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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티스타, 신자유주의에 맞선 저항의 상상력

방제훈 |2006.04.29 02:59
조회 143 |추천 2


1. 붉은 피를 가진 사람들의 봉기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한참 시끄러웠던 지난해 성탄 전야, 멕시코가 노사정합의로 7개월만에 imf체제를 벗어나고 외채를 조기상환한 '모범 사례'로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릴 때였다. 바티칸을 비롯한 전세계가 예수탄생을 찬미하고 있다는 뉴스와 함께, 이런 평화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만한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멕시코 친정부 준군사대원들이 23일(한국시각) 남부 치아파스주에서 토착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적어도 45명이 살해되고 상당수가 부상했다고 한 적십자 관계자가 말했다. 이번 학살은 지난 94년 1월 좌익 사파티스타 농민반군의 반정부 소요로 정부군 1백35명이 사망한 이래 최악의 유혈사태이다. …… (중략) …… 적십자의 이투아르테 대변인은 당국이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무장괴한들의 공격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도 토착민 학살을 막기 위한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치아파스주에서는 지난 수개월간 집권 제도혁명당(pri)의 무장 지지대원들과 생활수준 향상을 요구하는 사파티스타 반군의 지지자 간에 충돌이 빈번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대학살의 우려가 고조돼왔다. (, 1997년 12월 24일) 하지만, 이 기사는 '세계의 분쟁'이라는 식으로 늘 신문의 외신면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기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래 기사도 마찬가지겠지만.... 멕시코 최대 빈곤지역인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1일 원주민 폭동이 일어나 2일 현재 최소한 57명이 숨졌다. 멕시코 정부는 1일 새벽 폭동이 일어난 뒤 2일에도 원주민과 진압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26명 이상이 숨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 관리는 첫날 전투에서 군, 경찰 22명과 폭동 농민 9명이 사살됐다고 전했다. 현지 언론들은 멕시코 혁명의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이름을 따 자신들을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 소속이라고 밝힌 마야족 후예 원주민 6백여명이 1일 새벽 과테말라 접경 치아파스주의 산크리스토발을 비롯한 4개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원주민들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은 멕시코 원주민들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며 토지개혁과 새 정부 구성 등을 요구했다. 치아파스주는 빈부·종교·민족갈등이 심각한 지역이다. (, 1994년 1월 3일) 이 역시 대부분 신문들의 신년호에서 '올해도 세상은 시끄럽다'는 식의 상투적인 기사와 함께 보도된 기사이다. 그렇다면, 1994년 새해와 1997년 성탄 전야에 멕시코 동남부의 '가난한' 치아파스 주에서 벌어진 일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그런 류의 분쟁이었을까? 최소한 우리나라의 언론에서는 늘 그랬다. 그것은 멕시코의 성공적인 외환위기 극복사례와는 전혀 다른 땅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도되었다. 마치 그것이 화성에 착륙한 탐사선 소머즈보다도 더 먼 행성의 이야기라고 해도 믿을 듯이. 하지만, 외신면을 일상적으로 장식하는 세계 각지의 전쟁, 분쟁소식이 컴퓨터 속의 전쟁시뮬레이션 게임과 다른 점은 거기엔 붉은 피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멕시코의 치아파스 주도 그러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그처럼 붉은 피를 가진 '사람들'이다. 1994년 1월 1일 그들이 봉기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새해의 세계를 훼방놓으려는 심술궂은 짓도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그날 발효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자신들이 지켜온 삶의 기반은 물론,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하고 있다는 절박한 현실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총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 후 4년이 념은 1998년, 지금도 그들은 멕시코 민중들의 압도적인 지지속에서 멕시코 정부군과 친정부 군사조직들의 잔혹한 토벌과 탄압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고 있다. 전세계의 진보진영은 이들의 놀라운 투쟁에 연대와 지지를 표하면서, 도대체 m16소총과 목총이 전부인 그들이 전세계 자본주의의 맹주 미국의 앞마당(남미, 특히 멕시코는 늘 미국에게 그랬다!)에서 탱크와 대포로 무장한 정부군에 맞서서 어떻게 저렇게 잘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이고, 왜 싸우고 있는가? 2. 그들은 누구이고, 왜 싸우고 있는가? 사파티스타 농민군이라고 불리는 이들 대부분은 치아파스 주에 사는 인디오 농민들이다. 멕시코의 지도를 놓고 보면 치아파스(chiapas) 주는 멕시코의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곳은 커피와 코코아가 많이 생산되며, 목축업과 수력발전이 성하고, 특히 라칸돈 우림지역에서는 목재가 많이 생산되는 등 자연자원이 가장 풍부한 주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치아파스는 언제부터인가 멕시코의 최대 빈곤지역이 되어 버렸다. 