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던 연휴도 어느덧 다 끝나고 악몽같은 월요일이 다가오는 군요. 내일부터 중간고사인 독자분들은 저보다 더 내일이 오는 게 싫으시겠네요. 하하핫. ============================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 기억 - 흐음..... 민아와 오랜 시간 있으면서 느낀 바에 따르면 나의 셧다운 증상의 역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져 왔고 이젠 키스나 가벼운 스킨십 정도도 무리 없이 커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즉, 단련 내지 적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의 내공을 끌어올리는 데 지금처럼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물론 상대가 상대인 탓에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전에 가서 버벅거리거나 뻗어버리는 것 보다는 이런 형태로나마 연습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한나 - ..... 기다리다 날 새겠네. 멀뚱하니 서서 조각 감상하고 있어요? 뭐, 물론 워낙 조각 같은 몸매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 나이스 바디인 건 인정하지만 본인이 저렇게 말하니 어깨는 제쳐두고 한 대 쥐어박고 싶다. 기억 - 잠깐 심호흡 좀 하고. 까짓 거 못할 게 뭐 있냐는 쪽으로 생각을 굳힌 난 어깨와 목에 긴장을 풀며 천천히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섰다. 좋아, 이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나는 보다 강인한 남자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 간다! 기억 - ......... ....... 무리다. 결심에 걸린 시간이 100 이라면 체념에 걸린 시간은 0.3 정도.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공중에 멈춰버린 두 손은 대뇌를 향해 끊임없는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손대면 죽는다.= 기억 - ....... 으음. 이 사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의 근성이란 고작 이 정도였나. 한나 - 에휴, 됐어요. 안마 받으려다 속 타서 죽겠네. 같이 영화나 봐요. 결국 기다리다 지친 한나는 질렸다는 듯 어깨 너머로 손을 내저으며 TV 옆 비디오 진열장을 향해 걸어갔다. 한나 - 음. 이게 좋겠다.. TV와 마주보고 있는 3인용 소파에 가운데 자리를 비워놓고 앉은 한나와 나. 비디오의 내용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약간 유머러스하면서도 잔잔한 멜로물이었다. 기억 - 이런 영화 좋아해? 한나 - 뭐, 이런 쪽보단 화끈한 액션영화가 좋지만 그런 건 볼륨 줄여놓고 보면 재미없잖아요? 위에 언니도 자고 있는데.... 기억 - 아.... 그랬구나. 그럼 과자라도 좀 꺼내올까? 한나 - 아뇨, 전 이런 영화 볼 땐 절대 그런 거 안 먹어요. 옆에서 빠작빠작 거리는 것도 싫고... 그녀는 평소에도 영화에 상당히 몰입하는 편인지 이후 한 마디의 말도 없이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기억 - ....하암. 이미 체력은 바닥나서 기절 직전인 상황. 폭발음에 경기를 일으키며 깨는 한이 있어도 필사적으로 잠을 청할 상황에 멜로 영화는 자장가가 아니면 무엇이랴..... 기억 - ........ 영화가 시작한지 10분도 안 되어 팔걸이에 턱을 괸 채 곤한 단잠에 빠져든 나. 얼마나 곤히 잠들었는지 설핏 눈을 떴을 때 이미 영화는 끝나고 제작진의 이름이 화면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훌쩍.... 어떡해.... 훌쩍.... 기억 - 음? 한나 - 흑........ 흑........훌쩍........ 처음엔 TV 소리인가 했더니 바로 내 옆에 붙어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한나. 예상 밖의 광경에 놀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이내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날 돌아보며 소리쳤다. 한나 - 뭐해요? 여자가 옆에서 울고 있는데. 기억 - ...... 졸리니까 자고 있었지. 한나 - 지금이라도 깼으면 손수건 줘야 할 거 아녜요! 기억 - 없어 그런 거. 한나 - ...... 아이씨, 그럼 티슈라도 뽑아다 줘요! 기억 - ...... 네 앞에 있잖아. 한나 - 정말 센스 하고는..... 