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49화> 메피스토 -完-

바다의기억200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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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새로 맞췄습니다.

 

도수도 많이 바뀌었고 기분 전환도 할 겸...

 

테도 마음에 들고 렌즈도 잘 맞는 것 같은데

 

문제는 시력이 몹시 안 좋은 탓에

 

경제적 부담이 심각하다는 겁니다.

 

대체 다음 달까지 뭘 먹고 살지.

 

======================독자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살....(퍼억) =======================

 

철수

- 만약 이 일이 잘 되면


같이 프로방스로 여행을 떠나자.


보랏빛 라일락 들판에서 향기에 취해 휘청거려도 보고


꽃밭에 누워서 뒹굴어도 보자.


하늘에 태양이 얼마나 찬란히 빛나는지


풀숲을 지나는 바람이 얼마나 상쾌한지


온 몸으로 느껴보는 거야.



탁자에 마주 엎드려


두 손을 포개 잡은 철수와 선희는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앞날을 그리며 빙긋 웃었다.


보랏빛으로 출렁이는 라일락꽃의 파도,


아늑히 멀리 펼쳐진 지평선과 하얗게 밝아오는 여명.


그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철수

- 떠나기 전엔 흰색 드레스를 사자.


눈이 부실만큼 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자긴 흰색이 어울려.



선희 - ...... 그럼 자기는?


철수 - 난.... 자기만 있으면 돼.


선희 - 피... 나도 자기만 있으면 된다, 뭐.


철수 - ...... 사랑해.


선희 - ... 나도.



이 세상 어느 연인들보다 자연스럽게


사랑을 속삭이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가슴 한 쪽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기억 - 쿡...쿡쿡쿡.



박사는 늘.... 이런 기분으로 웃고 있던 걸까.


난 잠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손으로 눈가를 덮어 기분을 진정시키고


다음 등장을 준비했다.



배경은 자정의 거리.


불안한 마음에 철수를 따라 나온 선희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어스름한 무대 한 쪽에서 등장했다.



선희 -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것 맞아?


철수 - 약도를 보면... 여기가 맞는데.... 아, 저기 있나 보다.


선희 - 응? 어디?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조금 밝아지는 무대 반대편.


그곳엔 내 흰색 가운 끝자락이


희미한 조명 속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철수 - 저... 실례지만..... 오늘 아침에....


박사 - 아.... 와주었군요.


철수 - 예, 저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박사 - 쿡쿡..... 근처에 좋은 술집이 있거든요. 자세한 이야기는 그곳에서...



난 여전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철수를 유인하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선희의 손을 놓고


앞서 다가오고 있는 철수,


그가 어느 정도 사정거리에 들었다 싶은 순간


난 슬며시 조명이 비추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선희 - ........히익?!



내 모습이 보이는 순간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옅은 비명을 삼키는 선희.


선희는 온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선희 - 철수씨!!!


철수 - 응?



그녀의 절박한 부름에


철수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내 손엔 예의 검은 단도가 들려 있었다.


필사적으로 철수를 향해 뛰어오는 선희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나를 돌아보는 철수.



철수 - ..... 흑?!



그때 이미 내 단도는 그의 등을 꿰뚫고 있었다.



더듬더듬...


자신의 가슴과 등 중


어디를 만져야 할 지 고민하던 철수의 손은


이내 힘을 잃고 밑으로 축 늘어졌다.



풀썩 무릎을 꿇고 앞으로 쓰러졌다가


옆으로 완전히 누워버리는 철수.


선희는 그런 그의 몸을 감싸 안으며


절망적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선희 - 안돼, 안돼! 안돼, 철수씨, 안돼, 안돼....



보랏빛 프로방스.


그리고 새빨갛게 물든 현실.


선희는 자신의 손에 묻어나오는 붉은 피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손을 치맛자락에 닦아내며


철수의 몸을 일으키려 했다.



선희 - 왜..... 왜.... 왜........


기억

- 쿡쿡쿡......이미 보지 않았나.


내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다.


이제 한 명만 더 있으면 돼.


후우..... 하아.....쿡쿡쿡.



난 당혹감에 거칠어진 숨을 푹푹 내쉬며


천천히 그녀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선희 - .......



선희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따라 움직였다.


끝까지 철수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


연기라기에 그것은 너무나 잔인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이 무대에 서기 전까지만 해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했잖아.


어째서..... 내가 그런 표정의 널 봐야 하는 거야.



다른 공간에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사랑.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서


지독한 이질감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민아가 아니다. 그녀는 선희일 뿐....


이 연극이 끝나야지만.... 민아는 내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빌어먹을 연극이 끝나야지만...



난 천천히 단검을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선희를 죽이고, 민아를 되찾기 위해.



