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화가 났다. 적어도 그녀를 알고 나서부터 여태껏. 요즘 들어 이런 식으로 배신을 당했다는 기분이 자주 드는 건 왜일까. 비록 시나리오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녀와 제대로 토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작용했겠지만, 저렇듯 막무가내로 멋대로 배역을 결정지어 버리다니. 게다가 그 남자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사람인지도 모르고 덥석 월척이랍시고, 낚어 버리는 그녀의 넌 센스에 화가 났다.
“진즉에 당신이란 여자를 내 맘대로 하지 못한 게 원망스럽군. 제길!”
희뿌연 담배연기만큼이나 그녀의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답답한 석재는 괜한 화풀이를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소담스런 화단에 발길질로 쏟아 부었다.
‘파란 눈. 아무리 코발트빛의 파란 눈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나 나까지 그렇게 될 것 같아. 그의 눈은 마치........’
“그만 좀 보지?”
“네?”
“네 눈 말이야. 이상한 물건을 보듯 하는 당신의 태도가 싫어.”
그녀가 너무도 노골적으로 조단을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그가 느끼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한번도 그의 눈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는 왜 그런 쓸데없는 자격지심을 보이는 건지. 만약에 그가 아니 코발트빛의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연인이었다면 아마도 하루 종일 그 신비스런 눈빛에 빠져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 지도 모르고 황홀하게 보냈을 것이다. 그녀는 불현듯 든 엉뚱한 생각에 그와 마주친 눈을 차 창밖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런 뭐야~ 너 그런 느끼한 생각을 하다니.’
“뭐지 그 표정?”
“네? 아무것도 전 그냥 당신의 눈이 예쁘다고 생각 했어요.”
“뭐라고? 하 하하 하 하하 하하”
그는 그녀의 말에 차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남자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예쁘다는 말을 하는 그녀의 엉뚱함에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느꼈던 유쾌한 기분이 그를 또 다시 즐겁게 만들어 버렸다.
“이 이봐요. 조단씨 그만 좀 웃어요. 내가 농담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웃을 것 까진 없잖아요.”
나윤은 기분 나쁘다는 투로 조단에게 말했다. 그 순간 조단이 웃음을 멈추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너무나도 부드럽게 속삭여주었다.
“당신 입술도 꽤나 예뻐. 아니 매력적이군. 그래서 키스하고 싶은데?”
“헙! 뭐예요. 당신 왜 그런 말을 지금 나를 놀리는 거죠?”
그녀는 갑작스럽게 키스라는 단어를 강조하듯 말하는 남자에게 놀라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고 말았다.
“하 하하 그것 봐. 당신도 내 말을 못 믿잖아. 그래서 나도 당신이 하는 말에 꽤나 기분이 상한 사람이라고, 남자한테 예쁘다는 말은 계집아이와 같다는 말이란 걸 모르나”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그의 눈이 정말 예쁘다는 말을 삼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조단은 지금당장이라도 차를 세워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돼는 그의 말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생소하기만 했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 그녀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그런 감정이 그녀가 낯설 정도로 흥분되게 만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
“네?”
창밖을 보며,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있던 나윤은 자신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짝 그에게로 돌려놓는 조단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애써 태연하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생각 하냐고? 설마 정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말도 안돼는 소리 그만하시고, 운전이나 하시죠.”
그러고 보니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치고, 한국지리를 너무나 잘 아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능숙하게 몰아가는 조단의 운전솜씨에 작은 감탄을 삼키며, 자신의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있음을 아쉽게 실감했다.
“자. 그럼 내일부터 여기로 오면 되는 건가?”
“뭐....... 그렇죠.”
“뭐야. 그 말투?”
“네? 내 말투가 뭐요?”
“마치 골난 사람처럼 그리고 이건 계약서를 쓰기 전에 확실히 밝혀 두고 싶데 이 일은 나를 위해서 하는 거 보단 당신이 원해서 하는 거니까. 그렇게 억지로 하는 것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어. 당신이 싫다면 나도 안하면 그만이니까.”
“거참, 말 많네. 누가 보면 내가 외국에서 살다왔고, 당신이 한국에서 쭉 살아온 사람인줄 알겠네요.”
나윤은 시시콜콜 따지려 드는 그의 말을 이런 식으로 무마시켜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단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더니 그녀 앞으로 한발 한발 힘을 실어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주는 의미는 그녀에게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화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내려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갈게 있어서.”
