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펌> 해논 글입니다.

레오200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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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서 처음으로 시아버지 생일을 맞았다. 결혼 전에 내가 본 바로는 남자 친구네 집은 누구 생일 때면 나가서 조촐하게 외식을 했고 무슨 행사라고 식구들과 친척들이 다 모여서 성대하게 상을 차려 먹는 집이 아니어서 이 정도라면 결혼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결혼 후에 여기저기서 얘기를 들어보니 아무리 단출하게 행사하는 집이라도 며느리를 보고 나면 온갖 격식 다 챙겨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잔치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심 불안하기는 했지만 설마 안 하던 일을 일부러 하랴 싶어 그 말을 흘려 들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생일 며칠 전 시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시더니 집에서 생일상을 차리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식사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해 보니 시어머니 혼자 이것저것 만들고 계셨다. 굳은 얼굴로 아버지 생일이라고 해도 아무도 신경도 안 쓴다면서 몇 마디 하셨는데 그건 나를 향해 하시는 말씀임이 분명했다.

나는 시누이는 언제 오느냐고 물었고 시어머니는 "몰라, 언젠가 오겠지"하고 퉁명스럽게 내뱉으셨다. 집에서는 집안일도 거의 반반씩 부담하면서 평등 부부 분위기를 제법 내는 우리 남편은 시집에 오자 당연하다는 듯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켰고 나는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시어머니를 거들기 시작했다.

시누이는 거의 점심상을 다 차렸을 무렵에야 아이를 데리고 등장했다. "어머, 엄마 나가서 그냥 사먹자니까"하고 들어오자마자 애교있게 외친 시누이는 소파에 앉아서 그동안 자기 직장에서 있었던 일과 일상사에 대해서 남편과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즐겁게 웃고 떠드는 가운데 식사가 끝났다.

나는 모든 식구들이 식사를 마치기가 바쁘게 그릇을 걷어서 개수대로 가져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시집에 가면 내 뇌리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벌떡 일어나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뻔뻔한 사람이 될 거라는 강박관념이 꽉 차오른다.

시누이와 시어머니는 "어머나, 뭘 그렇게 서두르니"하면서 나를 말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묵묵히 서서 설거지를 했고 시누이는 옆에서 나를 거들다가, 시아버지와 떠들다가, 다시 생각나면 돌아와서 거들다가 하며 왔다갔다 했다. 나는 말없이 소처럼 산더미같은 설거지를 해치웠고 시아버지와 남편은 소파에 앉아서 과일상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일을 먹으면서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말씀하셨다.

"내년부터는 작은 아버지들도 오시라고 해야겠다."

남편이 눈이 둥그래져서 물었다.

"네? 이때까지 아버지 생일 때 한 번도 친척들 부른 적 없었잖아요."
"얘, 아들 장가보내면 아버지도 어른 되는 거야. 어른 되면 이제 동생들도 자주 보시고 싶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할 생각해."

시어머니는 말씀하시며 은근슬쩍 나를 쳐다보셨다. 시누이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못 들은 척 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시부모님들의 생일상과 며느리에 대한 평균적인 생각을 보여주는 일화일 것이다.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내 경우는 약과라고 한다. 온갖 친척들 다 불러놓고 며느리만 일하라고 해놓고 다른 사람들은 꿈쩍도 안 하는 경우도 허다하니 내 경우에는 오히려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도 한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꽉 막혀오는 듯했다. 왜 사람들은 고생해서 아들, 딸 키운 보답을 아들, 딸에게서 직접 받지 않고 아들의 배우자에게 받으려 할까? 왜 아들, 딸들은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 생일상을 자신들이 아닌 남의 집 딸이 차려야 한다고 생각할까?

한국에서 여자는 결혼한 순간부터 시집의 모든 행사를 주도적으로 맡을 것을 강요받고 시집의 각종 행사에 울며 겨자먹기로 참석하여 시집 식구들 뒤치다꺼리를 해낸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주위 모든 환경들이 그것이 며느리의 도리라고 합창을 해대므로 어쩔 수 없이 그에 순응해간다.

그 과정에서 결국 자신이 의무적으로 해야 될 도리는 시집에만 있는 것이며 친정에서는 쉬어도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또 친정에 와서는 시집에서 자신이 한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자신의 남자 형제의 배우자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시집에서는 자신에게 떨어지는 과도한 의무들이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자신의 올케에게는 그것이 해야 할 당연한 도리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딸은 자기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생일상을 다른 집 딸이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아들은 대대로 '부엌에 들어가서는 안되는' 존재기 때문에 역시 자기를 애지중지 길러주신 부모님의 생일상을 자신의 배우자가 차려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시부모들은 모두 효도를 남의 집 딸에게서 받는다. 이 불합리한 과정에서 며느리들은 며느리들 대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시부모들은 시부모 대로 화병이 난다. '우리 대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것들은 이렇게 부모 고마운 걸 몰라' 운운하며 괘씸한 며느리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아무리 신세대라지만 부모 고마운 걸 왜 모르겠는가. 관건은 타인의 부모를 섬길 것을 강요한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배우자의 부모라고 하지만 배우자의 부모는 내게 육신을 주고 키워 준 친부모가 아니다.

