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윤은 오늘도 신 프로젝트에 걸 맞는 주인공을 찾기 위해 혼잡한 명동으로 나왔다. 그녀의 직업이 직업인지라 지나가는 사람을 한번도 허투로 볼 수 없는 게 나윤의 본능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의 예리한 본능을 십분 발휘하여 필사적으로 주인공 찾기에 나섰다.
‘따라라~ 라 라라라~ 랄 라라~’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집중을 하던 그녀는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소리에 흘깃거리며,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김 이사란 문구를 확인하고서야 습관처럼 전화를 받았다.
“네. 강 나윤 입니다.”
“강 작가! 지금 어디서 뭐하는 거야!”
단단히 화가 난 투로 그녀에게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김 이사의 목소리에 무언가 큰일이 터진 걸 나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혹시?’나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머릿속이 한꺼번에 뒤숭숭해졌다.
“김 이사님 저 지금 작업 중이거든요?”
김 이사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알지 못하는 그녀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능청스럽게 지금 이 순간을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김 이사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기만 하고, 그녀의 말에 순순히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더 큰 소리로 그녀를 명동에서 20분가량에 위치한 영화사 사무실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어머! 강 작가님 빨리 들어가 보세요.”
김 이사의 비서로 일하는 홍주아가 머리위로 뿔을 만들어 보이며 그녀를 조심스레 반겨주었다. 아무래도 김 이사가 그녀가 설마 하던 ‘한석’의 일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어차피 한번쯤은 부닥쳐야 할일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지금 일어난 사태의 심각성에 잠시잠깐심호흡을 하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똑똑-
“김 이사님 저 왔어....... !”
휙~ 툭! 탁!
나윤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김 이사가 갑자기 던진 대본하나가 그녀의 입술로 날아들어 제대로 맞고 떨어졌다. 나윤은 입술이 살짝 짖겨진 채로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건 바로 김 이사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하나의 빛은 청산되었다.’라고 분노하는 김 이사를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주억거렸다. 나윤은 자신의 화난 감정조차 주체하지 못하는 김 이사를 향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그가 그녀로 하여금 조금쯤 주눅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김 이사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위축이라도 된 듯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그녀에게 화를 냈다.
“강 작가 뭐하는 짓이야! 한석이 놈 뼈 빠지게 키워났더니 이제 와서 D&D로 빼돌려! 그놈들이 너한테 얼마를 준다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네가 한 행동이 우리 J&I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다음 프로젝트는 어떻게 할 거야! 그놈만큼 그 프로젝트에 어울릴 만한 녀석이 있을 것 같아! 이 정신없는 여자야!”
김 이사는 그녀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한석’의 일에 더 더욱 분개하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의 주먹 진 손이 혹여 그녀에게 나갈까 후들거리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서있는 모습이 그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나윤은 그런 김 이사를 무시하듯 피곤한 몸을 쉴 겸 아이보리 색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김 이사가 그녀의 맞은편에 피곤한 얼굴로 앉으며, 그녀를 여전히 몰아세웠다.
“말해봐! 왜 그런 거야! 이 정신 나간 여자야!”
“그만 좀 해요. 나 정신 멀쩡하니까. 아니다. 하긴 정신이 반쯤 나가야 이 세계에서 버티지. 그러고 보니 김 이사님 모처럼 흥분한 모습이 꽤 섹시해보이네요.”
석재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아침 아니 새벽에 D&D에 있는 후배로부터 들은 말들이 그의 하루를 망쳐놓고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아픈데 이 여자는 내가 화를 내도 막무가내로 웃고만 있으니 정말 열통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가 조금 전 이성적이지 못하게 그녀를 향해 던진 대본에 맞은 그녀의 입술이 피물로 얼룩져 있었다. 한때 자신의 성질을 본성을 참지 못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던 게 은연중에 들어난 것이 그녀의 입술을 보는 지금 이 순간 후회로 그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일은일 ‘한석’을 빼돌린 장본인이 그녀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그의 가슴속을 차고 넘치게 자리 잡은 ‘배신감’이라는 단어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쳇! 당신이란 여자 정말 싫어.”
나윤은 결국 그녀의 생각대로 화를 내다 스스로 자포자기 하고 마는 김 이사를 바라보며, 슬며시 웃음이 나와 버렸다. 김 이사는 열을 식히듯 자신을 위로하듯 애연가로써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탁자위의 담배를 연거푸 피워댔다. 나윤은 다른 때 같았으면 화를 내며, 소화기라도 집어 들고 그를 말리려 했겠지만, 왠지 오늘 만큼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둬야 할 것 같았다. 그에게 그녀의 위로의 말 대신 담배가 절실한 순간이었으니까.
그가 3계피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는 순간 나윤은 뭔가 결심한 듯 슬그머니 ‘한석’의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 놈 이제 놔 줍시다. 어린놈 잡아서 여태 실컷 울 거 먹었음 됐지. 우리가 더 이상 한석이한테 그럴 이유 없잖아요.”
“뭐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이건 어쩔 거야!”
김 이사가 또다시 열을 내며, 나윤의 눈앞에 휘두르는 대본을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거 그놈 거 아니에요.”
“뭐!!”
결국 석재는 그녀의 말에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석재은 늘 그녀는 다른 사람(작가)들과는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가 볼 때 모든 작가들이 글을 써놓고 그에 맞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기 위해 애를 쓰는 반면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캐스팅할 배우를 미리 점찍어 놓고, 글을 쓰곤 했었다.
‘그래가지고 무슨 작가냐?’란 뭇 언론계에서 질타를 받곤 하지만, 그녀의 느낌은 항상 한발 앞서는 그런 글들만 쏟아 내고 있어서 인지 늘 히트를 치곤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질타를 가볍게 넘겨버리기 일수였다. 하지만 이번 ‘블루아이즈’건은 그조차도 한석을 위해 그녀가 만들어 논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폭탄과도 같은 발언이 그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젠장! 당신이란 여자. 정말 어디까지가 현실이야!’
