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늙은 인디언들의 오두막 근처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이 인디언들이 전통적인 축제나 중요한 모임을 갖는 곳이라고 들었다. 나무들 위로 보이는 둥근 하늘과 멀리 언덕 사이로 뻗어 있는 작은 골짜기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땅에 새겨진 많은 기억들을 상상하려고 애를 썼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구르는 천둥으로부터 루비 계곡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디언들이 피로 서명한 협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1863년 쇼쇼니 부족이 살 수 있는 땅의 경계선을 확정하는 협정이 네바다 주의 루비 계곡에서 맺어졌다. 인디언 추장들과 사형 집행인들이 그 협정에 서명했고, 미국 의회가 그것을 승인했다. 하지만 우리가 맺은 조약은 피의 대가를 치른 것이었다.
당시 백인들은 인구도 많지 않았고, 인디언보다 세력이 약했다. 평화 협정을 맺자고 우리에게 온 자들은 바로 백인들과 그들의 정부였다. 백인들은 자기들끼리 남북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미합중국의 링컨 대통령은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에서 금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금을 운반하려면 네바다 주를 가로질러가야 했는데, 백인 정부는 금을 운반하는 모든 역마차를 안전하게 지킬 만큼 충분한 군인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역마차가 지나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평화 협정을 맺기를 원했다. 우리 쇼쇼니 족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고, 우리가 그 땅의 주인이었다.
백인들과 미합중국의 대표자들은 협정을 맺기 위해 쇼쇼니 부족의 추장들과 부족 사람들을 꼭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결국 만날 날짜가 정해졌다. 인디언들은 그날 축제를 열기로 결정했고, 모든 인디언들이 그곳에 모이기로 했다. 말 잔등이에 실려 그 소식은 사방으로 전해졌다.
인디언들은 풍성한 음식을 차려 놓고 큰 축제를 열 생각이었고, 그 자리에서 양측이 평화 협정에 서명하면 더 이상의 싸움은 없을 터였다. 그런 자리에는 총이 필요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무장도 하지 않고 가기로 했다.
약속된 시간에 쇼쇼니 부족 사람들과 추장들이 루비 계곡의 약속 장소에 모였다. 그들은 전부 비무장 상태였다. 백인 정부의 대표자들은 군인들과 함께 나타났는데, 그들 뒤로 총이 무리지어 세워져 있었다.
인디언들이 모두 모이자, 갑자기 백인 군인들이 총을 들고 미리 잡아온 한 인디언을 쏴죽였다. 백인들은 그 인디언이 역마차를 강탈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백인들이 인디언의 땅을 통과하려는 걸 방해하려는 모든 인디언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인디언의 사지를 찢어서 커다란 검은 솥에 넣고 끓였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인디언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죽은 사람의 인육은 먹으라고 강요했다.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동안 남자, 여자, 어린아이 가릴 것 없이 모든 인디언들은 동족의 인육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뒤 백인들은 부족 사람들에게 협정에 서명하게 했다. 우리가 맺은 협정은 피의 대가를 치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맺은 협정과 우리의 땅을 지킬 것이다. 언젠가는 백인들도 그 협정을 지켜야 할 것이고, 우리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모든 것이 공평해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구르는 천둥과 테모크 추장이 이끄는 한 무리의 쇼쇼니 족 사람들이 루비 계곡의 인디언 땅에서 함부로 사냥하고 술을 마시는 백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에 출전하는 전사처럼 얼굴에 물감을 칠하고 길을 나섰다. 그들은 백인들을 불시에 기습했고, 백인들은 쇼쇼니 족 전사들에게 쫓겨 인디언 보호 구역 밖으로 달아났다. 그 뒤로 사냥꾼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쇼쇼니 족 인디언들이 위선에 찬 인디언 담당국과 토지 관리국, 그리고 그들의 땅을 점령한 농장 주인들을 상대로 싸워온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협정의 서명에 얽힌 일들과 백인이 나타나기 전 수백 년 동안 행해졌던 축제와 의식을 떠올렸다. 백인들이 등장한 뒤로 사람과 대지의 조화는 깨졌고, 인디언들에게는 모든 일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출처 : 체로키 인디언 치료사가 말하는 마음과 영혼 구르는 천둥
체로키족의 죽음의 행진 - 인디언들의 '눈물의 역사'
할아버지는 나에게 정부군이 강제로 인디언들을 이주시킨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하셨다. 지난 일을 모르면 앞일도 잘 해낼 수 없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어느 날 정부군 병사들이 찾아와 종잇조각 하나를 내보이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새로운 백인 개척민들에게 체로키족의 토지가 아닌 곳에 정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서류라고 하면서 말이다. 체로키인들이 거기에 서명을 하자, 이번에는 더 많은 정부군 병사들이 대검을 꽂은 총으로 무장을 하고 찾아왔다. 병사들은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 종이에는 체로키인들이 자신들의 골짜기와 집과 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내용이 씌여 있다고 했다. 체로키인들은 어쩔 수 없이 저 멀리 해 지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 곳엔 체로키인들이 살도록 정부에서 선처해준 땅, 하지만 백인들은 눈곱만치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땅이 있었다.
병사들은 그 드넓은 골짜기를 총으로 빙 둘러쌌다. 밤이 되면 빙 돌아 피워놓은 모닥불이 총을 대신했다. 병사들은 체로키인들을 그 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른 산과 골짜기에 살고 있던 체로키인들까지 끌려와 우리 속에 든 소 돼지처럼 계속 그 원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거의 모든 체로키인들을 다 잡아들였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차와 노새를 가져와, 체로키인들에게 해가 지는 그 곳까지 타고 가도 좋다고 했다. 체로키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았다. 덕분에 체로키인들은 무언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볼 수도, 입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지켰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갔다.
정부군 병사들은 체로키인들의 앞과 뒤, 양옆에서 말을 타고 걸어갔다. 체로키 남자들은 똑바로 앞만 쳐다보고 걸었다. 땅을 내려다보지도 않았고 병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자와 아이들도 그렇게 했다.
기나긴 행렬의 맨 뒤쪽에는 아무 쓸모 없는 텅 빈 마차가 덜그덕거리며 따라왔다. 백인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갈 때면 백인들은 양옆으로 늘어서서 체로키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처음에 백인들은 덜그덕거리는 빈 마차들을 뒤에 달고 가는 체로키인들을 보고 멍청하다고 비웃었다. 체로키인들은 웃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백인들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향 산에서 멀어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병사들도 행렬을 멈추고 죽은 사람을 묻을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가 결국 전체의 삼분의 일이 넘는 체로키인들이 행진 중에 숨을 거두자, 병사들은 3일에 한 번씩만 매장할 시간을 주겠노라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체로키인들에게서 손을 떼고 싶은 게 그 병사들의 심정이었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 했지만 체로키인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는 대신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 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고 하염없이 걸었다. 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백인들 몇몇이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나 체로키인들은 울지 않았다.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체로키인들은 마차를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 미국 신대륙의 역사에는 1838~1839년에 걸쳐 1만3천여 명 정도의 체로키인들이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한 상흔이 남아 있다. 당시 1300km나 되는 거리를 행진해야 했던 체로키 인디언족 가운데 무려 4천여 명이 추위와 병, 사고 등으로 죽어갔다고 한다.
참내..인디언들도 속으로는 피눈물 났겠구먼... 지금 인디언들도 저런 선조들의 비극에 대해 알기는 하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