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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검은 구름과 불 타는 땅 - 고대의 서상(瑞祥)정치와 재이설(災異說)

진정우 |2006.06.21 16:25
조회 476 |추천 1

http://kr.dcinside7.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history&page=1&sn1=&divpage=1&banner=&sn=on&ss=off&sc=off&keyword=무지랭이&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28     다운로드 #1    32m1711m0.jpg (40.6 KB), Download : 0 제 목    검은 구름과 불 타는 땅 - 고대의 서상(瑞祥)정치와 재이설(災異說)


아무리 합리성을 추구한 유가(儒家)의 역사서술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고대로부터 확립되어 쉽사리 탈피할 수 없었던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의연히 존재하였습니다. 김부식이 살고 있었던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둘러싼 부명(符命)과 서상(瑞祥), 재이(災異)의 조작이 얼마만큼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 논리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유용한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현혹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기 때문에 전통시대의 지식인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순자(荀子)도 “기우제나 일식에 대한 제사 및 점복 자체는 실제 아무 소용이 없지만, 백성들이 그것을 신성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정사(政事)를 문식(文飾)하는 데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로마세계에서 성행된 각종 형식의 모든 제의를 백성들은 똑같은 진실로 믿었지만, 철학자들은 똑같은 허구로 생각하는 반면, 행정관들은 똑같이 유용하다고 여겼다”는 어느 서양인의 지적도 실로 정곡을 찌르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고대인의 심성을 기억하지 않으면, ‘검은 구름[玄雲]’과 ‘땅이 불탔다[地燃]’는 기록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1) 3년 (서기 59) 봄 3월에 왕이 토함산에 올라갔는데, 검은 구름이 덮개[蓋]처럼 하여 왕의 머리 위에 떠서 오래 있다가 흩어졌다. 여름 5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6월에 살별이 천선(天船)자리에 나타났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위의 기록에서 반영된 자연현상은 검은 구름과 혜성의 출현으로 요약됩니다. (혜성의 출현은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검은 구름’이라고 번역을 했기 때문에, 이것이 화산의 연기를 묘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원문에는 ‘현운(玄雲)’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현(玄)’은 ‘현묘(玄妙)하다’는 표현에 쓰이는 것처럼 좋은 뜻입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인들도 ‘玄雲’의 출현은 매우 상서로운 조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2) 검은 구름(의 출현)은 황제가 사람을 부리니 각자가 그 재목을 다 하는 것을 말한다. (『宋書』卷22 樂志, 玄雲,言聖皇用人,各盡其材也.)

(3) 玄雲 현운가
玄雲起丘山,祥氣萬里會.검은 구름이 산 위에 오르고, 상서로운 기운이 만 리에서 모여드네.
龍飛何蜿蜿,鳳翔何翽翽.꿈틀거리며 웅비하는 용이여,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하는 봉황이여.
昔在唐虞朝,時見靑雲際.옛적 당우 시절에, 때때로 푸른 구름이 드리우는 것을 보았노라.
今親遊萬國,流光溢天外.지금 친히 만국을 주유하니, 찬란한 빛은 천외에 넘치도다. (후략) (『晉書』卷23 樂志 )

실제 토함산 정상에서 검은 구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뒷 구절에서 “왜국과의 수교(修交)”를 언급한 것은 검은 구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지만, 위 기록의 바로 뒷 부분에서 “가을 8월에 마한의 장군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바쳐 항복해 왔다.”는 사건을 전한 것은 ‘현운’이 갖는 ‘서상’으로서의 의미를 웅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땅이 불탔다[地燃]’는 것은 중국에서도 좋지 않은 징조, 제후의 하극상, 국경에서의 변고를 암시할 때에 자주 거론되는 표현입니다.

(4) 광희 원년 5월, 범양국의 땅이 불타서 가히 아궁이(와 같아서) 이 불이 땅을 초토화시켰다. 이 때에 예악정벌이 (천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후에게서 나왔다. 『晉書』卷29 五行志 山崩地陷裂

(5) (앞부분에서는 풍문통(馮文通)이 북위 태무제에게 입조하지 않고 반항하는 기록을 소개한 후) 세조가 또 다시 악평왕 비에게 명하여 풍문통을 토벌하게 하니, (풍문통의 세력이) 날로 위축되어, 상하가 두려움에 떨었다. 풍문통의 태상 양민이 문통에게 다시 항복하여 죄를 청하라고 권하였다. 문통이 대답하기를,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으니, 만일 일이 틀어지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가서 훗날을 도모하겠다.” 양민이 말하기를 “위나라가 천하의 무리를 이끌고 한 귀퉁이의 땅을 공격한다면,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우리 세력은) 반드시 흙 무너지듯이 붕괴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이적(夷狄)이라, 믿고 기약하기가 어려우며, 비로소 서로 화친한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마음을 바꿀까 두렵습니다. 일찍 결정하지 않으시면 후회해도 늦습니다.” 풍문통이 양민의 권고를 듣지 않고, 몰래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하였다. 태연 2년, 고구려가 장수 갈로 등으로 하여금 무리를 이끌고 풍문통을 맞이하게 하여 화룡성에 들어가서는, 누더기옷을 빼앗고 문통이 거느리던 병기마저 빼앗아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문통이 이에 성내의 사졸과 여자들을 데리고 고구려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풍문통의 나라에는 그 해가 끝나도록 이리떼들이 밤새도록 성을 포위하고 울부짖었다. 또한 쥐들이 성 서쪽에 모여들어 수 리(里)를 가득 메웠으며, (중략) 숙영지가 불에 타서 열흘만에 꺼졌다. 땅을 파니 지네들이 나왔으며, 한 달 남짓 지나서야 그쳤다. (『魏書』卷97 馮文通傳)

