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걷기【12】

쵸코쿠키2006.04.28
조회1,454


말을 하려 입을 떼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다 눈을 감는다.
머리 속이 새 하얗다. 몸 안의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피로 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이 상황을 저주 했다.
너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니..?
왜 그런 일을 저질렀니…? 왜 그녀에게 상처를 줬냔 말이다.
그래.. 널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 형…?"
"사랑한다고 모든 일이 다 용서되는 게 아니야!!!! 후우우… 니가.. 니맘이 그러하대도 그녀가 널
받아들여 주겠니..? 이미 너 때문에 상처 받았는데… 널 보려 하겠냐고.. 넌.. 그녀에게 상처만 될 뿐이야,"
"그렇다고 이제와서 예은이랑 결혼 할 수도 없잖아. 그게 그녀에겐 더 큰 상처가 될거야. 형.. 형은 예은이를 설득해줘. 형에게.. 예은이에게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내가 더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은 란아씨야. 지금은 날 안 받아들이려 하겠지만.. 내가 잘하면.. 노력하는 모습 보여주면..내 진심 알면..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응? 형.. 제발.. 나 좀 살려줘. 나.. 그녀 없으면 죽을 것 같아.. 그러니까 형도.. 예은이도 날.. 포기해줘. 이렇게 형편 없는 놈.. 형도 예은이 짝으로 바라지 않잖아. 제발.. 란아씨를 생각 해서라도 그래줘."
나도.. 나도 그녀 없으면 안된다고… 안되겠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선뜻 얘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어떤 것이 진정 그녀를 위하는 길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어차피.. 너 같은 자식한테 예은이 줄 생각 없었다. 이런 짓 까지 저지른 넌 인간도 아니야. 그녀가 널
용서하고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사죄는 해라. 이제 다시는.. 두번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다. 앞으로 마주치지 말자."
뒤돌아 문을 향해 걸었다.
"형!"
그대로 멈춰섰지만.. 돌아서지는 않았다.
"고마워. 나.. 꼭 그녀의 마음을 얻을거야.."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생각나는건.. 한란아.. 오직 그녀 하나뿐인데… 과연 그녀가 날 필요로 하는지…
내가 다가가도 괜찮은건지.. 아니면 이대로 하민과 이어지도록 방관하는게 그녀를 위한 일인지...
어느것 하나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 녀석을 흠씬 두들겨 주고… 돌아가 그녀를 위로해 주려 했었다.
꼭 안아주며.. 어느새 그녀가 내게 스며든 것처럼.. 그렇게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었다.
헌데… 그녀석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단다.. 그 녀석이 책임져야 한단다.
나와 그녀석 사이에서 힘들어 지는건 아닐까…?
어쩌면 하민이의 마음을 받아들이는게 그녀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걸까..?
머리속이 복잡하다. 엉키고..엉켜서.. 올바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애꿎은 핸들만 주먹으로 내리치다 거칠게 차를 출발 시켰다.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게 꿈이길 바랬는데…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너무도 선명히 내 머리속에 새겨져.. 두려움에 떨게한다.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지 막막 하기만한데 막연한 불안감 마저 가슴을 짓누른다.
할 수 없이 등을 대고 앉아 숨을 크게 들이켜야만 했다.
엄마.. 엄마가 보고 싶다.
오늘은… 아니 내일.. 아니 좀 더 진정되면.. 엄마를 보러 가야 겠다.
 


잠깐 졸다가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구지…?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정예후 그가 온건가…?
욱신 거리는 몸을 일으켜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향했다.
조그만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너무 가까이 서있어 누군지 보이질 않는다.
회색의 양복만 보일 뿐…
슬며시 미소 지으며… 문을 열었다.
"이 시간에 웬…"
열리는 문 사이로 보이는 얼굴로 인해… 몸이 굳어 버렸다.
문을 잠궈야 할 시기를 놓치고.. 그 틈을 타 안으로 들어선 그는..
"란아씨.. 얘기 좀 해요. 우리 얘기 해야만 해요."
떨고 있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손을 잡으며 말한다.
"나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아윽!.. 후~ 이러지 말고 제 말좀 들어봐요.."
눈은 멍들고.. 입가가 찢어져 있다. 그리고 어딘가 아픈듯...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지만...

