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서도 나무는 당당하다. 빈 가지마다 바람이 걸려 울지만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다. 화단 가득 버틴 나무를 보며 올곧게 서는 법을 익힌다. 자긍심이 나무처럼 매일 자란다.
어느 날 화단 귀퉁이 석류나무와 앵두나무가 무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까닭을 몰라 내려다 보는데 허탈하다. 밑동에서 잘려 나동그라진 나무처럼 지난 시간이 아득하다. 생각이 자리잡을 때부터 기억할 수 있는 수많은 날이 나무와 함께 흩어진다. 나를 다잡아 세우던 봄의 생기와 꽃향기, 여름날의 푸르름과 조그맣게 물러 터뜨려질듯 영글던 열매나 가을날 진솔하게 잎을 떨어뜨리던 순응의 몸짓이 마음에 새겨진다.
역사가 시작되었다. 목수와 미장이들이 몰려와 시끄럽더니 달포쯤 지나 집이 한 채 세워진다.
강원도 위쪽에서 내려온 사투리가 심한 아주머니가 세를 들었다. 나보다 훨씬 작은 아이부터 제법 자란 아이까지 늘어세울 수 있는 큰 가족이다. 힘든 살림에도 아주머니는 늘 얼굴에 웃음을 띤다. 그러나 보기보다 그리 편한 속이 아니다. 웃음이자기를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집 옆에 우물이 있다. 한밤에 물을 뜨려고 나섰다가 어둠 속 웅크린 그림자로 인해 철렁한다. 나로 인해 삭이지 못한 감정을 안고 아주머니가 허겁지겁 간다. 쪼그리고 앉았던 자리에 슬픔과 외로움이 덕지덕지 남아 있다. 우물은 원래 여인네들이 있어야 제격이다. 아무 데서나 드러내지 못하는 애환이 늘어진, 감히 누가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공간이다.
우물 안으로 새파란 이끼 촘촘한 바위가 줄줄이 엇물려 내려간다. 깊은 속은 이 우물이 있어 온 햇수만큼 가늠할 수 없다. 희끄무레하게 떠도는 빛이 산란하여 파장을 일으킨다. 햇빛이 쉬이 들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아주 잠깐 달도 깨진 채 들어가지만 이내 어둠이 삼켜버린다. 떨어뜨린 두레박이 한참 뒤 물과 만나는 파열음이 난다. 충분히 휘저은 다음 끌어올리면 참 오랜 세월 숙성된 물이 세상으로 나온다. 맑고 투명한 찰랑거림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갈증을 지우고도 모자라 사지 백해를 돌며 뼈와 살이 된다. 여름 삼복 더위에는 뼛속이 시릴만큼 차갑다. 하지만 한겨울에는 추위에 언 손을 담그면, 마음까지 푸근하도록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침 우물가는 분주하다. 금방 길어올린 물로 나는 퍼덕퍼덕 소리가 나도록 낯을 씻는다. 어머니와 아주머니가 아침 찬거리를 고르고 있다. 곧 하나둘씩 깨어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면 아주머니가 간단하게 맞장구를 친다. 손을 바쁘게 놀리는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향해 소리치기도 한다. 아직 깨지 못한 잠이 엉거주춤 선 아이들을 비틀거리게 한다. 아주머니가 양푼에 나물을 담아 들고 무거운 허리를 폈다. 어느 순간 주위가 조용하다. 대문간에 낯선 남자가 서 있다. 느닷없이 아주머니가 떨어뜨린 양푼이 큰 소리를 낸다.
샘이 깊은 물
눈 속에서도 나무는 당당하다. 빈 가지마다 바람이 걸려 울지만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다. 화단 가득 버틴 나무를 보며 올곧게 서는 법을 익힌다. 자긍심이 나무처럼 매일 자란다.
어느 날 화단 귀퉁이 석류나무와 앵두나무가 무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까닭을 몰라 내려다 보는데 허탈하다. 밑동에서 잘려 나동그라진 나무처럼 지난 시간이 아득하다. 생각이 자리잡을 때부터 기억할 수 있는 수많은 날이 나무와 함께 흩어진다. 나를 다잡아 세우던 봄의 생기와 꽃향기, 여름날의 푸르름과 조그맣게 물러 터뜨려질듯 영글던 열매나 가을날 진솔하게 잎을 떨어뜨리던 순응의 몸짓이 마음에 새겨진다.
역사가 시작되었다. 목수와 미장이들이 몰려와 시끄럽더니 달포쯤 지나 집이 한 채 세워진다.
강원도 위쪽에서 내려온 사투리가 심한 아주머니가 세를 들었다. 나보다 훨씬 작은 아이부터 제법 자란 아이까지 늘어세울 수 있는 큰 가족이다. 힘든 살림에도 아주머니는 늘 얼굴에 웃음을 띤다. 그러나 보기보다 그리 편한 속이 아니다. 웃음이자기를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집 옆에 우물이 있다. 한밤에 물을 뜨려고 나섰다가 어둠 속 웅크린 그림자로 인해 철렁한다. 나로 인해 삭이지 못한 감정을 안고 아주머니가 허겁지겁 간다. 쪼그리고 앉았던 자리에 슬픔과 외로움이 덕지덕지 남아 있다. 우물은 원래 여인네들이 있어야 제격이다. 아무 데서나 드러내지 못하는 애환이 늘어진, 감히 누가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공간이다.
우물 안으로 새파란 이끼 촘촘한 바위가 줄줄이 엇물려 내려간다. 깊은 속은 이 우물이 있어 온 햇수만큼 가늠할 수 없다. 희끄무레하게 떠도는 빛이 산란하여 파장을 일으킨다. 햇빛이 쉬이 들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아주 잠깐 달도 깨진 채 들어가지만 이내 어둠이 삼켜버린다. 떨어뜨린 두레박이 한참 뒤 물과 만나는 파열음이 난다. 충분히 휘저은 다음 끌어올리면 참 오랜 세월 숙성된 물이 세상으로 나온다. 맑고 투명한 찰랑거림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갈증을 지우고도 모자라 사지 백해를 돌며 뼈와 살이 된다. 여름 삼복 더위에는 뼛속이 시릴만큼 차갑다. 하지만 한겨울에는 추위에 언 손을 담그면, 마음까지 푸근하도록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침 우물가는 분주하다. 금방 길어올린 물로 나는 퍼덕퍼덕 소리가 나도록 낯을 씻는다. 어머니와 아주머니가 아침 찬거리를 고르고 있다. 곧 하나둘씩 깨어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면 아주머니가 간단하게 맞장구를 친다. 손을 바쁘게 놀리는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향해 소리치기도 한다. 아직 깨지 못한 잠이 엉거주춤 선 아이들을 비틀거리게 한다. 아주머니가 양푼에 나물을 담아 들고 무거운 허리를 폈다. 어느 순간 주위가 조용하다. 대문간에 낯선 남자가 서 있다. 느닷없이 아주머니가 떨어뜨린 양푼이 큰 소리를 낸다.
'언제 왔더래요?'
물기 젖은 묘한 억양이 묻히기도 전에...
'아바이!'
아이들이 갸륵하게 달려들어 남자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