 집 주소를 확인한다. 메모지에 집 주소를 적어서 주머니에 넣고는 옷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는 선우.

등본에 적힌 집 주소만을 가지고 집을 찾아 나서는 선우는 낯선 동네에 와서 처음으로 집을 찾아본다. 겨우 겨우 찾아 온 집. 수현의 집이 맞는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우선 그래도 흡사하기에 초인종을 누르는 선우.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 자고 있나? ’

 

다시 초인종을 눌러 보지만 역시나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이번에는 현관문을 치며 이름을 불러본다. 그래도 소리는 나지 않는다. 어떻해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선우. 혹시나 하고 손잡이를 당겨보는 선우. 문이 열린다. 하..하.. 문이 열려 있었다? 어의 없이 문이 열리자 당황했지만 바로 방안으로 들어가는 선우. 침대에 누워 있는 수현을 발견하고는 다가간다. 얼굴에는 땀이 범벅이가 되어 있고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 이봐.. 수현..수현아..? 나 왔어. ”

 

수현의 몸을 흔들며 깨어 보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괴로운 듯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수현을 보고는 이마를 짚어 보는데 열이 상당히 높은 것 같았다. 정신을 못 차리고 축 늘어져 있는 수현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와 자신의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는 선우. 응급실로 들어가 진찰을 받고 링겔을 꽂았더니 수현의 표정이 그제 서야 안정되는 듯 보였다. 의사의 말로는 과로에다가 몸이 원래 약해 보인다고 한다. 수현의 옆에서 손을 잡고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선우. 갑자기 조용한 병원에서 벨소리가 울려 퍼졌고 사람들의 시선이 선우에게로 쏠렸다. 송 비서였다.

 

 

“ 송 비서. 오늘은 내가 좀 급한 일이 생겨서 회사에 다시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오    늘 일정 좀 대신 취소해 주겠어? ”

“ 예.. 이사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이내 전화가 끊겼고 링겔을 맞고 있던 수현이 핸드폰 울리는 소리에 깼는지 눈을 뜨고 있었다. 두리 번 거리는 수현.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선우를 보고 놀라는 수현.

“ 이제 좀 괜찮아? ”

“ 어떻게 된 거에요? 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 그리고 이사님은..왜.. ”

“ 그렇게 아프면 나한테 전화하지 그랬어.. 몸 관리 좀 해야 겠다. 결근까지 하고. 그러게     누가 그렇게 무리해가면서 까지 며칠이고 야근하랬어? 야근이라는 거 없애 버릴까보다.”

자신을 위해서 야근을 없애 버리겠다는 농담을 할 수 있는 남자는 아마도 이 남자뿐일 것이다. 기운도 없고 몸도 나른하지만 선우의 말 때문에 웃음이 나오는 수현. 수현이 웃어 보이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선우. 같이 따라 웃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선우가 다시 수현을 침대에 눕힌다.

“ 뭐하는 거야? 이거 안 보여? 당신 지금 링 겔 맞고 있는 중이라고. ”

“ 집에 갈래요. 여기 답답해요. ”

“ 아무튼 성격 급하긴. 알겠으니까 우선 누워 있어. 맞던 링 겔은 다 맞고 가야 하니까. ”



6

 링 겔을 맞고 선우의 과도한 부축의 의해서 병원에서 나오는 수현. 자신을 무슨 중환자처럼 대하는 선우를 보면서 웃음이 나오는 건 왜 일까.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던 선우가 오늘은 차문을 열어주고 조심스럽게 수현을 차에 태운다. 돌아와서 자신도 차에 타고 수현이 안전벨트를 매주고는 출발한다. 그렇게 가다가 죽 전문점을 발견한 선우는 잠시 차를 세워 놓고 죽을 포장해서 들고 나온다. 이내 차에 오르는 선우. 다시 출발하여 수현의 집에 도착한다. 또 다시 수현을 부축하여 집까지 데려다 주는 선우. 수현의 침대에 눕힌다.

 

 

“ 그런 눈으로 안 봐도 갈 거야. 잠드는 거 보고 조용히 갈 테니까. 나 보기 싫으면 빨리     자든가. 그리고 일어나서는 죽 사온 거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꼭 먹어. ”

“ 이사님. 오늘.. 다른 사람 같아요. ”

“ 다른 사람? 그게 무슨 말이야? ”

“ 너무 친절하잖아요. ”

“ 그럼 내가 그 동안 안 친절했다는 거야? 음.. 은근히... 기분 상하는데? ”

“ 그런 뜻 아니에요. 고맙다고요. ”

수현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을 처음 들어 보는 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선우.