풍부한 자연자원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생활수준은 대단히 낮고, 심지어 학교, 병원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공공서비스 시설조차 대단히 열악한 상태이다. 그럼 도대체 왜 가장 자연자원이 풍부한 이 땅이 멕시코 빈곤의 상징이 되었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멕시코의 역사를 조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멕시코는 혁명으로 열렸다. 1910년 프란시스코 마델로(fransisco madero)는 자본가와 대토지 소유자에게 유리한 자유주의 정책과 비대해진 권력의 부패로 얼룩진 포르피리오 디아즈(porfirio diaz)정권에 맞서서 봉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1911년 멕시코혁명의 전설적인 지도자이자 '사파스티타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가 철저한 토지 재분배와 공동체적 토지소유 허용을 요구하는 이른바 「아얄라 계획」을 발표하고 무장투쟁을 선언한다. 그는 1913년 반혁명쿠데타를 일으켜 멕시코의 대부분을 장악한다.그러나 사파타는 1915년 혁명 주류파로 급부상한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마침내 1919년 정권을 장악한 카란사의 군대에 암살된다. 카란사 정부는 1917년 께레따로에서 혁명헌법을 마련했고, 이어 집권한 까예스(calles)정부은 1929년 국가혁명당(pnr)을 결성했다. 이 헌법과 국가혁명당은 이로부터 약 70여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기까지 멕시코 사회의 기본틀로 유지되게 된다. 1917년 제정된 헌법이 지금도 대부분의 골격을 유지한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 눈에는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1929년에 만들어진 국가혁명당이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정권을 빼앗기지 않고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혁명당은 1938년 멕시코 혁명당(prm)으로, 그리고 다시 지금의 이름인 제도혁명당(pri)로 이름을 바꿔 왔지만 집권당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1930년대 형성된 민중동원적 코포라티즘(corporatism) 때문이다. 이 체제를 통해 멕시코노동자연맹(ctm), 전국농민동맹(cnc) 등의 대부분의 대중조직들과 군부는 조직적으로 당부문과 통합되었고, 이들 세력은 당의 동원세력으로 전락했다. 이 체제에서 대통령과 여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대신 대중조직에게는 정치적 지지의 대가로 유리한 정책, 법률, 물질적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후원과 수혜의 끈끈한 관계가 이루어졌다. 이런 일당 장기독재와 민중동원적 코포라티즘 정치체제의 결과는 너무도 자명했다. 그것은 전사회적으로 만연한 구조적 부정부패와 이에 저항할 대안세력의 부재였다. 한편, 1910년 혁명의 영향으로 멕시코의 경제체제는 국가자본주의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비록 사회주의는 아니었지만, 미국과 같은 경쟁자본주의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1910년 멕시코 혁명의 영향이 컸다. 이에 따라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띄고 '수입대체 산업화'를 통한 자립경제 달성을 목표로 했다. 이는 강력한 국가개입과 보호주의 아래에서 국내에서 공산품을 생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는 1970년대 중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한층 고무되어, 뽀르띠요 정권은 '제1세계로!'라는 과감한 슬로건까지 내세운다. 하지만, 석유산업주도형 발전전략은 1980년대 초반 국제유가 폭락, 국제금리 상승 등으로 인해 멕시코를 빚더미 위에 올려 놓고만다. 결국 1982년 집권한 마드리드 정권부터 미국과 imf의 권고에 따라 소위 자유주의적 정책을 취하게 된다. 보호무역은 폐지되고 수출허가완화, 관세인하, 적극적 외자유치 등 일련의 대외개방정책이 추진된다. 1985년에는 gatt에도 가입한다. 1988년 살리나스가 집권하면서 개방기조는 더욱 가속화된다. 북미를 자유무역지대로 만드는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이를 통해 미국자본의 투자를 확대시키고, 미국의 무역장벽을 제거함으로써 대미시장에서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10여년에 걸친 잇따른 무역자유화조치가 가져온 결과는 기대와 달리 무역적자와 외채위기였다. 결국 1994년 멕시코는 외국자본의 연쇄적인 철수로 인한 페소화 폭락으로 경제위기를 맞았고, 마침내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시행되면서 국내기업의 도산과 해외자본의 잠식으로 이어졌다. 결국 현재 멕시코는 초긴축정책으로 인해 외면상으로는 경제가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외국자본에 의해 경제의 전부문이 장악되었으며, 국내산업의 도산으로 광범위한 실업자군이 양산되고 있다. 결국, 저임금에라도 취업하려는 멕시코 민중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은 초국적 자본에 불과하며, 남는 것은 국내산업기반의 해체와 빈익빈 부익부인 것이다. 자, 다시 치아파스로 돌아가자. 멕시코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에 치아파스의 원주민 농민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20여년이 넘는 광범위한 농민투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들의 존재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인디오인 이들은 1940년대 수입대체 산업화와 함께 정부가 대토지 소유자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면서 라티푼디오(latifundio)라고 불리는 대농장 등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불만이 사회위기를 가져올 것을 우려하여 이들을 라칸돈정글에 정착시킨다. 