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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면증/상실의천재] 4. 그림 -2-

박성인 |2006.06.26 18:14
조회 279 |추천 0
 

“자, 그럼 그린다아-”

보기 좋게 가꿔 놓은 마당 앞,

민혁은 크레파스를 손에 쥔 채, 요리조리 구도를 잡는 유리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한 때, 천재 화가로 이름이 드높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 꿈속의 이야기일 뿐. 붓도 캔버스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마냥 낯설었다.

슥슥-

커다란 스케치북에 거침없이 크레파스를 대어 움직이는 유리의 손이 바빠졌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이 사실인지, 크레파스를 잡은 유리의 얼굴은 자못 진지했다.

연로한 화가처럼...

민혁은 옆으로 늘어놓은 화구들을 만지작거리게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무엇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 것일까?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 볼 수 도 없는 물건들에 한숨을 내쉬는 민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이 참! 아빠 자꾸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어떻게해 멋지게 그려 달라더니, 그 표정을 어떻게 멋지게 그려.”

“응? 아... 미안 미안. 어떻게 그려야 할 지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됐네. 미안해.”

“으휴! 됐어. 나 그려주는 게 그렇게나 싫고 귀찮으면 안 그려줘도 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화가나 부루퉁해진 유리의 두 볼에 민혁의 얼굴로 난처함이 스쳤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예쁘고 즐겁게 그림을 그려주고 싶지만, 사용법도 모를 화구들을 보자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자고로 그림이란 건 아빠. 이렇게 손으로 붓이나 크레파스를 딱 잡고 표현하고자 하는 상대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눈으로 열린 세상을 응시하며 그리는 거야. 하고 싶은 데로 그리고 싶은 마음대로.”

“하아- 장황하기도 하다. 그 말도 내가 해 준거니?”

“응? 아니, 이묘환 아저씨가 그랬어. 일전에 아빠가 병원에 가고, 나 혼자 남아서 그림 그리고 있었더니 유리는 그림에 소질이 있다면서 말해줬어.”

“... 그렇다면 만화책에 나온 말이겠군.”

“응? 뭐라고 아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작게 중얼거린 말을 되묻는 유리의 모습에 민혁이 얼버무리며 말했다. 그가 한 말이라면 백프로다. 읽는 것이라고는 의서와 만화책 밖에 없는 위인이니, 저런 멋진 말이라면 백프로 만화책에서 나온 말이 맞을 것이다.

“붓을 딱 잡고 표현하고자 하는 상대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눈으로 열린 세상을 응시하며 그린다. 이 말이지?”

“응. 이렇게 유리처럼 가슴을 딱 펴고 말이지.”

민혁은 자랑스레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는 유리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놓인 유화를 붓 위로 짜냈다. 밑바탕을 위한 연한 색의 물감이었다.

“아차차- 젯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 위로 붓을 대려는 순간, 민혁의 눈에 옆에 놓인 작은 통이 보였다. *젯소는 아교와 석회를 섞은 것으로 물감을 잘 먹게 하고 캔버스의 표면을 매끄럽게 해주어 그림을 그리기 쉽게 만들어주는 준비 도구입니다.

“아, 이미 발라 말려져 있나? 지금 젯소를 바르기엔 너무 늦었는데.”

젯소가 담긴 통을 보며 중얼거리던 민혁의 얼굴에 한순간 화색이 돌았다. 손으로 더듬어 본 캔버스 위로 잘 말라붙은 젯소의 감촉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음- 좋아. 그럼 당장 그림을 그려도 상관이 없겠지. 그럼 일단 스케치부터...”

처음 붓을 들었을 때의 어색함이 없이, 중얼중얼 그림을 그려나가는 민혁의 눈빛이 빛났다. 처음 보는 낯설기 짝이 없던 화구들이 오래된 친우처럼 반갑다. 붓, 팔레트, 캔버스 할 것 없이 손에 쥐어진 화구들이 잘 지냈냐는 듯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진정 예술을 원한다면 아이처럼 그려라 라고 했던가? 좋군.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아.”

자신 있게 붓을 놀리는 민혁의 얼굴 가득 웃음이 걸렸다.


“아아?”

크레파스로 범벅이 된 스케치북.

유리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있는 민혁의 모습에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매일 보던 마당이, 거울로만 보던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있던가?

진지하게 그림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민혁의 이마위로 굵은 땀방울이 맺혀 흘렀다. 혼을 깎는 다. 눈이 아닌 마음의 세상에 앉아 예술 혼을 깎아낸다.

‘과연 천재...’

유리는 자신의 움직임조차 느끼지 못한 채 캔버스 안의 세상에 열중 하고 있는 민혁을 바라보며 조용히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빛.

세상에 다시없을 빛이 깨어나고 있다.


“저걸... 내가 그렸단 말이지?”

텅 비웠던 거실을 채운 하나의 화폭.

민혁은 활짝 웃고 있는 유리의 그림을 바라보며 휘휘 고개를 가로저었다. 직접 그리고 말려 걸었음에도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 저 화려한 색채의 그림을 진정 스스로의 손으로 그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빠 뭐해? 안자?”

“음? 아아- 자야지. 우리 이쁜 딸 졸려?”

“응. 졸려. 자안득- 자안득- 피곤해.”

유리는 웃으며 묻는 민혁의 말에 피곤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웅크린 팔을 쭈욱 뻗어 말했다.

“이크! 그럼 안 되지. 자- 어서 가서 코 자자 이쁜 우리 딸.”

“응! 아빠도 빨리 자자.”

민혁은 베시시 웃으며 팔에 매달린 유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래 그럼 어디 푹- 자러 가볼까?”

“응응! 유리는 찬성. 푹 자고 좋은 꿈꾸자.”

“그래 자자!”

“와-”

신나게 웃으며 안아든 유리와 함께 침대 위로 뛰어든다.

행복한 단잠.

즐거운 꿈.

민혁은 베시시 웃고 있는 유리의 볼을 콕 하고 꼬집고는 침대 위 이불을 끌어 당겼다.

“잘자요 우리 딸. 오늘 보다 더 재미있을 내일을 위해서.”

“응! 헤헤- 아빠도 잘자요. 오늘 보다 더 재미있을 내일을 위해서.”

“히히히. 그래그래 자자-”

툭-

방을 밝게 밝혔던 형광등이 꺼지고, 웃음 가득하던 방으로 조용한 정적이 찾아왔다. 눈을 감고, 포근한 체온을 느끼며, 단잠에 빠진다. 생각 할 것이 많은데... 평소라면 복잡한 머릿속에 눈 한번 재대로 감지 못했을 텐데 잠에 취해버린다. 오랜 옛날, 어머니의 품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었던 그때마냥 민혁은 눈 한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엄습해오는 잠에 몸을 맞겼다.

하루. 

빛살처럼 빠르게 흘러간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 제목을 기면증에서 상실의 천재로 바꿀까 생각중입니다.

   최근 올려 둔 글에는 두 개 모두를 명시해 놓았으나, 차후 다음 화가 올때는

  전부 상실의 천재로 수정 할 생각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 위 글은 글쟁이의 개인 홈페이지 forpsi.cafe24.com 에서 먼저 연재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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