완전 누구랑 판박이라니까. 기억 - ..... 누구 말하는 거야? 한나 - 궁금해요? 문득,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빠, 누구랑 되게 닮은 거 알아요?= 그 땐 민아가 워낙 정색을 해서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그 =누구= 가 대체 누구인가에 대해선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내 속내를 읽었는지 언제 울었냐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리는 한나. 그녀의 반응으로 볼 때 여기서 =응=이라고 하면 보나마나 터무니없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지만 =아니= 라고 하면 이 의문은 영영 미지의 저편으로.... 기억 - .....응. 역시나 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을 마저 닦아내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한나 - 아아..... 갑자기 냉장고에 있는 오렌지로 직접 갈아 만든 오렌지주스가 마시고 싶네. 기억 - ..... 만들 줄 모르는데? 한나 - 누가 뭐래요? 그냥 마시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기억 - 편의점 가서 사오면 안 될까? 한나 - 그냥 마시고 싶을 뿐이라는데 왜 괜히 그래요? 그렇게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리고 전 분명 냉장고에 있는 오렌지로 =직접 갈아 만든=이라고 했는데요? .........정말 때려주고 싶다. 기억 - 맛없다고 탓하기 없기다. 한나 - 뭐, 오빠 양심에 맡길게요. 대답할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새벽 세시 반에 믹서로 오렌지를 갈게 될 줄이야. 게다가.... 아무리 100% 오렌지 주스라고 해도 라벨에 보면 구연산이니 뭐니 잔뜩 들어있던데 이렇게 그냥 믹서에 간다고 그게 오렌지 주스가 될까? 뭐.... 그거야 일단 마셔보지 않고야 모를 일이지만..... 기억 - 어디 보자.... 카악~ 시다! 쓰읍..... 일단 오렌지 하나를 그냥 통째로 갈아 마셔본 결과 오렌지 씨로 예상되는 까슬까슬한 가루와 시큼한 껍데기 맛이 절절히 어우러져 미각과 촉각 모든 면이 최악이었다. 시험공부 할 때 잠깨기용으로 쓰면 딱일 것 같다. 자.... 일단 시행착오 1회. 다음은 껍데기 벗기고 씨를 발라낸 뒤에 알맹이만 갈아보자. 기억 - ......너무 걸죽한데? 이후 5회에 거친 시행착오 끝에 난 얼음과 설탕, 오렌지 알맹이가 적당히 배합된 오렌지주스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기억 - ....... 이게 한계야. 맛없으면 어쩔 수 없고. 한나 - 어디.... 음~ 맛있네요. 계란, 치즈, 베이컨이 들어있는 토스트랑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기억 - 뭐랑 뭐랑 뭐? 한나 - 계란프라이, 치즈, 베이컨. 케첩 잊지 말고요. 기억 - ......... 간신히 통과인가 싶었더니 이번엔 토스트냐. 기억 - 아까 라면 먹었잖아. 한나 - 언제요? 쥬라기 시대에요? 그건 진작 소화됐죠. 기억 - ....... 살찐다. 한나 - 걱정 마세요~. 전 체질상 남은 열량은 전~부 바스트와 힙으로만 간답니다. ..... 할말 없다. 잠시 후, 새벽 5시 20분. 기억 - ..... 조금 있으면 첫차 다닐 시간이야. 빨랑 필름 주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줘. 한나 - 어머나.... 욕심도 많으셔라.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고요? 기억 - 두피마사지에 오이팩까지 도와줬잖아. 그 정도 했으면 된 거 아냐? 한나 - 누가 해달라고 했어요? 난 그냥 =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을 뿐인데 오빠가 알아서 해준 거잖아요. 기억 - ......... 주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한나 - 에이에이,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게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 짓지 말아요. 어쩜 그렇게 표정이 싹 변해요? 사람 무섭게.... 잠깐만 기다려요~, 내 안의 분노가 이성의 벽을 뛰어넘으려 도약하는 그 순간 그녀는 내 어깨를 툭 두드리더니 쪼르르 민아의 방으로 올라갔다. 기억 - 거, 거긴 왜.... 한나 - 쉬~잇.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어간 한나는 잠시 후 손에 조그만 앨범 하나를 들고 내 앞으로 돌아왔다. 한나 - 에... 어디보자. 언니 초등학교 때 사진인데.... 보여요? 