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중한 몸체, 늘씬한 옆구리선, 둔중한 느낌이 드는 이놈은 시속 250킬로나 나가는
괴물이었다. 처참하게 부서지고 으깨진 채 트럭에 실린 가사와키 400 시리즈는 곧 패기
처분될것이다. 자기의 주인과 운명을 같이 한 바이크의 모습도 대준과 다르지 않았다.
이대준 그는 충북 온양 사람이었다.
어려서 부터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우기고 다녔던 그는 스피드 광이었다.
오토바이에 미쳤고 자동차의 질주를 즐겨했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업계에서 내놓라하는 명 자동차를 줄줄이 외우고 다녔는데 그는
언젠가 미국 포드사의 스포츠카인 머스탱을 산다고 큰소리쳤다. 빠르기야 페라리나
포르쉐를 쫒아가지 못하지만 외관의 유려함은 머스탱이 매력있다고했다.
1964년 처음 시판되어 아메리칸 스포츠카의 영원한 상징이 된 머스탱과 관련한 잡지만
수십권쯤 지니고 있었다.
술에 취한 채 광란의 질주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다.
대준은 스피드에 미친 남자처럼 자주 질주에 모험을 걸곤했다.
그것이 언젠가 큰 사고로 이어질거라 추림이 말했는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맞으면 싸인좀 부탁합니다."
재복을 입은 경찰이 다가와 서류와 볼펜을 건넸다.
대준의 죽음뒤에 남은 것은 그의 일처리였다. 도로를 질주하다가 트럭과 충돌하고
마주오던 대형 화물차와 그대로 정면충돌을 일으켰다고 했다.
15톤 화물트럭의 앞부분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을 정도의 엄청난 충격이었다.
스피드 게이지의 바늘이 163 에서 멈추어져 있었다. 사고 당시 대준이 올린 속도는
그대로 멈춘 채 당신의 상황을 짐작케했다.
빠른 속력을 내는 자동차나 바이크의 사고는 종말을 가져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하고도 한동안 살아 있던것이 오히려 용하다고 의사들과 경찰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멍하고 기운없는 얼굴로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추림은 후둘거리는 다리로 대준의
빈소가 마련된 곳으로 향했다.
아침 열시 반.
고향에서 친척들과 식구들이 몰려와 그의 죽음에 절규하고 애통해하며 통곡의 바다가 되어 있었다.
"아이고. 니가 대준의 친구여? 대준이 그놈아가 숨을 거두며 너를 찾아다믄서?"
얼굴에 주름이 자글한 할머니가 구부러진 허리를 두드리며 다가왔다.
"......"
추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두운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대준이 숨을 거두면서도 끝까지 양미선을 걱정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으로 가족이 아닌 자신에게 그녀의 나머지 일을 부탁할 정도로 사랑한 것이다.
"이놈아! 왜 말을 못혀? 뭐라고 한겨? 말좀해봐!"
추림의 팔소매를 잡고 자지러지며 할머니가 고함을 질렀다.
"인사드려라. 대준의 작은 고모님이시다."
박도형이 초췌한 얼굴로 다가오며 말했다. 검은 양복에 검은색 넥타이를 메고 있는
그의 옷차림이 낮설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예. 추림입니다. 고모님. 그는... 편히 갔을 거예요. 너무 마음상해 하지 마세요."
"아이고. 우리 장손! 어떻하나... 원통하고 억울해서 어떻게 눈을 감았나... 아이고오!"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고모님을 뒤로하고 추림은 빈소가 차려진 위패
앞으로 다가갔다.
급하게 구한듯 보이는 확대한 사진속에 대준은 밝고 시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림속에 대준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났다.
작년 초여름에 용인 어딘가에 놀러 갔을때 찍은 사진이었다.
다른이도 아닌 자신이 찍어준 사진이라서 금새 떠올랐다.
하얀 국화꽃이 위패의 단상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가 가고 그를 위해 바쳐진
저 국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슴이 시려왔다.
믿을수가 없었다. 이것이 정녕 꿈이라면 빨리 깨어나기를 바랬다. 그와 함께했던
이년여간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며 감당못할 슬픔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어물며 화단의 난간에 엉덩이를 붙히고 앉았다.
미칠것 같았다. 너무 울어버려 이제는 울 힘도 없었다.