그게 다였다. 도대체 무얼 짚고 넘어간다는 건지 그녀의 생각을 모조리 뒤죽박죽으로 흔들어 놓는 그의 코발트빛 눈동자를 응시하느라 그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
“내가 외국에서 살다온 건 확실해 하지만 난 엄연히 한국 사람이라고, 내가 잊고 살려고 했어도 어김없이 떠올려지는 한국사람. 다시는 내 앞에서 날 외국인 취급하지 말아줘.”
그는 역시 자신의 아름다운 눈을 원망하고 있었다. 왜.......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지 그녀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처럼 가족에게 버려진 것도 아닐 텐데....... 그녀는 생각보다 먼저 그의 눈 주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윤의 손길을 느낀 그가 한발 뒤로 물러났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의 아름다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를 위로해 주고 싶은 섣부른 마음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 눈 정말 아름다워요. 난 세상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눈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나윤의 말에 기막히다는 듯 조단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때어 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던 눈빛을 그의 마음처럼 차갑게 변하여 그녀를 응시했다.
“나도 알아. 내 눈을 신기해하는 당신들 마음. 하지만 난 당신들이 즐거워하는 동물원원숭이 보듯 하는 시선은 질린다고”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는 군요. 좋아요. 그건 당신 마음이니까. 하지만 당신이 왜 한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파란 눈을 하고 있는지는 나에겐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에요. 다만 당신을 내 작품과 연결 지을 수 있다는 게 나에겐 행운이란 생각이 드네요.”
나윤은 화를 내며, 그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얘기했다. 하지만 그의 눈이 너무 맘에 들어 신기할 정도를 넘어섰다는 걸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어차피 그의 눈은 그녀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구질구질한 설명 따위 그만두고 싶었다.
나윤은 그가 그녀의 말에 화를 내며, 차를 몰고 사라진 후에도 집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한참 동안을 빌라 앞을 서성거렸다. 그가 화를 내든 말든 그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일은 그의 매니저를 그녀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적어도 그를 한 시간 전에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해야 할 처지였다.
“그럼 당신이 내 매니저를 해 줘.”
조단의 말에 나윤을 비롯한 두 사람모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조단의 말에 석재가 조용한 목소리로 꽤나 기분 나쁘다는 듯 응수했다.
“당신 매니저는 우리화사가 알아서 결정지을 일이오.”
“난, 저 여자면 충분해요.”
그는 이제 아예 대놓고 손가락까지 가리키며, 고집스럽게 그녀를 지목하고, 나섰다. 그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석재의 손이 무심결에 탁자를 내리쳤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위험스럽게 느껴졌는지 은지는 조심스럽게 조단을 향해 미소 지으며, 석재를 대신해 말을 했다.
“저 조단씨 이건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김 석재 이사님 말이 맞는 것 같은데요. 어차피 매니저라는 게 당신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을 말하는 건데........ 얘는 운전도 못하고, 거기다 시나리오를 작업해야하는 작간데........ 그냥 다른 사람으로 하시는 게”
“싫습니다. 그럼 저도 이일 하고 싶지 않아요.”
나윤은 어이가 없었다. 마치 ‘나 저거 사죠.’ 라고 문방구 앞을 지나던 아이가 엄마를 조르는 겪이라고 할까. 그의 태도는 사뭇 장난스럽게 보여 졌으나, 표정은 꽤나 진지하기 이를 대 없었다. ‘이럴 때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나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좋아요.”
“강 작가!”
그녀가 먼저 승낙을 하자 김 이사가 강하게 그녀를 막아섰다. 그런 김 이사를 재지한건 옆에 있던 은지였고, 그녀는 하던 말을 계속해 나갔다. 나윤이 바랬던 시너지는 그녀를 원했던 그가 스스로 그녀를 포기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싶었다.
“내가 당신의 매니저를 잘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한번 해도도록 하지죠. 하지만 나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난 운전도 못하고, 게을러서 더럽게 말 안 들어 처먹거든요.”
나윤의 마지막 말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버렸다. ‘지금은 좋다고 웃겠지 하지만 정말 난 더럽게 말 안 들어 줄 거야.’ 그녀는 그의 웃음을 고개까지 까닥여 주며, 응수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이사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그들을 버려두고 레스토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은지마저 그들을 놔두고 김 이사를 쫓아 나가 가버렸다.
“저 두 사람 화가 단단히 났나 봐요.”
“당연하죠.”
그녀의 당연하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조단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또 다시 사람을 빨아 들이 는 듯한 저 눈빛. 으~ 지독히도 깊군.’ 그의 눈 속에 자신의 얼빠진 모습이 비쳐보이자 그녀는 서둘러 몸을 경직시켰다.
“우리도 그만 가죠.”
“잠깐. 당연하다는 말 무슨 뜻인지 물어도 돼?”
