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붉은악마 회원도 아니고 마니아적인 축구팬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의 팬이라고 할까요. 우리 선수들이 국제 대회에서 선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대한민국 국민일 뿐입니다.
요즘 들어 우리나라 축구 응원단의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악마”라는 이름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사와 상반되는 악의 상징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뭐 굳이 바꿔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극히 일부겠지만 요즘 심심찮게 들려오는 붉은 악마들(클럽 회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의 추태를 접하다보면 다른 생각이 들기 이전에 가슴이 너무 아파옵니다. 축구 하나로 국민이 모두 하나가 될 수는 있지만 축구 하나로 모든 것이 용서되진 않습니다.
거리를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놓는다거나 지나가는 남의 차에 올라가서 쿵쿵 뛰어 다 부숴놓고 공중전화를 두드려서 박살을 내고 남의 상점에 들어가 물건을 무대포로 그냥 들고 나온다거나 임신한 아줌마 배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고 못하게 말리면 자기 아버지 벌되는 어른의 멱살을 잡는다거나 젊은 남녀가 차 위에 올라가서 팬티까지 벗어 재끼고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몸짓을 한다거나 거리가 무슨 바닷가나 수영장인줄 아는지 여자들이 브래지어만 입고 다니고 남자들은 바로 이때다 싶어 그런 여자들의 가슴을 만지고 엉덩이를 더듬고 아주 무법천지에 “개판 5분 전”이란 표현도 부족하며 그야 말로 이름 그대로 악마들의 광란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응원단의 이름이 악마라서 악마처럼 행동하는 것이라면 이름을 바꾸면 좀 나아질까요? 글쎄요?
지금 이런 폐단이 이름만 바꿔서 말끔히 사라진다면 당장이라도 바꿔야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름을 바꾸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잘못된 거리응원문화를 바로 잡는 것이고 대기업의 얄팍한 상술에 놀아나고 있는 붉은악마의 순수성을 되찾는 일입니다. 그런 연후에 이름도 바꿔야 하는 것이죠.
축구팬이나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붉은악마의 그 “악마”의 이미지는 기독교에서의 그것과는 다를 겁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귀여운 앙마”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또한 우리나라 축구 응원단이 종교단체는 아니기 때문에 서양의 종교적 개념과 연관 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겠죠. 치우천왕도 종교적 개념의 우상이 아니라 붉은악마를 상징하는 마스코트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구요.
하지만 왠지 꺼림칙 한건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악마의 좋지 않은 의미 때문에도 그렇지만, 벨기에의 그것을 따라하는 것 같은, 외신 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독창성이 없는 이름이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왕에 우리 민족의 정기를 상징하는 치우천왕을 마스코트로 내세웠다면 응원단의 이름도 그에 걸 맞는 좀 더 민족적인 이름이어야 하겠죠. “악마(devil)”라는 이름은 우리 민족정서와는 거리가 멀며 서양에서 온 말이니까요.
도깨비는 어떨까요? 붉은 도깨비. 도깨비는 다들 알다시피 우리 민족 고유의 귀신이죠. 귀신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죽어서 되는 혼령이나 악령. 악귀가 아닌 부지깽이 등에 붙어살면서 착한 사람에겐 행운을 주고 나쁜 사람에겐 벌을 주는 정의의 靈(령). 도깨비는 원래 형체가 없지만 옛날 사람들이 치우천왕의 모습을 도깨비에 대입한 것이라고 하죠.
영문 표기 또한 도깨비 그대로를 쓰는 겁니다. Dokkaebi. 어떤가요? 외국산인 악마보다 국산인 도깨비가 우리나라를 응원해도 더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또한 응원을 빙자해서 못된 짓 하는 일부 정신 나간 사람들 도깨비가 혼도 내줄 것 같구요.
붉은악마 창단 멤버 분들은 치우천왕하면 딱 연상되는 것이 도깨비인데 첨에 왜 도깨비로 할 생각을 못했을까요? 아마도 붉은악마라는 이름을 먼저 지은 후에 치우천왕을 영입(?)하셨나 봅니다.
그리고 붉은색에 대한 이견은 없습니다. 옛날 어르신들은 “빨갱이”라 하면 치를 떠셨는데 요즘엔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빨갱이 들이니...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얘기겠지요. 붉은색은 정열을 상징하고 또한 상대방을 압도하는 색이라고 하니... “붉은”은 그대로 두는 게 좋겠지요.
다른 색으로 바꾸면 또 돈 들어가고 게다가 마스코트까지 다른 걸로 바꾸면, 예들 들어 “붉은 호랑이”로 바꾸자면 치우천왕 지우고 호랑이 그려 넣어야 하는데 그 비용은 또 장난이 아닐 겁니다. 뭐 붉은악마 뒤엔 부자 스폰서 KTF가 있긴 하지만 결국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상품들은 우리보고 돈을 내고 사라고 할테니... 그러나 “붉은 도깨비”로 바꾸면 다른 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이름만 바꾸면 되니 자원의, 비용의 낭비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