“당신 속이 말이 아닌 건 이제 충분히 알겠는데....... 난 이 작품을 좀 사실적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서 거기 대본을 당신도 봐서 알겠지만, 주인공은 분명히 ‘코발트빛을 띤 푸른 눈의 남자’라 구요. 그러니 한석인 당연히 안 되죠.”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파랗든 퍼렇든 그게 문제가 된다고 봐! 그리고 현석이 놈한테 렌즈 끼워서 눈속임으로 얼마든지 넘어가도 되는 일을 왜 어렵게 만들고 그래!”
점점 말도 안돼는 그녀의 우격다짐에 김 이사는 하루 종일 아팠던 머리가 또다시 아플 지경이었다.
“싫어요. 이번만큼은 내가 싫어요. 그리고 내 작품을 그런 식으로 모욕할 거면 나도 더 이상 여기 남을 이유가 없을 것 같네요.”
쾅!!
처음에 사무실을 들어 설 때는 김 이사와 좀더 차분하게 다음차기작에 대하여 의논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속물근성이 넘쳐나는 김 이사의 발언에 그만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그녀가 먼저 사무실을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나가 버린 사무실이 오늘따라 꽹해 보였다. 김 이사. 김 석재는 그녀 강 나윤을 5년 전 이 곳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도 여전히 패기가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넘어가 자칫 도산의 위기에 허덕이던 그가 빛을 늘릴 수 있었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버렸었다. 결과는 다행히 두 사람 아니 ‘한석’을 포함한 세 사람에게 부와 영화를 주고, 그들을 아시아시장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영화사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녀가 그의 곁을 저렇게 쉽게 떠난 다고 말하다니 ‘한석’의 일로 골치가 아픈 것 보다. 그녀가 그의 곁을 느닷없이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삐~
“네. 김 이사님”
“한석씨한테 연락 좀 해봐.”
“저 저기요. 이사님 연 연락이 안돼는 되요.”
석재는 홍비서의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조차 그를 짜증나게 만들고 있는 듯 했다. 한번도 그녀에게 화를 낸 적이 없던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럼 연락되는 쪽으로 알아 봐!”
뚜~~~~~~~~
이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화를 내고 마는 그의 속은 새까맣게 타고 있는 듯 답답하기만 했다.
‘어서 연락 좀 해. 이 나쁜 놈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래서 애꿎은 한석을 향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5년 전 나윤은 극본공모를 한 J&I를 찾아 왔다. 왜 자신의 작품을 쓰레기 취급하며, 돌려보냈는지. 그녀가 보낸 원고와 더불어 김 이사라는 사람이 친필로 쓴 편지를 읽는 동안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해있었다.
쾅!
“이보세요. 여긴 당신 같은 잡상인이 출입하는 곳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가 주세요!”
“너나 꺼져. 내가 어디 봐서 잡상인이야.”
“무슨 일입니까?”
그녀와 인형같이 생긴 비서의 실랑이에 외모가 무섭게 생긴 키가 큰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윤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마치 ‘너 같은 놈 하나 안 무섭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은 상대방을 충분히 즐겁게 만들었다.
“이사님 되시나요? 아니면 비서?”
건방지게 남의 사무실을 처 들어 와서는 다짜고짜 자신을 찾는 여자를 석재는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서류봉투를 바라보며, 얼마 전 그가 스스로 편지를 써서 돌려보낸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작품을 읽으면서 ‘지금 도산의 위기에 처해있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을 걸 떠올렸다.
“아니 이 사람이 여기가 어디라고, 이사님 죄송합니다.”
“하~ 그러니까 당신이 이사 맞네. 하하하”
다짜고짜 남자들의 웃음처럼 하하거리며 씩씩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석재의 복잡한 머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를 매몰차게 밀어 내는 홍 비서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그만 두라고 말해 버렸다.
“홍비서 나가 봐요. 아니 여기 차 좀 부탁해요.”
“네?”
“여긴 괜찮으니까. 차 좀 부탁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홍비서는 김 이사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를 쏘아보기만 했다. 석재는 그녀가 앉은 맞은편에 앉아 하루 종일 핀 담배를 버릇처럼 또다시 입에 물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재빠르게 석재의 담배를 뺏어가며, 그의 눈앞에서 두 동강을 내고 말았다.
“아니 이거 봐요!”
“죄송해요. 제가 천식에 가래가 있어서요. 콜록콜록~”
그가 보기엔 전혀 아파보이지 않는 그녀가 콜록거리며, 담배를 두 동강낸 이유를 말하자 석재는 할말을 잃어 버렸다. 여태껏 어느 누구도 그가 애연가임을 반박하거나 싫다고 말한 사람이 없건만, 그녀의 행동은 그를 또다시 어이없게 만들어놓았다.
“그래. 날 찾아온 용건은?”
“역시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졌군요. 내가 찾아온 용건은 당신이 동봉해서 보낸 이 편지 때문입니다.”
석재는 자신이 장황하게 써내려간 편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내용임 즉. 연애편지도 아닌 그녀의 시나리오가 지금 J&I사의 현실에 맞지 않아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찾을 지도 모른다는 그야 말로 애매모호한 내용의 편지였던 것이다. 석재는 자신이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자신이 이처럼 무모한 아가씨를 상대로 실랑이를 벌일 줄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이게 뭐 어떻다는 거지?”
그는 아무래도 그녀가 보기에 나윤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담배를 못 피운 화풀이를 대신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보기에도 얼추 5살은 많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차마 ‘반말 하지 마’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하여튼 나윤의 기분도 눈앞의 그 못지않게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기분은 마치 그가 돌려보낸 그녀의 시나리오와 함께 동봉된 편지를 읽었던 순간에 느꼈던 그런 느낌이었다.
“이거 왜 돌려보내신 거죠? 게다가 이편지의 저의가 뭐죠?”
저의라....... 애초에 그는 저의 란 감정을 생각하지 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찾아와 다짜고짜 물어 대는 그녀의 저의가 궁금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녀가 새 초름하게 뜬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기분이 과히 나쁘지 만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할 따름이었다.
“저의? 하하 하하하 저의라 흠흠. 글쎄 그런 거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난생처음 시나리오를 돌려보냈으니 아마 나조차도 모르는 숨겨진 저의가 있지 않을까 싶군.”