나에겐... 불쌍하다.. 안됐다 하며 봐 줄만한 여유가 없다.

내 감정만으로도 넘치고 흘러서 감당이 안된다.

"나가.. 나가!! 나가!!!!!!!!!!"
눈을 감아 버렸다.

"알았어요.. 진정해요.진정. 자.. 나 나왔어요. 여기서 얘기 할께요. 됐죠? 란아씨. 나 좀 봐요. 나.. 이렇게 용서 빌께요. 뻔뻔한거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빌어요. 사랑해요. 사랑해서 그랬어요. 어젠..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란아씨 겁먹게 한거.. 아프게 한거.. 후회해요. 나.. 한번만 봐줘요. 나 믿어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께요.. 란아씨가 원하지 않는 한 란아씨 몸에 손도 대지 않을께요. 맹세해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며 용서를 빌고 맹세를 한다.
그 모습에 자꾸만 어제의 모습이 겹쳐 진다.
난…... 그가 두렵다.
"가요.. 제발.. 제발 내 앞에서 사라져요. 사라지란 말이야!!!"
목소리가 점점 히스테릭해 짐을 느끼고.. 이러다 미쳐가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알았어요. 알았어. 갈께요. 제발 진정해요. 좀 진정되면 다시 올께요. 그때 얘기해요.네?"
엘리베이터 하향 버튼을 누르며 말하는 그의 앞에서 문을 닫아 잠궈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제만큼 빨리 뛰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는다.

 


나쁜 사람.. 정말.. 나빴어..
그렇게 따뜻했으면서… 사람 기대하게 해 놓고… 이렇게 기다리는데.. 왜 안오는거야..
다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얼굴을 묻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나지 않는다.
이번 일에 정답은 없다.
한 번쯤은 가슴이 시키는대로 행동한다 해서 크게 잘못될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내 운을 한번 믿어보자구.


 

