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때때로 억지나 미신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럴때면 내 나이가 뒤집히려는 그네처럼
불현듯 출렁거림을 느낀다.
나는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 하기는 커녕 그 점을 반기는편이다.
그런데 이렇듯 심한 멀미는 왜 생겨나는 것일까?
젊은날의 신화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의 불안은 여기서 출발한다.
+
그날 약속시간은 4시였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서점에 들어섰을때는 4시 5분전이었다.
밖은 몹시 바람이 불고 제법 쌀쌀했지만 서점안은 따스했다.
나는 김이 서린 안경을 벗었다.
일주일전 그녀의 전화를 받은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 제사가 있어서 나는 학원 강의를 마치자마자
강남에 있는 내 오피스텔이 아니라 부모님이 계신 삼선교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동안 학원에서의 위치도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고
결혼이 좀 늦어질 거란 예감을 제외하면 내 삶은
꽤 평온하고 만족스런 편이었다.
저녁 8시쯤 되었을까? 저녁을 먹고 난 후였다.
여자들의 속살거림과 기름진 음식냄새가 범벅이 된
부엌쪽의 소란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는 거실 탁자위에서
엄숙하고 진진한 자세로 붓펜을 쥐고 지방을 쓰고 이었다.
그 곁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나는
전화벨 소리에 무심코 수화기를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전화가 내게 걸려온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의 목소리가
“거기 안영준...씨 있으면 좀 바꿔주세요” 라고 했을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제가 안영준인데.. 누구십니까?”
“그럴줄 알았어”
다짜고짜 여자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 나왔다.
그럴줄 알았다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직 장가도 못가고 집에서 후식이나 축내고
신문이나 보고 그럴줄 알았다고”
“저 죄송하지만 누구십니까?”
내말에 오히려 상대방 여자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나 몰라?”
나는 정말 몰랐다.
그녀가 이름을 밝히기 전까지
나는 설마 전화를 건 사람이 그녀일줄은 짐작도 못했다.
“나 혜원이야. 내 목소리 안 변했는데”
“뭐? 혜원이라구? 민혜원이?”
내 목소리가 다소 높았는지 아버지가 돌아보았고,
부엌쪽에서 호기심 많은 사촌동생이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
“응 나야”
듣고보니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때 하필 내 입에서
왜 이런 어리석은 물음이 튀어 나왔는지 모르겠다.
“너 결혼했잖아?”
“했지”
침착하고 야무진 그녀의 대답을 듣고서야 나는
내 질문이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는지를 알아차렸다.
“결혼했으면 전화하면 안돼?”
그녀가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나를 공격해왔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아니라 뭐?”
“너무 갑자스러워서 그렇지”
“그렇지? 정말 되게 오랜만이다?”
그녀가 내말을 순순히 긍정하는 순간,
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2년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6년만이었다.
2년전의 짧은 부딪침은 도저히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더이상 삼선교 집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전화를 걸었다.
그날 그시간, 내가 거기 없었더라면 그녀는
전화를 그냥 끊었을 것이고 내 오피스텔 전화번호까지 알아내서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만나게 된것은 오로지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
쿵!
서점의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다.
안경을 닦아 쓰고보니 문을 미어지게 닫은 장본인인 중학생이
힘차게 뛰어가는 모습이 서점 유리를 통해 보였다.
“어이구, 제가 아주 문을 부수구 가네”
서점 남자가 이렇게 말할때
나는 화사하게 들어서는 그녀를 보았다.
분명 민혜원이었다.
그녀는 한창 유행인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부츠에
짧은 모직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파마머리에
두개의 작은 핀을 꽂고 공들여 화장을 한 그녀는 결코
두아이의 엄마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그녀에게서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매력이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나는 서점 진열대를 돌아 그녀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는 곧바로 자주색 가죽장갑을 벗고 진열대 너머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잘 지냈어?”
나는 진열대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악수를 했다.
“응. 너도 잘 지냈어?”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가에 잔주름이 조금 잡혀 있었다.
스물아홉의 고개 ' 인생의 참맛은 미친 사람들만이 아는 걸 '
나는 책을 덮어 다시 진열대에 얹었다.