“이봐요. 이사 아저씨 난 내 작품을 함부로 말하는 것도 싫지만, 괜한 기대감을 주는 그런 말도 싫다고요. 되면 된다. 가망 없으면 가망 없다. 이렇게 확실하게 해줘야 나도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식은 나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고요.”
나윤은 생각보다 더 흥분하며, 자신의 시나리오뭉치를 마구 흔들어 대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의 발 앞으로 몇 장의 시나리오 원고가 투두둑 떨어져 버렸다. 그 모습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종이를 잡았다. 종이를 잡는다고 더불어 얼떨결에 맞잡은 그와 그녀의 손이 잠깐사이 서로에게 어색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그렇게 흥분을 잘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글을 썼지?”
“그건 댁이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난 아무 때나 흥분하거나 하지 않는 다고요.”
“그 런가? 그건 격어 봐야 알 것 같고, 우선은 내가 왜 당신의 시나리오를 거절했는지 말하지 혹시 요즘 우리 회사의 일들에 대해서 뭐 아는 거라도 있나?”
뜬금없이 회사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보며, 나윤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하루 종일 책만 보며, 지내는 그녀에게 J&I의 상황을 물어본다는 건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시나리오가 성공은 아니더라도 대중들에게 조금은 어필 될 수 있는 좋은 소재라는 건 그의 눈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요사이 몇 번의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해서 일어난 불운이라고 밖에는 그녀를 그녀의 시나리오를 놓치는 데 대한 변명으로 삼았었다.
“으흠. 그럼 어디서부터 얘기를 한담.”
그가 길고 긴 서론을 꺼내려 할 때. 홍비서가 그들을 위해 커피를 준비해 왔다. 그리고 여전히 나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밖으로 나갔다.
“내 얘기가 길어 질 수도 있으니까. 우선 차부터 마시지.”
“길건 말건 나랑 상관없는 얘기는 집어 치우고, 결론은 왜 안 되는 지부터 말해 주세요.”
석재는 건방지게 성격이 급한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게다가 그동안 회사 일에 골머리를 썩혀왔던 자신을 위해 그녀가 그간의 일들을 들어주길 바라고 있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위로라고? 말도 안돼.’
“좋아. 우선 안 될 건 없어. 요즘같이 정에 메말라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히 어필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니까. 하지만, 안돼. 지금 우리 회사의 주식전부가 다른 영화사로 매각되기 일보직전이거든.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그 정도는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정말 이건 내가 당신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내 마지막 작품 중에 이정도 쯤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 그래서 별 뜻 없이 당신한테 편지를 쓴 거겠지. 그게 당신이 말한 저의가 있는 거라면 나도 그 저의를 마땅히 말로는 표현 못하겠군.”
그의 말이 다 끝나도록 요지부동으로 있던 그녀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아니 소름 돋게 만들었다.
“결국 여기도 허울 좋은 영화사군요. 하하 어쩐지 그럴 거면 왜 나같이 순진한 사람들에게 시나리오 공모를 원 했죠?”
“뭐? 당신 정말 무례한 여자군”
“그래요. 나 무례해요. 하지만 당신네들은 사람의 꿈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들 아닌가요?”
“뭐? 쓰레기! 당신 말다했어!”
석재는 그녀의 말에 너무도 화가나 그만 저도 모르게 그녀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가녀린 그녀의 몸이 그의 거친 팔 힘에 못 이겨 그의 앞으로 덜컥 딸려와 버렸다.
“아니요. 말 다 못했어요. 당신네들 때문에 나처럼 꿈에 부풀어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에 생채기가 났는지 알기나 해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올인 해 보지 왜 그만 두려고만 하는 거야. 이 나쁜 남자야!”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분노를 온몸으로 표출하듯 그를 향해 울분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 걸 보는 순간 석재는 그만 그녀의 목을 조르듯 움켜진 멱살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또 한번의 자책감을 가져야했다.
‘그래 나 비열한 놈이야. 이 상황이 죽기보다 더 싫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해 시나리오를 모았는데........ 결국 내가 원하던 일 제대로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내야 하는 내가 너무 싫다고’
“어차피 망할 거면, 당신 아니 내 소원 좀 들어 주면 안돼요?”
언제 그랬냐는 듯 풀죽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주는 의미를 생각했다. ‘소원이라니.......... 정말 대책 없는 아가씨로군’
“내가 엉뚱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도 이번 한번만 욕심을 부려보고 싶어요.”
눈물이 아직도 맺혀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한점의 거짓도 담지 않은 모습으로 그를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마치 어떠한 소원이라도 들어 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그런 느낌이 그로 하여금 들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애도 아니고, 갑자기 소원은.......”
“난 성공하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요. 그 방법을 당신이 알고 있잖아요. 제발 한번만 도와줘요.”
이번에 소원을 말하는 그녀의 입은 성공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열정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체 그녀는 시나리오 한편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녀의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말들이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걸론 부족해. 그냥 좋은 시나리오다란 소리는 듣겠지만, 재정적인 문제도 있고, 너무 힘들어. 게다가 매각처분이 코앞인데 누가 우리 회사를 상대로 영화 찍겠다고 하겠어. 어떠한 관계자도 참여하지 않을 거야.”
“혹시 배우들 개런티(guaranteed) 때문인가요?”
“그것도 하나의 문제가 되겠지.”
“그렇담 신인을 쓰면 되죠. 개런티(guaranteed)가 적은 대신 스타로 만들어 주는 것을 담보로..........”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녀의 예상대로 보기 좋게 성공을 거뒀고, 그들의 영화에 출연한 ‘한석’은 의외로 영화의 상종가와 함께 대스타로 총망 받는 연기자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 그를 이제 와서 라이벌 회사인 D&D사에 넘겨준다는 건 말도 안돼는 일이었다.
‘삐~’
“뭡니까?”
“이사님 한석씨가 30분 후 ‘화이트캐슬’에서 뵙자고 연락 왔습니다.”
“알았어요. 미스 홍 오늘은 그만 퇴근하세요. 참, 강작가랑 한 번 더 연락 가능할까요?”
“저 실은 강 작가님이 한석씨랑 연락을 하셔서 그리로 오시라고 전화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연락하지 마시라고요. 휴대폰을 꺼 논 상태시라고요.”
‘젠장. 당신은 정말 제멋대로야.’