“ 뭘 그런 걸 가지고 감동하고 그래..하..하..하..음..”

얼굴이 붉어지는 선우를 보면서 손을 뻗어 선우의 얼굴을 감싸는 수현. 갑작스런 수현의 행동의 놀라는 선우. 수현은 선우의 눈썹. 코. 그리고 입술까지.. 작은 손으로 한번 씩 쓸어내린다. 닮았구나. 닮았어.

“ 잘가요. 이사님. 저 이제 잘게요. ”

“ 어? 어..그래.. ”

 

 

 30분정도 수현의 옆에서 지켜보다가 잠이 든 것 같아서 아담한 거실로 나오는 선우.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보지 못했던 수현의 집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아담한 수현의 집. 곳곳에는 수현의 취향에 맞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서 수현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거대한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거실이었지만 이곳에서 수현이 생활하고 있기에 선우에게는 한 없이 넓게만 느껴진다. 서랍장 옆에 배치되어 있는

 

 

 작은 탁자에 눈에 들어와서 다가간다. 탁자 위에는 다이어리로 보이는 분홍색 수첩이 놓여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선우는 다이어리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달 달에 스케줄을 적힌 달력이며 그 때 그 때 마다 메모한 듯 보이는 글씨들. 한참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선우. 그러다가 다이어리에 끼어져 있는 사진을 발견하고는 꺼낸다. 뒷면으로 끼어져 있던 사진을 앞으로 돌려 확인하는데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선우.

 

‘ 이 사진은... 형 방에 걸려 있던 액자에 있었던 사진이잖아...? 이게.. 왜.. 여기에...’

 

두 장에 사진이었기에 나머지 사진도 확인하고는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순간적으로 그 두 사진을 자신의 안주머니 속에 넣고 수현에 집에서 빠르게 나온다. 차를 타고 바로 집으로 향하는 선우.

 집으로 가는 동안 선우에 머릿속에서는 아주 복잡한 심정이다. 너무 불안하다. 수현을 만날 때마다 자신을 보면 눈물을 글썽거리던 수현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다이어리에서 발견된 이 두 장의 사진을 보니 혼동 스럽다.

 

‘ 그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닐 거다. 한 선 우. 네가 지금 오버하는 거야. ’

 

집에 도착한 선우는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위층으로 올라가 형인 승우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본다. 자신의 안주머니에 넣었던 두 장의 사진을 꺼낸다. 걸려 있던 액자를 내려서 수현의 집에서 가져 온 사진과 비교해보고는 표정이 일그러진다. 사진을 침대에 던져버리는 선우. 멍한 표정의 선우는 자신이 던진 사진에 뒷면에 무엇인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손으로 줍는다.


난 말이죠..그 때가 참 행복 했어요

가족 아닌 사람에게...내가 유일하게... 애교부리고...가장 추한 모습도 보일 수 있고...

어린아이처럼.. 투정도 부려보고..내 모든 걸 걸고 사랑했던 그 때가 참..행복 했어요

당신의 인생에 내가 그냥 지나쳐버린 한 여자이고..

흘러가 버린 하나의 작은 추억일지는 몰라도...

나에겐 너무도 많은걸 얻게 해주고..잃게 해준....

그래서 너무 기억할 것이 많은.. 그래서 너무 지워야 할 것도 많은..

그러나...너무 행복했던....그 때 였어요

나는 오래 오래....기억할것이고...

나는 오래 오래....추억할 것이며....

나는 오래 오래....사랑할 것입니다.


 사진 뒷면에 적힌 이 글을 읽고는 그래도 안 되겠다는 얼굴로 액자를 열어 사진 뒷면을 확인한다.


6월11일 수현이의 생일을 기념하면서..

수현아. 사랑한다.


 그 사진 뒷면에 써있는 글을 보고는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멍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해 있는 선우의 머릿속에는 지난날에 수현의 모습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 당시 서로 알지 못했던 그 때도 자신의 팔목을 붙잡고는 눈물을 글썽였던 수현의 모습. 자신을 볼 때마다 모든 행동이 멈춰지는 수현의 모습. 자신을 몰래 훔쳐보던 수현의 모습. 수현의 책상에 꽂혀 있던 책 속에서 나온 자신과 닮은 사람의 그림. 자신이 키스하려고 다가갈 때 울던 수현의 모습. 방금 전 수현의 집에서 자신의 얼굴을 하 나 하 나 쓸어내리며 만지던 수현의 모습.

