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알약(16)-

임마누엘2006.04.22
조회339

*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하던 사람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1

 며칠 때 수현과 연락이 되지 않자 선우는 고민 끝에 개발 기획팀으로 전화를 연결했다.

 

 

“ 개발 기획팀 사무실입니다. ”

“ 최수현씨 좀 부탁합니다. ”

“ 최수현씨요? 수현씨는 얼마 전에 동작지사로 발령받았는데요. ”

“ 동작지사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 얼마 전에 갑작스럽게 동작 지사로 발령 받아서 그 곳으로 출근할 거에요. ”

“ 얼마나 됐습니까? ”

“ 14일이었으니까 6일전이네요. 그 쪽으로 문의하시면 될 겁니다.”

“ 예. 알겠습니다. ”

 

수화기를 내려놓는 선우는 멍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동작지사로 발령을 받다니. 입사한지 3개월 밖에 안 지났고 회사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그 때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이 있었다.

 

‘ 아버지. 그래. 아버지가 하신 일이야. ’

 

 

바로 회장실로 달려가는 선우. 다급하게 노크를 하고 들어가는 선우는 한 회장과 승우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 무슨 일이냐? 이 시간에. ”

“ 예. 회장님. 본부장님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

“ 우리 가족 뿐 인데 그런 호칭은 좀 부담스러워. 선우야. ”

승우가 웃으면서 말하자 조금 무서운 눈빛으로 승우를 쏘아 보는 선우.

“ 여긴 회사다. 회사에서는 공식적인 호칭을 써야 하는 거다. 무슨 일이냐? ”

무슨 대책도 없이 여기까지 달려왔다. 수현이 갑자기 동작지사로 발령 받았다는 말을 듣고 떠오르는 사람은 아버지인 한 회장뿐이었으니. 그러나 승우가 그 자리에 있었고 자신 또한 수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한 회장이 알게 되면 수현이 더 상처 받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묻는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선우는 처음으로 평소처럼 빠르게 그리고 재치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 두 분이 이렇게 모여 계시다 길래 점심이나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왔습니다. 점심     어떠신지요?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회장님. ”

“ 허허허허. 그래 이제 곧 점심시간이군. 오랜만에 나가서 같이 식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승우 너도 괜찮지? ”

“ 예. 아..회장님. ”





2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한 세 사람. 캡틴에 안내를 받아 예약 석으로 향했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가롭게 대화를 나눈다. 오랜만에 두 아들과 같이 점심식사를 하게 된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진 한 회장. 그러나 선우와 승우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며칠 째 연락이 되지 않아 알아보니 동작지사로 발령받았다는 수현의 소식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으려고 무던히 노력중인 선우. 4년 만에 겨우 만난 수현이 자신을 외면하기에 괴로운 승우. 그러나 승우와는 달리 선우는 아버지인 한 회장 앞에서는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잠시 후 순서대로 음식이 나왔고 한가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 그래. 승우 너는 회사 일을 해보니 어떠냐? ”

“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

“ 그럴 테지. 하지만 곧 익숙해질게다. 본부장이라는 자리는 쉬운 자리가 아니니 잘 감당해    내야 한다. ”

“ 예. 아버지. ”

“ 그런데 너희 둘 다 통 먹지를 못하는구나. 맛이 없는 게냐? ”

“ 아닙니다. 아침을 늦게 먹었더니 그러네요. 맛은 제가 보장합니다. ”

“ 그래.. 허허허허허. 아무리 회사 일이 바쁘더라도 끼니는 거르지 말고 챙겨 먹어라. ”

“ 예. 아버지. 아버지도 건강 잘 챙기셔 야죠. ”

“ 하하하. 역시 선우가 날 걱정해주는 구나. ”

 

 

한 회장은 마냥 흐뭇한 듯 웃는다. 다른 사람들의 비유는 맞출 생각도 안하는 선우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언제나 효자 아들로 남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많을 테니. 식사가 끝난 후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는 데 선우가 나선다.