"편히 갔을거다. 마지막에 할 말 다했잖아."
익숙한 음성이 들려오며 누군가가 곁에 앉았다.
박도형이었다. 잠도 못자고 한밤중에 놀라 대준의 죽음을 지킨 그도 많이 속상하고
슬픈 얼굴이었다.
"병신같은 새끼! 편히가? 성기까지 말라고 그래요. 누구 마음대로? 신발놈!"
눈을 부릅뜨고 추림이 쌍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박도형은 그런 추림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누구보다 그와 친한 이가
추림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속상하고 견딜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거면 차라리 울어 새끼야. 솔직하지 못하게 감추지 말고."
"그런가요? 하긴 그런놈에게 욕하는것도 이상하지... 제명도 못채우고 간 놈인데....."
"믿을수 없다. 어제 멀쩡하던 놈이 한순간에 사라지다니... 난 믿고 싶지 않다!"
"후우... 차라리 나도 확 죽어버릴랍니다! 미칠거 같아요."
한숨을 내쉬며 추림이 우울하게 말했다.
"너 새끼야! 정신차려! 죽은놈은 죽은 놈이고...
너 요즘 왜그러는데? 이새끼가 정신을어디다가 두고 다니는거야?
대준이 한말 못들었어? 넌 그만큼 요즘 맛이 가있단 말이다."
"......"
말없이 어두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파랗게 변한 하늘이 맑고 청명했다. 이런날 대준은 간 것이다.
무언가 크게 어긋나고 있는 때였다. 하나같이 정상적인게 없었다.
자신을 되돌아 보고 추스릴 동기가 필요했고 큰 자각이 필요했다.
자신이 아닌 자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미... 시작은 그녀였던가? 아니다. 모든것은
자신에게서 시작된 일일수도 있으니 그녀를 탓하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걱정은 많았다.
양미선을 만나봐야 하는데,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대준은 거짓말로 둘러대라 했지만 그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녀는 알아야 하고 그럴 권리쯤은 있었다. 아니 꼭 알아야한다. 그래야 대준을 잊을
수가 있을 것이다. 힘들겠지만 견디어 낼것이다. 많은 어려움이 따를것이고 시간이
필요할 것이지만 세월은 그녀에게 약이 되어 줄 것이다.
대준이 무척 잔인한 부탁을 하고 떠나갔다. 부담... 부담감이 느껴진다. 대준을 대신해서
자신은 온통 그가 남긴 잔재를 떠안아야 한다.
뭐가뭔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왜 이런 가혹한 시련이 계속해서 다가드는지 몰랐다.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온통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파과... 그 강대한 고통뒤에 무엇이 오려고 힘든 고통이 수반되는 것일까!
눈물이 흐르려고해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기분 더럽구나. 이럴줄 알았으면 조금더 잘해주는 건데! 새끼... 편히 쉬어라.
나중에 나가거든 그때 신나게 어울려보자."
박도형이 하늘을 올려다 보며 음울하게 말을 내뱉았다.
'대준아... 간거구나! 편히 쉬어. 너 알지? 나안테 큰 빚 졌다는거? 나중에 갚아.
나 천천히 갈까? 나도 굉장히 힘들다. 나도 너처럼 가고싶은데... 욕할거니? 괴롭다.
넌 내게 잘살라 행복하라 힘들지 말라 했지만 쉽지가 않다. 거기 편하니? 응? 기다려.
나 천천히 갈께. 편히 쉬고... 날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줘... 조금 지나면 좋아지겠지 뭐.
내일 널 쉬게 해주러 갈꺼야. 충주호라고했지? 새끼아... 거기다가는 집 못짓는데.
그냥 거기서 쉴래? 흐흣! 나중에 만나자... 나쁜놈아! 편히 쉬어라......"
하늘을 올려다보고 마음으로 대준에게 말한 추림의 눈가에 뿌옇게 습막이 차올랐다.
어디선가 구름 한점이 다가와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 * *
이태원의 거리는 서울에 위치한 도시면서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한국에 거점을 둔 미군주둔기지가 위치해있어 그들의 문화와 풍습에 맞추어 발전한
것이 오래전이었다.
건물들도 미국의 그것들처럼 낮설고 이국적이었다.