여기 이 사람. 그녀가 펼쳐준 페이지엔 굳이 그녀가 손가락으로 짚어주지 않아도 바로 찾을 수 있었을 것 같은 외모의 남자가 민아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린 채 서 있었다. 내가 10년 쯤 후에 머리를 좀 기르고 안경을 쓰면 이런 모습이 될 거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의 옆에 바싹 붙은 채 너무나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 처음엔 장인어른(?)인가도 생각해 봤지만, 거실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속의 그녀 아버지와 이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기억 - ..... 누구야? 이 사람. 한나 - 누구긴요. 언니 첫사랑이지. 문득, 얼마 전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이 생각 난 나. =난.... 누나가 아니야= =누나가 돌아오면.... 기억이는 어떻게 할 거야?= =그게 생각이 필요한 일이었어?= 뭐지? 갑자기 왜 이렇게 화가 나지? 기억 - 집에 갈 거야. 아니, 그 전에....... 필름.... 필름 내 놔. 한나 - .... 필름 현상해서 그 사진 것만 빼고 나머지는 돌려 줘요. 친구들이랑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 잔뜩.... 기억 - 시끄럽고 빨랑 내놓으라고!! 한나 - ....어, 언니 깨요! 기억 - 필름.... 필름..... 빨리 내 놔. 빼앗다시피 필름을 받아 챙기고 푸르스름한 새벽녘의 언덕을 내려오는 길.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에 난 몇 번이나 내리막 아래로 곤두박질 칠 뻔했다. =뜬금없이 남자친구가 생겼다길래 왠일인가 했더니....= ..... 그런거니? 민아야.... 정말..... 난......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3화> 클론
꿈같던 연휴도 어느덧 다 끝나고
악몽같은 월요일이 다가오는 군요.
내일부터 중간고사인 독자분들은
저보다 더 내일이 오는 게 싫으시겠네요.
하하핫.
============================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
기억 - 흐음.....
민아와 오랜 시간 있으면서 느낀 바에 따르면
나의 셧다운 증상의 역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져 왔고
이젠 키스나 가벼운 스킨십 정도도
무리 없이 커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즉, 단련 내지 적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의 내공을 끌어올리는 데
지금처럼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물론 상대가 상대인 탓에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전에 가서 버벅거리거나 뻗어버리는 것 보다는
이런 형태로나마 연습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한나
- ..... 기다리다 날 새겠네.
멀뚱하니 서서 조각 감상하고 있어요?
뭐, 물론 워낙 조각 같은 몸매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 나이스 바디인 건 인정하지만
본인이 저렇게 말하니
어깨는 제쳐두고 한 대 쥐어박고 싶다.
기억 - 잠깐 심호흡 좀 하고.
까짓 거 못할 게 뭐 있냐는 쪽으로 생각을 굳힌 난
어깨와 목에 긴장을 풀며
천천히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섰다.
좋아, 이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나는 보다 강인한 남자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 간다!
기억 - .........
....... 무리다.
결심에 걸린 시간이 100 이라면
체념에 걸린 시간은 0.3 정도.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공중에 멈춰버린 두 손은
대뇌를 향해 끊임없는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손대면 죽는다.=
기억 - ....... 으음.
이 사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의 근성이란 고작 이 정도였나.
한나
- 에휴, 됐어요. 안마 받으려다 속 타서 죽겠네.
같이 영화나 봐요.
결국 기다리다 지친 한나는
질렸다는 듯 어깨 너머로 손을 내저으며
TV 옆 비디오 진열장을 향해 걸어갔다.
한나 - 음. 이게 좋겠다..
TV와 마주보고 있는 3인용 소파에
가운데 자리를 비워놓고 앉은 한나와 나.