 

 

“ 아버지. 저는 형하고 회사 일 좀 의논하다가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

“ 그래. 그럼 나 먼저 들어가마. 윤 비서 가지. ”

“ 예. 회장님. ”

한 회장이 탄 차가 출발했고 남아 있는 승우와 선우.

“ 무슨 의논할 일 있어? ”

“ 형... 우선 어디라도 들어가자.  ”

“ 그래. ”

다시 호텔로 들어간 두 사람은 호텔 내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선우가 무슨 말을 하지 기다리는 승우. 그러나 10분이 지나도록 말은 하지 않는다.

“ 선우야. 뭔데? 말해봐. ”

“ 형.. ”

“ 응.. 그래..”

“ 수현이 놔줘. ”

 

 

회사일로 의논할 것이 있다던 동생 선우의 입에서 수현의 이름이 나오자 놀라는 승우. 게다가 자신을 보고 수현을 놔주란다.

 

 

“ 그..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수현이를 어떻게 알아? ”

“ 우리 회사 직원이니까. 부하직원이기도 하고. 알고 있는 게 당연하거잖아 ? ”

“ 강남지사에 있지도 않고 동작지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이름도 다 외우고 있다는 거야? ”

“ 뭐? ”

 

 

아무래도 승우는 수현이 강남지사에서 일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영향으로 동작지사로 쫓겨나듯이 발령받았다는 것도. 하긴 철저한 아버지께서 승우가 이 사실을 알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겠지.

 

 

“ 하..하.. 수현이한테 들었어. 형에 대한 얘기는. ”

“ 수현이? 너....그게 무슨 소리야? ”

“ 4년 전에 형이 수현이를 떠났고 이제는 서로 남남이 됐다는 얘기 말야. ”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자신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동생 선우도. 수현이를 너무나 친근하게 부르는 것도. 서로 남남이 됐다는 말이 수현에 입에서 나왔다는 말도. 모두 다 잘 못들은 것이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4년 전에 그렇게 수현이를 힘들게 했으면 된 거잖아? 두 사람은 이미 4년 전에 끝난 사    이니까. 놔주라고. ”

“ 함부로 말 하지마. 끝났다니? 누가 끝났다는 거야?  수현이 하고 내가? 너도 이 모든 사    실을 안다면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 알고 있을 거 아냐? ”

“ 그건 형 생각이지. 어찌 되었든 어떤 상황이었든 수현이를 사랑한다면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이제 형에게 돌아간 기회는 남아 있지 않다고. ”

“ 선우.. 너... 왜 이러는 거야? ”

“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서 물어? 내 입으로 말해줘야 알아먹겠어? 그래? ”

“ 너..혹시... ”

“ 형이 수현이를 사랑했던 것처럼 난 지금 수현이 사랑해. 그래서 수현이가 상처받는 거 죽    어도 못 보겠어. 그렇게 떠나 놓고 이제 와서 다시 그 사랑을 달라고 하면 수현이가 기쁘    게 뛰어가서는 형에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

“ 하..하.... 수현이를 사랑한다고?  하..하..그럼. 수현이는? 수현이도 널 사랑한대? ”

“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아나? 사실을 확인하는 것 보다 모르는 편이 때론 좋을 수 있    어. 4년 전에 수현이 곁을 떠났으면 깨끗하게 놔줘. ”

 

 

믿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떠나왔지만 수현이라면 이해해주고 기다려 줄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잘못 된 것인가? 4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이 사랑하고 있으니 수현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지나친 오만이었던 것인가? 수현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고 그 다른 남자라는 작자가 자신의 동생이라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눈앞이 깜깜해졌고 온 몸에는 누가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 바빠서 먼저 일어날게. ”

승우는 선우가 떠난 그 자리에 정신을 못 차리고 오래 시간동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3

“ 그게 무슨 소리야? 누굴 만나? 누굴 만났나고? ”

“ 오빠. 승우오빠. ”

“ 정말? 하..잘 잘됐다. 정말 잘 됐다. 승우씨는 잘 지냈대? ”