거리엔 흑인이나 백인이 넘쳐났고 내국인과 비율은 절반가량이었다.
산뜻한 옷차림으로 이태원 중심가를 거닐던 유미는 몇번 들른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다른곳과 질적으로나 분위기가 달라서 무척 마음에 든 곳이므로 이곳을 하루에
한번쯤은 꼭 들러 차를 마시고 갔다. 벌써 수주째 그런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여자 종업원이 반갑게 인사를 해왔고 마주 인사한 유미는 늘 앉던
창가진 자리로 다가갔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창가를 내다보며 낮게 흐르는 음악의 선율에 마음을 맡겼다.
미국의 남부도시 샌프란시스코를 노래한 곡인 '샌프란시스코' 였다.
여기가 마음에 드는 이유중 하나가 이곳에서 들려주는 팝송 때문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곡들만 엄선된듯 흘러나와 우연히 들른 이곳 를 습관처럼 들르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어쩌면 거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난번 그 사건이후로 그도 자신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수연과 석호등에게 그의 거취를 물었다.
하지만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말만 들었다.
자신과의 일과 연관될 때마다 그의 흔적과 자취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괴로운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다.
괴롭고 죄책감에 견디지 못한 유미는 얼마 후 집을 나와버렸다.
이태원에서 바를 하는 막내 이모에게 자신을 의탁해 버린 것이다.
그도 사라졌듯이 자신도 사라져 버리려 한 것이지만 자신은 의도적이었다.
더이상 그를 대할 자신이 없고 사랑할수가 없었다.
자격상실! 그랬다. 자신은 이미 자격을 박탈당한 여자였다.
토요일날. 비오는 거리에서 집에 전화를 했다가 듣게된 사실, 불과 십분전에 추림이
전화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죽고만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져왔다. 보이는 듯했다. 자신을 기다리다 지쳐 자신에게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안되자 비오는 거리를 배회하고 다닐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잊어야했다. 더이상 그의 주위에 남아 있다면 그를 더욱 힘들고 피곤하게 만들것이었다.
다른 이들도 다 잊고 싶었다. 주위에 존재하는 이들은 모두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고 자신의 흔적조차 그들에게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사랑하지만 사랑해서는 안되는 남자. 이추림!
사랑하지만 자신의 사랑은 그를 힘들게 한다. 그래서 사랑해선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했다.
속상하고 애가 탔지만 그보다 그에게 저지른 자신의 거짓같은 행동이 더 중압감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자신은 추림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인지도 몰랐다.
남을 배려하고 이타적이지 못한 추림은 넓고 따듯한 가슴을 지닌 남자였다.
그에 반해 자신은 이기적이고 약속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여자로 낙인되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자신은 그런 여자인지도 몰랐다.
그날... 추림의 집앞에서 네시간을 떨며 기다렸지만 추림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시간도 기다리고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상실감에 지치고 죄책감에 억눌린
심정을 감당할수가 없었다. 결국 네시간동안 지친 몸으로 기다리다가 도망치듯
추림의 집을 떠나왔다.
몹시 그립고 만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점차 술에 의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언가 한곳이 빈듯 늘 공허한 상태로 거리를 배회했고 밤을 하얗게 지세우는 시간이
길어졌다.
만약 우연처럼 그를 만난다면 빌고 또 빌고 싶었다.
그는 다 용서하고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이 먼저 다가가
그를 만날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뻔뻔한 짓거리 같았다.
울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자신을 다그쳤다. 약해지기 싫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후회를 오랜동안 가슴에 떠안고 살아갈수는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어쩔수 없다고
우긴다고 해도 그러기는 싫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그때는 견디지 못할것 같았다.
어렵고도 험하다. 뭐가 이렇게 힘든것인지 도통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냥 좋아하는데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이렇듯 지치고 힘든것인지... 그의 목소리가
듣고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기운내라 웃어라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만큼 누군가를 그리워 하거나 그로인해 힘들어한적이 없었다.
이것의 정체가 사랑이라면 너무 큰 댓가를 치루고 있었다. 사랑의 힘은 어떤 고난과
고통도 이기게 해 준다고 하는데 모두 거짓말이다.