“그건........ 그냥 우리 둘 다 저 두 사람이 보기에 쿵~짝이 잘 맞아서 그래서 샘이 났나 봐요.”
나윤의 부연 설명에도 그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나윤은 그녀의 27살 생일 기념으로 얻은 10년산 프랑스제 와인 한 병을 받아들고, 어정쩡하게 도로를 서성거렸고, 함께 나왔던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의 눈앞으로 까맣게 세팅 된 승용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창문이 열리며, 조금 전 사라진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그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운전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묵을 깨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할 건 아니죠?”
“뭘?”
“뭐긴요. 나를 당신 매니저로 원한다는 거 말이에요.”
“난 한번 한말 취소하는 사람 아니야.”
진지한 말투도 모자라 저 진지한 표정은 또 뭐람. 그의 너무도 진지한 모습이 그녀를 아연질색하게 만들었다. 결국 당신이 날 포기하게 만드는 것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새벽 2시를 조금 넘긴 시간 나윤은 잠을 못 이루고 있었고, 그 시간까지 김 이사를 쫓아 나간 은지는 연락도 없다. 할일 없이 거실을 배회하던 그녀의 걸음이 은지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혹시나 그녀가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은지가 들어온 건 아닐는지 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그녀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녀의 걱정을 알기라도 하 듯 마침 전화가 왔다.
“어디야!”
“어. 미안 나 오늘 못 들어가겠다. 사정이 좀 생겼어.”
“사정? 무슨 사정? 너 혹시 김 이사랑 같이 있는 거야?”
“많은 걸 묻지 마셔요. 그냥 자. 그럼 끊는다.”
은지는 자신의 말만 남긴 채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뭐하자는 거야. 이거 혹시 김 이사랑 사고치는 거 아닌가?”
그녀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지는 다음날 늦은 정오가 되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밤새도록 묻고 싶었던 질문을 차마 하지 못했다. 나윤의 눈에 비친 그녀는 무척 지치고,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은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에게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 놓지 않는 친구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지금으로썬 그녀의 어떠한 질문도 견뎌낼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길고 지루한 김 이사와의 밤은 그만큼 그녀로 하여금 절망만 안겨주었다.
“내가 그렇게 매력 없냐?”
“뭐래는 거야? 밤새도록 어떤 놈들과 어울려 놓고선 왜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는 건데?”
“풋~ 하하하 그렇지 바로 그거 거 던 내가 천하의 내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런데 말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맘에 드는 남자란 놈은 날 무시하는 거냐고”
은지는 단지 그 말만 하고선 또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오후에 있을 미팅에 입고갈 옷을 고르기 위해 분주히 시간을 보냈다.
“참, 너 진짜 그거 할 거야?”
“뭐 말이야?”
“뭐긴 조단씨의 매니저일. 난 사실 조단씨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니까. 그 남자 널 언제 봤다고, 게다가 넌 운전도 못하잖아. 사실 어제 널 불러내기 전에 그 남자에게 넌지시 물었거든 이런 일 있는데 한번 해보지 않겠냐.”
“그랬더니?”
“처음엔 무조건 웃기만 했어. 그러고 나서 내가 없을 때 너랑 무슨 얘길 했는지 나한테 다시 전화를 했지. 하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매니저를 자기가 생각하는 사람으로 정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야. 처음엔 그게 나인 줄 알았다. 조단씨가 한국에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일등공신이니까. 아마 날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닌가 생각했지.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으로 정해도 되냐고 제차 물어 올 때도 난 아무 생각 없이 영화사에서도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말해 버렸던 거였고, 하지만 이거 예상외로 조단씨의 생각이 의심스럽단 말이야.”
나윤도 친구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운전을 못한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그녀를 매니저로 낙점하고 말았다. 한석이 처음 영화사 일에 발을 들여놓았을 무렵 그 녀석의 당당하던 표정이 낯선 세계에서는 무척이나 얼어있었다. 그 덕에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매니저 일을 자청해서 해야만 했다. 그들의 영화가 생각보다 더 뜨고, 그 녀석을 화려한 스타로 만들어 버렸을 무렵 그녀 스스로 더 이상 그의 그림자 노릇을 그만 두었지만, 여전히 그 녀석의 엉뚱한 일들의 뒤처리를 하느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건 그 만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넌 잘 해낼 거야. 한석이 때도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까지 네가 다 했잖아. 그래서 김 석재 그 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너 하나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건지도 모르지.”
“김 석재? 김 이사님 말이야? 참, 어제 왜 그렇게 화가 났었데?”