하지만, 지난 수세기동안 식민지 지배자, 정부관료,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해에 따라 억압받아야 했던 이들에게 이번에도 평화란 없었다. 1972년 당시 대통령인 에체베리아(echeverria)는 다른 지역에 '생태보호지역'(bioreserve)를 만들기로 하고 이들에게 그곳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한다. 물론 이는 이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노린 목재회사와 벌목권을 가진 국영기업의 이윤추구를 위해서였다. 그러자 치아파스의 인디오 농민들은 이주를 거부하고 그로부터 20년동안 토지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며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1992년 살리나스대통령은 민영화조치의 일부로 1917년 헌법 27조가 보장하고 있던 공동토지소유(이를 '에히도'(ejido)라 한다)마저 폐지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는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그 토지의 매매를 금지함으로써 지주들로부터 인디오 농민들의 토지소유권을 보장해 주려했던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의 제도적 성과를 무화시키는 조치였다. 여기에 더해 1990년대 정부가 취한 일련의 개방화조치는 그나마 취약해진 공동체경제에 마지막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 nafta를 준비한다는 명목아래 멕시코 정부는 옥수수수입제한, 커피가격 보조금 등의 조치를 폐지하였다. 이로써 목재, 목축, 커피, 옥수수등에 기반한 이 지역 경제는 해체되고야 만다. 그 결과 이 지역 농민들의 생존권을 극도로 악화된다. 이에 참지 못한 농민들이 1992, 3년에 평화적으로 대규모적인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아무런 대답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전략을 바꾼다. 1993년 중반부터 농민들은 농사짓기를 그쳤고, 아이들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그 돈으로 무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4년 1월 1일 nafta의 발효와 동시에 봉기한 것이다. 그들이 내건 선언문의 제목은 "오늘, 우리는 말한다. 이제 그만좀 해!(ya! basta!)". 3. 사파티스타 투쟁 : 세가지 차원 지금까지 사파티스타 투쟁을 이끌고 있는 인디오농민들이 처한 멕시코 사회의 정치, 경제적 배경을 통해 왜 그들이 싸움을 위해 총을 들었는 지 살펴 보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국제적인 뉴스배급을 독점하는 세계적인 통신사들과 국내의 제도언론으로부터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해서 그렇지, 지금도 지구의 어느 한 켠에서 벌어지고 있을 세계민중들의 생존권투쟁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은가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 사실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다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사파티스타 투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 1 신자유주의에 맞서서 사파티스타 투쟁이 갖는 의의는 우선 그것이 1990년대 들어 전세계적으로 노골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를 최초로 선포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맞이한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고자 나타났다. 1930년대 초의 대공황을 케인즈주의를 통해 돌파한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전후 5∼60년대 최대의 호황을 누린다. 그러나, 유효수요 창출을 위한 복지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전략은 1960년대말부터 서서히 한계를 드러낸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인플레의 악화, 경제활동의 혼란과 위축은 전후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크게 뒤흔들었다. 이로부터 신자유주의 노선이 출현한다. 신자유주의는 우선 긴축재정과 국가개입의 최소화를 추구하면서 모든 것을 시장의 원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혜택이나 공공서비스는 민영화되거나 극도로 축소된다. 동시에, 노동의 유연성이 극대화됨으로써, 노동자의 고용형태는 안정적인 정규직에서 시간제, 임시직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힘은 극단적으로 약화된다. 이 모든 것이 가져온 단 하나의 결과는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에 심대한 위협이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인 마르코스(marcos)는 신자유주의로 뒤덮인 당대의 세계를 그림퍼즐로 묘사한다. 부의 집중과 빈곤의 확산, 지구적 규모로 확대된 착취, '국경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이민노동자들, 세계화된 금융과 세계화된 범죄, 주권을 잃어버린 국가가 휘두르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 민족국가의 수준을 뛰어넘어버린 '초거대정치'. 이들 조각들로 모여진 신세계질서는 냉전이 사라진 세계에 역사의 종언과 영원한 평화 대신 '제4차 세계대전'을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사파티스타는 이러한 신자유주의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바로 신자유주의안에서 저항의 물줄기를 길어올리고 있다. '저항의 주머니들'. 