사랑이 받는것보다 주는 것임을 절실히 깨달은 유미는 추림에게 무엇하나 주지못한
자신 의 처지가 애처롭기까지 했다. 또한 원망스러웠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이미 일이란 일은 다 저질러 놓고도 무엇을 바라는 자신의 마음에 심한 배반감을
느꼈다.
후회할것을 무엇하러 그랬는지... 실수는 자신의 일이지만 다른이도 그렇게 생각해 줄것
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쇼파에 등을 깊게 묻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단상들이 떠오르고 모든것은 하나의 귀결로 이루어졌다.
이추림! 모든것은 그가 지배하고 명령했으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런것이다. 자신의 마음은 이렇게 온통 그를 그리워 하고 있고 의미를 부각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일이라도 정말 생긴 것일까? 잘 지내고 있을까?
지난번 일이 있었을 때 그의 모습은 너무 엉망이었는데 지금도 그러할까?
"미안해요 추림씨!"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유미의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 울지 않으려 하지만 그
강한 다짐은 매번 너무도 쉽게 깨어지고 말았다.
"보고싶어요 추림씨. 당신 괜찮은건가요? 나 때문에 당신 힘들지요? 못난 나로인해
당신을 힘들게 했다면 용서하세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진심이 아니에요.
실수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그렇지만 분명 진심이 아닌걸요. 믿어주세요...
믿어주세요!"
너무 그리워진 추림의 얼굴이 아른거려 주체할수 없는 격정에 유미는 길게 흐느껴
울었다. 상실감에 죽어 버리고 싶고 무이미해진 삶을 조각내고 싶었다.
"아아... 너무... 힘들어... 미칠것 같아!"
가슴을 부여잡은 유미는 몸을 웅크려 고통에 떨었다. 정말이지 참을수가 없었다.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고 아팠다.
"흑흑...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조용한 가게 안을 지키던 중년 여인의 눈에 비치는 한 여자는 수주째 같은자리 같은
모습으로 매번 슬프고 회한스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때문에 그렇게
서러워야 하는지 어느덧 궁금해진 중년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곧장 유미에게 다가간 여인의 입이 열리며 유미에게 인기척을 냈다.
"잠깐 말좀 할 수 있을까?"
여인의 음성에 젖은 얼굴을 든 유미의 표정은 온통 힘든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 * *
대준이 떠나간지 이주가 흘렀다.
삼일장으로 그의 불태워진 육신을 충주호에 흘려보낸 후 추림의 일탈은 무척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술병을 집으려하자 그의 손길을 잡아가는 이가 있었다.
중도에 가로막힌 추림의 손이 포악스럽고 거칠게 그 손을 털어내고 술병을 들어 올렸다.
"나쁜놈! 정말 너 너무하는거 아니니? 이게 뭐야? 너 이추림 맞는거야? 이러지마 제발!"
수연이 속상한 마음을 담아 말리려 했다. 두시간째 술만 들이키는 추림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하도 연락이 안돼서 아예 찾아와 버린 길이었다.
짐작은 맞았다. 지난번 보다 더 엉망인 모습으로 변해 있는 추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연의 눈에 비친 추림은 원래 그녀가 알고 있던 추림이 아니었다. 지난번 일이 있은
직후 달라지나 했더니 다시 어그러진 모습이었다.
"추림아. 이러지 말자 응? 너 이러면 안되는거 아니니? 왜 그러니? 도대체 왜 그러니?
나 너 이런모습 정말 싫다. 정신좀 차려. 추림아 제발 정신좀 차리라고!"
수연이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추림은 대꾸도 없이 술만 들이켰다.
벌써 상당히 취해있는 추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물처럼 쓰디쓴 술을 못마셔
죽은 귀신처럼 마셔댔다.
문득 추림이 잘못될까 걱정이 된 수연은 입술을 깨물고 추림에게 달겨들어 술병을
강제로 빼앗으려했다.
술병을 빼앗는가 싶었는데 여자의 힘으로 남자의 무력을 당할수가 없다는 것은
정설인 듯 추림의 팔힘은 수연이 당할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연은 계속해서 추림에게 들린 술병을 빼았으려했다.
"이러지 말라고! 나쁜놈! 이거 당장 내놔! 너 미쳤어! 미쳤다고!"
짝!
격분한 수연이 추림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다가 소리를 지르며 그의 뺨을 후려쳤다.
