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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면증] 2. 소녀.

박성인 |2006.06.23 01:56
조회 389 |추천 0

 


길었던 기자회견이 끝나고, 집을 향하는 민혁의 발걸음은 납덩이 마냥 무거웠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걱정이 가득한 마음에 눈앞으로 다가온 현관문이 너무나도 크고 무겁게 보였다.

키릭

초인종을 눌러 볼까 했지만, 이미 밤 열시가 넘은 시간. 민혁은 조심스레 주머니 속 열쇠를 꺼내 돌렸다. 기억나지 않는 여덟 살 어린 딸이 혹 깨진 않을 까 하는 배려에서였다.

“후- 다행이 자나보네.”

도둑고양이 마냥 슬쩍 연 현관문으로 사이로 보이는 새까만 어둠. 살금살금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조용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삼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는 집의 전경은 어둠에도 익숙하게 신발을 벗고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늦었네.”

“... 헉!”

잔득 조린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에 민혁의 입에서 헛숨이 새어나왔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뉴스 다 봤어. 나 기억 안 나는 거지?”

“아니 그게 저...”

“됐어. 아빠가 아직 아빠가 아니었을 때 다 말해줬으니까 뭐라 변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 딱 보니까 알겠는 데 뭘 아빠는 아빠야. 그건 삼년 전 내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변하지 않는 진실이야.”

“그, 그래... 하하... 그렇지.”

지금 것 무엇을 고민해 온 것일까?

민혁은 오히려 자신보다 배는 더 태연한 소녀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어떻게 설명하고, 이야기 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자신에 상태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드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밥은 먹었어? 아까, 쓰러졌다는 속보가 들린 게 이른 오후같았는데 지금은 밥이잖아.”

“아, 그게... 죽... 먹었어. 아... 하하...”

“그래?”

소녀는 어색하게 웃는 민혁을 바라보며 성큼 한걸음 다가섰다. 그리고는 얼룩진 바지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한번 맡아보고는 조그만 어깨를 으쓱거렸다.

“밥은 입으로 먹는 거지 옷 입은 다리. 그것도 바지로 먹는 게 아니네요. 아빠가 오기 전 이묘환 아저씨가 전화해서 다 말해줬어. 죽 엎질렀다며? 배고플 거라고 하더라. 많이 비웃던데. 다 큰 애가 갈 거라고.”

“아...! 그 치사한 인간!”

민혁은 휘휘 고개를 흔드는 소녀의 모습에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런 실수를 고자질쟁이처럼 일러바치다니... 거만하게 웃는 겉모습과 달리 어른스럽지 못하다.

“어둡다. 불 켜고 아줌마가 해두고 간, 음식 데워줄게. 일단 좀 씻어. 야채 죽 냄새 심해.”

“아... 어 그래. 알겠어.”

소녀는 다시금 어벙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민혁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난 주방으로 간다 아빠.”

“아... 어...”

쪼로로 주방을 향하는 소녀의 모습에 민혁은 복잡한 머리를 흔들어 깨웠다. 어찌 되었건, 긴 잠은 깨었고 자신은 자신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되었다는 게 좀 다르지만... 말이지.”

욕실을 향하는 민혁의 눈이 주방의 소녀를 향해 걸렸다.


쏴아아-

몸을 두드리는 샤워기 소리가 욕실 가득 퍼져나갔다. 20세기의 아날로그 시대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잠든 삼년간 가속화 되어 욕실까지 파고들었다. 눈 대충으로 맞춰야 하는 온도가 아닌 디지털화 된 적당한 샤워기의 온수는 몸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변덕의... 천재라...”

수많은 기자들이 떠들어 대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들은 이미 그 들 만의 세상에 빠져있다.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천재이자 최고의 불운함과 변덕을 갖춘 괴짜.

언론이 말하는 그의 모습은 누구나 한번 쯤 꿈꿔본 이상향의 천재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못하는 게 하나 없는 팔방미인쯤 될까?

항상 새로운 학문에 도전해 천재라는 수식어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그는 이미 전 국민들의 자랑이 된지 오래다.

“언젠가 또 기면증에 빠지고 나면, 나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겠지? 천재 천재 천재... 도대체 뭘까. 나는... 어떤 놈일까...”

뿌연 수증기에 가린 거울 사이로 비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삼년 전, 바로 어제같이 또렷한 기억속의 모습과 조금은 달라진 얼굴.

까칠하게 긴 수염을 매만지며 민혁은 거울 뒤 서랍 속에서 면도기와 면도 크림을 꺼내 들었다.

“삼년간 내가 뭘 했던 간에 하루에 한번 꼬박 꼬박 면도를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군. 나는 꽤나 수염이 빨리 자라는 편인데... 자식 게을렀던 모양이네.”

치이익- 면도 크림을 바르는 민혁의 입 꼬리가 작게 올라섰다.

수염. 

그렇게 삼년이란 시간동안 남모르게 유행에 맞춰 기른 수염이 깨끗하게 잘려나가는 순간이었다.


* * *


쩝쩝-

“천천히 먹어. 그러다 채하겠어.”

“응? 아아- 그래 하하...”