 

승우를 다시 만났다는 말을 수현에게 들은 경미는 진심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축하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승우를 만났다는 수현의 표정은 너무 슬퍼보였다. 기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제는 눈물이 멈춰야 하는 게 정상이거늘. 수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근데.. 너.. 왜 그래? 승우씨를 만났다면서~ 그런데 네 얼굴이 왜 그러냐고? ”

“ 경미야.... 경미야.. 나 어떻하니? 어떻하면 좋아? ”

이제는 수현의 눈에서 한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수현을 먼저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수현을 안아주는 경미.

“ 왜그래~? 무슨 일이야? ”

“ 오빠가... 오빠가 글쎄... JD그룹 회장 아들이래. ”

“ JD... 그룹... ”

 

 

JD 그룹.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갑자기 경미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는 수현을 안고 있던 자신의 팔을 풀러 수현을 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 같아서.

“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어디? ”

“ JD그룹. 하..하... 오빠가 아주 부잣집 아들이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아주....부잣집 아들”

기가 막힌 경미.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회사3인방에 속하는 그룹인 JD 그룹의 아들이라는 수현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수현에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그게..뭐? 승우씨가 재벌 2세인 게 뭐? 그게 뭐가 문제가 돼? ”

침착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다 보일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로 수현을 설득시키려는 경미.

“ 경미야.”

“ 수현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승우씨도 널 사랑하잖아. 근데 뭐가 문제야? ”

“ 문제는 많아. 아주 많아. 회장님이 날 부르셨었어. ”

JD 그룹의 회장님이 수현을 부르셨다는 말을 듣고는 불안한 예감이 든다.

“ 직접적으로 말은 안 하셨지만 승우오빠에게서 멀어지라는 말씀을 하신 거였어. 결국. 만    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안 된대. 오빠가 볼 수 없는 곳으로 옮기래. 그래서 동작지사로 옮    겼어. 그래서...난 그럴 수밖에 없었어. ”

드라마 같았다. 이 스토리는 어느 드라마에서나 재벌 2세와 사랑을 하게 되면 항상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상황을 그려내듯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주위에서 . 그것도 소중한 친구 수현에게서 벌어지고 있었다.

“ 집으로 갔더니 오빠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너무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 만나고 싶    었었는데 난 4년 만에 처음 만난 오빠한테 보고 싶었다라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어. 너 무나 다른 모습의 오빠는 내가 알지 못했던 너무나 거대한 배경들이 뒤 따라오는 오빠는 너무 낯설게 느껴졌어. 그리고 난 그날 처음 알았어. 내가 그렇게 거짓말을 잘 하는 앤지. 온갖 모진 말들로..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내 입에서 줄줄 나왔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기억이 나질 않아.. 경미야.. 내가 오빠한테 상처 주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한 거 같은데 어떻 하지? 어떻하면 좋아.... ”

 

 

경미는 할 말을 잃었다. 수현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수현을 너무도 잘 이해하기에. 이번에도 수현은 죽을 것 같이 아프지만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경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수현이 참지 말고 통곡을 하면서라도.. 그렇게 울어서라도 속에 있는 아픔을 들 취어 냈으면 하는 생각을. 참으면서 속으로 우는 수현을 안아주며 경미 또한 울고 있다.




4

 동작지사로 발령 받은 수현은 3개월간에 정든 개발 기획팀 동료들과 헤어지고 나서 마음이 괴로운 상황이다 보니 새로 일하게 된 홍보 마케팅부에서 좀처럼 명랑하지 못했다. 그렇게 밝고 명랑하던 수현이 또 한 번에 우울증이 찾아 온 것처럼. 하 루  하 루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고는 곧바로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한다. 무작정 다리에 피곤함이 느껴질 때까지 걸어 다니며 시간을 보내다가 늦은 시각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수현. 힘없이 걸어오는 수현을 보자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승우가 수현에게 다가간다.

