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Pac 힙합사의 전설이 되어버린 한 이름.
1996년 9월 7일.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플라밍고 로드(Flamingo Road)의 동쪽 근처에서 약 13발의 총성이 울렸고, 래퍼 투팍(2pac)이 쓰러졌다. 그리고 약 1주일이 지난 후 네바다 대학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그는 겨우 25세의 나이로 결국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래퍼로서, 배우로서 너무 많은 재능을 지녔던 그는 어머니 아페니 셰이커 (Afeni Shakur)와 아버지 빌리 갈란드(Billy Garland), 그리고 이복동생인 세키와(Sekiywa)를 남겨 놓은 채 이렇게 우주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투팍이 숨을 거둘 당시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 듯 상승 중이었다.
랩 역사상 첫 더블 앨범으로 빌보드 팝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한 [All eyez on me]는 약 3백만장 정도의 판매를 기록했고, 수록 싱글인 "California love", "How do you want it"은 최정상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출연한 3편의 영화는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처럼 누가 봐도 가장 축복받은 인생을 살던 그도 죽음의 위세에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현재 투팍의 죽음은 미궁에 빠져 있다. 7일 라스베이거스 MGM 호텔에서 자신의 소속 레이블인 '데스 로(Death Row)'의 동료들과 마이크 타이슨 대 브루스 셀던의 헤비급 세계 타이틀전을 관전하고 퇴장하던 투팍은 한 흑인 청년과 마주쳤다. 시비 끝에 동료들과 청년을 마구 구타한 투팍은 곧 호텔을 빠져 나와 데스 로의 대표인 마리온 "슈그" 나이트(Marion "Suge" Knight:31세)의 집에서 옷을 갈아 입은 후 흑인 갱 조직을 반대하는 모임에 참석키 위해 나이트가 운영하는 MOB 클럽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목격자의 진술에 의하면 플라밍고 로드의 동쪽으로 향하던 나이트의 BMW 자동차가 코발 레인(Koval Lane) 사거리에 다가설 무렵 뒤에서 따라 오던 흰색 캐딜락이 속도를 내며 옆으로 다가왔고, 곧바로 총격이 가해졌다고 한다. 항상 방탄 조끼를 입고 다니던 투팍은 이 날 따라 불행히도 보통 옷차림이었다. 그는 네 발의 총을 맞았고, 이 중 가슴을 명중한 두 발은 치명적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두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13일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화장되었다.
죽음 둘러싸고 떠도는 소문들
투팍의 사망 1주일 후 그의 죽음에 관한 루머가 나돌기 시작했다. 먼저 타이슨과 셀던의 시합이 끝난 후 싸움을 벌인 청년이 투팍을 쏘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투팍이 총격을 당했을 때 이 청년을 취조하고 있었다고 나중에 발표했다.
두 번째는 총격의 대상이 투팍이 아니라 나이트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나이트는 로스엔젤레스 지역 갱인 더 블러드(The Blood)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로 라이벌 갱인 더 크립(The Crip)의 주요 공격 대상 중 하나란 것이다. 더 크립은 나이트를 목표로 총격을 가했거나 아니면 그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의미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인물 하나를 희생물로 선택했고, 그가 바로 투팍이었다는 말이다.
세 번째로 제기되고 있는 의문은 동부(The East Coast)와 서부(The West Coast) 랩의 극한 대결 때문에 투팍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서부 랩을 대표하는 데스 로는 오랫동안 동부의 '배드 보이(Bad Boy)' 레이블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94년 강도들에게 4만달러 상당의 보석을 빼았겼던 투팍은 배드 보이의 대표 션 "퍼피" 콤즈(Sean "Puffy" Combs)와 대표적인 아티스트 노토리어스 비 아이 지(The Notoriuos B.I.G.)를 범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콤즈는 투팍의 사망 후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해 왔다).
이처럼 투팍의 죽음이 더욱 미궁에 빠져들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투팍의 동료인 나이트와 데스 로의 멤버들이 총격전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지 모르나 누군가 확실한 증언을 하지 않는 이상 투팍의 죽음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될 지도 모른다.
커트 코베인에 필적하는 대중 음악의 우상
1994년 권총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얼터너티브 락 밴드 너바나(Nirvana)의 핵심 멤버 커트 코베인(Kurt Kobain)처럼 투팍은 젊은이들의 고뇌와 분노를 대변했던 '90년대 대중음악'의 우상이었다. 마치 제임스 딘이나 엘비스 프레슬리,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마빈 게이처럼 그는 짧은 인생을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살다 갔다.