사람이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사람에게 효를 행하고 싶은 것은 기본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리효(=며느리가 아들 대신)를 행할 것을 공공연하게 강요한다. 이렇게 대리효도의 희생자가 되었던 우리의 시어머니, 시누이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며느리, 올케를 통해 상쇄시키려 하는 것이다.

자신이 당할 때는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 며느리나 올케가 행하는 것은 자신이 누누이 들어왔던 바대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흔히 여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시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여자네 집에서 남자의 집에 여자를 '준다'고 생각한다.

"예쁘게 기른 따님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얼마나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인가. 시집으로 '들어간' 여자는 자신은 친정에서 시집으로 '보낸' 것이라 생각한다. 올케는 또 시집에서 올케네 시집으로 '보낸'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 자식간의 교환 사상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모, 자식간의 교환 사상은 현대 여성들 가운데서도 남자 형제가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 무난하게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딸만 둔 부모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딸만 둔 부모는 딸들을 다 아들 부모에게 '줘버려서' 자식이 없는 것이 되는가? 또, 이렇게 교환하다가 만일 시누이나 올케 한쪽이 이혼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나머지 한쪽도 이혼을 해야 하는가? 이런 부모, 자식의 교환사상은 기본적으로 여자를 한집에서 다른집으로 보내고 받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야만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자는 소나 말이 아니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보내고 받을 수 있는 동물 혹은 물건이 아니라 존엄한 인격체를 지닌 인간이다. 여자가 결혼했다고 해서 호적에서 지우고 남자집 호적에 등재하는 것, 여자의 본적이 한 번도 가 본 적도 없는 남자의 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사실 여자에 대한 인권침해다.

여자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와 그 여자를 둘러싼 그 여자의 가족이라는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는 심각한 기본권 침해이다. 호주제가 달리 유엔인권회의의 삭제 권고를 받았을까.

문제는 이런 야만적인 생각이 지금도 우리나라 사회의 주류를 이루며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고된 시집살이를 했던 시어머니는 적어도 그 반은 며느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시집에서 온갖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시누이는 친정에 와서 자신의 올케가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는 제도적으로 남의 집에서 봉사할 것을 강요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아들을 낳으려고 한다. 세상의 어느 누가 다 자라면 남의 집 부모를 섬기게 될 자식을 낳고 싶어하겠는가? 다 자라 자기 친부모를 섬기게 될 자식, 즉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심사가 아니겠는가.

여아낙태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건 결국 이런 사고방식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무심결에 행하는 이런 대리효도 사상의 악순환이 결국엔 누군가의 뱃속에 있는 여아를 죽이는 칼날이 되고 있다.

지금의 이 가족제도로는 시부모님도, 아들도, 며느리도, 딸도, 친정부모도 모두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시부모님들은 억지로 억지로 남의 집 딸에게 효도를 받아내느라 속을 썩고, 남의 집 딸들은 자기 부모에게 행해야 할 효를 타인의 부모에게 행해야 한다는 강요에 속을 썩는다.

모든 이들이 이 불합리한 가족제도 안에서 속을 앓고 서로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보면 우리나라의 가족제도가 급속하게 무너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리는 오래 묵은 대리효도 사상을 깨뜨려야 한다. 여자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호주제는 마땅히 폐지해야 하며 효도는 아들, 딸에게서 직접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야 한다.

며느리를 딸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사위처럼 대해야 한다. 사위란 어떤 존재인가. 남의 집 아들이며 자기 고유의 생활과 사고방식이 있는, 존중해줘야 한는 타인이 아닌가.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며느리는 집안에 들어온 대리딸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다. 남의 집 딸이며 자기 고유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엄연한 타인인 것이다.

딸이 당당하게 자신의 부모에게 우선 효를 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가정교육을 잘 받은 처자라면 명절 때마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천금같은 내 친부모님을 보러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나 우리나라는 여자에게 이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조차 행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이제 그만 걷어치우자. 이 지독한 대리효도의 악순환을.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내부모와 내 아들, 딸의 자리를 찾아가자.

 

2004년에 작은레오 임신하고....한창 시댁과의 갈등(?)으로 생속을 썩고 있을무렵 여기서 이글을 봤네요..

그때당시에도 이 글쓴분 참 대단하다 라고 느꼈었는데....지금 다시봐도 대단하시네요...

그때 제가 이글 퍼다가 울남편에게 멜로 보냈었는데....오늘 남편 부탁으로 그 남편멜을 열어보니 아직도 이글이 있네요..

감회가 새로워 한번 퍼와봤습니다....

비록 날씨는 비올듯 말들 우중충 하지만서도....웃으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