딩동딩동.
벨을 누른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에선 기척이 없다.
다시 한번 눌러보고 손잡이를 돌려보지만..
철컥 철컥 소리만 날 뿐 열릴 생각을 안한다.
쾅쾅쾅쾅!!!
"이봐!! 한란아!! 문열어!! 집에 없는거요??"
철컥.
더 세게 두드리려 높이 든 손이 무색하게… 참... 시간도 잘 맞춰 열린다.
"집에 있었으면서 왜 이렇게 문을 안 여는 거요?"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짐짓 화난 듯 물었다.
그런데도 이 여자.. 쏘아 보기만 할 뿐 대답을 않는다.
맨 얼굴로.. 주먹쥔 양손을 옆으로 늘어뜨리고.. 맨 발로 서서 옆으로 비껴보는 그녀는 너무도 귀여워
보였지만…지금은 그 어떤 표현도 할 수 없다.
"왜.. 왜?!"
두 눈에 서서히 차오르다 순식간에 떨어지는 눈물이 너무도 확실하게 보였다.
"왜 그러는거요? 또 무슨일 있었소?"
한 발 다가서며 묻자..
옆으로 늘어뜨렸던 주먹으로 내 가슴을 두드리며 말한다.
"왜.. 왜 이제서야 오는거에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엉..엉.."
그녀의 행동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대로 안아버렸다.
이 조그만 주먹으로 치는 가슴이 아파서가 아니다.
이렇게 귀여운 그녀를… 예쁜 그녀를 어찌... 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품안에 쏙 들어오는 그녀의 느낌이 좋았다. 코 끝을 간지럽히는 은은한 향기가 좋았다.
"쉬.. 자 울지말고.. 얘길 해봐요. 왜 날 기다린거요?"
눈을 감고 기분 좋은 대답을 기다렸다.
"김하민이 왔었어요."
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가슴에서 떼어내며 표정을 살폈다.
또 무슨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숙여진 그녀의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 래서..?"
"소리를 질러서 쫒아냈어요. 하지만 다시 온다면... 또 그렇게 대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한가지만 묻겠소. 하민이가 끝내 당신을 포기 못하겠다 하면… 그땐.. 어떻게 할거요?"
그녀는 굳어진 표정으로 내 손을 쳐내며 싸늘하게 말한다.
"하..몰랐어요. 아니 왜 몰랐을까…? 결국… 이거 였군요? 김하민에게서 나를 떼어내는거… 맞아..
당신의 목적은 그건데.. 오직 그거 하난데… 바보같이 잊고 있었네..? 오늘도 그 대답을 들으러
오신건가요? 그래요? 내가 이 일을 핑계로 그 사람을 붙잡고 늘어질까 걱정되던가요?
또 얼마로 흥정 해야 하나.. 그 생각하나요? ... 지긋 지긋해. 당신도. 김하민도. 정말 지긋지긋 하단 말이야!! 꼴도 보기 싫어… 당장.. 당장 나가요."
아닌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그녀가 오해를 한다.
내 앞에서 등을 보인다. 멀어지려 한다.
"아니야! 그게 아니오. 그런 생각 전혀 하지 않았소. 당신.. 믿어. 믿는다구.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몰라. 난.. 자꾸만.. 날 도발하는 당신이 생각나서.. 보고싶어서… 당신을 만날 정당한 이유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소. 하지만 만날때마다 더 큰 억지를 부리고… 당신의 반응을 기대하며 즐거워하는 나를..  애써 외면했었소. 바보같이 이제야 알았는데.. 이제서야 확신하는데… 내 앞에서.. 등 돌리지마… 화내지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단숨에 말해버렸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숨조차 쉴 수 없다.
온 몸이 경직되고.. 손에선 진땀이 배어나온다.

 

 

 

지금.. 무슨말을 들은거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떠보았다.
현실이다.
나를 감싸고 있는 두 손을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따뜻하다… 정말.. 현실인가 보다.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믿고 싶다.
나를 구슬려.. 원하는 대로 하려는 속셈일수도 있겠지만… 정말… 믿고 싶다.
그에게 기대고 싶다.
내일부터 어찌해야 하나.. 막막 했었다. 회사에 출근할 수도…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모른체 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어떠한 결론도 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었다. 그리고.. 겁이 났다.
하지만… 이 남자가 모든걸 해결 해 줄것만 같다.
왜 그런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여지껏 남에게 기대보지도.. 또 그런걸 바라지도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건.. 내가 아닌데…
손 놓고 바라보는 건.. 나한테 맞지 않는데... 수동적으로 변해버린 자신이 맘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어제의 충격 때문이라고… 아직은 그럴 수 있다고.... 애써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당장 짐싸요. 필요한 것만 간단하게.. 하민이가 언제 또 올지 모르니 우선 우리집으로 갑시다.
그리고 당신 회사엔 내가 사직서를 내겠소."

마치... 준비한 대답인 듯.. 곧바로 그의 말이 이어졌다.
"잠깐만요! 당신.. 집에요? 그건 좀..."
"그럼.. 여기에 계속 있겠다는 거요? 당신 혼자서?"
"하지만 내가 당신 집에 간다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나 혼자 사는게 아니고 예은이랑 같이 살고 있소. 집에는 일하는 아주머니도 계시고… 그래도 정 그렇다면 당신을 스카우트 하지. 능력있는 사람에게 숙식제공.. 뭐 이런것 쯤 당연한 거 아니오?"
"정말.. 저에게 일자리를 주실 건가요?"
"전에도 말한 바 있는데…?"
"흠.. 제 보수는 상당히 쎄요."
"하하. 남의 회사에서 인재를 빼오는데 그만한 감수 못할까? 자.. 빨리 준비해요."
살며시 밀어내며 창가로 다가가 서는 그가 보인다.
그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걸음을 떼었다.
이래도… 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