고개가 휙하고 돌아간 추림의 얼굴이었다.
"......!"
수연은 자신의 행동에 너무 놀라고 어이가 없어져서 입을 벌리고 추림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나간 손짓이었다.
"크크크... 크큭... 크하하하......!"
추림의 입에서 갑자기 괴소가 터져 나왔다.
수연은 놀란 얼굴을 더욱 굳혀버렸다. 괴이쩍은 웃음을 터트리는 추림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물줄기처럼 흘러 내리는 눈물이었다.
"크흐흐... 흐흐... 크하하하......!"
가슴이 심하게 저려왔다. 수연은 이 믿을수 없는 현실을 부정이라도 하는듯 머리를
흔들며 얼굴을 일그렸다.
"다 떠났다. 날... 버려두고 다 떠나버렸다! 크흐흐... 왜? 왜 가는데? 크흐흣... 흑흑...
가지마... 싫어... 가지마!"
쿵!
벽에 기대어 울며 정신없는 말을 늘이던 추림의 상체가 바닥으로 그대로 기울어 지며
쿵 하고 소리나도록 힘없이 늘어져 버렸다.
입을 헤벌리고 눈을 반개한 얼굴로 추림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대준이 떠나간지
이주... 모든것이 변해 버렸다. 삶이 삶이 아니듯 변했고 믿음과 진실이부서져갔다.
이십년동안 믿어왔고 믿으려했던 순수의 진실이 파괴되고 붕괴되고 있었다.
견딜수 없어 유미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듣게된 사실!
유미... 그녀가 사라졌다.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절망과 좌절위로 또다른 그것들이
덧씌워지고 세상을 집어삼킬 잔악한 악마의 파괴가 덮쳐들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쉬고 싶었고 잊어버리고 싶었다.
마음에 문을 걸어 잠거 버렸다. 이제는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지 말아야했다.
사랑... 애증이되고 그것은 분노로 변했다.
그리움 그것이 악마의 속삭임으로 돌변해갔다.
수연은 무언가 중얼거리는 추림의 목소리에 마음이 울렁거려 참을수 없었다.
벌떠 몸을 일으킨 수연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추림. 그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의 일그러진 행태가 가엽고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처럼 느껴졌고 그의 눈물에 가슴이 갈라져 오고 있었다.
몰랐다. 막연하게 느끼던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사랑일까? 그래!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것을 그렇게 표현한다.
추림... 널 사랑하는데 어쩌지? 넌 다른 사랑으로 힘들어 하고 있구나!
이러지마 제발... 너의 이런 모습 정말 싫어. 왜 그렇게 아파하는거니?
내게 기대면 안될까? 난 그녀와 다르게 널 대할수 있는데!
"흐흑... 변했어. 다 변했어! 이제 남은게... 뭐지? 크흑... 없다! 아무것도 없다! 우아악!"
가슴을 쥐어뜯으며 누운채로 몸부림을 쳐대는 추림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수연은
다가가 그의 머리를 들어 품에 안았다.
"추림아... 왜 그러니? 이러..지마. 나쁜놈아! 흑흑. 이러지마... 이러지마... 싫어.
그만해."
뒤틀린 세상아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품처럼 나도 그렇게 안아다오!
회색빛 하늘아 너의 슬픈 흔적인 비를 쏟아 버릴때 나의 아픔을 씻어낼 그것도 다오!
흘러가는 강물아 너의 일부에 내 그리움을 담아줄테니 멀리멀리 가져가다오!
굳건한 대지야 땅을 깊게 파헤쳐 주렴 나의 사랑을 묻을수 있게 해다오!
산아 산아 높은 산아 어딘가에 은밀한 곳을 알려다오 나의 기억을 숨기게 해다오!
"큭... 가는거야! 다 그렇게 가는거야... 다 가는거야... 다......!"
잔인한 운명앞에 선 자들의 눈물은 혈이다! 한이다! 파괴고 절망이었다.
한 하늘아래 두개의 운명이 하나로 합쳐지길 갈망하는 진통! 그것은 가혹한 사랑의
시작에 불과했다!
93년 5월! 하나의 운명이 별이 되고... 추림과 유미의 엇갈린 사랑은 또다른 애증을 잉태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