은지는 무신경한 나윤의 물음에 잠깐 동안 화가 났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따위 무시하기는 두 사람 다 무신경하긴 마찬가지지만 왠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무수한 오해가 생긴다.’는 어느 소설가의 글귀가 떠올라 친구를 향한 질투심을 한쪽 귀퉁이로 밀어내버렸다. ‘그래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나를 제대로 보이지 못하는 내 잘못일 거야.’
“야! 송 은지!”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귀 따 거.”
“김 이사님이 왜 화가 난건지 물었잖아. 왜 대답 안 해!”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지. 나도 그 사람이 왜 화를 냈는지 몰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눈치가 구단인 송 은지 일지라도 그녀 맘대로 알고 있는 것과 그가 얘기를 해주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으니까.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서두른 다음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딩동! 딩동!’
“어? 누구지?”
문을 열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윽~ 위험한 저 미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가 영화를 시작하며, 대박은 나겠는 걸’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하얀 치아를 들어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웬 일이에요?”
“설마 어제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운전을 못하는 건 괜찮지만, 약속을 잊어버리는 건 매니저로써 낙제인데........”
그의 말에 기회를 놓칠 새라 그녀가 바로 응수하고 나섰다.
“맞아요. 나 머리 무지 나빠서 매니저 그거 못해요. 하하 당신 참 영특하시네.”
그가 그녀의 말에 기막히다는 듯 웃더니 그녀의 집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어떨 결에 그를 집안으로 들이고 보니 여간 어색한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뭐야. 이 기분 남자가 한두 번 집에 온 것도 아닌데........ 저 남자라고 다를 게 있냐. 태연하게 굴자고, 강 나윤’
“차 마시고 싶어요?”
나윤의 질문은 어딘지 어색하기만 했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어렵게 꺼낸 말들이 뒤죽박죽 섞이듯 그렇게 어색하기만 했다. ‘이런 젠장 차라리 말을 말자.’
“그럼, 커피 마실 수 있나?”
“네. 물론이죠. 참 우리 집엔 원두커피는 없어요. 다방커피만 존재 하죠.”
그녀는 차를 타는 행위나 음식을 만드는 행위를 가장 싫어했다. 다른 건 금방 습득하는 그녀가 운전하는 것과 요리하는 것에는 커다란 장애를 가진 것처럼 습득불능의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녀의 옆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은지마저 그 부분에 대해선 포기한지 오래였다.
“너처럼 둔한 애는 처음이다. 운전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여자가 음식을 할줄 모르냐”
은지의 말에 나윤 역시 시대착오적인 남자가 여자가 하는 사상 따위 쓰레기통에나 버리라는 듯 응수해 주었지만, 역시나 그녀의 차타는 솜씨는 너무도 형편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일회용차를 사서 마시는 거였다.
따뜻한 물에 잘 녹은 커피 두 잔을 들고, 그와 그녀의 앞에 하나씩 놓아두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낯선 남자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다는 건 너무도 끔직 하리만치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우선 시나리오 좀 볼 수 있을까?”
그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을까? 그녀에게 말을 하는 목소리가 굉장히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긴장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윤은 생각 들었다. 그에게 자신의 시나리오를 건 내어주며, 희죽 웃고 말았다.
조단은 할말을 잃었다. 우선 그녀의 시나리오는 완벽 그 자체였다. 프랑스에서 의상학과를 다니면서 틈틈이 연극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그쪽 분야에서 조금씩 일을 하던 그로써도 너무나 괜찮은 작품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야기의 흐름이 자신의 성장기와 너무도 흡사해 혹여 그녀가 자신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1시간이 지났을 무렵 그는 드디어 그녀의 대본을 자신의 손에서 때어 놓았다. 물론 일부만 본 것이지만, 그래도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던 자신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무수한 기억들을 떨쳐내느라 그는 잠시 무거운 침묵을 고수했다.
나윤은 그의 기분이 점차적으로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뭔지 모르지만, 그녀의 글이 그를 힘들게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글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그의 표정은 마치 1000ml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 가쁘게만 보였다. 그의 앞에 놓인 다 식어 버린 찻잔으로 손을 내밀던 나윤의 손을 그가 덥석 잡아 쥐었다.
캐스팅 걸 - (3) 그 남자와 그 여자
#3. 그 남자와 그 여자
그는 화가 났다. 적어도 그녀를 알고 나서부터 여태껏. 요즘 들어 이런 식으로 배신을 당했다는 기분이 자주 드는 건 왜일까. 비록 시나리오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녀와 제대로 토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작용했겠지만, 저렇듯 막무가내로 멋대로 배역을 결정지어 버리다니. 게다가 그 남자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사람인지도 모르고 덥석 월척이랍시고, 낚어 버리는 그녀의 넌 센스에 화가 났다.