‘ 하..하...하... 그럼..그게..다.... 승우형의 모습이 떠올라.. 날 보고 그런 슬픈 표정을 했던     거란 말인가..? 하..하....하... ’



6

 깊은 잠에서 깨어난 수현은 언제나 혼자 잠이 들고 혼자 깨어나는 게 생활이었지만 이렇게 아픈 날은 누군가가 옆에 있어 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플 때 옆에서 걱정해줄 부모님도. 승우도. 이젠 자신의 곁에 없기에.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와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향하는 수현은 식탁에 놓여 있는 쇼핑백을 발견한다. 죽 전문점... 그 쇼핑백을 보니 한 남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또 다시 겹쳐지는 또 하나의 얼굴...... 승우다. 왜 매번 선우가 생각나면 승우도 뒤 따라 얼굴이 겹쳐지는 것인지. 마음이 괴롭기만 하다. 어제 잠들기 전에 선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 죽 사왔으니까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어.]

 

참 고마운 사람이다. 자신에겐. 쇼핑백 안에 있는 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수현. 죽을 먹으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승우의 얼굴이 생각난다. 이제 거의 4년이 다 되어 가는 예전에 승우 모습이. 자신이 아플 때 마다 승우는 죽 전문점에서 사오는 죽 대신 손수 죽을 끓여 수현에게 먹여 주곤 했었다. 죽을 먹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수현.

내일은 수현의 생일은 6월11일이다. 생일... 가장 행복해야 할 그 날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웃을 수만은 없었다.

 

‘ 내일은 회사도 안가니 한 번 가봐야겠다. ’



7

 어젯밤 수현의 과거의 남자가 자신의 형인 승우라는 것을 알고 몹시 괴로웠던 선우는 술집에서 모든 술을 축 낼 것처럼 독한 양주를 입에 털어 넣기 바빴고 어떻게 집에 들어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전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겨우 눈을 뜬 선우는 머리가 지끈 거려 와서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잠시 후 노크와 동시에 아버지인 한 회장이 들어온다. 이제 서야 일어난 선우를 보면서 조금은 엄한 표정을 짓는 한 회장.

 

 

“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먹다니. 무슨 일이 있는 게냐? ”

“ 아버지.... 아닙니다. 그냥. 마시다보니 . 죄송합니다. ”

“ 됐다. 일어났으니  어서 준비하고 나와라. 오늘 승우가 미국에서 들어오는 날이니 공항으    로 마중 나가야겠다. ”

 

 

아마도 자신의 말만 하고 용건 끝났다는 듯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 없이 나가버리는 버릇은 선우가 한 회장을 닮은 듯하다. 그렇게 나가버리는 한 회장을 보면서 그리고 승우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또 한 번 선우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8

 인천 공항.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출구에서는 조금은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는 승우가 한 남자와 같이 걸어 나온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한국에 도착한 승우는 일찍 도착한 다는 말을 아버지인 한 회장에게 알리지 않았다. 4년 만에 밟아 보는 이 나라. 이 땅. 자신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이곳. 그리고 사랑하는 수현이 살고 있는 이곳. 4년 동안 얼마나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은 충동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수현을 떠나오고 자신의 미국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강요 때문에 사랑하는 수현을 떠나 미국 땅으로 왔을 때 반항하는 마음으로 한 때는 한동안 방황하는 생활을 했다. 술과 친구가 될 정도로 술집에서 술로만 시간을 보내다가 한국에서 걸려 온 한 회장의 전화를 계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한 회장은 미국에서 방황하는 승우에게 조건을 걸었다.

 

[ 만약 네가 미국에서 해야 할 공부를 모두 다 마치고 박사 학위를 딴다면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사랑한다던 그 여자와의 교제 또한 허    락해 주겠다.  ]

 

 

 그래서 승우는 한시가 아까워 남들보다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고 놀지도 않고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노력했다. 오직 한국으로 돌아가서 수현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박사학위라는 것이 그리 쉽게 딸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시간이 가다 보니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 이곳을 떠나 있었고 너무 오랜 시간 수현을 떠나 있었다. 이제는 수현을 다시 만날 수 있다.