“알았어요. 그만 퇴근하세요.”
“네.”
그녀가 모처럼 찾아온 인천 월미도는 한적한 분위기와 함께 바닷바람만이 그녀를 맞아 주었다. 북적이는 도심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한 곳이 여기라는 생각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하지만, 세월만큼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인지 얼마 전 한석의 갑작스런 행동이 떠올라 그녀의 기분이 또다시 무거워졌다.
나윤은 한번도 생일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다 한석을 알게 된 후부터는 줄곧 생일을 챙겨 받게 되어서 무척 행복했었다. 그리고 며칠 전 그녀의 27번째 생일날 그로부터 받은 뜻밖의 선물에 당황하고 말았다.
“왜. 맘에 안 들어요?”
“어? 아 아니 맘에 들지만, 내가 너한테 이런 선물 받을 자격이나 있냐? 이런 건 네 여자친구를 위해 아껴둬야 하는 거잖아.”
그녀의 말에 한석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진 보석함에서 그가 골랐어도 너무나 눈부신 ‘로열 크리스틴’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조심스레 걸어 주었다. 연기하면서도 곧잘 여자에게 선물하는 자상한 남자로 나오던 그였지만, 오늘은 왠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선물 앞에 그녀 또한 설레 이 긴 마찬가지였다.
“하하 나 정말 떨린다. 황송하게도 내 목에 너무 안 어울리는 비싼 목걸이를 걸고 있다는 것도 떨리지만, 대한민국에서 아니 아시아에서 최고로 치는 네가 이런 선물을 나한테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으악! 떨려 죽겠다. 하하하 야! 한석아 나 떨고 있니?”
그녀가 지금의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넘기려는 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자신의 목에 걸린 그녀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목걸이에서 눈을 때지 못하는 모습이 그로썬 기쁠 따름이었다. 자. 이제는 그가 오랫동안 맘에 담아 두었던 그녀에게 멋지게 고백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는 애써 태연하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아직도 목걸이에 눈을 때지 않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한석이 평소보다 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걸이 그만 보고 나 좀 봐줄래?”
“어?”
나윤은 갑작스런 한석의 반말에 놀라기보다. 그녀의 턱을 잡고 마치 연인의 눈빛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한석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저 놈 느끼한 눈빛은 또 뭐야? 설마........ 키 키스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의 예리한 느낌이 맞아 들고 말았다. 한석은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그녀가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 야릇한 눈빛과 함께 그녀의 입술을 앗아가 버렸다. 순간적으로 든 배신감에 그녀의 두 손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다.
‘퍽! 퍽퍽!’
“윽~ 누 누나!”
“그래! 나 네 누나야!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 나쁜 놈아!”
한석은 그녀의 이런 반응을 한번쯤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라면 길길이 뛰고도 남았을 상황을 누구보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그동안 조심 또 조심하며, 지내왔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동료 연예인들이 자신들과 스캔들 나기를 원하고, 실제로 몇몇 연예인들은 일부러 스캔들 기사를 내기도 하지만, 절대적으로 그가 맘이 없었기 때문에 그간의 스캔들이 모두 헛소문이라는 걸 모두 알고 인정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자신과 하룻밤이라도 어떻게 해보지 못해 안달하는 동안 정작 그가 연인이 되길 바라는 그녀는 그를 애 취급이나 하는 감정이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였다.
“누나가 날 싫어하지 않는 이상. 난 누나랑 결혼할 거야. 그리고 누나도 나 밖에는 없다는 걸 언젠가는 알거고”
“미친놈. 너 차라리 이적해 버려. 다시는 네놈 얼굴 보기 싫으니까.”
그녀는 그냥 홧김에 한말이었다. 하지만 한석의 굳어진 얼굴을 보는 순간 저놈이 그러고도 남을 인간임을 직감적으로 알아 버렸다. 한번도 그녀를 힘들게 한 적이 없는 녀석이 요즘 따라 그녀를 힘들게 하려고 자꾸만 연락도 끈은 채 지내기 일 수였다. 그러다 말겠지 했건만, 그의 이상한 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말았다.
“너 설마?”
“그래 나 사실 누나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하고, D&D사로 이적 결정한거 말하려고 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김 이사한테 남아 있지 말고, 나랑 같이 가는 건 어때?”
“웃기지마. 가려면 너나가 난 그 사람 옆이 편해”
“............ 뭐가 편해! 그 놈 팽이가 뭐가 좋다고, 맨 날 우리한테 빽빽거리기만 하고, 내가 모를 줄 알아 나 키워준답시고, 내가 벌어 들이 돈 그놈이 다 싹쓸이 했잖아!”
‘짝!!’
한석의 버릇없는 말투에 화가 난 나윤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매섭게 손을 날렸다. 철썩거리는 그의 뺨에 금 새 붉은 자욱이 도드라지게 올라와 버렸다. 그 모습에 나윤의 마음이 또다시 무거워지고 말았다. ‘원래 저놈은 너무 연약한 몸 이었어.’ 스스로를 위로하듯 한석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네놈이 뭐라고 지껄여도 난 너랑 안가 정 가고 싶으면 너만 가 그리고 너도 처음에 약속했잖아.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그 지긋 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게만 해준다면 뭐든 하겠다고, 내 앞에서 그리고 김 이사 앞에서 맹세했잖아. 그러고선 이제 와서....... 훗~ 정말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거 아니라는데....... 하지만 네놈이 어딜 가든 잘되기만 바라마. 그리고 이건 역시 내 것이 아니었어. 잠시나마 나를 행복하게 해줘서 고맙다.”
한석을 뒤로 한 채 그녀가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마지막 한점을 바라보며, 한석은 깊은 상념에 잠기고 말았다.
‘내가 다시 당신을 찾는 일은 없을 거야. 오히려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 나를 향해 애원하겠지. 꼭 그렇게 만들 거야.’
캐스팅 걸 - 프롤로그 - #1. 인연의 끈
프롤로그 - #1. 인연의 끈
나윤은 오늘도 신 프로젝트에 걸 맞는 주인공을 찾기 위해 혼잡한 명동으로 나왔다. 그녀의 직업이 직업인지라 지나가는 사람을 한번도 허투로 볼 수 없는 게 나윤의 본능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의 예리한 본능을 십분 발휘하여 필사적으로 주인공 찾기에 나섰다.