사랑으로 넋이 나간 자가 할법한 촌스런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 눈길이 그 문장을 무심히 스치던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이십대였다. 아니, 이십대의 마지막 흔들림에,
청춘의 그네에 불안하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나를 서성이게도 하고 주책없게도 하던 그 젊음이
끝나갈까 안달하며 혹은 끝나기를 간구하면서 그렇게..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향수냄새가 났다.
이것도 그녀에게서 맡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향기였다.
나는 한때 소설광이었던 그녀에게 말했다.
“읽고 싶은 소설 있으면 골라 봐”
“요즘 소설은 도대체 읽고 싶은 맛이 없어”
그녀는 툴툴대며 시집 코너로 갔다.
“그럼 시집이라도 몇권 사”
내말이 끝나기도전에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웃는 그녀는
대학 1학년때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를 연상시키는 것은 아니고,
안타깝게도 그 사이의 거리를 일깨웠다.
그녀는 시집히 꽂힌 서가 밑으로 몸을 날렵하게 구부리더니
차곡차곡 쌓여있는 유아용 학습지를 뽑아 들었다.
“이거 니가 우리 애기한테 선물할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유아용 책 몇권을
꼼꼼하게 검토하더니 그중 하나를 골랐다.
“애엄마 티 박박 내지?”
“좋은엄마 같아서 보기 좋아”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대학때부터 버릇이었다. 그녀가 마음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면 나는 늘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옆모습을 흘낏거리며 묵묵히 따라 걸었다.
멋쟁이 여학생들이 많기로 소문난 불문과에서 그녀는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편이었고 말투나 태도도 냉정한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줄곧 그녀만을 일방적으로 쫓아 다녔다.
신입생 시절 그녀와 같은 써클에 들었고,
그녀가 써클을 그만둔후에도, 그녀와 함께 스터디를 했고
거의 매일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집요하게 구애를 한다든가 상대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그런 열렬한 구애를
해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대학시절, 스물두엇의 나는
내 나름대로 충실히 그녀에게 애정을 암시했다고 믿었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그녀가 내 마음을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은 어쩌면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짐짓 내 마음을 모른척 했고,
그 무렵 성급하고 격정에 차있던 나는
약간은 그녀를 야속하게 여겼다.
그러나 내게 다른 선택이란 있을수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내 쪽에서 먼저 그녀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한다.
그녀가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던 건
정말 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일까
그녀에 관한 한, 나는 그런 생각 따위에 몰두하는 편이다.
어쨌든 그녀가 취한 적당한 거리감 덕택에 나는
친구로서 그녀곁에 오래 머물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때까지 우리는 각별한 친구 사이를 유지했다.
그녀가 설정한 거리, 아니 어쩌면 내가 지레짐작으로
그녀가 그어놓았다고 상상했는지도 모르는 그 간격을
나는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노력했다.
“나 배고프니까 치킨 맛있게 하는 데로 가”
그녀의 주문이었다.
그녀의 요청이 떨어지면 내 머리는 비상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동네에서 가장 치킨을 잘하는 집이
어디인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졸업후 바로 입대한 내가 제대를 몇달 앞두고였다.
그때 나는 내가 탈영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죽을 용기가 없는 사람만이 죽지 않을까 근심하는 법이다.
내가 탈영하지 않을 위인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2년전 나는 선배의 결혼식에서 그녀와 한번 마주친적이 있었다.
그녀는 둘째를 가져 배가 불러 있었고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하필 재수없게 그날 오후 민방위훈련이 있었고,
허둥지둥 찾아든 예식장 근처 레스토랑에선
어느 낯모르는 신혼부부의 피로연이 왁자지껄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구석자리에 앉아 그녀의 배부른 모습을 오래 생각했다.
처음 들어간 맥주집은 굴 속같이 껌껌했다.
“저기로 가”
모퉁이에 있는 건물 2층의 '호프광장'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저긴 치킨 안 할텐데”
“그럼 다른거 먹지 뭐.”
그녀는 좀 추워 보였다. 우리는 2층 호프광장으로 올라갔다.
