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주성치여 영원하라

최진훈 |2006.04.14 18:40
조회 79 |추천 0


 

 주성치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머나를 꼬득여 폐업한 비됴가게에서

만원을 주고 사도록 사주했던 그 비됴!

물론 지금은 나의 소장품이 된 그 영화 서유기 월광보합과 선리기연

 

 지금껏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서유기를 1순위로

꼽고 싶다. 서유기는 어설픈 소품과 과장된 연기, 홍콩 무협물의 패러디가 난무하는 B급 코미디 영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좋다. 심히 감동적이까지 해서 눈물을 찔끔거리게까지 한다. 그런데 과연 이영화가 주성치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영화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싶다.

 주성치 영화를 관통하는 그의 인간상과 세계관이 없었다면 내가 이토록 주성치 영화의 매니아임을 자청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럼 과연 주성치가 바라보는 세상사와 인간상은 어떤 모습이길래 나는 이토록 열광하는가. 물론 지금 말하고자 내용은 다분히 주관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또 요즘 머리에 똥이차서 영어공부가 잘 되지 않는 관계로 많이 하는 뻘 짓의 일환으로 생각해 주길 바란다.

 

 원래 영화의 주인공이라 하면 매력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정석이다. 혹은 악랄하고 비열한 인간이라고 해도 나름의 매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주인공이 매력적이지 못할뿐더러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 그런인간의 얘기를 누가 돈을 내고 아까운 시간을 버려가며 보고 있겠는가.

 

 그런데 주성치는 속물이다. 속물정도가 아니다. 건전한 도덕성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보기엔 역겹기까지한 인물이다. 

 이는 그의 모든 영화에서 보여지는 일관된 주인공의 모습이다

속물에 겁도 많고 능력도 없는 그래서 어딜가나 인정은 커녕 남들의 비웃음 거리 밖에 되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 혹여 이런 인간이 세상에 있을까 싶기까지한 저질 잉여인간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의 숨겨진 속마음은 순수하거나 혹은 세상에 대한 사랑이 넘치거나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진 않을까.

 답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속물이다.

 

 주성치는 자기보다 힘이 약한 사람, 가진게 없는 사람, 못난 사람에겐 가혹하리만큼 악랄하게 군다. 비난하고, 때리고, 모욕하고 조롱하고, 가학적 새디스트의 전형이다. 일말의 자책도 없다. 남들이 보기엔 상대방보다 잘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굴욕을 당하는 상대방은 언제나 자신의 처우에 순응한다. 마치 본인은 당연히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혹은 이따위 대접을 받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반대로 자기보다 힘이 센사람, 가진게 많은 사람, 잘난 살람에겐 철저하게 복종한다. 얼굴에 침을 뱉고 욕을하며 얼굴에 오줌을 누어도 감내한다. 그러면서도 웃는다. 이는 또한 매저키스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주성치는 말한다. 자 보라 인간이란 저런 것이다. 사람위에 사람있고 사람 밑에 사람있다. 인간성이나 도덕률 따위는 애당초 인간에게 기대할 수 조차 없는, 살아 숨쉬는 것이 처참한 그런 존재일 뿐이다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하는 왜인지도 무엇을 위해서인지도 모르지만 그냥 살아가야하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의 영화속에서 언뜻보면 휴머니티나 사랑과 같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불쑥 불쑥 나타나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한다.

 

 허나 감히 말하건데 그것은 동정이나 자기 연민과 같은 감정의 그럴듯한 패러디에 불과 할 뿐이다. 동정은 자기 중심적인 감정이다. 연민또한 마찬가지, 결국 주성치는 사랑도 계산적으로 한다. 이는 처절한 삶의 도피처로 삼기 위한 허상에 불과 하다.

 

 많은 사람들이 주성치의 사랑에 대해 감탄한다.