‘따라라~ 라 라라라~ 랄 라라~’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집중을 하던 그녀는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소리에 흘깃거리며,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김 이사란 문구를 확인하고서야 습관처럼 전화를 받았다.
“네. 강 나윤 입니다.”
“강 작가! 지금 어디서 뭐하는 거야!”
단단히 화가 난 투로 그녀에게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김 이사의 목소리에 무언가 큰일이 터진 걸 나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혹시?’나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머릿속이 한꺼번에 뒤숭숭해졌다.
“김 이사님 저 지금 작업 중이거든요?”
김 이사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알지 못하는 그녀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능청스럽게 지금 이 순간을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김 이사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기만 하고, 그녀의 말에 순순히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더 큰 소리로 그녀를 명동에서 20분가량에 위치한 영화사 사무실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어머! 강 작가님 빨리 들어가 보세요.”
김 이사의 비서로 일하는 홍주아가 머리위로 뿔을 만들어 보이며 그녀를 조심스레 반겨주었다. 아무래도 김 이사가 그녀가 설마 하던 ‘한석’의 일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어차피 한번쯤은 부닥쳐야 할일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지금 일어난 사태의 심각성에 잠시잠깐심호흡을 하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똑똑-
“김 이사님 저 왔어....... !”
휙~ 툭! 탁!
나윤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김 이사가 갑자기 던진 대본하나가 그녀의 입술로 날아들어 제대로 맞고 떨어졌다. 나윤은 입술이 살짝 짖겨진 채로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건 바로 김 이사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하나의 빛은 청산되었다.’라고 분노하는 김 이사를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주억거렸다. 나윤은 자신의 화난 감정조차 주체하지 못하는 김 이사를 향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그가 그녀로 하여금 조금쯤 주눅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김 이사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위축이라도 된 듯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그녀에게 화를 냈다.
“강 작가 뭐하는 짓이야! 한석이 놈 뼈 빠지게 키워났더니 이제 와서 D&D로 빼돌려! 그놈들이 너한테 얼마를 준다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네가 한 행동이 우리 J&I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다음 프로젝트는 어떻게 할 거야! 그놈만큼 그 프로젝트에 어울릴 만한 녀석이 있을 것 같아! 이 정신없는 여자야!”
김 이사는 그녀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한석’의 일에 더 더욱 분개하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의 주먹 진 손이 혹여 그녀에게 나갈까 후들거리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서있는 모습이 그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나윤은 그런 김 이사를 무시하듯 피곤한 몸을 쉴 겸 아이보리 색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김 이사가 그녀의 맞은편에 피곤한 얼굴로 앉으며, 그녀를 여전히 몰아세웠다.
“말해봐! 왜 그런 거야! 이 정신 나간 여자야!”
“그만 좀 해요. 나 정신 멀쩡하니까. 아니다. 하긴 정신이 반쯤 나가야 이 세계에서 버티지. 그러고 보니 김 이사님 모처럼 흥분한 모습이 꽤 섹시해보이네요.”
석재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아침 아니 새벽에 D&D에 있는 후배로부터 들은 말들이 그의 하루를 망쳐놓고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아픈데 이 여자는 내가 화를 내도 막무가내로 웃고만 있으니 정말 열통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가 조금 전 이성적이지 못하게 그녀를 향해 던진 대본에 맞은 그녀의 입술이 피물로 얼룩져 있었다. 한때 자신의 성질을 본성을 참지 못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던 게 은연중에 들어난 것이 그녀의 입술을 보는 지금 이 순간 후회로 그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일은일 ‘한석’을 빼돌린 장본인이 그녀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그의 가슴속을 차고 넘치게 자리 잡은 ‘배신감’이라는 단어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쳇! 당신이란 여자 정말 싫어.”
나윤은 결국 그녀의 생각대로 화를 내다 스스로 자포자기 하고 마는 김 이사를 바라보며, 슬며시 웃음이 나와 버렸다. 김 이사는 열을 식히듯 자신을 위로하듯 애연가로써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탁자위의 담배를 연거푸 피워댔다. 나윤은 다른 때 같았으면 화를 내며, 소화기라도 집어 들고 그를 말리려 했겠지만, 왠지 오늘 만큼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둬야 할 것 같았다. 그에게 그녀의 위로의 말 대신 담배가 절실한 순간이었으니까.
그가 3계피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는 순간 나윤은 뭔가 결심한 듯 슬그머니 ‘한석’의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 놈 이제 놔 줍시다. 어린놈 잡아서 여태 실컷 울 거 먹었음 됐지. 우리가 더 이상 한석이한테 그럴 이유 없잖아요.”
“뭐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이건 어쩔 거야!”
김 이사가 또다시 열을 내며, 나윤의 눈앞에 휘두르는 대본을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거 그놈 거 아니에요.”
“뭐!!”
결국 석재는 그녀의 말에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석재은 늘 그녀는 다른 사람(작가)들과는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가 볼 때 모든 작가들이 글을 써놓고 그에 맞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기 위해 애를 쓰는 반면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캐스팅할 배우를 미리 점찍어 놓고, 글을 쓰곤 했었다.
‘그래가지고 무슨 작가냐?’란 뭇 언론계에서 질타를 받곤 하지만, 그녀의 느낌은 항상 한발 앞서는 그런 글들만 쏟아 내고 있어서 인지 늘 히트를 치곤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질타를 가볍게 넘겨버리기 일수였다. 하지만 이번 ‘블루아이즈’건은 그조차도 한석을 위해 그녀가 만들어 논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폭탄과도 같은 발언이 그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젠장! 당신이란 여자. 정말 어디까지가 현실이야!’
“당신 속이 말이 아닌 건 이제 충분히 알겠는데....... 난 이 작품을 좀 사실적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서 거기 대본을 당신도 봐서 알겠지만, 주인공은 분명히 ‘코발트빛을 띤 푸른 눈의 남자’라 구요. 그러니 한석인 당연히 안 되죠.”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파랗든 퍼렇든 그게 문제가 된다고 봐! 그리고 현석이 놈한테 렌즈 끼워서 눈속임으로 얼마든지 넘어가도 되는 일을 왜 어렵게 만들고 그래!”