이처럼 '90년대 흑인 대중 문화'를 대표하는 아티스트 투팍 아마루 셰이커(Tupac Amaru Shakur:투팍의 본명)는 지난 '71년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메릴랜드주 의 볼티모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근교의 마틴 시(Martin City)로 이주한 후 그룹 디지털 언더그라운드(Digital Underground)의 멤버로 대중음악계에 첫 발을 디뎠다. 그룹 멤버로 그래미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는 그는 '91년 첫 솔로 앨범인 [2Pacalypse now]를 내 놓았다. 이 앨범은 R&B 앨범 차트 13위까지 진출하며 랩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한 "Brenda's got a baby", "Trapped" 등의 히트곡들을 낳았다.
하지만 과격한 가사는 곧 보수 정치인들의 공격 대상으로 떠올랐고, 당시 부통령이던 댐 퀘일(Dan Quale)은 공개적으로 이 앨범을 전통적 가치 기준을 무너뜨리는 사악한 음반으로 규정했다. 비록 대히트는 아니었으나 첫 앨범의 성공으로 그는 순탄한 성공 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93년 앨범 [Strictly 4 my n.i.g.g.a.z.]는 "I get around"(팝 11위, 랩 5위, R&B 7위)와 "Keep ya head up"(팝 12위, 랩 2위, R&B 7위) 등의 히트곡들을 낳았다.
세 번째 앨범인 [Me against the world('95년)]는 첫 두 앨범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약 2백만장의 판매를 기록한 이 앨범에선 "Dear mama"(팝 9위, 랩 1위, R&B 3위)와 "So many tears"(랩 6위, R&B 21위), "Temptation"(랩 36위) 등이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Dear mama"는 홀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 아페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곡으로 가사가 눈물겹게 다가 온다 - 이 곡을 만들 당시 투팍은 슬프게도 아버지 빌리 갈란드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투팍의 네 번째 앨범 [All eyez on me](약 6백만장 판매)는 최고의 상업적 기록을 세운 '하드코어 랩 앨범'으로의 영예를 누렸다. 두 장짜리 앨범으로 무려 27곡이 실린 [All eyez on me]의 레코딩에는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했다.
"California love"와 "How do you want it"은 각각 닥터 드레(Dr. Dre), 로저 트라우트만 (Roger Troutman)과 조데시(Jodeci)의 케이시(KC), 조조(JoJo)와의 합작품이고, "2 Of americaz most wanted"와 "All 'bout u"에는 스눕 도기 독(Snoop Doggy Dogg)이 참여했다. 이외에도 "No more pain"은 조데시의 드 반테 스윙(De Vante Swing)이 프로듀스했고, "Got my mind made up"에는 Dat Nigga Daz, Kurupt, Redman, Method Man 등의 래퍼들이 동지로 참여했다.
데스 로(Death Row)
이와 같은 투팍의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데스 로는 '92년 '서부 랩의 대부'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룹 N.W.A.(Niggaz With Attitude) 출신의 래퍼 겸 프로듀서 닥터 드레와 네바다 대학교 미식축구 선수였던 마리온 슈그 나이트가 함께 설립한 레코드사이다.
거의 150 킬로그램의 거구로 음악계에 모습을 보일 당시 무명이었던 나이트는 마치 할리우드를 조종하는 갱의 두목과 같은 이미지로 랩 음악계에 두려운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루머에 의하면 그는 폭력으로 사업을 운영해 온 전형적인 조직 폭력배의 보스라고 한다. 데스 로 설립 직전 그는 닥터 드레를 영입하기 위해 그가 소속돼 있던 Rutjless 레이블의 대표인 이지 이(Eazy E:N.W.A. 출신으로 '95년 에이즈로 사망)를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로 협박, 강제로 계약을 해제케 만들기도 했다.