소녀는 허겁지겁 음식을 몰아 삼키는 민혁을 보며 말했다. 큰 어린애라는 설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다. 젓가락을 들고 혹, 누가 빼서 먹을 까봐 밥그릇 위에 맛있는 반찬을 올려놓는 모습은 영락없는 욕심쟁이 꼬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아빠. 대학 교수일은 이제 물 건너 간 거네? 가르칠 능력 없어졌을 테니까.”

“응? 아... 뭐 그렇지. 애초에 대학 강단에 섰던 게 잘 못이라고. 시한폭탄을 가지고 그런 곳에 서면 어떻게 해. 아아- 귀찮은 짓을 해버렸어. 정말이지...”

“밥은 다 삼키고.”

“아... 미안.”

튀어나오는 말과 함께 흐르는 음식물에 소녀의 얼굴이 찌부러지자 민혁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겉모습은 여덟 살 내기 꼬마가 분명한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왠지 자신이 꼬마가 된 기분이다.

어린 꼬마에게도 모성본능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마치 엄마처럼 찬찬히 살펴주는 소녀의 모습에, 민혁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이름이 유리였지?”

“응. 아빠가 지어준 이름은 아니지만 전에는 잘 어울린다고 예쁘다고 했었어.”

“그, 그래? 하하.. 하긴 정말 그래. 잘 어울려. 유리라는 이름이 최근에는 규사(硅砂)와 소다회·석회 따위를 섞어서 녹였다가 급히 냉각시켜 만든 물질을 총칭하고 있지만, 사실 옛날에는 유리(瑠璃)이름에 금빛의 작은 점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검푸른 빛이 나는 광물. 그러니까 검푸른 빛이 나는 보석을 총칭하는 말이었어. 네 눈이랑 머리칼처럼 검푸르고 빛나는 아름다운 보석 말이야.”

오늘 들어 처음으로 유리라는 이름을 불린 소녀는 얼굴을 붉히는 민혁의 쳐다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아빠는 똑같아. 기억이 지워졌다고 해도 아빠는 아빠야. 방금 전에 아빠가 한 말. 나한테 처음 했던 말이야. 그거 보석이라는 거 맑은 유리류(瀏)자에  유리리(璃)자를 말하는 거지?”

“응? 아... 하하! 그래 맞아. 나보다 더 똑똑한 거 아니야. 이제 여덟 살이라더니 한문도 줄줄 외네.”

“그야, 처음으로 아빠가 말해준 내 이름의 예쁜 뜻이니까. 처음으로... 들어본 내 이름이었으니까...”

“아...!”

민혁은 슬프게 웃는 유리의 모습에 한순간 자신의 말이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좋은 뜻으로 말한 이야기가 이렇게 와전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작게 고개 숙인 커다란 눈망울로 차오르는 투명한 눈물의 모습에 밥을 먹던 민혁의 몸이 부산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아... 그러니까. 좋은 뜻으로 그러니까... 그러니까...”

“히히. 알아 아빠가 무슨 말 하려고 한 건지. 하지만 안다고 해서 날 잃어버린 아빠의 모습이 슬프지 않거나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야. 슬픈 것은 똑같아. 미리 깨닫고 있었기에 준비 할 수 있던 거지. 덜 울고 많이 웃을 수 있다고 해도 슬픈 것은 똑같아.”

“그래... 그렇구나...”

씩씩하게 눈물을 닦고 웃어 보이는 유리의 모습에, 민혁은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몰랐을까?

매번 같은 상황이 익숙해진 다해서 슬프고 힘들지 않지 않다는 것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데... 왜 몰랐을까?

민혁은 유리의 태연함과 웃음 속에 가려진 슬픔이 그제야 보이는 듯 했다. 자신과 다르지만 같은 상황과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시큰해진 코끝으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빠 혹시 울어?”

“응? 아, 아니야! 내가 울긴 왜 울어. 하하! 자 봐라- 이 부리부리한 눈을!”

“에?”

유리는 억지로 치켜뜬 민혁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흐르는 눈물은 감출 수 있어도, 새빨개진 눈망울은 감출 수 없는 것이다.

“히히- 씩씩해서 좋네. 그럼 내일부터 아빠 일 안 나가는 거지?”

“응? 아, 뭐... 그렇겠지.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제발한 환자를 다시금 불러 쓸 수는 없을 테니까. 내일 부터는 집에 콕 박혀서 지내도 된다- 이 말이겠지.”

“진짜? 그럼그럼! 아빠 놀이공원 가자. 응? 전에도 데려가 주기로 해놓고서 미국으로 도망쳤잖아. 여름이고 유리도 방학했으니까. 놀이공원 가자. 응? 놀이 공원~”

“놀이... 공원?”

민혁은 옆으로 바싹 달라붙어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의 모습에 잠시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놀이공원에 마지막으로 갔던 것이 언제던가? 기억을 되뇌는 민혁의 입이 작게 열렸다.

“기면증에 빠져 건축학에 미쳐있을 때 일기장으로 본 것이 마지막이었던가? 사년? 오년은 더 됐겠군... 평생 무료라고 했는데 아직도 유효하겠지?”

“응? 뭐가?”

“놀이 공원. 잠실에 있는 여기는~ 논데월드 말이야. 좋아! 내일 같이 가서 실컷 놀자 주말도 아니고 사람도 별로 없을 테니까.”

“응! 아빠 최고!”

팔을 부둥켜안고 얼굴을 부비는 유리의 모습에 민혁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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