점점 말도 안돼는 그녀의 우격다짐에 김 이사는 하루 종일 아팠던 머리가 또다시 아플 지경이었다.
“싫어요. 이번만큼은 내가 싫어요. 그리고 내 작품을 그런 식으로 모욕할 거면 나도 더 이상 여기 남을 이유가 없을 것 같네요.”
쾅!!
처음에 사무실을 들어 설 때는 김 이사와 좀더 차분하게 다음차기작에 대하여 의논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속물근성이 넘쳐나는 김 이사의 발언에 그만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그녀가 먼저 사무실을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나가 버린 사무실이 오늘따라 꽹해 보였다. 김 이사. 김 석재는 그녀 강 나윤을 5년 전 이 곳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도 여전히 패기가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넘어가 자칫 도산의 위기에 허덕이던 그가 빛을 늘릴 수 있었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버렸었다. 결과는 다행히 두 사람 아니 ‘한석’을 포함한 세 사람에게 부와 영화를 주고, 그들을 아시아시장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영화사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녀가 그의 곁을 저렇게 쉽게 떠난 다고 말하다니 ‘한석’의 일로 골치가 아픈 것 보다. 그녀가 그의 곁을 느닷없이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삐~
“네. 김 이사님”
“한석씨한테 연락 좀 해봐.”
“저 저기요. 이사님 연 연락이 안돼는 되요.”
석재는 홍비서의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조차 그를 짜증나게 만들고 있는 듯 했다. 한번도 그녀에게 화를 낸 적이 없던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럼 연락되는 쪽으로 알아 봐!”
뚜~~~~~~~~
이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화를 내고 마는 그의 속은 새까맣게 타고 있는 듯 답답하기만 했다.
‘어서 연락 좀 해. 이 나쁜 놈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래서 애꿎은 한석을 향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5년 전 나윤은 극본공모를 한 J&I를 찾아 왔다. 왜 자신의 작품을 쓰레기 취급하며, 돌려보냈는지. 그녀가 보낸 원고와 더불어 김 이사라는 사람이 친필로 쓴 편지를 읽는 동안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해있었다.
쾅!
“이보세요. 여긴 당신 같은 잡상인이 출입하는 곳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가 주세요!”
“너나 꺼져. 내가 어디 봐서 잡상인이야.”
“무슨 일입니까?”
그녀와 인형같이 생긴 비서의 실랑이에 외모가 무섭게 생긴 키가 큰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윤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마치 ‘너 같은 놈 하나 안 무섭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은 상대방을 충분히 즐겁게 만들었다.
“이사님 되시나요? 아니면 비서?”
건방지게 남의 사무실을 처 들어 와서는 다짜고짜 자신을 찾는 여자를 석재는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서류봉투를 바라보며, 얼마 전 그가 스스로 편지를 써서 돌려보낸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작품을 읽으면서 ‘지금 도산의 위기에 처해있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을 걸 떠올렸다.
“아니 이 사람이 여기가 어디라고, 이사님 죄송합니다.”
“하~ 그러니까 당신이 이사 맞네. 하하하”
다짜고짜 남자들의 웃음처럼 하하거리며 씩씩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석재의 복잡한 머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를 매몰차게 밀어 내는 홍 비서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그만 두라고 말해 버렸다.
“홍비서 나가 봐요. 아니 여기 차 좀 부탁해요.”
“네?”
“여긴 괜찮으니까. 차 좀 부탁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홍비서는 김 이사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를 쏘아보기만 했다. 석재는 그녀가 앉은 맞은편에 앉아 하루 종일 핀 담배를 버릇처럼 또다시 입에 물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재빠르게 석재의 담배를 뺏어가며, 그의 눈앞에서 두 동강을 내고 말았다.
“아니 이거 봐요!”
“죄송해요. 제가 천식에 가래가 있어서요. 콜록콜록~”
그가 보기엔 전혀 아파보이지 않는 그녀가 콜록거리며, 담배를 두 동강낸 이유를 말하자 석재는 할말을 잃어 버렸다. 여태껏 어느 누구도 그가 애연가임을 반박하거나 싫다고 말한 사람이 없건만, 그녀의 행동은 그를 또다시 어이없게 만들어놓았다.
“그래. 날 찾아온 용건은?”
“역시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졌군요. 내가 찾아온 용건은 당신이 동봉해서 보낸 이 편지 때문입니다.”
석재는 자신이 장황하게 써내려간 편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내용임 즉. 연애편지도 아닌 그녀의 시나리오가 지금 J&I사의 현실에 맞지 않아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찾을 지도 모른다는 그야 말로 애매모호한 내용의 편지였던 것이다. 석재는 자신이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자신이 이처럼 무모한 아가씨를 상대로 실랑이를 벌일 줄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이게 뭐 어떻다는 거지?”
그는 아무래도 그녀가 보기에 나윤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담배를 못 피운 화풀이를 대신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보기에도 얼추 5살은 많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차마 ‘반말 하지 마’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하여튼 나윤의 기분도 눈앞의 그 못지않게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기분은 마치 그가 돌려보낸 그녀의 시나리오와 함께 동봉된 편지를 읽었던 순간에 느꼈던 그런 느낌이었다.
“이거 왜 돌려보내신 거죠? 게다가 이편지의 저의가 뭐죠?”
저의라....... 애초에 그는 저의 란 감정을 생각하지 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찾아와 다짜고짜 물어 대는 그녀의 저의가 궁금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녀가 새 초름하게 뜬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기분이 과히 나쁘지 만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할 따름이었다.
“저의? 하하 하하하 저의라 흠흠. 글쎄 그런 거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난생처음 시나리오를 돌려보냈으니 아마 나조차도 모르는 숨겨진 저의가 있지 않을까 싶군.”
“이봐요. 이사 아저씨 난 내 작품을 함부로 말하는 것도 싫지만, 괜한 기대감을 주는 그런 말도 싫다고요. 되면 된다. 가망 없으면 가망 없다. 이렇게 확실하게 해줘야 나도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식은 나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고요.”