비디오의 내용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약간 유머러스하면서도 잔잔한 멜로물이었다.
기억 - 이런 영화 좋아해?
한나
- 뭐, 이런 쪽보단 화끈한 액션영화가 좋지만
그런 건 볼륨 줄여놓고 보면 재미없잖아요?
위에 언니도 자고 있는데....
기억 - 아.... 그랬구나. 그럼 과자라도 좀 꺼내올까?
한나
- 아뇨, 전 이런 영화 볼 땐 절대 그런 거 안 먹어요.
옆에서 빠작빠작 거리는 것도 싫고...
그녀는 평소에도 영화에 상당히 몰입하는 편인지
이후 한 마디의 말도 없이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기억 - ....하암.
이미 체력은 바닥나서 기절 직전인 상황.
폭발음에 경기를 일으키며 깨는 한이 있어도
필사적으로 잠을 청할 상황에
멜로 영화는 자장가가 아니면 무엇이랴.....
기억 - ........
영화가 시작한지 10분도 안 되어
팔걸이에 턱을 괸 채 곤한 단잠에 빠져든 나.
얼마나 곤히 잠들었는지
설핏 눈을 떴을 때 이미 영화는 끝나고
제작진의 이름이 화면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훌쩍.... 어떡해.... 훌쩍....
기억 - 음?
한나 - 흑........ 흑........훌쩍........
처음엔 TV 소리인가 했더니
바로 내 옆에 붙어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한나.
예상 밖의 광경에 놀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이내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날 돌아보며 소리쳤다.
한나 - 뭐해요? 여자가 옆에서 울고 있는데.
기억 - ...... 졸리니까 자고 있었지.
한나 - 지금이라도 깼으면 손수건 줘야 할 거 아녜요!
기억 - 없어 그런 거.
한나 - ...... 아이씨, 그럼 티슈라도 뽑아다 줘요!
기억 - ...... 네 앞에 있잖아.
한나 - 정말 센스 하고는..... 완전 누구랑 판박이라니까.
기억 - ..... 누구 말하는 거야?
한나 - 궁금해요?
문득,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빠, 누구랑 되게 닮은 거 알아요?=
그 땐 민아가 워낙 정색을 해서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그 =누구= 가 대체 누구인가에 대해선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내 속내를 읽었는지
언제 울었냐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리는 한나.
그녀의 반응으로 볼 때 여기서 =응=이라고 하면
보나마나 터무니없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지만
=아니= 라고 하면 이 의문은 영영 미지의 저편으로....
기억 - .....응.
역시나 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을 마저 닦아내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한나
- 아아..... 갑자기 냉장고에 있는 오렌지로
직접 갈아 만든 오렌지주스가 마시고 싶네.
기억 - ..... 만들 줄 모르는데?
한나 - 누가 뭐래요? 그냥 마시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기억 - 편의점 가서 사오면 안 될까?
한나
- 그냥 마시고 싶을 뿐이라는데 왜 괜히 그래요?
그렇게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리고 전 분명 냉장고에 있는 오렌지로
=직접 갈아 만든=이라고 했는데요?
.........정말 때려주고 싶다.
기억 - 맛없다고 탓하기 없기다.
한나 - 뭐, 오빠 양심에 맡길게요.
대답할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새벽 세시 반에 믹서로 오렌지를 갈게 될 줄이야.
게다가.... 아무리 100% 오렌지 주스라고 해도
라벨에 보면 구연산이니 뭐니 잔뜩 들어있던데
이렇게 그냥 믹서에 간다고 그게 오렌지 주스가 될까?
뭐.... 그거야 일단 마셔보지 않고야 모를 일이지만.....
기억 - 어디 보자.... 카악~ 시다! 쓰읍.....
일단 오렌지 하나를 그냥 통째로 갈아 마셔본 결과
오렌지 씨로 예상되는 까슬까슬한 가루와
시큼한 껍데기 맛이 절절히 어우러져
미각과 촉각 모든 면이 최악이었다.