'전 과거에 사랑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은 후에 큰 후회를 했습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겠소.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선리기연의 명대사라고 할 수 있다. 중경삼림의 패러디라고 하지만 원작의 감동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저 대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사에 대한 환멸과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주성치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은, 그것도 만년을 지속하고 싶은 그런 사랑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주성치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쌩뚱맞도록 쉽게 사랑에 빠져든다. 요괴 백정정과의 사랑도 그녀를 죽이러 간 그밤에 아무런 단서도 없이 시작되었다. 자하선자와의 사랑 역시 이유없이 눈물한방울에 시작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사랑이라고 이유없이 시작되는 뻘스런 그런 감정이라고 말이다.

 좋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것은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저질 잉여인간 새디 매저키스트에게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것이란 말이다. 더욱이 그런 이란들이 총집합한 주성치영화에서 순수한 사랑을 기대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주성치는 존재자체가 무의미한 인간사에서의 자신의 모습에대한 자기연민에 빠져들어 실체하지 않는 사랑을 약속한다. 만년동안 그 사랑을 지속하겠다고. 이는 반대로 만년동안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을 지속하겠다는 말과 다름아니다.

 

 섣부른 짐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분명히 그모습을 보았다. 대부분의 그의 영화 속에서 그는 마지막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곤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있는 그의 표정과 모습은 전혀 행복해 보이질 않았다. 웃고 있으되 왜 웃고 있는지 모를듯한 야릇한 그의 표정. 그것은 흡사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의 그것과 같이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었다.

 

 애당초 주성치는 사랑따위는 믿지 않는 인간이다. 그런데 왜 하필 사랑이라는 허상으로 도피하고자 했을까. 아마 사람들이 믿고 있는 사랑의 개념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헌신은 자기중심적인 인간에게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을런지도 모른다. 완벽한 자기부정을 위한 단하나의 단서 헌신, 결국 그는 죽음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사의 염증을 해결하기 위한 지상에서의 단하나의 탈출구인 헌신을 위해 사랑이란 개념을 택했을 것이다. 

 

 'Das Leben ist eine missliche Sache...'

삶이란 더러운 것이다.
23세의 젊은 쇼펜하우어가 늙은 시인 빌란드에게 한 말이다.

 

 나는 단언컨데 주성치의 세계관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생이란 맹목적인 삶의 의지만을 가질 뿐이기에 고통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쇼팬하우어가 자살을 예찬했다고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생의 본성인 맹목적인 삶의 의지가 제일의 전제이기에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무책임한 태도이다.

 이것이 주성치가 처절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차라리 죽어 없어져 버리는 것이 더욱 속시원할 것만 같은 삶을 연명한 이유가 아닐까.

 

  쇼팬하우어는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무욕구의 상태, 시공간계의 번뇌가 초월되고 형상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 곧 소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우리 의식이 의지로 가득 차 있는 한, 우리가 의지의 변함없는 희망과 근심이 담긴 수많은 욕망들에 몰두하는 한, 그리고 우리가 의지의 주관인 한, 우리는 결코 지속적인 행복이나 평화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왜 주성치가 헌신이란 개념의 사랑이란 마침표를 찍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특히 이런 세계관이 그 주제와 연결되어 완벽하게 잘 녹아들었는데 그것은 위에서 사랑에 대한 명대사를 읊조리며 금강권을 머리에 쓰는 모습에서 절정을 이뤘다.

 다른 영화에서 보여줬던 덜익은 감처럼 떫떠름했던 사랑으로의 도피는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농익은 모습으로 서유기에서 완벽하게 구현된 것이다.

 

 심각한 얘기를 하고자 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다.

 아무튼 난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 보기는 감독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관객이 정확히 받아들이는 것이라기 보다 관객 각자가 영화를 통해 자기가 보고 싶고 느끼고 싶은 것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나는 주성치 영화를 보면서 그의 과장된 행동속에 나 자신을 대입 보았다. 겉과 속이 다른 나의 모습을, 삼류임에도 삼류라고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나의 모습을 말이다.

 태초로부터 지금껏 언제한번 이세상이 꽃처럼 아름다운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살만하다며 자위하는 나의 모습에 침을 뱉어주는 주성치가 좋았다. 결국 나도 그와 다름아닌 새디 매저키스트이기 때문이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