호프광장은 생각보다 넓고 깨끗했고 팝콘을 튀기는 버터냄새가
고소했다. 그녀가 선듯 창가쪽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마주 앉자 은빛 머리띠를 한 여자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너 아직도 돈까스 좋아해?”
내 물음에 그녀는 윗도리를 벗으며 대답했다.
“그럼 좋아하지. 우리 큰애도 나 닮아 돈까스 잘 먹어”
가슴께에 작은 풍차가 수놓인
적갈색 스웨터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대학때는 무척 단순하게도 입던 그녀였다. 흰색 아니면
베이지색 티셔츠에, 청바지나 짙은 진바지가 고작이었다.
“그럼 돈까스하고 맥주 시킬까?”
“안주 말고 식사로 시켜. 여기 맥주 마시면서 식사하는데 맞죠?”
그녀의 물음에 은빛 머리띠가 공손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돈까스 식사로 하나 주시고 피처 하나 주세요”
“네”
“참 여기 후식도 나오죠? 커피로요 나중에 달라 그럴때 주세요”
“네”
“포크와 나이프도 각각 주시구요”
“네”
“물도 좀 주세요”
“네”
내가 담뱃갑을 꺼내 탁자위에 세워놓는 걸 보고 그녀가 덧붙였다.
“재털이랑 성냥도 주세요”
“네”
은빛 머리띠가 계산서를 냅킨 꽂이에 꽂고 주방쪽으로 갔다.
과연 그녀의 복잡한 주문을 죄다 외우고 가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창밖으로 횡단보도가 내려다 보였다.
경찰들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저 작자들 이제 철수하는군”
“그 얘기 하지마, 짜증나니까.
앞으로 그 얘기 할때마다 500원씩 내 벌금에 보태게”
“참 그 고지서 나 줘. 내가 낼께”
“아냐 넌 술 사. 이건 내가 낼래. 어쩐지 마지막 액땜이 될 것 같아”
마지막 액땜이 어떤 내용을 의미하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아니 전화를 받았을때부터,
나는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을 가졌다.
물론 입밖에 내어 말할수 없는 느낌이었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도 담배 피워?”
고개를 끄덕이길래 담배를 권했더니 그녀는
내 뒤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뒷자리에 50대 남자 둘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날
대학 2학년인 그녀는 술집에서 봉변을 당했다.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남자 셋이 그녀에게 담배를 끄라고 소리쳤고,
그녀가 꼿꼿이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 침착하게
새로 한대를 붙여 물었을때 소주병이 날라왔다.
다행이 병은 그녀의 어깨에 맞고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펄펄 뛰는 나보다도, 술집 주인을 불러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면 되는지 안되는지 묻고
경찰을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그녀의 또박또박한 말투에
더 두려움을 느낀 중년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떴고,
그걸로 사태는 마감되었다.
“그냥 피워. 이만하면 이제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그걸로 눈치까지 보고 그래야 되는거야?”
“나이 먹을수록 더 눈치봐야 하는 거 아니니?
젊었을때야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고 싶은대로 다 할 수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담배를 피워물긴 했다.
그녀의 첫모금은 깊었다.
은빛 머리띠는 피처를 가져오면서 모든걸 챙겨왔다.
우리는 담배를 피우며 맥주를 마셨다.
그녀는 내게 언제쯤 결혼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애인은 있구?”
나는 민정이가 애인인지 아닌지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설사 민정이가 애인이라 하더라도
그녀 앞에서 애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왠지 불가능해 보였다.
“가끔 만나는 사람은 있어”
“음. 그래?”
“응”
“사실 결혼 빨리 할 필요 없지.
마누라한테 정말 잘 해줄 자신 없으면 하지 마”
“넌 별로 재미 없나 보지?”
“재미? 그런 거 절대 없어”
그녀는 우거지상이 되어가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하하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원래 결혼이란게 다 그런 거래”
“그럼 넌 도대체 왜 결혼 한거야?”
“나도 몰라 왜 그랬는지.
열심히 말려주는 사람 있었으면 안 했을거야
아마 회사 다니기 끔찍해서 그랬나 봐”
제대한 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비굴할만큼 꼬치꼬치 물어
그녀의 결혼에 대해 모든 걸 알아냈다.