(6) 동위 무정 2년 11월, 서하의 땅이 무너지고 불에 탔다. 경방의 역술가가 점을 쳐 말하기를, “땅이 스스로 무너졌으니 군왕이 죽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조훤이 말했다. “불이란 양기의 정수이며, 땅이란 음의 주인이다. 땅이 불탄 것은 음의 도를 넘어서 양의 정치를 행하는 것이니, 신하가 제멋대로 방자하여 마침내는 스스로 망할 (형상이다.)” 이 때에 북제의 신무제가 재상을 세웠으나, 후경이 하남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2년 후에 신무제가 과연 죽고, 후경은 마침내 난을 일으켰으니, 스스로 패망의 대가를 취한 것이다. (『隋書』卷23 五行志)

이와 같이 ‘地燃’이 앞으로 닥칠 좋지 않은 사건을 암시한다는 점은『삼국사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토함산의 땅이 불탔다는 태종 무열왕 4년(657)의 기록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년 (659) 여름 4월에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차 이를 치려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가을 8월에 아찬 진주(眞珠)를 병부령으로 삼았다. 9월에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00자나 되었고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6년)

토함산의 땅이 실제로 불에 탔는지는 저도 알 수 없으며, 이 사건이 당시 무열왕과 그를 둘러싼 지배계층 사이에 어떤 식으로 논의되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전통시대의 역사서들은 이와 같은 자연 현상을 기록할 때, 그것을 실제 정치와 연결시키려고 했다는 점인데, 그 과정에서는 인위적인 ‘조작’이 충분히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사서에서 빈번하게 출현하는 서상 중에는 그 실재를 부정할 필요가 없는 부류들도 있지만, 발이 여섯 개 달린 짐승, 눈이 하나밖에 없는 물고기,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 유니콘(?), 용이나 봉황, “고라니의 몸에 소의 꼬리, 이리의 목에 말의 발굽을 가진 짐승”, “길흉을 알고 불을 때지 않아도 저절로 끓으며 다섯 가지 맛이 저절로 생기는 신비의 솥” 등은 전혀 그 실재를 인정할 수 없는 부류입니다. 흔히 볼 수 없는 ‘서상’일수록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정치적인 효과는 자명하였을 것이며, 실제로 이러한 비일상적인 것들이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는 대표적인 ‘서상’이었다는 점은 전통시대의 관료들에 의해서 자행된 ‘서상의 조작’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케 해줍니다. 한대(漢代)에 서상을 많이 보고한 관료였던 황패(黃覇)는 그 공으로 승상에까지 발탁되었으며, 승상이 된 그는 지방관의 상계(上計)를 듣고 있을 때 갑자기 날아들어온 참새를 “신작(神雀)”으로 보고하려 하였고, 변경에서 온 관리들은 그 새의 정체를 알았지만 물어도 짐짓 모른 채 하며 속으로는 승상의 작태를 비웃었다는 일화는 고대 정치문화의 일단면을 엿보게 해주는 일화들입니다.

물론, ‘재이’의 대부분은 일상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들이지만, 3년 동안 불타오르도록 끄지 못했다는 ‘地燃’의 사건은 확실히 신라의 수도를 현재의 경주에 비정하고 있는 기존의 통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의 토함산이 지금과 같은 작은 산에 불과하였다면, 신라의 국왕은 충분히 인력을 동원하여 화재를 진압했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3년 동안 방치되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토함산이 불탔다고 기록한 사가(史家)는 단순히 그 사실만을 적었을 뿐, 거기에 따른 구체적인 인명과 재산의 피해, 그리고 수도에서 일어난 대재난을 복구하기 위해 국가가 취한 조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요컨대 저는 토함산이 화산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되고 있는 ‘玄雲’과 ‘地燃’은 비록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자연 현상이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모종의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있으며, 특히 그것을 기록한 사관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과대하게 포장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고대의 관료들이 ‘서상’과 ‘재이’의 출현에 민감하였던 군주의 약점을 이용하여 ‘서상’과 ‘재이’를 가지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데에 줄기차게 이용해 왔음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비합리적 요소들이 사관(史官)들의 필법에 의하여 (왕의 근신과 왕도정치를 향한 매진을 유도하기 위해) 마치 실제로 일어났던 것처럼 사서에 떳떳하게 남아있음을 기억한다면, (신라의 수도가 지금의 경주에 있었다는 허다한 물증도 무시한 채) 토함산에서 일어난 ‘서상’과 ‘재이’를 가지고 신라의 수도를 대륙에서 찾는 노력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끝으로 동중서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비록 ‘재이설(災異說)’이라는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정당화해주고 있지만, 그 원리를 아는 것은 당시의 기록을 살피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무제 건원 6년 6월, 요동에 있는 고조의 사당에 불이 났고, 4월에는 고조 능원의 편전에 불이 났다. 동중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올렸다. "『춘추』의 방법은 지난 날을 가지고 미래의 일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에 일이 생기면 『춘추』에 기록된 사건 중 무엇이 비교될 만한 것인가를 살피고, 그 신묘한 뜻을 찾아내어 사건의 의미를 확인하며, 그것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를 이해하여 그 이치를 터득하면, 천지의 이변과 국가의 일은 모두 명백해질 것이며, 의심스러운 점이 조금도 없게 됩니다." (『한서』권27 오행지)

* "죽*습니다"가 왜 등록하기에 부적절한 말인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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