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에 관하여...
리파티의 브장송 고별 리사이틀(1950년 9월 16일)
연주자: Dinu Lipatti
음반사: EMI
음반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미완성' 음반.
그의 음악에 대한 갈증은 죽음 조차도 풀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은 갈증이 많이 났습니다.
커다란 머그잔에 물을 가득 담아 연거푸 들이부어도 웬일인지
이 갈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갈증의 경험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 꼭 집어 언제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갈증의 기억은 참으로 익숙하였습니다.
요즘 리파티의 연주를 다시 올려달라는 분이 많이 계셨습니다. 예전에 한 번 올렸던 곡인데 게시판이 바뀌면서 저만큼 숨어버려 찾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특히 브장송 고별 리사이틀을 많이들 좋아하시는 듯 합니다. 또한 이 음반에 대하여 많이들 궁금해하시더군요...
이 음반에 얽힌 사연을 말하며 망설이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 연주가에게 있어 연주 그 자체가 아닌 그 주변 이야기로 그의 작품을 말 하는 것은 결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연주 뒤에 감추어진 뒷이야기가 오히려 이 연주의 빛을 바래게 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고민 속에서도 번번히 전 제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들을 하고야 말곤 하지요.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감동을 주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과 5년의 짧은 활동을 한 후 33세로 세상을 떠난 디누 리파티... 이 브장송 고별 콘서트는 음악사상 유래가 없는 미완성 음반이었고 그의 짧은 연주 인생 중 그야말로 마지막 연주였습니다.
1950년 9월 16일 그가 브장송 음악제에 나갔을 때 그의 몸은 백혈병으로 이미 죽음의 문턱까지 가 있었고 가족들과 주치의는 연주를 극구 말리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이며 피아니스트였던 마들레느 리파티는 가슴 아프게 그 때를 회상합니다.
「그분은 아주 쇠약해져서 우려할 만한 상태로 연주회 날 저녁 브장송에 도착했으므로 피아노 연습을 하기 위해 연주회장인 '살 뒤 빨르라망'에 가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습니다. 호텔에 돌아오자 그분의 충실한 벗인 주치의가 연주회를 중단해야겠다고 만류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파티는 완강하게 '나는 약속했다. 나는 연주를 해야만 해'라고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그분은 기운을 차리기 위해 주사를 연거푸 몇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자동인형처럼 옷을 갈아입고 홀로 데려다 줄 자동차가 있는 데까지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그분에게는 정말 칼베르(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로 향하는 발걸음과 같았습니다. 숨이 막혀 실신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될 정도였습니다.
폭발적인 갈채가 홀에 도착한 그분을 맞이했습니다. 각처에서 모여든 청중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청중은 죽어가고 있는 -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 이 젊은 천재의 마지막 연주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손가락은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수많은 미스 터치를 범하다가 결국 쇼팽의 14곡의 왈츠 중 마지막 한 곡을 연주하지 못하고 끝내 무대를 내려와야 했고 두달 후에 영원히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그후 이 연주는 라이브 녹음으로 음반사상 유일한 미완성 연주로 우리 곁에 남게 되었습니다.
리파티의 연주 대부분을 녹음했던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그의 최후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기 30분 전에 베토벤의 'F단조 현악 4중주곡'레코드를 듣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봐요. 위대한 작곡가가 된다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아요. 저런 음악을 작곡하려면 당신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악기가 되어야 해요."
같은 시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리파티처럼 연주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신이 선택한 악기가 되어야 한다.」
리파티에게도 갈증은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의 음악에서 분명히 그의 갈증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시에 그러한 갈증 위에서 아름답게 꽃피었지요.
저 역시 그처럼 갈증 위에서 아름답게 꽃필 수 있을지... 신이 선택한 악기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지.... 제게도 과연 그런 자격이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이 음반 중 가장 감동적인 부분인 쇼팽의 왈츠 7번과 그의 마지막 연주였던 왈츠 1번을 들려드립니다. 1950년 당시의 라이브 녹음이였기에 음질의 열화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음악적 감동은 결코 음질과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믿고 있기에 자신있게 여러분에게 권합니다(이 음반은 이제 구하기 힘든 음반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대형 레코드점에서 재고가 한두 개 남아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해 전 심한 갈증 속에서 우연히 평소 가지 않던 성당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 중 「생명의 양식」 이라는 성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양식인 나에게로 오너라
내 물을 먹는 자 목마르지 않고...
..............................
'목마르지 않고'에 그만 목이 메어 버렸었습니다.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이 내게는 너무도 낯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마름의 고통이 너무도 강하게 밀려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갈증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하세요. 여러분...
2000년 5월 신왕호
*comment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 음반은 쉽지 않다.
가끔 약간의 물량이 수입될때가 있으니
그 기회를 놓지지 말고
꼭 들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작정 예전에 쓴 글을 긁어다 붙여놓고
깜빡했는데 왈츠 1번은 다음에 생각나면 올려드리겠다. ^^;
또한 리파티는 레파토리가 극히 제한적이였는데
이 쇼팽의 왈츠는 그의 몇안되는 레파토리중 하나였으며
또한 그가 매우 아끼는 곡이였다.
본 음반은 매우 감동적인것은 사실이나
쇠약한 몸을 이끌고 무대에 섰던 공연을 라이브녹음을 한것이라
연주를 하면서 박자를 놓지거나 악보를 건너뛰고 건반을 잘못누르는등의
여러 실수들도 많이 있으며 막판에 가서는 힘에 부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만일 전성기때의 그 의 연주를 듣고 싶다면 EMI에서 20세기 위대한녹음 시리즈로
그의 왈츠 연주가 나와있으니 그것을 들어보면 좋을것이다.
*comment2
갈증은 주기적으로 내 인생을 찾아온다.
그리고 그 갈증은 나이를 먹어가며
더욱더 복잡하고 그 근원을 간파하기 힘든 갈등과 함께
찾아오곤 한다.
그래도 목이 마를때마다
난
내 자신이 아직 사람임을 느낀다.
*comment 3
이 글을 쓴지도 5년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엄청나게 나이를 먹었나보다.
그 사이 세상은 많이도 바껴, 드디어 이 음반이 리마스터링이 되어 GROC 시리즈로 출반 되었다. 소문만 무성하고 정작 출반은 되지 않아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글을 새로 정리하며 검색해 보니 새로 나왔더라. 새로나온 음반 이미지로 다시 올린다.
*comment 4
예전에는 글과 함께 음악도 올렸는데, 저작권 문제와 트래픽 문제로 음악을 올리는게 예전처럼 쉽지 않다. 저작권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음악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을 계속하여 생각해 보겠다.
Dinu Lipatti: Besancon Recital [ORIGINAL RECORDING REMASTERED]
Performer(s): Dinu Lipatti, Frederic Chopin, Johann Sebastian Bach
Label: Emi Classics
Audio CD (March 23, 2004)
ASIN: B0001HAHPA
Posted by wangho at March 16, 2005 02:24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