선희 - 철수씨를 살려줘요.



단검을 막 내려치려는 순간,


그녀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만약 그녀가 말하는 게 1초가 늦었다면


난 대본과 무관하게 그녀를 향해 단검을 꽂았을 것이다.



선희

- 내 생명이 필요하다면 줄게요,


그러니까... 철수씨를 살려줘요.



박사 - ...... 진심인가?


선희 - 그래요.



두려움도,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


그 다부진 의지에 눌린 난


주춤주춤 물러서 그녀를 겨누던 단검을 내렸다.


그때 답답하다는 듯 무대로 뛰어나오는 악마.



악마

- 뭐하는 거야! 어서 저 여자를 죽여!


그리고 은하와 행복하게 사는 거야!



박사 - 그래....은하..... 은하를 살려야 해.



잠시 잊었던 목적을 다시 일깨우는 악마의 말에


난 늘어뜨렸던 단검을 다시 굳게 거머쥐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앞을 막아서는 천사.



천사

- 안돼요! 이제라도.... 이제라도 그만 둬요.


이런 희생 위에 이룬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리 없다고요!



박사

- ....... 그래도 난 행복해질 거야.


다시... 예전처럼... 행복하게 살 거야...



천사

- 당신이 늘 말했잖아요, 이제 와서 돌이킬 순 없다고!


과거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와서 돌이킬 순 없어요!



박사

- 난... 대가를 지불했어.


아홉을 죽이고, 그 장기와 사지로 은하를 고쳤지.


그러니까....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어.



천사 - 당신은 변했어요, 이젠 더 이상 그 때의 당신이 아니예요.


박사

- 쿡쿡쿡...... 바뀐 건 없어.


난 은하를 사랑했고, 지금도 은하를 사랑해...


그러니까 꺼져!! 모두 사라지라고!!



더 이상 날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천사와 악마가 사라진 무대 위,


다시 선희에게 접근한 난 단검을 든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선희 - 약속해줘요, 철수씨를 살려주겠다고.


박사

- 쿡...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


어차피 죽으면 끝이야,


철수가 살아나건 말건, 너와는 상관없다고.



선희 - 아뇨, 상관있어요.


박사 - 어째서?


선희 - 사랑하니까.



그녀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박사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건가.


선희 - 다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게 사랑이니까...


박사

- 그런가..... 난.... 내 자신을 못 버렸군.


그러니 이렇게 될 수밖에.



이제야 뭐가 잘못됐는지 깨달은 난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넌지시 물어보듯 중얼거렸다.



박사 - ..... 그거 알고 있나? 넌 내 아내와 닮았어.


선희 - ....


박사 - 내게 사랑한다 말해주겠어?



핏빛 추락을 기다리는 길로틴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는 단검 아래


선희는 아랫입술을 다져 물었다.



선희 - ....... 사랑해요. 여보.


박사 - .... 나도 당신을 사랑해.



난 웃었다. 선희도 웃었다.


그리고 난 내 가슴을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선희 - ...... !!


박사 - 허....허억.....은하야 사랑해,... 미치도록... 사랑한다.



짧은 순간, 잘못된 사랑과 후회스러운 과거.


그 모든 것을 용서 받으려 몸부림치는


박사의 마지막 감정이 격정적으로 온 몸을 휘감았다.


지금 바닥에 떨어지는 붉은 물감이


참회의 눈물처럼 가슴에 와서 박혔다.



털썩......


파도 앞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쓰러지며


철수의 가슴에 단검을 옮겨 꽂는 나.



철수 - 허억?!


선희 - 철수씨!!



철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뜬 순간


선희는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눈물을 쏟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부축하며 무대에서 퇴장하고


홀로 무대 위에 남겨진 나.



기묘한 자세로 거꾸러진 채


조용히 피 흘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말 그대로 쓸쓸한 최후.


서서히 사그라지는 조명 속에 내 모습이 희미해져갈 때 즈음


다시 무대 양쪽에서 천사와 악마가 등장했다.



악마 - ....바보 같은 녀석.


천사 - 잘 했어요...조금... 늦긴 했지만.


악마 - 네 녀석 때문이야.


천사 - 이제 넌... 물러갈 때가 되지 않았나?


악마 - ....칫.



악마가 퇴장하고....


내 머리맡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는 그녀.


흰색 베일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넓게 퍼졌다.



천사

- ......여보... 여린 당신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요.


이젠 헤어지지 말아요,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해요.



그리고 그녀는 날개로 알을 품듯


천천히 나를 감싸 안았다.


어두운 무대 안 은은한 핀 조명이 우릴 비추었다.


그 순간 코끝이 찡해온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사... 당신은.... 구원받았다.



그렇게.... 연극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