이것은 신자유주의라는 그림퍼즐을 완성시키려면 없어서는 안되는 그림조각이지만, 바로 그 그림을 위협하고, 모습 자체를 뒤바꿀 존재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수백 만의 인간 존재를 억압하고자 하며, '잉여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하지만, 바로 그 '쓰레기 인간'들이 이제 반항을 한다.... 이 저항의 주머니에는 여성, 어린이, 노인, 청년, 원주민, 생태주의자, 동성애자, 노동자 그밖에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운행에 방해가 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렇듯 '현대화'(멕시코 정부가 추진했던 바로 그것)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저항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파티스타는 멕시코의 한 정글 속의 자신들이 처한 문제가 전 지구적인 신자유주의적 공세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달았고, 바로 그로부터 배제된 모든 이들로부터 저항과 투쟁이 시작되어야 함으로 공공연히 선언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의 최선두에 서 있는 셈이다. 3-2 민주주의 : 아래로부터의 조직화 1990년대 이후 전세계의 많은 노동조합이나 진보적인 운동단체들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자본주의 승리의 팡파레를 경험하면서 현실세계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그것이 안겨줄 문제점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지구화, 정보사회 등의 개념들이 현실의 변화를 잘 설명하는 듯 올빼미처럼 읖조려왔다. 오랫동안 운동을 이끌었던 조직과 이념은 경직되었고, 운동의 기층이 당면한 생존권적 투쟁을 수용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사파티스타를 비롯한 95년 겨울의 프랑스 노동자파업, 영국 부두노동자의 투쟁 등은 그 사이 민중들은 신자유주의의 공세속에서 스스로의 삶의 기반이 허물어가는 것을 느꼈고,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제도적인 틀이나 상층의 타협에 의존하기 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이해와 요구에 충실한 생존권투쟁은 어느새 제도화된 운동이 맞서지 못했던 신자유주의의 강풍에 맞서는 선두의 대열을 형성하고 있다. 사파티스타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원주민 인디오이고, 농민이다. 이들은 멕시코 사회내에서도 주변적인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자, 기존의 전통적인 혁명이론에서도 늘 주변적인, 때로는 반동적인 위치에 놓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노동조합들이 코포라티즘 속에서 체제내화된 멕시코 현실속에서 자신들의 생존권은 스스로에 의해서만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의 생존권이 단지 경제적인 권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自尊)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고, 스스로를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요구이다. 정부측과의 최초의 협상이었던 산안드레아스 협상의 첫 주제가 '원주민의 문화와 권리'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문화와 권리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문화와 인종들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이처럼 문화적 다양성, 정치적 다양성을 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는 보장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생각은 '복종함으로써 지도한다'(mander obediciendo)는 말 속에 담겨져 있다. 운동의 지도자들은 조직의 구성원에게 복종해야 하며, 중요한 사항의 결정은 조직 구성원 전체의 집단적 의사결정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측은 교육받은 일부의 도시출신 지식인들이 인디오농민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하면서, 마르코스 부사령관을 지목했지만, 그는 이미 10년전에 정글에 들어가서 인디오농민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사파티스타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은 그들이 정부와의 협상을 승인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1994년 3월 2일에 채결된 정부와의 잠정협정은 3개월에 걸친 전 공동체의 토론과 투표끝에 부결되었다. 그들은 협상을 승인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언제나 오랜 시간을 걸려서 공동체 전체의 의사를 묻는 절차를 밟았다. 다음의 일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단호함을 역설한다. 정부측은 협상에서 협상안에 대한 농민군측의 답변을 조속히 달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사파티스타는 '우리들 인디언은 문제를 이해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우리 나름대로의 리듬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부측은 조롱하듯 '근데 우리는 당신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소. 당신은 지금 일본제 시계를 차고 있지 않소.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 원주민의 시계를 차고 있다고 말하는 거요?' 그러자, 사파티스타는 '당신들은 인디언의 시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우리는 시간을 사용하지 시계를 사용하지 않소.'