“진즉에 당신이란 여자를 내 맘대로 하지 못한 게 원망스럽군. 제길!”
희뿌연 담배연기만큼이나 그녀의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답답한 석재는 괜한 화풀이를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소담스런 화단에 발길질로 쏟아 부었다.
‘파란 눈. 아무리 코발트빛의 파란 눈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나 나까지 그렇게 될 것 같아. 그의 눈은 마치........’
“그만 좀 보지?”
“네?”
“네 눈 말이야. 이상한 물건을 보듯 하는 당신의 태도가 싫어.”
그녀가 너무도 노골적으로 조단을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그가 느끼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한번도 그의 눈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는 왜 그런 쓸데없는 자격지심을 보이는 건지. 만약에 그가 아니 코발트빛의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연인이었다면 아마도 하루 종일 그 신비스런 눈빛에 빠져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 지도 모르고 황홀하게 보냈을 것이다. 그녀는 불현듯 든 엉뚱한 생각에 그와 마주친 눈을 차 창밖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런 뭐야~ 너 그런 느끼한 생각을 하다니.’
“뭐지 그 표정?”
“네? 아무것도 전 그냥 당신의 눈이 예쁘다고 생각 했어요.”
“뭐라고? 하 하하 하 하하 하하”
그는 그녀의 말에 차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남자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예쁘다는 말을 하는 그녀의 엉뚱함에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느꼈던 유쾌한 기분이 그를 또 다시 즐겁게 만들어 버렸다.
“이 이봐요. 조단씨 그만 좀 웃어요. 내가 농담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웃을 것 까진 없잖아요.”
나윤은 기분 나쁘다는 투로 조단에게 말했다. 그 순간 조단이 웃음을 멈추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너무나도 부드럽게 속삭여주었다.
“당신 입술도 꽤나 예뻐. 아니 매력적이군. 그래서 키스하고 싶은데?”
“헙! 뭐예요. 당신 왜 그런 말을 지금 나를 놀리는 거죠?”
그녀는 갑작스럽게 키스라는 단어를 강조하듯 말하는 남자에게 놀라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고 말았다.
“하 하하 그것 봐. 당신도 내 말을 못 믿잖아. 그래서 나도 당신이 하는 말에 꽤나 기분이 상한 사람이라고, 남자한테 예쁘다는 말은 계집아이와 같다는 말이란 걸 모르나”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그의 눈이 정말 예쁘다는 말을 삼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조단은 지금당장이라도 차를 세워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돼는 그의 말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생소하기만 했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 그녀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그런 감정이 그녀가 낯설 정도로 흥분되게 만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
“네?”
창밖을 보며,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있던 나윤은 자신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짝 그에게로 돌려놓는 조단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애써 태연하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생각 하냐고? 설마 정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말도 안돼는 소리 그만하시고, 운전이나 하시죠.”
그러고 보니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치고, 한국지리를 너무나 잘 아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능숙하게 몰아가는 조단의 운전솜씨에 작은 감탄을 삼키며, 자신의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있음을 아쉽게 실감했다.
“자. 그럼 내일부터 여기로 오면 되는 건가?”
“뭐....... 그렇죠.”
“뭐야. 그 말투?”
“네? 내 말투가 뭐요?”
“마치 골난 사람처럼 그리고 이건 계약서를 쓰기 전에 확실히 밝혀 두고 싶데 이 일은 나를 위해서 하는 거 보단 당신이 원해서 하는 거니까. 그렇게 억지로 하는 것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어. 당신이 싫다면 나도 안하면 그만이니까.”
“거참, 말 많네. 누가 보면 내가 외국에서 살다왔고, 당신이 한국에서 쭉 살아온 사람인줄 알겠네요.”
나윤은 시시콜콜 따지려 드는 그의 말을 이런 식으로 무마시켜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단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더니 그녀 앞으로 한발 한발 힘을 실어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주는 의미는 그녀에게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화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내려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갈게 있어서.”
그게 다였다. 도대체 무얼 짚고 넘어간다는 건지 그녀의 생각을 모조리 뒤죽박죽으로 흔들어 놓는 그의 코발트빛 눈동자를 응시하느라 그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
“내가 외국에서 살다온 건 확실해 하지만 난 엄연히 한국 사람이라고, 내가 잊고 살려고 했어도 어김없이 떠올려지는 한국사람. 다시는 내 앞에서 날 외국인 취급하지 말아줘.”