 

“ 수현아. ”

 

자신의 마음도 괴롭지만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승우 때문에 더 늦은 시각까지 돌아다녔던 수현은 11시가 넘은 늦은 시각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승우를 보자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예전과 승우가 다른 것이 있다면 자신을 만나러 올 때 멋진 고급 승용차가 함께 라는 것이다. 그 모습에서부터 알 수 없는 벽이 자신과 승우사이에 생겨버린 것 같았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승우를 모른 척 하고 지나가 버리는 수현. 그러나 승우가 수현의 팔을 잡았고 이내 뒤에서 수현을 안아버린다.

 

 

“ 수현아. 내가 다 잘못했어. 너한테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던 것도. 말도 없이 미    국으로 유학 간 것도. 모두다.. 내가 잘못했어. 이러지 마. 이러면 너도 아프잖아~ 네 마    음도 아프잖아. 수현아. ”

“ 이 손 놔. ”

 

 

작은 저음 소리로.. 그리고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견고하게 말하는 수현. 그러나 수현을 더욱 세게 껴안아 버리는 승우.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기에. 이대로 놓치면 영영 이 손을 잡지 못하게 될 까봐 겁이 나 몸으로라도 수현을 잡아두고 싶었다. 제발 이번만은 뿌리치질 않기를 바라면서. 그 때 수현의 집 앞 작은 골목길로 또 한 대의 차가 들어섰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선우였다. 승우가 수현을 뒤에서 안고 있는 것을 보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쏫아 오르는 강한 분노가 강한 눈빛에서 표현되고 있었다.

 

“ 그 손 놔. 승우형. ”

 

누구의 목소리인지 두 사람은 확인하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수현이 힘을 주어 승우를 뿌리치려고 하자 승우의 팔도 힘없이 풀리고 만다.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는 선우는 승우에게 다가가 주먹을 한 대 날린다. 바닥으로 곤두 박칠 치듯이 넘어지는 승우. 넘어지는 승우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수현의 몸이 움찔 했으나 선우가 수현의 팔을 잡아 승우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막는다. 승우의 입술에는 피가 나고 있었고 입술을 만지면서 일어나는 승우.

 

 

 뭐하는 짓이야? ”

“ 형이야 말로 뭐하는 짓이야? 수현이한테? ”

“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

“ 아니. 저번에도 내가 말 했을 텐데. 수현이 건들지 말라고. 이미 내 여자라고. ”

 

선우의 말에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수현이 선우를 보았지만 잡고 있던 팔에 힘을 더 가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듯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승우를 보자 수현은 어쩔 수 없이 또 거짓말을 해야겠다는 생각하고는 마음속으로 각오한다.

 

“ 수현아. 아니지? 선우가 하는 말 사실 아니지? ”

“ 왜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이야. 우리 두 사람 좋은 감정 갖고 있으니까. ”

 

 

수현의 말에 승우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거겠지만 선우 역시 놀란 표정을 잠시 짓는다. 승우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선우에 입에서 들었을 때도 힘들었지만 수현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은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아무 말도 없이 차에 오르는 승우. 그런 승우는 참아 보지 못하고 뒤 돌아 서버리는 수현. 승우가 돌아간 그 자리에서 수현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고 이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환경이 싫었고 이럴 수밖에 없는 승우의 환경 또한 미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뒤 돌아서서 울고 수현의 눈물도 닦아주고 싶었고 자신의 품안에서 울도록 끌어안고 싶었지만 오늘 만큼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가만히 수현을 지켜봐주는 선우.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경미.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들어오는 경미 때문에 항상 집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반갑게 경미를 맞이하는 김 여사. 경미를 낳아주신 어머니다.

