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Choi Jeung Hwa (1961~ )

류영주 |2006.06.14 10:07
조회 39 |추천 1


최정화는 1961년 서울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파리, 방콕) (서울) 개최. 선데이 서울, 메이드 인 코리아, 쇼·쇼·쇼전 등 기획, 한국사진의 수평전, 아시아현대미술제(후쿠오카), 행복지전(도쿄), 아시아태평양 트리엔날레(뉴욕), 패스트 포워드(토론토), 느림-한국미술 호주 순회전(맬버른), 한일현대미술전(도쿄) 등 국내외 기획전 참가. 92년 이후 가슴시각개발연구소 운영, 인테리어 디자이너, 영화 아트 디렉터, 공공미술 제작자도 겸하고 있다. 흥행성과 대중적 인기를 보장하는 작가 최정화의 작품 세계는 그의 활동 범위만큼이나 다양하다. 미술관과 화랑, 부띠끄와 주점· 거리· 영화에서 우리는 그의 사진· 디자인· 설치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재래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물건들을 버무려 기발하고 신선한 미술 작품으로 변신시키는 그의 작업은 동시대의 시각적 토템에 가깝다. 최정화라는 화사하고도 달짝지근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몇 년을 사이에 두고 화급하게 바뀐 문화부의 명칭을 떠올리게 된다. 문체부를 거쳐 문광부로, 그러니까 팔팔올림픽이 거국적인 대사로 떠오르자 체육을 붙였다가 그 ‘여진’이 가시자 관광을 슬쩍 끼워 넣게 된 그 경로를 기억하게 한다. 기실 최정화가 만들어 내는 작품과 작업의 방법론에는 일찍부터 우리 문화 속에 내장되어 있던 건설적 체육주의와 일종의 관광주의라 할 만한 특정한 태도가 외삽(interpolate)되어 있다. 되돌아보면 국민보건체조와 교련·민방위 훈련으로 이어지는 신체의 훈육은 그 ‘공정’상 저 끝에서 한국 모더니즘의 성실하고도 미욱한 붓 자국과 맞닿아 있다. 또 미래를 위해 반납한 현재의 시간관 속에서 미술이란 것은 보는 과정을 즐긴다기보다는 남에게 혹은 미래의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의 물증으로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한발 양보해 말하자면, 미술품은 즐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관광적 운명―흔히 보는 신혼여행 사진의 경우처럼―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 경우 미술 작품은 과거의 고난을 막는 주술이자 미래의 풍요를 향한 물신(fetish)으로써 기능한다. "변두리의 낯선 아름다움" 최정화는 그 자신 놀랄 만한 체육 정신으로 주변의 사물들을 끊임없이 포획하고, 또 그것들이 놓여 있을 만한 사회적 ‘포인트’들을 두루 섭렵하는 작가다. 말할 것도 없이 작품은 물론이고 자신마저도 치장해서 보여주는 것을 즐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미술품의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는 관제적 노동의 성실성을 ‘빨리감기-패스트 포워드’ 하기를 즐긴다. 또는 과시의 물신성과 전시의 주술성을 ‘되감기-리와인드’한다. 다소간 악의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대량생산된 싸구려 물건들을 과감히 방치하거나 ‘흘러간’ 각종 향수(鄕愁)용 오브제들을 잡다하게 뒤섞는다. 대체로 이것들은 70년대의 국정교과서나 80년대의 삐라 혹은 90년대의 서커스 포스터 등에서 감지되는 감수성과 관통하는, 다시 말해 시간상으로나 공간적으로 변두리라 할 만한 장소에서 발견되는 오브제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주변적 오브제들을 반복해서 빨리 감거나 되감기함으로써 사태를 희화화하거나 비판하는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최정화의 강점은 아마도 그 과정에서 낯선 아름다움이랄까, 생경한 위엄이랄까, 그런 것까지를 노출시키는 특유의 힘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도 그렇지만, 특히 의 빨간 색 플라스틱 바구니들, 그것들과 겹쳐 쌓은 금박 트로피들의 모뉴멘트적 골격은 우리 몸 깊숙이 침투해 있는 문화적 관성들을 마치 피막이 벗겨진 전선처럼 그대로 드러낸다. 그 적나라한 기념비에 우리는 낮은 한숨을 쉬며 굴복하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최정화의 작품들이나 그의 작가적 태도가 사회정치적인 독법을 외연(外延)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활동 이력만 간단히 살펴봐도 이는 쉽게 추정할 수 있는 일이다. 88년도까지 계속되던 ‘체(體)’ 시리즈로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했다는 경력은 예외로 치도록 하자. 그 뒤론 갑자기 인테리어 디자이너·그래픽 디자이너·아트 디렉터 등을 겸직하면서 ‘최정화 브랜드’를 유행시켰고, 한동안 술집이나 길거리, 폐가 등 그간 배제되었던 전시 공간에서 소규모 이벤트와 릴레이 전시를 조직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각종 국제 미술 무대에 한국의 대표 선수로, 그리고 국내외 뮤지엄이나 상업 화랑에 단골 작가로 선발되는 그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추천수1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