그는 역시 자신의 아름다운 눈을 원망하고 있었다. 왜.......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지 그녀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처럼 가족에게 버려진 것도 아닐 텐데....... 그녀는 생각보다 먼저 그의 눈 주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윤의 손길을 느낀 그가 한발 뒤로 물러났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의 아름다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를 위로해 주고 싶은 섣부른 마음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 눈 정말 아름다워요. 난 세상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눈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나윤의 말에 기막히다는 듯 조단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때어 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던 눈빛을 그의 마음처럼 차갑게 변하여 그녀를 응시했다.
“나도 알아. 내 눈을 신기해하는 당신들 마음. 하지만 난 당신들이 즐거워하는 동물원원숭이 보듯 하는 시선은 질린다고”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는 군요. 좋아요. 그건 당신 마음이니까. 하지만 당신이 왜 한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파란 눈을 하고 있는지는 나에겐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에요. 다만 당신을 내 작품과 연결 지을 수 있다는 게 나에겐 행운이란 생각이 드네요.”
나윤은 화를 내며, 그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얘기했다. 하지만 그의 눈이 너무 맘에 들어 신기할 정도를 넘어섰다는 걸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어차피 그의 눈은 그녀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구질구질한 설명 따위 그만두고 싶었다.
나윤은 그가 그녀의 말에 화를 내며, 차를 몰고 사라진 후에도 집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한참 동안을 빌라 앞을 서성거렸다. 그가 화를 내든 말든 그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일은 그의 매니저를 그녀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적어도 그를 한 시간 전에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해야 할 처지였다.
“그럼 당신이 내 매니저를 해 줘.”
조단의 말에 나윤을 비롯한 두 사람모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조단의 말에 석재가 조용한 목소리로 꽤나 기분 나쁘다는 듯 응수했다.
“당신 매니저는 우리화사가 알아서 결정지을 일이오.”
“난, 저 여자면 충분해요.”
그는 이제 아예 대놓고 손가락까지 가리키며, 고집스럽게 그녀를 지목하고, 나섰다. 그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석재의 손이 무심결에 탁자를 내리쳤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위험스럽게 느껴졌는지 은지는 조심스럽게 조단을 향해 미소 지으며, 석재를 대신해 말을 했다.
“저 조단씨 이건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김 석재 이사님 말이 맞는 것 같은데요. 어차피 매니저라는 게 당신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을 말하는 건데........ 얘는 운전도 못하고, 거기다 시나리오를 작업해야하는 작간데........ 그냥 다른 사람으로 하시는 게”
“싫습니다. 그럼 저도 이일 하고 싶지 않아요.”
나윤은 어이가 없었다. 마치 ‘나 저거 사죠.’ 라고 문방구 앞을 지나던 아이가 엄마를 조르는 겪이라고 할까. 그의 태도는 사뭇 장난스럽게 보여 졌으나, 표정은 꽤나 진지하기 이를 대 없었다. ‘이럴 때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나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좋아요.”
“강 작가!”
그녀가 먼저 승낙을 하자 김 이사가 강하게 그녀를 막아섰다. 그런 김 이사를 재지한건 옆에 있던 은지였고, 그녀는 하던 말을 계속해 나갔다. 나윤이 바랬던 시너지는 그녀를 원했던 그가 스스로 그녀를 포기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싶었다.
“내가 당신의 매니저를 잘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한번 해도도록 하지죠. 하지만 나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난 운전도 못하고, 게을러서 더럽게 말 안 들어 처먹거든요.”
나윤의 마지막 말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버렸다. ‘지금은 좋다고 웃겠지 하지만 정말 난 더럽게 말 안 들어 줄 거야.’ 그녀는 그의 웃음을 고개까지 까닥여 주며, 응수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이사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그들을 버려두고 레스토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은지마저 그들을 놔두고 김 이사를 쫓아 나가 가버렸다.
“저 두 사람 화가 단단히 났나 봐요.”
“당연하죠.”
그녀의 당연하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조단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또 다시 사람을 빨아 들이 는 듯한 저 눈빛. 으~ 지독히도 깊군.’ 그의 눈 속에 자신의 얼빠진 모습이 비쳐보이자 그녀는 서둘러 몸을 경직시켰다.
“우리도 그만 가죠.”
“잠깐. 당연하다는 말 무슨 뜻인지 물어도 돼?”
“그건........ 그냥 우리 둘 다 저 두 사람이 보기에 쿵~짝이 잘 맞아서 그래서 샘이 났나 봐요.”
