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일본학)교수님의 대원군 당시 일본 침략에 대한 말씀.. 아시겠지만 인용..
당시 위정척사 사상으로 무장한 대원군의 조선은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를 모두 조선의 승리로 이끌었다. 그래서 프랑스나 미국을 격퇴시킨 대원군의 조선이 일본으로서는 쉽게 침공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1873년 12월, 고종친정 체제가 출범하면서 대원군은 사실상 실각되었다. 일본은 이 같은 조선 내의 변화를 잘 알아보고, 대원군이 지휘하는 조선보다 고종의 조선은 파고 들어갈 틈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다음 프랑스와 미국이 왜 조선군에게 패배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결론적으로 김포시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염하(鹽河)로 진입하면 프랑스와 미국처럼 양쪽의 해안에서 날아오는 대포 세례를 받아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은 강화도 남단에만 접근하는 작전을 수립한 것이다.
그래서 강화도 남단의 초지진 포대에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하여 조선에서 먼저 발포하게 만든 다음, 조선이 “측량을 하러 간 일본선박에 공격을 가했다”고 호소하는 외교전에 돌입하여, 국제적인 압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고이즈미의 한국이 후회할 일, 과거를 뒤돌아 보니 이런 내용이 있군여..
일본는 항상 아주 야비하게 급습으로 상대국들과 전쟁을 진행합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도
그들은 항상 선제 기습공격으로 상대국을 초기에 제압하는 수법을 예외없이 구사했습니다.
그런 일본의 행위에서 우리는 항상 일본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쇄국정치라고 비판하는 그 흥선대원군 당시에
일본이 아주 불손한 외교 문서로 우리에게 교역을 요구해 왔을 때
흥선은 아주 강경하게 거부하고 단호히 대응했고
그에 따라 일본내에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 놈들 처음부터 조선에 대한 어떤 침략을 노린 것이겠지만
어쨌든 흥성대원군의 강력한 대응에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일었느나
그들은 결코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는 시기에는 감히 얼신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지여...
흥선대원군 당시 프랑스, 미국 등 세계 최강대국들을 비록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조선의 독자 힘으로 모두 물리쳤다는 것에서도 일본이 상당히 조심했다는 것이지여...
당시 쇄국정책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는 그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영토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대응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전쟁이나 국교단절까지 바로 가는 것은 조금 자제하며
일본의 침략적 도발행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온당하고도 정당한 행동들을 동원하여 순리대로 단호히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cafe.daum.net/ggham 악성댓글 카페에서 작성..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일본학)교수님의 대원군 당시 일본 침략에 대한 말씀.. 아시겠지만 인용..
당시 위정척사 사상으로 무장한 대원군의 조선은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를 모두 조선의 승리로 이끌었다. 그래서 프랑스나 미국을 격퇴시킨 대원군의 조선이 일본으로서는 쉽게 침공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1873년 12월, 고종친정 체제가 출범하면서 대원군은 사실상 실각되었다. 일본은 이 같은 조선 내의 변화를 잘 알아보고, 대원군이 지휘하는 조선보다 고종의 조선은 파고 들어갈 틈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다음 프랑스와 미국이 왜 조선군에게 패배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결론적으로 김포시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염하(鹽河)로 진입하면 프랑스와 미국처럼 양쪽의 해안에서 날아오는 대포 세례를 받아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은 강화도 남단에만 접근하는 작전을 수립한 것이다.
그래서 강화도 남단의 초지진 포대에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하여 조선에서 먼저 발포하게 만든 다음, 조선이 “측량을 하러 간 일본선박에 공격을 가했다”고 호소하는 외교전에 돌입하여, 국제적인 압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