시험공부 할 때 잠깨기용으로 쓰면 딱일 것 같다.
자.... 일단 시행착오 1회.
다음은 껍데기 벗기고 씨를 발라낸 뒤에
알맹이만 갈아보자.
기억 - ......너무 걸죽한데?
이후 5회에 거친 시행착오 끝에
난 얼음과 설탕, 오렌지 알맹이가 적당히 배합된
오렌지주스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기억 - ....... 이게 한계야. 맛없으면 어쩔 수 없고.
한나
- 어디.... 음~ 맛있네요.
계란, 치즈, 베이컨이 들어있는 토스트랑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기억 - 뭐랑 뭐랑 뭐?
한나 - 계란프라이, 치즈, 베이컨. 케첩 잊지 말고요.
기억 - .........
간신히 통과인가 싶었더니
이번엔 토스트냐.
기억 - 아까 라면 먹었잖아.
한나 - 언제요? 쥬라기 시대에요? 그건 진작 소화됐죠.
기억 - ....... 살찐다.
한나
- 걱정 마세요~. 전 체질상 남은 열량은
전~부 바스트와 힙으로만 간답니다.
..... 할말 없다.
잠시 후, 새벽 5시 20분.
기억
- ..... 조금 있으면 첫차 다닐 시간이야.
빨랑 필름 주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줘.
한나
- 어머나.... 욕심도 많으셔라.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고요?
기억
- 두피마사지에 오이팩까지 도와줬잖아.
그 정도 했으면 된 거 아냐?
한나
- 누가 해달라고 했어요?
난 그냥 =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을 뿐인데
오빠가 알아서 해준 거잖아요.
기억 - .........
주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한나
- 에이에이,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게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 짓지 말아요.
어쩜 그렇게 표정이 싹 변해요? 사람 무섭게....
잠깐만 기다려요~,
내 안의 분노가 이성의 벽을 뛰어넘으려 도약하는 그 순간
그녀는 내 어깨를 툭 두드리더니
쪼르르 민아의 방으로 올라갔다.
기억 - 거, 거긴 왜....
한나 - 쉬~잇.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어간 한나는
잠시 후 손에 조그만 앨범 하나를 들고 내 앞으로 돌아왔다.
한나
- 에... 어디보자. 언니 초등학교 때 사진인데....
보여요? 여기 이 사람.
그녀가 펼쳐준 페이지엔
굳이 그녀가 손가락으로 짚어주지 않아도
바로 찾을 수 있었을 것 같은 외모의 남자가
민아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린 채 서 있었다.
내가 10년 쯤 후에 머리를 좀 기르고 안경을 쓰면
이런 모습이 될 거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자.
그리고 그의 옆에 바싹 붙은 채
너무나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
처음엔 장인어른(?)인가도 생각해 봤지만,
거실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속의 그녀 아버지와
이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기억 - ..... 누구야? 이 사람.
한나 - 누구긴요. 언니 첫사랑이지.
문득, 얼마 전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이 생각 난 나.
=난.... 누나가 아니야=
=누나가 돌아오면.... 기억이는 어떻게 할 거야?=
=그게 생각이 필요한 일이었어?=
뭐지? 갑자기 왜 이렇게 화가 나지?
기억 - 집에 갈 거야. 아니, 그 전에....... 필름.... 필름 내 놔.
한나
- .... 필름 현상해서 그 사진 것만 빼고
나머지는 돌려 줘요.
친구들이랑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 잔뜩....
기억 - 시끄럽고 빨랑 내놓으라고!!
한나 - ....어, 언니 깨요!
기억 - 필름.... 필름..... 빨리 내 놔.
빼앗다시피 필름을 받아 챙기고
푸르스름한 새벽녘의 언덕을 내려오는 길.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에
난 몇 번이나 내리막 아래로 곤두박질 칠 뻔했다.
=뜬금없이 남자친구가 생겼다길래 왠일인가 했더니....=
..... 그런거니?
민아야.... 정말.....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