 

“ 성민씨. 내가 어디 좀 들려야 할 때가 있어요. 나 따라오지 말고 바로 아버지께 가서 입   국 했다고 전해주세요. 저녁 때 쯤 집으로 가겠다고요. ”

“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

“ 4년 만에 돌아오는 거에요. 오늘은 가 볼 때가 있어요. 먼저 가요. ”

 

 

짐을 성민에게 맡긴 채 급히 뛰어가는 승우. 택시를 타고 한참을 달리던 택시가 도착한 곳은 선유도 공원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제일 먼저 찾아 가는 곳은 4년 전 수현의 생일 날 이벤트를 해주기 위해 벽화를 그렸던 그 곳이었다. “ 너를 사랑해 ”라는 시. 4년이라는 시간 때문에 조금은 변해 있었지만 모든 것이 거의 그래 로였다. 승우는 손으로 만지며 그 때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너무나 행복해 하던 수현의 얼굴이 떠오른다. 덩달아 웃음이 나오는 승우.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는 승우.

“ 수현아. 나 왔어. 내가 한국에 돌아왔어. 이제는 널 다시 볼 수 있어. 수현아. ”



9

 오랜만에 찾는 선유도 공원. 이제는 4년 전에 일이 되어 버린 이 장소의 추억을 하 나 하 나 되살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는 수현. 주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곳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곳은 여전했다. 애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벽화를 보더니 여자가 떼를 쓰는 것 같았다. 자신도 이런 이벤트를 선물로 받고 싶다면서. 티격태격하면서 즐거워하는 두 사람은 잠시 후 그 자리를 떠났고 수현이 벽화로 다가간다. 4년 전에 이곳에는 승우와 같이 왔었고 깜작 이벤트로 이 벽화를 선물했다. 지금은 없지만 그 날은 장미꽃으로 하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자리에. 지금 서있는 이 자리에. 손으로 벽을 어루만지는 수현.

 

 

“오빠. 수현이 왔어. 오랜만에 왔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오빠가 해 놓    은 멋진 작품을 감상하고 갔을 거야. 오빤 거기서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아프지도 않고     매일 매일 열심히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지? 오빠....보고 싶어... ”

눈물을 흘리며 사람도 없는 그 곳에서 벽을 바라보면 말하고 있었다. 수현이 이 장소에 오기 전에 승우도 이 장소를 찾아왔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두 사람은 어긋나고 있었다.



10

 수현의 옥탑 방으로 가고 있는 승우. 이제 수현을 만나러 가면 되는 것이다. 손에는 장미  꽃을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어 포기하고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간다. 옥상에 도착해서 숨을 크게 한 번 쉬고는 옥탑 방문에 노크를 한다. 누군가가 현관 쪽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 때문에 더 크게 뛰는 심장소리.

 

“ 누구세요? ”

라며 나오는 여자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생일이니 친구가 축하해주러 왔다고 생각한 승우는 그 여자에게 묻는다.

“ 수현이 안에 있습니까? ”

“ 누구요? ”

“ 수현이요. 최수현. ”

“ 그런 사람 없는데요. ”

“ 네? 그런 사람이 없다니요? 여기 최수현씨가 사는 곳 아닌 가요? ”

“ 무슨 말씀이세요? 여긴 제가 사는데요? ”

“ 네? 아..그럼. 전에 살던 여자는 어디로 이사 갔는지 혹시 아십니까? ”

“ 저야 모르죠. ”

 

 

당황해 하고 있는 승우. 그 때 주인아주머니가 올라온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수현이 이 옥탑 방에 살고 있을 때 주인아주머니로 계시던 분이었으니.

“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저 모르겠어요?  ”

“ 누..누구시더라? ”

“ 저요.. 수현이 기억하시죠? ”

“ 수현? 수현...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혹시.. 깡패들 찾아 와서는 난장판으로 만들어    서 이사 간 그 아가씨 말인가? ”

“ 네? 아.... 네.... 맞는 것 같네요. ”

“ 아.. 그 아가씨는 진작에 이사 갔지. 그 깡패들이 난리 친 다음에는 이웃사람들이 하도 뭐    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사 갔어. 내가 그 아가씨만 생각하면 아직도 미안하다니까. ”

“ 왜요? 그 뒤로 또 그 사람들이 다녀갔었나요? ”

“ 내가 살짝 들었었는데 돈을 갚으라는 거 같았거든. 안 그래도 힘들게 사는데 이사까지 가    게 해서 내가 미안했지. 잘 사나 모르겠네.~ ”

“ 아... 그래요. 저기 그럼. 어디로 이사 갔는지 혹시 모르세요? ”