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결국 이러한 기층의 이해와 요구에 대한 철저한 복종, 이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4년이 넘는 동안 라칸돈 정글은 물론, 치아파스 주의 원주민, 나아가 멕시코 전민중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이들의 투쟁이 힘을 가질 수 있었던 버팀목이 되었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1995년 2월 9일 정부측이 일방적으로 휴전협정을 파기하고 치아파스 전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공격을 개시하여 주 전체를 장악했을 때, 상당수의 멕시코 농민들이 이들을 따라 정글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이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반영한다. 3-3 미디어와 국제연대 : 인터넷과 새로운 국제주의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국제연대를 현실화시켰던 것은 이들이 신자유주의 전략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인터넷'을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의 노동자, 민중들은 이에 효과적으로 맞서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대항하는 투쟁이 고립·분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주요인이다. 자본진영의 움직임은 소수의 초국적 자본과, imf 등의 국제기구, 그리고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에 의해 통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반해,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은 국경, 지역, 계층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권력과 자본 앞에서 번번히 좌절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파티스타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이 고립분산적이라는 문제를 과거와 같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건설하는 것만으로 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적(敵)의것을 모방한 이같은 조직은 쉽게 관료화되어 변화가 필요할 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가진 아래로부터의 조직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산에서 이미 확인했다. 이들은 지역적 수준의 투쟁과, 전국적 투쟁 그리고 전세계적인 투쟁간의 연계성을 확장하는 지구적 과정이 진보진영의 국제연대에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국제연대를 위한 무기로써 역설적이게도 자본에 의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정보통신기술과 컴퓨터 네트웍망에 주목한다. 물론 이런 기술과 네트웍은 분명 현재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화'를 가능케 하는 물질적 기반인 '정보화'는 새로운 시장의 창출과 이윤획득에 기여하고 있으며, 인간 노동을 대체하여 노동자들을 실업의 고통속에 몰아넣고, 심지어는 고달픈 노동에서 작은 휴식과도 같던 여가시간마저도 '전자감시망'(electronic panopticon) 속으로 포섭함으로써 권력과 자본의 지배력을 획기적으로 배가시키고 있다. 사파티스타도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정보통신의 발달이 권력과 자본의 통제망을 공고히 해주는 만큼 역으로 틈새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틈새들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집단간의 조직화와 연대활동을 가능하도록 하는 역동적 수단을 제공한다'. 이 틈새를 통해서 기술과 네트웍은 설계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정부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정보통신기술을 다루는 한 사람의 전문가"라는 마르코스의 말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선전하는데 있어서 첨단의 인터넷망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봉기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멕시코 정부는 언론매체를 통제함으로써 혁명군 세력을 고립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형적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1994년 1월 봉기 당시 발표된 사파티스타의 선언문은 즉시 전화와 팩스, 전자우편을 통해 밖으로 알려졌고, 각국의 독립 저널리스트들이 취재를 위해 속속 혁명군 진영에 도착했다. 여전히 대부분 제도언론들은 이들을 애써 외면했지만(도입부에 인용된 기사처럼!), 투쟁에 공감하는 많은 이들이 언론구실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사파티스타의 선언문과 통신문을 손으로 치고 스캐너로 읽어서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전송했다. 각종 뉴스그룹과 토론그룹에 사파티스타의 투쟁소식이 올랐고, 지지하는 홈페이지와, 전자우편을 통해 정기적으로 소식을 받을 수 있는 메일링리스트(mailing list)도 생겨났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활발한 활동은 정보교류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조직화와 국제연대를 실험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사파티스타는 1996년 7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대규모의 국제회의를 사파티스타 점령지 한 복판에서 개최했다. '대륙간 회합'(intercontinental encuentros)라고 명명된 이 회의에는 전세계 5개 대륙, 42개 나라에서 모두 3,000명이 넘는 활동가, 지식인들이 참여해서 신자유주의에 맞선 전 지구적 차원의 투쟁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을 하였다(생각해보라, 80년 해방광주에서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국제회의가 열렸다고). 