 

 

“ 경미야. 이리 와서 이것 좀 보거라. ”

“ 네.. 무슨 일이세요? ”

“ 너.. 이 번주 토요일에 선 한번 안 볼래? ”

“ 네 에? 엄마.. 제발요. ”

“ 그냥 한 번 만나보기라도 해보라는 거야. 이번엔 선자리가 좋아서 그래. 한 번만 눈 딱     감고 만나보면 안 되겠어? ”

“ 이번엔 또 어떤 집안의 아들이 길래. 우리 엄마가 이렇게 부탁을 하실까~? ”

“ 그건. 선 자리에 나가보면 알게 될 거야. 엄마 소원이야. 한 번만 봐라. 응? ”

“ 아무튼. 우리 엄마 애교에 내가 넘어 가드릴 수밖에 없다니까. 알았어요. 그 대신. 그냥     만나만 보는 거에요. ”

“ 만나서 마음에 들면 또 만나야지~ 이번 주 토요일 코엑스 인터 넨 탈 호텔 1층 커피숍이    야. 시간은 1시고. 꼭. 나가야 한다. 펑크 내면 안 되는 거 알지? ”

“ 알겠어요. 헤헤헤. ”



5

 넓은 도로위에는 자신의 불빛을 뽐내며 소리를 내고 지나다니는 차들로 가득하다.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승우와 선우. 선우가 운전을 하고 있고 승우는 몸이 피곤한지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웃음이 사라져버린 승우를 보면서 형이기에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형이 받았을 고통보다 수현이 받았을 고통이 먼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사람마음이라는 게 자신이 마음먹은 데로 된다면야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승우가 갑자기 몸을 똑바로 세운다.

 

“ 선우야. 차 좀 세워봐. ”

 

갑작스럽게 차를 세워달라는 승우의 말에 인도 옆에 차를 세우는 선우. 그리고는 유독 한 곳을 바라본다.

“ 우리 간단하게 뭐 좀 먹고 갈까? ”

“ 배고파? ”

“ 응.. 많이.. ”

“ 그래.. 그러자. ”

 

 

차에서 내린 승우는 한참을 바라보던 곳으로 향해 다가간다. 뒤 따라 가는 선우. 그리고 포장마차로 들어가는 승우를 따라 들어간다. 들어가 보니 승우가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 아주머니. 떡볶이 2인분 주시고요. 튀김 3천원워치 주세요. ”

이 주문 방식. 어디서 많이 듣던 주문방식이었다. 수현과 재래시장에 갔을 때 음식점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은 수현이 시킨 주문과 똑같았다. 자신은 수현에 안내로 처음 떡볶이라는 음식을 접했었는데 형인 승우가 떡볶이를 주문하는 솜씨는 한두 번 해본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현과 똑같이 주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것을 느낀다.

떡볶이가 나오고 “ 먹자 ” 라는 말을 하고는 허겁지겁 먹는 승우. 선우도 수현과 함께 먹었던 떡볶이를 생각하면서 먹고 있었다. 처음에는 배고팠는지 너무 잘 먹다가 3분 정도가 지나자 먹는 속도가 느려지는 승우. 그리고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먹고 있었다. 승우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승우는 자신의 입 속에 떡볶이를 잔뜩 넣고는 천천히 씹고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수현 과의 추억이 생각나서 그러는 것이리라. 선우는  승우가 말은 하지 않아도 이제는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향상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는 주인아주머니가 놀라서 묻는다.

 

 

“ 떡볶이가 매워요? ”

“ 아..아니요.. 너무 맛있어서요. 너무 맛있습니다. 그래서요....그래서요.. ”



6

 노크 소리와 함께 장비서가 들어왔고 승우에게 서류를 건네고는 살짝 눈치를 본다. 계속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장비서를 의식한 승우.“

 

 

“ 더 할말 있어요? ”

“ 아.. 본부장님. 오늘 1시에 업체 관리자하고 미팅 있는 거 기억하고  계십니까? ”

“ 점심약속이요?  무슨...? ”

“ 오늘 오후 1시에 코엑스 인터 넨탈 호텔 1층 커피숍입니다. 예약되어 있습니다.  ”

“ 아~ 그랬었죠. 알았어요. 사실 잊고 있었는데 고마워요. ”

“ 나가 보겠습니다. ”

 