그녀는 회사에서 만난 노총각 공학도와 결혼했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공부 해보는게 어때?
요즘은 늦게 시작하는 것두 유행인가 보던데”
“지금? 저 끔찍한 혹들을 달고?”
“봐줄 사람 없어? 좀 맡기든가”
나는 내말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어떤식으로든 탈출구를 찾기를 바랬다.
늙은 공학도에 대한 원한도 한몫 끼어 있었다.
“누가 봐주겠어? 다 돈인데. 유행은 모 아무나 따라가니?”
그녀는 초조한듯이 포크로 맥주잔을 두드렸다.
“조심해야 돼, 진짜 셋까지 되면 난 정말 돌아버리고 말거야”
돈까스와 샐러드가 나왔다. 그녀는 돈까스를 먹기 좋게 잘랐다.
“이제 뜬구름 잡는 얘긴 지겨워. 문학이란 거 사실
유아문학 아니니? 어른들이 누가 시를 읽고 소설을 읽어?”
“나 읽는데?”
“그래 너 같이 어른 덜 된 애들이나 그렇지. 이제 먹어”
내가 집은 돈까스 조각은 끝이 까맣게 타 있었다.
나는 나이프로 탄 부분을 떼어내려 애쓰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학때도 그녀는 오직 내 앞에서만 이렇게 명랑했고
내 앞에서만 이렇게 수다스러웠다. 이런 식의 믿음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 신랑같이 제대로 된 어른은 절대 그런거 안읽어.
문학 나부랭이 얼마나 경멸한다구. 세상을 움직이는 건
그런 작자들이야. 그래서 말야. 나 고시공부를 해볼까 하는데.
너두 학원선생 때려치고 나랑같이 고시공부 안 할래?
후년부터 엄청 증원된다잖아”
내가 헛웃음을 웃자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조심해야 돼, 진짜 조심해야 돼, 셋까지 되면 아, 난 죽는다”
그녀는 그들부부의 구체적인 피임을 화제로 삼는 게
나를 거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는지
계속 셋이란 숫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아이들 이야기를 물었다.
“애기들은 어떡하구 나왔어?”
“남편이랑 시댁에 갔어”
“같이 안가도 시어른들이 뭐라고 안 그래?”
“뭐라긴. 둘이 싸우는 꼴 안 보게 되서 다행이다 하시겠지”
“남편이랑 원만하지 못한거야?”
나는 놀리듯이 물었지만 가슴이 아렸다.
“원만하고 말고 할것도 없어. 아무 관심도 없는 걸. 뭐 쌍방간에”
내가 괴상한 표정을 짓지 않아서인지 그녀는 제법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가 피처 하나를 더 시켰을때는 거의 6시가 넘어서였다.
새로운 안주로는 그녀가 굳이 우기는 바람에 김치볶음밥 하나만
달랑시켰다. 그녀는 옛날부터 구두쇠였다. 자기 돈만
아끼는 게 아니라 내 돈도 거의 자기 멋대로 아껴버리곤 했다.
그녀가 가끔 만나는 아가씨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서
나는 민정이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를 했다.
“가만 그 아가씨 몇살이야?”
“내일이면 스물 다섯 돼”
“되게 이쁜가 부다”
“그냥 그렇지 뭐”
“이 순 도둑놈아”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까르륵 웃었다.
여자가 예쁘다는 건 언제고 내게
중요해 본적이 없었다는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어쩌면 지금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속이기는 어려웠다.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나는 카페 '포엥'에 전화를 걸었다.
동창 녀석이 빨리 오라고 고함을 쳤다.
나는 금방 가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한거야? 어디 약속 있어?”
“아니 고등학교 놈들 망년회 하자고 해서.
이 근처거든.. 너도 같이 가자”
“아냐, 안 그래도 나 이제 일어설 참이었어. 벌써 7시야”
“7시밖에 안됐잖아?”
“너 가 봐야지”
“시간 맞춰 갈 필요는 없는데야.