나윤의 부연 설명에도 그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나윤은 그녀의 27살 생일 기념으로 얻은 10년산 프랑스제 와인 한 병을 받아들고, 어정쩡하게 도로를 서성거렸고, 함께 나왔던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의 눈앞으로 까맣게 세팅 된 승용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창문이 열리며, 조금 전 사라진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그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운전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묵을 깨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할 건 아니죠?”
“뭘?”
“뭐긴요. 나를 당신 매니저로 원한다는 거 말이에요.”
“난 한번 한말 취소하는 사람 아니야.”
진지한 말투도 모자라 저 진지한 표정은 또 뭐람. 그의 너무도 진지한 모습이 그녀를 아연질색하게 만들었다. 결국 당신이 날 포기하게 만드는 것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새벽 2시를 조금 넘긴 시간 나윤은 잠을 못 이루고 있었고, 그 시간까지 김 이사를 쫓아 나간 은지는 연락도 없다. 할일 없이 거실을 배회하던 그녀의 걸음이 은지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혹시나 그녀가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은지가 들어온 건 아닐는지 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그녀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녀의 걱정을 알기라도 하 듯 마침 전화가 왔다.
“어디야!”
“어. 미안 나 오늘 못 들어가겠다. 사정이 좀 생겼어.”
“사정? 무슨 사정? 너 혹시 김 이사랑 같이 있는 거야?”
“많은 걸 묻지 마셔요. 그냥 자. 그럼 끊는다.”
은지는 자신의 말만 남긴 채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뭐하자는 거야. 이거 혹시 김 이사랑 사고치는 거 아닌가?”
그녀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지는 다음날 늦은 정오가 되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밤새도록 묻고 싶었던 질문을 차마 하지 못했다. 나윤의 눈에 비친 그녀는 무척 지치고,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은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에게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 놓지 않는 친구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지금으로썬 그녀의 어떠한 질문도 견뎌낼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길고 지루한 김 이사와의 밤은 그만큼 그녀로 하여금 절망만 안겨주었다.
“내가 그렇게 매력 없냐?”
“뭐래는 거야? 밤새도록 어떤 놈들과 어울려 놓고선 왜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는 건데?”
“풋~ 하하하 그렇지 바로 그거 거 던 내가 천하의 내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런데 말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맘에 드는 남자란 놈은 날 무시하는 거냐고”
은지는 단지 그 말만 하고선 또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오후에 있을 미팅에 입고갈 옷을 고르기 위해 분주히 시간을 보냈다.
“참, 너 진짜 그거 할 거야?”
“뭐 말이야?”
“뭐긴 조단씨의 매니저일. 난 사실 조단씨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니까. 그 남자 널 언제 봤다고, 게다가 넌 운전도 못하잖아. 사실 어제 널 불러내기 전에 그 남자에게 넌지시 물었거든 이런 일 있는데 한번 해보지 않겠냐.”
“그랬더니?”
“처음엔 무조건 웃기만 했어. 그러고 나서 내가 없을 때 너랑 무슨 얘길 했는지 나한테 다시 전화를 했지. 하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매니저를 자기가 생각하는 사람으로 정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야. 처음엔 그게 나인 줄 알았다. 조단씨가 한국에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일등공신이니까. 아마 날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닌가 생각했지.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으로 정해도 되냐고 제차 물어 올 때도 난 아무 생각 없이 영화사에서도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말해 버렸던 거였고, 하지만 이거 예상외로 조단씨의 생각이 의심스럽단 말이야.”
나윤도 친구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운전을 못한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그녀를 매니저로 낙점하고 말았다. 한석이 처음 영화사 일에 발을 들여놓았을 무렵 그 녀석의 당당하던 표정이 낯선 세계에서는 무척이나 얼어있었다. 그 덕에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매니저 일을 자청해서 해야만 했다. 그들의 영화가 생각보다 더 뜨고, 그 녀석을 화려한 스타로 만들어 버렸을 무렵 그녀 스스로 더 이상 그의 그림자 노릇을 그만 두었지만, 여전히 그 녀석의 엉뚱한 일들의 뒤처리를 하느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건 그 만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넌 잘 해낼 거야. 한석이 때도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까지 네가 다 했잖아. 그래서 김 석재 그 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너 하나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건지도 모르지.”
“김 석재? 김 이사님 말이야? 참, 어제 왜 그렇게 화가 났었데?”
은지는 무신경한 나윤의 물음에 잠깐 동안 화가 났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따위 무시하기는 두 사람 다 무신경하긴 마찬가지지만 왠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무수한 오해가 생긴다.’는 어느 소설가의 글귀가 떠올라 친구를 향한 질투심을 한쪽 귀퉁이로 밀어내버렸다. ‘그래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나를 제대로 보이지 못하는 내 잘못일 거야.’