데스 로는 닥터 드레의 앨범 [Chronic]과 스눕 도기 독(Snoop Doggy Dogg) 의 [Doggystyle] 등으로 지난 4년간 무려 1천8백만장의 판매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으나, 폭력 집단의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회단체의 집중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큰 기대를 걸었던 스눕 도기 독의 두번째 앨범 [Doggfather]의 부진과 닥터 드레의 탈퇴는 데스 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투팍이 죽기 얼마 전 닥터 드레는 동업자였던 나이트에게 저주를 퍼부은 후 레이블을 탈퇴했다. 이제 투팍의 죽음으로 한 때 '서부 랩의 메카'로 군림했던 데스 로는 와해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타고난 연기력으로 영화에도 얼굴 내밀어
그의 사망 이후 마카벨리(Makaveli) 가명으로 [The Don Killuminati]가 발표됐고, 미발표작인 [One nation]과 [Outlaw immortals]도 발매 대기 중이다.
한편 투팍의 재능은 좋은 음악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연기력으로 지난 4년 동안 무려 6편의 영화에 모습을 보였다. 흑인 빈민가 청년들의 애환을 다룬 영화 [Juice]에서 비숍(Bishop)이란 역할로 스크린에 데뷔한 그는 [Poetic Jusitice]에서 재닛 잭슨의 상대역으로, 농구 영화 [Above The Rim]에선 버디(Birdy) 역으로 출연했다.
또한 지난 2년 동안 제작된 [Gridlock]과 [Gang Related], [Bullet]은 개봉을 앞두고 있는 상태이다.
분노와 파괴로 점철된 사생활
외형적인 화려함과 달리 투팍의 성장기는 불우했다. '60-'70년대 흑인 과격 단체인 블랙 팬더(BlackPanther)의 멤버로 만난 그의 부모는 여러 차례 테러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을 추격을 받았고, 그 와중에 투팍을 낳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어머니의 사정에 따라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아야만 했던 그에게 보통 어린이의 성장기는 기대하기 힘든 축복이었는지 모른다. 이런 성장 과정은 그의 정서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고, 당연히 그의 랩에는 이와 같은 험난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많이 드러나 있다. 그는 랩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인생의 처절함과 불행, 그리고 흑인 빈민가의 생활과 폭력 등을 표현했다.
사실 투팍은 가출 십대들을 위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Underground Railroad)'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사망 직전 흑인 갱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등 맣은 긍정적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생활은 분노와 파괴의 연속이었다. 1983년 그는 두 명의 사복 경관에게 총을 쏜 혐의와 성추행으로 기소된 바 있다. 이미 그 전에도 그는 사인을 받길 원하던 여성 팬을 구타하고, 허가받지 않고 총기를 소지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의 과격한 행동은 영화 현장에서도 드러났다. 자신이 주연한 영화 [Poetic Justice]의 감독 존 싱글턴(John Singleton)이 영화 [Higher Learning]의 캐스팅에서 자신을 제외하자 감독을 폭행하러 달려 들었고, Allen Hughes 감독의 [Menace II Society]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소속된 갱과 라이벌 조직의 총격전에서 6세 소년이 사망하는 등 두 건의 살해사건에도 연류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지난 5년 간 무려 8차례나 체포되고, 성폭행 혐의로 8개월 동안 실형을 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투팍의 삶은 난장판의 연속이었다.
아들이 죽은 후 아버지 빌리 갈란드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아들의 불행에 대해 난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내 아들이 날 필요로 할 때 난 그 옆에 없었다. 이제 모두가 내 아들의 사생활보다 업적에 관심을 가져 달라. 죽은 내 아들을 마치 흉악한 범죄자처럼 얘기하는 건 옳지 않다. 물론 그 아이가 완벽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짧은 인생을 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일들을 많이 했다."
대중 음악사에서 투팍이 짧은 기간에 이룩한 업적은 실로 엄청나다.
갱스터 랩의 인기가 떨어지는 추세 속에서도 그는 더욱 더 과격한 언어로 소외 계층의 절망과 분노를 대변했고, 미국 사회가 지닌 모순을 직시하는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지금까지 발표한 음악만으로도 그는 대중음악사에서 이미 그 누구에도 비교될 수 없는 자신만의 위치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그의 죽음과 함께 그만의 독특한 철학과 천재성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투팍은 분명 한 인간으로 많은 한계를 드러낸 인간이었다.
무엇이 그를 분노케 했고, 스스로를 파괴하게끔 만들었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음악이 아직까지 음악 팬들의 곁에 남아있는 점이다. 앞으로 오랫 동안 투팍의 음악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큰 용기를 제공할 것이다.
글 / 리드머닷넷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