이 국제회의의 조직 과정은 인터넷을 통한 국제연대의 모범을 보여준다. 1996년 초부터 사파티스타가 통신망을 통해 각국의 진보세력들에게 이 주제에 관한 대륙별 회의 개최를 요청하자, 인터넷을 따라 참가자가 조직되고 온라인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 5개 대륙에서 각각 대규모 회의가 개최되었고, 이에 기초해서 바로 점령지 안에서의 국제회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 회의는 이후에도 이어져 지난해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제2차 대륙간 회합이 개최되었다. 이처럼 사파티스타는 놀라운 미디어 활용을 통해 국지적이고 산발적인 투쟁으로 그칠수도 있었던 자신들의 투쟁을 세계정치의 전면에 이슈화시켜내는데 성공했을 뿐만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대한 국제진보진영의 논의를 촉발시켰으며, 결정적으로 아래로부터 신자유주의에 맞선 전 지구적 네트웍을 건설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주도적으로 제기하였다. 4.사파티스타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사파티스타 투쟁은 하나의 '모범'일 뿐이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을 연구하는 제임스 페트라스(james petras)는 최근 사파티스타가 정치적 전망의 본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파티스타가 초창기에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혁(일부에서는 사회주의적 전망까지)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오늘날 전반적인 강조점은 '민주화', '탈군사화', 그리고 일종의 '정치적 이행'에 맞추어지면서 목표가 좁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정부가 아무런 양보도 제시하지 않은 채 지리한 소모전을 펴면서, 재산몰수를 통해 공동체들을 황폐화시킨 뒤 기습적인 군사공격을 가하는 속에서, 과연 사파티스타가 '무기'와 '정치'라는 둘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결코 그들의 투쟁이 우리의 투쟁과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들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실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사파티스타는 기존의 조직과 사상의 틀을 깨고 넘어서려는 상상력, 아래로부터의 광범위한 조직화와 철저한 대중민주주의가 필요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시사점은 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우리의 삶의 문제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모든 다른 이들의 삶의 조건과 얽혀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사회운동은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물론 다른 나라의 문제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다는 저간의 사정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물론, 최근 인터넷의 확산으로 국제간 정보교류가 저렴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각 부문에서 국제연대가 활성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1996∼1997년에 걸쳐 벌어진 노동자 총파업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지지를 호소함으로써 컴퓨터통신을 이용한 노동자 국제연대의 대표적 사례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총파업 통신지원단'의 활동은 이의 필요성과 영향력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국내 사회운동의 국제연대가 대부분 일방적으로만 지지를 호소하는 일시적 활동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지대인 마퀼라도라(maquiladora)는 멕시코의 대미수출전진기지이다. 이곳에 있는 「한영」(han young)이라는 기업은 현대정공 미국공장에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이다. 이 회사의 노동자들은 여러 해가 넘게 민주노조를 인정하고 노조설립을 추진하려다 해고된 노동자를 복직시키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지만, 회사측의 술책과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오늘도 투쟁하고 있다. 이는 단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와 사파티스타의 투쟁은 바로 이런 문제가 외신면의 단신속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멕시코 노동자들의 목을 노리는 그 칼은 바로 우리의 목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멕시코의 현실과 농민문제 - 사파티스타 농민군을 중심으로」, 지식인연대 월례토론회 자료, 1997. 2) 리처드 로만·에두르 벨라스코 아레기, '사파티스타와 세기말의 멕시코 노동운동', 『읽을꺼리』 제 2호, 1998. 3) 이원영, '멕시코 무장봉기군 사빠띠스다의 외침', 월간 『말』, 1998년 5월호. 4)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편역, 『신자유주의와 세계민중운동』, 한울, 1998. 5) 제임스 페트라스, '되살아나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운동', 『읽을꺼리』 제 2호, 1998. 6) 해리 클리버, 이원영·서창현 옮김, 『사빠띠스따』, 갈무리, 1998. 7) manuel castells, the power of identity, blackwell,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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