“야! 송 은지!”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귀 따 거.”
“김 이사님이 왜 화가 난건지 물었잖아. 왜 대답 안 해!”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지. 나도 그 사람이 왜 화를 냈는지 몰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눈치가 구단인 송 은지 일지라도 그녀 맘대로 알고 있는 것과 그가 얘기를 해주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으니까.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서두른 다음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딩동! 딩동!’
“어? 누구지?”
문을 열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윽~ 위험한 저 미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가 영화를 시작하며, 대박은 나겠는 걸’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하얀 치아를 들어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웬 일이에요?”
“설마 어제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운전을 못하는 건 괜찮지만, 약속을 잊어버리는 건 매니저로써 낙제인데........”
그의 말에 기회를 놓칠 새라 그녀가 바로 응수하고 나섰다.
“맞아요. 나 머리 무지 나빠서 매니저 그거 못해요. 하하 당신 참 영특하시네.”
그가 그녀의 말에 기막히다는 듯 웃더니 그녀의 집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어떨 결에 그를 집안으로 들이고 보니 여간 어색한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뭐야. 이 기분 남자가 한두 번 집에 온 것도 아닌데........ 저 남자라고 다를 게 있냐. 태연하게 굴자고, 강 나윤’
“차 마시고 싶어요?”
나윤의 질문은 어딘지 어색하기만 했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어렵게 꺼낸 말들이 뒤죽박죽 섞이듯 그렇게 어색하기만 했다. ‘이런 젠장 차라리 말을 말자.’
“그럼, 커피 마실 수 있나?”
“네. 물론이죠. 참 우리 집엔 원두커피는 없어요. 다방커피만 존재 하죠.”
그녀는 차를 타는 행위나 음식을 만드는 행위를 가장 싫어했다. 다른 건 금방 습득하는 그녀가 운전하는 것과 요리하는 것에는 커다란 장애를 가진 것처럼 습득불능의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녀의 옆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은지마저 그 부분에 대해선 포기한지 오래였다.
“너처럼 둔한 애는 처음이다. 운전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여자가 음식을 할줄 모르냐”
은지의 말에 나윤 역시 시대착오적인 남자가 여자가 하는 사상 따위 쓰레기통에나 버리라는 듯 응수해 주었지만, 역시나 그녀의 차타는 솜씨는 너무도 형편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일회용차를 사서 마시는 거였다.
따뜻한 물에 잘 녹은 커피 두 잔을 들고, 그와 그녀의 앞에 하나씩 놓아두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낯선 남자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다는 건 너무도 끔직 하리만치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우선 시나리오 좀 볼 수 있을까?”
그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을까? 그녀에게 말을 하는 목소리가 굉장히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긴장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윤은 생각 들었다. 그에게 자신의 시나리오를 건 내어주며, 희죽 웃고 말았다.
조단은 할말을 잃었다. 우선 그녀의 시나리오는 완벽 그 자체였다. 프랑스에서 의상학과를 다니면서 틈틈이 연극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그쪽 분야에서 조금씩 일을 하던 그로써도 너무나 괜찮은 작품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야기의 흐름이 자신의 성장기와 너무도 흡사해 혹여 그녀가 자신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1시간이 지났을 무렵 그는 드디어 그녀의 대본을 자신의 손에서 때어 놓았다. 물론 일부만 본 것이지만, 그래도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던 자신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무수한 기억들을 떨쳐내느라 그는 잠시 무거운 침묵을 고수했다.
나윤은 그의 기분이 점차적으로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뭔지 모르지만, 그녀의 글이 그를 힘들게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글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그의 표정은 마치 1000ml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 가쁘게만 보였다. 그의 앞에 놓인 다 식어 버린 찻잔으로 손을 내밀던 나윤의 손을 그가 덥석 잡아 쥐었다.
“도대체 당신은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 낸 거지?”
그의 눈이 무섭게 빛을 발하며, 그녀를 다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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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 걸은
어디에 숨겨두었던지 찾기도 힘들었던 파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봄맞이 대청소중에 불쑥 튀어 나와준 캐스팅 걸...
너무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적어도 파일을 열어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까지는요... ㅠㅠ...
오타는 그렇다 치더라도 문맥이 맞지 않는 곳이 어찌나 많던지.
아무튼 여러분들도 혹시 오타나 문맥상 흐름이 안맞아서 안습이다 생각하시면,
그즉시 저에게 쪽지를 날려주세요.
물론 리플도 사양하지 않습니다만,
갠적으로 쪽팔린다구요...ㅋㅋㅋ
하여튼 오늘도 4부까지 올려볼랍니다. 여기까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