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영웅 '명림답부'
명림답부 (明臨答夫, 67~179 )
165년(신대왕 1) 연나조의(椽那衣)로 있다가, 포악한 차대왕(次大王)을 죽이고 왕제(王弟) 백고(伯固)를 신대왕(新大王)으로 옹립하였다. 이듬해 패자(沛者)로 승진되고, 고구려 최초의 국상(國相)이 되어 정치 ·병권(兵權)을 도맡았다. 172년 한(漢)의 현도군 태수(太守) 경림(耿臨)의 침입을 받자, 지구전 끝에 책략으로 좌원(坐原:遼寧省)에서 격파(좌원대첩)하여, 왕으로부터 좌원 ·질산(質山)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113세의 고령으로 죽자 질산에 장사지내고, 묘지기로 20가구가 배치되었다.
[ 일화소개 ]
“한나라 군사[漢兵]는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 편을 가벼이 여기니, 만일 나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가 겁을 낸다고 하여 저들이 자주 내침할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는 이른 바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부(萬夫)로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漢)은 국토가 크고 인민이 많은 데다가 지금 굳센 군대가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칼날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경우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경우에는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인(漢人)들은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실어 왔으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참호를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으며, 들판의 농작물을 치우고 기다리면 저들은 반드시 만 일개 월이 지나지 않아 굶주리고 피곤해서 돌아갈 것이니, 그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써 몰아치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한인(漢人)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가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싸우니, 한군(漢軍)이 대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質山)을 주어 식읍을 삼게 하였다. [신대왕] 15년(179) 가을 9월에 죽으니 나이 113세였다. 왕이 친히 빈소에 가서 애통해하고, 7일간 조회를 파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질산(質山)에 장사지내고 수묘인(守墓人) 20가(家)를 두었다.
=========================== 삼국사기에 나오는 명림답부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
『三國史記 列傳 三國史記卷第四十五-明臨答夫 (삼국사기 열전 권제45 - 명림답부』
人也. 時, 爲國相. 大守{太守} , 發大兵欲攻我, 王問群臣戰守執{孰} 便. 衆議曰: "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曰: "不然, 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小{少} 者宜守, 兵家之常也. 今, 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迫之, 可以得志." 王然之, 城固守.
명림답부는 고구려인이다. 신대왕 때 국상이 되었다. 한 나라 현토 태수 경림이 대군을 발동하여 우리를 침공하려 하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에서 어느 것이 유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는 병사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비겁하다 하여 자주 올 것이요, 반면에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관문을 지켜도 만 명이 당하지 못하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군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우리를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으며, 지금 정예병이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또한 군사가 많은 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병가의 상법입니다. 지금 한 나라 사람들은 천 리 길에 군량을 운반해 왔으므로 오랫동안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들판을 비워 놓고 기다린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강병을 앞세워 추격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帥師數千騎, 追之, 戰於, 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及, 爲食邑. 十五年秋九月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以禮葬於, 置守墓二十家.
한 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렸으므로 돌아갔다. 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교전하였는데, 한 나라 군사가 대패하여 단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좌원대첩).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하사하여 그의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가 15년 가을 9월에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통해 하며 7일 간 조회를 금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하고 묘지기 20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