 

사무실 밖으로 나오는 장비서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다 날씨가 더운 탓도 있지만 자신의 직속 상사인 본부장에게 거짓말을 하고  사무실에서 방금 나와서 더욱 더웠다. 본부장에게는 비밀로 하고 토요일 오후 1시까지 코엑스 인터 넨탈 호텔까지 승우를 데려오라는 한 회장의 명령으로 일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어째 불안하고 껄끄럽기만 하다. 시간이 되어 사무실에서 나오는 승우.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몰고 삼성역으로 향한다. 코엑스 인터 넨탈 호텔에 도착한 승우. 예약된 자리로 안내를 받아 한 여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간다. 자신이 조금 늦었다는 생각에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한다.

 

 

“ 안녕하십니까. 한 승 우입니다. ”

“ 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뒤 놀라는 두 사람.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선보러 나온 경미. 이런 자리인지도 모르고 업체 미팅이 있었는 줄만 알고 왔던 승우. 그리고 4년 만에 보는 두 사람. 얼마 전에 수현을 통해서 승우에 대한 소식을 들었기는 했지만 4년 전에 알던 모습과는 역시나 차이가 있었다. 우선 고급 정장을 차려 입었다는 것. 세월이 간만큼 나이도 들었다는 것. 모든 것이 고급스러웠지만 한 가지 빠진 게 있었다. 얼굴은 많이 야위었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도 하 루 하 루 살이 빠지고 얼굴이 야위어 가는데 이 남자라고 다를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자리에 앉기 전에 경미가 먼저 악수를 청하다.

 

 

"4년 만인가요? 반가워요. ”

“ 아.. 네.. 경미씨. 오랜만입니다. ”

“ 앉으시죠. ”

“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가 선 자리를 탐내시더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웃다가 앞에 앉아 있는 승우에게 미안한지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한다.

“ 많이 힘들죠? ”

 

 

자신과 수현의 사랑을 지금까지 지켜봐 온 가장 가까운 이 사람. 자신의 마음을 한 마디로 대신 표현해 주고 있었다. 수현에 옆에서 오래 있었고 소중한 친구이니 수현에 대해서 무엇이라도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 승우씨. 수현이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거 맞죠? ”

“ ....네.... 사랑합니다. ”

“ 승우씨가 수현이..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다는 거 전 잘 알아요. 하지만 승우씨가 이번엔    수현이를 먼저 놔주면 안 되겠어요? ”

“ 겨..경미씨..? ”

“ 내 말이 야속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네요. 승우씨가 떠난 뒤로 많이 힘들어 했어요.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질 않았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데 .. 그 모습이   꼭. 수현이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실의에 빠진 수현이의 모습과 다를 게 없 었어요. 그 때 수현인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었고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행동했었거든 요. 겨우 마음잡고  잘 지내다가 승우씨를 만났죠. 승우씨라면 수현이 옆에서 영원히 사    랑해 줄 것만 같아서 믿음이 컸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떠나가 버리고 나선     다시 실의에 빠졌죠. 4년이 넘도록 승우씨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    는 그 아픔이 아물어 많이 좋아진 상태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사    람이 알아주는 회사에 회장 아들이라는 말에. 충격이 컸었나 봐요. 요즘 수현이는 다시     실의에 빠질 것만 같아요. 웃음도 잃어버리고 기쁨도 잃어버린 사람처럼. 수현이가 많이    힘들어 해요. 승우씨가 수현이를 많이 사랑하는 건 알지만 모든 벽을 깨고 사랑을 지켜나  가기에는 이제는 수현이가 너무 많이 지쳐있어요. 이제 그만. 놔주세요. 수현이. ”

“ 그럼.. 아직도 저에 대한 마음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닌 겁니까? ”

“ 네.. 그렇지만 이제는 수현이가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승우씨가 다시 돌아와서 더    없이 행복해야만 할 수현인.. 지금 너무 힘드니까요. 승우씨가 수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내가 잘 알아요. 또 수현이가 승우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너무 잘 알고요. 사랑한다고 해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아니 잖아요. 서로를 위해서 보내주는 것도 중요 한 거니까요. ”