실은 안 갈까 했는데 나온김에 전화나 한번 해본거야”
“나온김에 가 봐”
“너 간다면 가구”
“난 안돼”
“너랑 술 마실려고 차도 놓구 나왔는데”
“아무튼 난 안 갈래”
“같이 가자. 별 부담없는 자리야”
“나 니 애인인줄 알라구?”
“좋지. 노총각 위해서 오늘 하루 애인 노릇좀 해 줘라”
“정말 안돼. 오랜만에 그런 자리 가면 내가 날 주체하지 못할 거야”
나는 목이 컥 막혔다.
“가자...”
“아냐 됐어”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술좀 마시고 그러자.
나중에 내가 데려다 줄께”
“너 그러다가 내가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떼 쓰면 어쩌려고 그러니?
나 충분히 그럴수 있어”
그녀의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순간 나는 그녀가 무척 눈치 빠른 여자라는 걸 잊었다.
내 얼굴이 심각해졌던게 틀림없다.
재빨리 내 표정을 읽은 그녀가 이렇게 얼버무렸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 늙은 우리 신랑이 불쌍해져서
도저히 안되겠어 애 새끼들도 보고 싶고”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자기 말에 낄낄거렸다.
나도 조금 웃었지만, 그녀의 남편이 그녀보다
아홉살이나 연상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입맛이 씁쓸했다.
막차를 타고 떠난 여인을 노래한 가요가 생각났다.
그녀의 결혼이 막차의 차창처럼 쓸쓸한 풍경으로 그려졌다.
아무도 그녀를 그런 곳에 머물게 할 권리는 없었다.
“그럼 할수 없지, 완력을 쓰는 수 밖에...”
“어머, 어머 ! 정말 안된다니까 그러네”
순간 그녀의 얼굴은 몹시 아름다웠다.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였지만, 슬프게도 그녀는
나와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을 아무래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더 유혹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
그녀의 고집에 진척하고 섭섭한 얼굴로 그녀를 놓아주어야 할지
나는 결정짓지 못했다.
그녀가 담배를 한대 더 피워물었다.
“소문난 돼지구이구나...”
“저 집 고기 괜찮아. 가서 먹을까?”
“아니 싫어 나 배불러.. 그게 아니라
여기 창문에 붙은 호프의 ㅎ자 있잖아”
예전에도 그랬다.
내게 뭔가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할때의 그녀는 항상 귀여웠다.
쌀쌀맞고 공격적인데가 조금도 없었다.
“가운데 여기 양쪽이 있잖아”
그녀는 길쭉한 동그라미의 양쪽 기둥을 가리켰다.
“여기에 가려서 돼지구이에서 두글자가 안보였거든..
난 이때까지 소문난 지구가 뭔가 하고 있었어..”
“하하 소문난 지구? 그거 멋있다”
“고깃집 이름이 그 정도면 죽이지?”
우리는 마치 새로운 연인처럼 다정했고,
오래된 연인처럼 박자가 잘 맞았다.
그녀가 고집하면 나는 그녀를 망년회에 데려가지 않고
집에 보내줘야 겠다고 결심했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집에 들어가지 안겠다고 하면 나도
그녀를 집에 들여보내고 싶지 않을것 같았다.
예전엔 그녀가 나의 돌진을 적당히 막아내면서 관계의 거리를
잘 유지했지만 정작 그 거리가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
그녀는 그렇게 냉철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어느날 그녀가 애기 둘을 안고 내게 뛰어 온다 하더라도
내게는 도저히 그녀를 막을 힘이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여 아내가 있다면 아내가 나서서 막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분명 내 약점이지만,
불행히도 그 약점을 안다는 것이 내 강점이었다.
호프광장에서 후식용 커피를 마시고 나왔을때,
여덟 시 반이 조금 넘어 있었다. 그녀는 길가에 늘어선
포장마차를 보자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소주와 닭꼬치를
조금씩 먹고 가자고 했다. 우리는 좁은 의자에 앉아
추위에 몸을 떨면서 소주를 마셨다.
그녀가 말을 꺼냈다.
“우리 동네 뻥튀기를 파는 여자가 있거든.
그 소리 왜 끔직스럽게 크잖어?”
