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에 대한 고찰..

최은미200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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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오후...

친구와의 약속으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제기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일진이 좋지않아 조금은 짜증스런 마음으로 자리 맞은편 유리창에 비친 내모습을

생각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내게 시간을 물어온다.

공교롭게도 마침 그 때가 지하철 천장의 전광판에서 시간을 알려주고 있던 터라 '저걸 보면 되지 왜 하필

나한테 물어...'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걸 막을 방도가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알려주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그에대해 짜증스런 마음을 가졌던 것이

순간 미안해졌다.  장애인이었다.

시간을 물어올때 말투가 어색했던것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내게 묻는다.

미안함에 대한 표시로,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어렵사리 말하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 나 대답한다..

원치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졌다.

학생이신가, 결혼은 하셨는가, 직업은 무엇인가, 교회는 다니시는가....

내가 결코 즐기지 않는 개인적인 물음과 답변들이 오고갔다.

전도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비록 자신도 장애가 있지만 어느어느 도시에서 자신보다 더 심한 중증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노라고 설명을 하더니 문득 내게 서울사람들이 무섭고 너무 나쁘다고 말한다.

대답없이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 떼어놓는다.

오늘 교육이 있어서 서울에 왔다... 교육끝나고 동서울 터미널에 가서 식사하기전에 차표먼저 끊어놓으려고

보니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이 없어졌다... 벼룩이 간을 내어 먹지 어떻게 이럴수가 있느냐.....

...

울먹이는듯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면서 내게도 지하철 타고 다닐때 소지품 조심하시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안됐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얼까, 내게 도움을 바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대화를 더이상 잇고싶지않아 짐짓 앞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계속해서 내게 말을한다..

다행히 아는 사람과 연락이 닿아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두시간 동안이나 나를 찬바람 속에 서 있게

만들었다... 전화기도 꺼 놓고 일부러 안 만나 주는것 같다...  또 다른 사람과 연락이 되어 지금 석계역으로

가고 있는중인데 만약 그 사람도 날 만나주지 않으면 큰일이다.. 서울에는 더이상 아는사람도 없다...

...

지하철은 어느새 내 목적지인 제기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것인가,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인가 갈등하며 내 지갑안의 돈을 계산했다.

달랑 만원짜리 한장..

난감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마침내 그의 입에서 좀 도와달라는 말이 떨어졌다.

지갑안의 만원짜리 한장.. 그것을 꺼내어 줄 것인가 말것인가 갈등할 시간이 다만 몇초라도 더 주어졌더라면

아마 꺼내어 주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죄송하다는 말로 거절의 의사를 대신하고 도망치듯 지하철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고 지하철은 다음역을 향해 떠났지만 난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힘들게 말하던 그의 한마디, 한마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지가 않는다.

돈이야 카드로 더 출금하면 되니까  가지고있는 돈을 줘 버릴걸 하는 생각..

아침의 언짢은 기분의 연장으로 '왜 하필 나야..' 하는 생각..

이런저런 수십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 마음이 영 불편하고 복잡하다.

내 행동에 대한 타당성을 도출하기 위해 그와의 대화에서 석연찮았던 부분들을 억지로 생각해내며

친구를 만났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거나 희석됨 없이 불편하고 심란한 마음에 친구에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내 행동에

대한 판단을 해 줄것을 요구했다.  

친구는 만약 그러한 상황이라면 이러이러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타당할텐데 오히려 그사람이 이상하다며

내가 속을뻔 한거라고 얘기를 한다...  물론 불편한 내 심기를 헤아려 위로하려고 그랬을 것이다.

잊으라고, 잊어버리라고 내 등을 두드리는 친구를 보며 그러마고 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도 그의 말과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 지금 생각하건데 내가 그토록 심란했던 것은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때, 어려워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만났을때 그것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나의 때묻은 순수 그것 때문이었으리라... 

요즘 방송되고 있는 어떤 이동통신 광고에 나오는 꼬마가 있다.

산타 할아버지가 내 얼굴 알아요? 하고 순진한 얼굴로 묻는 아주 귀여운 꼬마..

그 광고를 볼때마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아주 소중한 것이 있는듯한 느낌이 들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오백원짜리 담배한갑을 신문지에 싸서 생신선물이라고 아빠에게 드리던 어린 내 모습이 기억난다.

수신인 주소에 "국군아저씨께" 라고만 달랑 써서 시키지도않은 위문편지를 보내던 어린 내 모습이 기억난다.

다친 어린참새를 주워다가 며칠간 극진히 보살피고 엄마찾아 가라고 숲에 놓아주며 엉엉 울던 어린 내 모습이...

아마 그때는 나에게 있었으나 지금은 갖고있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는것 같다.

아마 지금도 내가  아이의 순수함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면 아마 사람들은 나더러 바보라고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때의 순수가 그리울 뿐이지 다시 돌려받고 싶지는 않다.

다만,  순수함을 포기 해야만 영악하게, 손해없이 살아갈수 있게 되어버린 현실, 그래서 쉽사리 남을 믿지

못하는 현실, 그런것들이 옳다 그르다 미처 판단할 새도 없이 같이 물들어 버린 내 모습이 가끔, 아주 가끔씩

슬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