“ 네...경미씨가 하는 말..잘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건 없었던 일로 하죠. 그리고 수    현이 옆에서 많이 힘이 되 주셨던 거 감사합니다. 염치없지만 한 번 더 부탁드릴게요. 수    현이 잘 돌봐주세요. 경미씨.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

“ 네...안녕히 가세요. ”

 

 

호텔을 나오는 승우는 슬픈 표정으로 차에 오른다. 그런 승우의 모습을 창문 밖으로 지켜보는 경미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승우와 수현의 경우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스토리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될 수 는 없으니. 현실을 인정하고 보내주도록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문자 오는 소리가 들리자 폴더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는 경미

 

[ 경미야. 선 본 남자랑 잘 하고 있는 거지? ]

 

경미의 엄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셨는지 문자를 보내서 확인까지 하시는 건지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경미. 그리고 손을 움직여 문자를 쓴다.

 

[ 아니요. 그 남자는 제가 맘에 안 드나봐요. 커피만 마시고 헤어졌어요 ]

 

문자 전송을 마치고 핸드폰을 닫는 경미는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커피숍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는다.




7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승우는 공과 사를 구분하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아프지만 힘들지만 자신이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 처리하기 위해서.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힘든 상황과 아픔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수현을 생각하면서 수현에게 부끄럽지 않는 남자이고 싶어서. 아무렇지 않는 모습으로 일에 집중하는 승우.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일하고 있는 승우. 일을 하면서도 수현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 안 되겠는지 차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달려간다. 운전대를 잡는 승우.

 

‘ 한번만. 오늘 한번만 보고는 더 이상 찾아 가지 않을 거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

 

평소보다 속도가 빠른 승우의 차는 조금은 위태위태해 보인다. 30분 안에 수현의 집 앞에 도착한 승우. 핸드폰을 열어 수현에게 전화 한다. 그러나 예상했던 데로 전화는 받지 않는다. 집에 불이 안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아직 귀가 전이라는 것을 알고 무작정 수현을 기다리는 승우. 40분 뒤에 어두운 골목길 속에서 여자의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고 어두워서 처음엔 보이지 않던 수현의 얼굴이 가로등 아래로 지나갈 때 보이기 시작한다. 걸어오다 승우를 보고는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또 다시 못 본척하고 들어가려는 수현.

 

“ 마지막 인사하러 왔어. ”

라는 승우의 말에 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수현의 가슴을 차갑고 아프게 파고들었다.

 

“ 이젠 널 만나러 여기 오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다시는 네 앞에서 나타나지도 않을 거다.     이제 너에게 이런 말 할 기회는 없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사랑한다..수현아.. 그리고     오늘 이후로는 널 사랑했다라고 말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랑 했었다라고 말 할 수 있    도록 노력할 거다. 현재 진행형이 아닌 과거형이 될 수 있게 노력할 거다. ”

 

“ ....잘... 생각했네. 내가 바라던 거야...... 내가... 정말....바라던 거야. 나 먼저 들어갈게. ”

 

또 한 번 승우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는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 가버리는 수현. 마지막으로 찾아 온 승우에게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고 매정하게 집으로 들어오던 수현은 현관문을 들어서서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런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승우가 차를 타고 떠난다. 방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현관문에 기대어 울음을 참으며 눈물 흘리고 있던 수현이 다시 문을 열고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간다. 승우의 차는 방금 전  출발해서 거의 도로로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있는 힘껏 달려가는 수현. 그러나 승우는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뒤에서 달려오는 수현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도로를 지나 더 멀리 떠나 버린다.

 

“ 오빠~ 오~빠~ 승우오빠... 승우오빠..........”

 

 목이 터지도록 큰 소리로 불러보지만 차는 멈추지 않았고 이제는 자신의 시야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리는 수현은 또 다시 울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한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 만큼에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