“ 나야 모르지. 그러고 보니. 총각은 아가씨랑 애인 사이였지 아마? 애인이 애인 행방을 왜    모른데? ”

“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안녕히 계세요. ”

이사라.. 벌써 4년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수현을 어디 가서 찾을지 눈앞에 캄캄해진 승우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 돈? 돈을 갚으라고 했다고? 그 깡패들이?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돈을 갚으라고 했다는 게 이상해. 무슨 일이지? 휴.. 수현아... 얼마나 힘들었니..? 어디 있어..... 어디 있니.. ’

 

 

시선을 땅을 보면 걸어가는 승우. 반대편에서는 수현이 걸어오고 있다. 서로 그렇게 오던 길을 계속해서 왔더라면 만났을 테지만 수현은 커브를 돌아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계속해서 시선을 땅에 두고 걷는 승우는 들고 있던 장미꽃을 떨어뜨린다. 신경도 쓰지 않고 걸어가는 승우. 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는 승우.

 

 

 그 반대편에서는 케잌을 들고 경미가 수현의 집으로 향한다. 수현의 집 앞에서 떨어져 있는 장미꽃을 발견하고는 몸을 숙여 주어서 살핀다.

 

 

“ 포장한지 얼마 안 된 장미를 누가 이렇게 길에다 버렸어? 깨끗하네~ 수현이한테 줘야지”

 수현의 집 현관문을 두두 리는 경미.

“ 수현아~ 수현아. 나야 경미 ”

문을 열렸고 방긋 웃는 얼굴로 수현을 보는 경미

“ 짜 짠~ 생일 축하해 최 수 현~ ”

역시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주는 사람은 경미뿐이었다. 혼자 지내야 할 생일날이면 항상 찾아와 축하해 주는 아주 오래된 소중한 친구 경미. 경미가 사온 생일 케잌에 촛불에 불을 붙이고 축하노래를 부르는 두 사람. ]

“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갈 거다~ ”

“ 정말? 그래도 되?  ”

“ 당연하지~ 헤헤 아버지한테 허락 받고 오는 길이야. 나 먼저 씻어도 되지? ”

“ 그럼.. 시원하게 씻어 ”

 

수현은 경미가 씻는 동안 다이어리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이어리를 열었다. 그러다 문득 4년 전에 기념으로 남긴 사진이 생각나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욕실에서 나오는 경미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수현을 보고 묻는다.

 

 

“ 왜? 뭐 찾아? ”

“ 응.. 사진. 사진 ... ”

“ 무슨 사진? ”

“ 그 사진. 오빠가 나한테 생일 선물로 준 벽화가 찍힌 그 사진 말야..없어.. 없어져버렸어.”

“ 잘 찾아봐. 어딘가에 있겠지. 회사에 놔두고 온 거 아냐? ”

“ 그런가? ”

“ 그렇게 걱정하지 말고 내일 회사 가서 잘 찾아봐. 있을 거야. ”

당황하는 수현을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회사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정말 그 사진이 회사에도 없다면 수현이 많이 속상해 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걱정스러운 경미.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

“ 너랑 이렇게 자는 거 오랜만이다 ,그치? ”

“ 응. 그러네? 헤헤. ”

“ 경미야. ”

“ 응? ”

“ 사실.. 나 오늘 거기 갔었다. 그 사진 속에 장소. 정말 오랜만에 간 거였는데 4년 전 일인  데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더라. 오빠가 그렇게 떠나고 나서도 난 겁이 나서 갈수가 없었 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오빠가 날 떠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런데 말 야. 오늘 그 곳에 가보니까. 오빤 날 떠난 게 아니었어. 몸만 잠시 떠난 거였어. 오늘 그    곳에 가서 나는 오빠를 만나고 왔어. 4년 전에 오빠 모습 그래도 말야.  그런데 경미야..”

“ ...응? ”

“ 오빠를 이대로 영영 못 보게 되는 걸까?  이대로..영영? ”

“ 수현아... ”

“ 만약에..정말 만약에.. 오빠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보고     싶었다고 먼저 말하겠지? 우리가 다시 사랑을 하지 못해도 좋아. 그냥.. 단 한번만이라도..    오빠를 만나고 싶어. 오빠의 사랑이 이미 식었다고 해도...상관없어. 보고 싶어.. ”

 

눈물을 흘리는 수현을 경미는 안아 준다.

 

“ 괜찮아.. 괜찮아. 수현아. 꼭.. 만날 수 있을 거야..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