나윤은 생각보다 더 흥분하며, 자신의 시나리오뭉치를 마구 흔들어 대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의 발 앞으로 몇 장의 시나리오 원고가 투두둑 떨어져 버렸다. 그 모습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종이를 잡았다. 종이를 잡는다고 더불어 얼떨결에 맞잡은 그와 그녀의 손이 잠깐사이 서로에게 어색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그렇게 흥분을 잘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글을 썼지?”
“그건 댁이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난 아무 때나 흥분하거나 하지 않는 다고요.”
“그 런가? 그건 격어 봐야 알 것 같고, 우선은 내가 왜 당신의 시나리오를 거절했는지 말하지 혹시 요즘 우리 회사의 일들에 대해서 뭐 아는 거라도 있나?”
뜬금없이 회사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보며, 나윤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하루 종일 책만 보며, 지내는 그녀에게 J&I의 상황을 물어본다는 건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시나리오가 성공은 아니더라도 대중들에게 조금은 어필 될 수 있는 좋은 소재라는 건 그의 눈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요사이 몇 번의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해서 일어난 불운이라고 밖에는 그녀를 그녀의 시나리오를 놓치는 데 대한 변명으로 삼았었다.
“으흠. 그럼 어디서부터 얘기를 한담.”
그가 길고 긴 서론을 꺼내려 할 때. 홍비서가 그들을 위해 커피를 준비해 왔다. 그리고 여전히 나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밖으로 나갔다.
“내 얘기가 길어 질 수도 있으니까. 우선 차부터 마시지.”
“길건 말건 나랑 상관없는 얘기는 집어 치우고, 결론은 왜 안 되는 지부터 말해 주세요.”
석재는 건방지게 성격이 급한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게다가 그동안 회사 일에 골머리를 썩혀왔던 자신을 위해 그녀가 그간의 일들을 들어주길 바라고 있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위로라고? 말도 안돼.’
“좋아. 우선 안 될 건 없어. 요즘같이 정에 메말라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히 어필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니까. 하지만, 안돼. 지금 우리 회사의 주식전부가 다른 영화사로 매각되기 일보직전이거든.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그 정도는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정말 이건 내가 당신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내 마지막 작품 중에 이정도 쯤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 그래서 별 뜻 없이 당신한테 편지를 쓴 거겠지. 그게 당신이 말한 저의가 있는 거라면 나도 그 저의를 마땅히 말로는 표현 못하겠군.”
그의 말이 다 끝나도록 요지부동으로 있던 그녀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아니 소름 돋게 만들었다.
“결국 여기도 허울 좋은 영화사군요. 하하 어쩐지 그럴 거면 왜 나같이 순진한 사람들에게 시나리오 공모를 원 했죠?”
“뭐? 당신 정말 무례한 여자군”
“그래요. 나 무례해요. 하지만 당신네들은 사람의 꿈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들 아닌가요?”
“뭐? 쓰레기! 당신 말다했어!”
석재는 그녀의 말에 너무도 화가나 그만 저도 모르게 그녀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가녀린 그녀의 몸이 그의 거친 팔 힘에 못 이겨 그의 앞으로 덜컥 딸려와 버렸다.
“아니요. 말 다 못했어요. 당신네들 때문에 나처럼 꿈에 부풀어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에 생채기가 났는지 알기나 해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올인 해 보지 왜 그만 두려고만 하는 거야. 이 나쁜 남자야!”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분노를 온몸으로 표출하듯 그를 향해 울분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 걸 보는 순간 석재는 그만 그녀의 목을 조르듯 움켜진 멱살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또 한번의 자책감을 가져야했다.
‘그래 나 비열한 놈이야. 이 상황이 죽기보다 더 싫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해 시나리오를 모았는데........ 결국 내가 원하던 일 제대로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내야 하는 내가 너무 싫다고’
“어차피 망할 거면, 당신 아니 내 소원 좀 들어 주면 안돼요?”
언제 그랬냐는 듯 풀죽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주는 의미를 생각했다. ‘소원이라니.......... 정말 대책 없는 아가씨로군’
“내가 엉뚱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도 이번 한번만 욕심을 부려보고 싶어요.”
눈물이 아직도 맺혀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한점의 거짓도 담지 않은 모습으로 그를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마치 어떠한 소원이라도 들어 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그런 느낌이 그로 하여금 들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애도 아니고, 갑자기 소원은.......”
“난 성공하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요. 그 방법을 당신이 알고 있잖아요. 제발 한번만 도와줘요.”
이번에 소원을 말하는 그녀의 입은 성공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열정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체 그녀는 시나리오 한편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녀의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말들이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걸론 부족해. 그냥 좋은 시나리오다란 소리는 듣겠지만, 재정적인 문제도 있고, 너무 힘들어. 게다가 매각처분이 코앞인데 누가 우리 회사를 상대로 영화 찍겠다고 하겠어. 어떠한 관계자도 참여하지 않을 거야.”
“혹시 배우들 개런티(guaranteed) 때문인가요?”
“그것도 하나의 문제가 되겠지.”
“그렇담 신인을 쓰면 되죠. 개런티(guaranteed)가 적은 대신 스타로 만들어 주는 것을 담보로..........”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녀의 예상대로 보기 좋게 성공을 거뒀고, 그들의 영화에 출연한 ‘한석’은 의외로 영화의 상종가와 함께 대스타로 총망 받는 연기자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 그를 이제 와서 라이벌 회사인 D&D사에 넘겨준다는 건 말도 안돼는 일이었다.
‘삐~’
“뭡니까?”
“이사님 한석씨가 30분 후 ‘화이트캐슬’에서 뵙자고 연락 왔습니다.”
“알았어요. 미스 홍 오늘은 그만 퇴근하세요. 참, 강작가랑 한 번 더 연락 가능할까요?”
“저 실은 강 작가님이 한석씨랑 연락을 하셔서 그리로 오시라고 전화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연락하지 마시라고요. 휴대폰을 꺼 논 상태시라고요.”
‘젠장. 당신은 정말 제멋대로야.’
“알았어요. 그만 퇴근하세요.”
“네.”