그녀는 입가를 잔뜩 찡그리고 다리를 가볍게 떨었다.
“그래 엄청 크지”
“지나가다 놀란적 많아.
근데 그런 우렁찬 소리를 내는 그 여자말야
정작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여.
뻥튀기 하나 들어올릴 기운도 없어 보여”
내가 직접 말해주지 않아도 그녀는 많은걸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분방하게 변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그 여잘 보면...”
나는 기다렸다.
“마음이 좀 그래...”
톡톡 쏘던 그녀가 이제 내게조차
말을 분명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슬펐다.
이렇듯 화려하게 성장한 그녀를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그녀는 외롭게 보였다.
대학때 자기를 죽자사자 쫓아다니던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오면서 그녀는 왜 정성들여 화장을 할 생각이 들었을까?
그녀도 민정이처럼, 한쪽 눈썹을 그리고 담배 한대 피우고 나서
마져 다른쪽 눈썹을 그려야 더 잘 그려진다고 생각했을까?
입술라인을 그릴때면 반드시 그날 만날 사람을 생각했다는
민정이처럼 그녀도 오늘 입술 라인을 그리면서 나를 생각했을까?
나는 대학때 가끔 술에 취하면 그랬듯이 그녀와 어깨동무를 하고
소주를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서로가 몸을 당기면
당기는 대로 흔들리면서, 그렇게 한 손으로 소주잔을 들고,
오른손이 자유로운 사람이 안주를 집어주고 왼손이 자유로운
사람이 그 안주를 받아 먹으면서 그렇게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내가 그녀를 떠나 보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불쑥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동안.. 너, 많이 생각했어..”
“데려다 줄께”
“아, 싫어! 싫어!”
“왜?”
“몰라, 여기서 그냥 헤어져”
“그럼 택시타는 거라도 보고”
“아 제발.. 싫다니까”
그녀가 이 정도로 고집을 부리면 무슨 수를 짜내도
꺾기 어렵다는걸 나는 알고 있었다.
몇시쯤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짧고 무익한 섹스..
그러나 그녀와는 처음인 섹스였다.
뜨거운 음식을 먹듯 우리는 땀을 흘리며 급하게 섹스를 했고,
노곤한 휴식도 없이 서둘러 옷을 입고 여관을 나왔다.
큰길로 나오는 넓고 어두운 길목에서 급하게 마신 소주때문인지
머리가 핑 돌았다.
추위에 굳은 그녀의 입가가 힘들게 벌어지며
작별의 웃음을 만들어 냈다.
“잘 지내 영준아”
“어... 그래”
“너도 '잘 지내 혜원아' 해”
“잘 지내 혜원아”
“응”
왠지 그녀가 악수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손을 내밀지 못했다.
“안녕! 안녕!”
그녀는 자줏빛 가죽장갑을 낀 손을 흔들어 보이고
곧장 돌아섰다.
출렁..
그녀와 나의 스물 아홉이 돌아섰다.
부츠를 신고 퍼머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의 뒷모습이
사람들속에 묻혀져 갔다. 나는 그녀를
내 곁에 붙들어둘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지금이 그나마 그녀가 그녀 자신을, 내가 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말연시 밤을 만끽하느라 몰려든 인파가 세월처럼 그녀를 지웠다.
벌금을 내면서 그녀는 나를 기억할까?
내가 사준 책을 딸들에게 읽어주면서 그녀는 나를 기억할까?
그녀는 혼자 가버렸다.
그녀가 다시 내게 전화하는 따위에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않는
나 자신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택시가 활증램프를 켜고 달리고 있었다.
아마 나는 다시는 그녀를 만날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녀 없이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내 이십대를 마감하고,
나는 서른의 램프를 켰다. 아무래도 나는 젊음을 내던지는 데
너무 적은 비용을 들였다. 나는 가끔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가 인생의 참 맛을 알아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미신이어도 좋고 억지여도 좋을 그런 관념에 휩싸이면,
나는 불안과 행복의 경계에서 비틀거린다.
그러나 이 간격은 점점 흐려지고 나는 점점 늙어 갈 것이다.
첨부파일 : 3(1159)(3857)_0400x0266.sw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