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10
비가 내리고 있는 대학 정문을 들어설 때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올 뻔 하였다. 베를렌느의 시(詩) 중에서 '비올롱'이라는 악기가 문득 생각이 났고 뜨거운 햇빛이 비닐처럼 드리워진 긴 담을 기억해냈다. 여기는 학생회관 옆 간이 휴게실이다. 너도 기억하겠지. 대학도서관의 검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앉아 있는 탁자 오른편에는 대학병원이 있다. 맑은 날이면 환자들이 파자마 차림으로 나와서 배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의 경험들과 감각들을 기억했다. 여학생 서넛이 마구 뛰어갔다. 시간은 오후 한 시. 문득 종교(宗敎)에 대해서 생각했다. 무엇인가 터득한다는 것이 편리한 일일까. 하지만 나는 나의 습관들을 무시하기로 하였다.
이상하지, 비가 오는 날씨에는 모든 사물들이 검게 보인다. 철저한 감각론자는 아니지만 인간의 내면을 언제나 새로운 느낌으로 채우는 외면적 실체는 존재할 것 같다. 얼마 전에는 길거리에 뛰어노는 작고 귀여운 애들을 보고 갑자기 네 생각이 났었다. 너를 생각하면 항상 무슨 구름 생각이 나. 가끔씩은 약간의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옆 좌석에서는 두 명의 사내가 역사(歷史)를 얘기하고 있다. 기다림이란 얼마나 파괴적일까. 몇 개의 구름들이 지상(地上)으로 내려오기 위하여 얼마나 작은 몸들로 찢기워져서 후드득 떨어지는지. 비가 개이면 숲으로 올라가 보면 좋겠다. 사랑은 서로의 그림자를 나눠 갖는 것일까.
-1984. 4. 17. 기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