그녀가 모처럼 찾아온 인천 월미도는 한적한 분위기와 함께 바닷바람만이 그녀를 맞아 주었다. 북적이는 도심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한 곳이 여기라는 생각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하지만, 세월만큼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인지 얼마 전 한석의 갑작스런 행동이 떠올라 그녀의 기분이 또다시 무거워졌다.
나윤은 한번도 생일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다 한석을 알게 된 후부터는 줄곧 생일을 챙겨 받게 되어서 무척 행복했었다. 그리고 며칠 전 그녀의 27번째 생일날 그로부터 받은 뜻밖의 선물에 당황하고 말았다.
“왜. 맘에 안 들어요?”
“어? 아 아니 맘에 들지만, 내가 너한테 이런 선물 받을 자격이나 있냐? 이런 건 네 여자친구를 위해 아껴둬야 하는 거잖아.”
그녀의 말에 한석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진 보석함에서 그가 골랐어도 너무나 눈부신 ‘로열 크리스틴’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조심스레 걸어 주었다. 연기하면서도 곧잘 여자에게 선물하는 자상한 남자로 나오던 그였지만, 오늘은 왠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선물 앞에 그녀 또한 설레 이 긴 마찬가지였다.
“하하 나 정말 떨린다. 황송하게도 내 목에 너무 안 어울리는 비싼 목걸이를 걸고 있다는 것도 떨리지만, 대한민국에서 아니 아시아에서 최고로 치는 네가 이런 선물을 나한테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으악! 떨려 죽겠다. 하하하 야! 한석아 나 떨고 있니?”
그녀가 지금의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넘기려는 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자신의 목에 걸린 그녀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목걸이에서 눈을 때지 못하는 모습이 그로썬 기쁠 따름이었다. 자. 이제는 그가 오랫동안 맘에 담아 두었던 그녀에게 멋지게 고백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는 애써 태연하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아직도 목걸이에 눈을 때지 않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한석이 평소보다 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걸이 그만 보고 나 좀 봐줄래?”
“어?”
나윤은 갑작스런 한석의 반말에 놀라기보다. 그녀의 턱을 잡고 마치 연인의 눈빛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한석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저 놈 느끼한 눈빛은 또 뭐야? 설마........ 키 키스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의 예리한 느낌이 맞아 들고 말았다. 한석은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그녀가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 야릇한 눈빛과 함께 그녀의 입술을 앗아가 버렸다. 순간적으로 든 배신감에 그녀의 두 손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다.
‘퍽! 퍽퍽!’
“윽~ 누 누나!”
“그래! 나 네 누나야!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 나쁜 놈아!”
한석은 그녀의 이런 반응을 한번쯤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라면 길길이 뛰고도 남았을 상황을 누구보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그동안 조심 또 조심하며, 지내왔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동료 연예인들이 자신들과 스캔들 나기를 원하고, 실제로 몇몇 연예인들은 일부러 스캔들 기사를 내기도 하지만, 절대적으로 그가 맘이 없었기 때문에 그간의 스캔들이 모두 헛소문이라는 걸 모두 알고 인정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자신과 하룻밤이라도 어떻게 해보지 못해 안달하는 동안 정작 그가 연인이 되길 바라는 그녀는 그를 애 취급이나 하는 감정이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였다.
“누나가 날 싫어하지 않는 이상. 난 누나랑 결혼할 거야. 그리고 누나도 나 밖에는 없다는 걸 언젠가는 알거고”
“미친놈. 너 차라리 이적해 버려. 다시는 네놈 얼굴 보기 싫으니까.”
그녀는 그냥 홧김에 한말이었다. 하지만 한석의 굳어진 얼굴을 보는 순간 저놈이 그러고도 남을 인간임을 직감적으로 알아 버렸다. 한번도 그녀를 힘들게 한 적이 없는 녀석이 요즘 따라 그녀를 힘들게 하려고 자꾸만 연락도 끈은 채 지내기 일 수였다. 그러다 말겠지 했건만, 그의 이상한 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말았다.
“너 설마?”
“그래 나 사실 누나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하고, D&D사로 이적 결정한거 말하려고 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김 이사한테 남아 있지 말고, 나랑 같이 가는 건 어때?”
“웃기지마. 가려면 너나가 난 그 사람 옆이 편해”
“............ 뭐가 편해! 그 놈 팽이가 뭐가 좋다고, 맨 날 우리한테 빽빽거리기만 하고, 내가 모를 줄 알아 나 키워준답시고, 내가 벌어 들이 돈 그놈이 다 싹쓸이 했잖아!”
‘짝!!’
한석의 버릇없는 말투에 화가 난 나윤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매섭게 손을 날렸다. 철썩거리는 그의 뺨에 금 새 붉은 자욱이 도드라지게 올라와 버렸다. 그 모습에 나윤의 마음이 또다시 무거워지고 말았다. ‘원래 저놈은 너무 연약한 몸 이었어.’ 스스로를 위로하듯 한석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네놈이 뭐라고 지껄여도 난 너랑 안가 정 가고 싶으면 너만 가 그리고 너도 처음에 약속했잖아.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그 지긋 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게만 해준다면 뭐든 하겠다고, 내 앞에서 그리고 김 이사 앞에서 맹세했잖아. 그러고선 이제 와서....... 훗~ 정말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거 아니라는데....... 하지만 네놈이 어딜 가든 잘되기만 바라마. 그리고 이건 역시 내 것이 아니었어. 잠시나마 나를 행복하게 해줘서 고맙다.”
한석을 뒤로 한 채 그녀가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마지막 한점을 바라보며, 한석은 깊은 상념에 잠기고 말았다.
‘내가 다시 당신을 찾는 일은 없을 거야. 오히려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 나를 향해 애원하겠지. 꼭 그렇게 만들 거야.’
한석은 주먹 진 자신의 손등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그녀를 향해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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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5월입니다.
그동안 네이트를 잠시 이탈했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여기는 여전히 많은 분들의 글이 생동감있게 올라오고 있네요.
여러분 혹시 저 아랑을 잊으신건 아니겠죠?
오랫동안 참았던 만큼 실망시키지 않고, 열심히 연재하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시고, 답글 달아 주세요 ^^**
참, 저에게 필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 분은 네이트 쪽지를 이용해 주세요....
그럼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마감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