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의 둘째 모순은 분명히 불완전한 교정에서 생기는 것 같다. 이 사람은 먼 과거생에서 이집트의 임금 자리에 있었던 적이 있다. 으스대고 오만한 태도, 의젓하고 자신만만한 행동거지 따위는 그 경험에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 생에서 팔레스타인에 태어나 예수님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다. 그 위대한 스승의 인격은 그에게 엄청난 감명을 주었고, 그는 예수님과의 교류를 통하여 사회봉사에 대한 강한 충동과 인간은 모두 형제라는 이성적인 믿음을 얻은 것이다.
그의 경우 현생에서 우세한 것은 이 후자 쪽의 충동이다. 그는 평생의 사업으로 종교나 사회봉사 분야에서 지도자로 일하는 길을 택했다. 복음전도의 새로운 방식을 세워 그는 지금도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또 고민하는 사람들의 상담자로서도 아주 알뜰하고 진지하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이따금 저 이집트 시대의 사나운 오만에 사로잡히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성질이 팔레스타인이나 그 밖의 전생에서 반밖에는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잠재해 있는 모순된 성질을 깨닫고, 그는 지금 그것을 극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노력을 계속하노라면 그는 차츰 조화를 잘 이루는 사람이 되고, 아직 청산되지 않은 성질도 차츰 자기완성과 봉사라는 새로운 목표에 따라 향상되어 갈 것이다.
이렇게 모순을 자각하는 것, 어떤 성격적 경향이 가장 바람직한가를 분별하는 것, 그리고 대립되는 성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 등이 뿌리 깊은 갈등을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이런 경우들을 면밀히 살펴 나갈수록 누구든 뚜렷이 “먼저 당신이 사는 목적을 정하시오”하고 리딩이 거듭해서 권고하는 까닭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과연 극히 건전한 말이지만, 동시에 너무 평범하고 유치한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신중하게 끝까지 음미해 본다면, 이 평범한 말의 뜻이 인격의 통일과 조화를 향해 가는 도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이상 내지 목표가 정해지면 항해에 필요한 나침반은 가진 것과 같다. 즉, 그것은 무의식의 마음속에 있는 어떠한 모순되는 생각의 소용돌이라도 다스리고 조화시키고 초월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 투쟁은 어쩌면 빛과 어둠의 투쟁, 영과 육 또는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해 본다면 그것은 무의식의 심층에 들어 있는 과거의 생각과 행위가 갖는, 아직 청산되지 않은 힘과 계몽된 의식과의 싸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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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몇 세기에 걸쳐 무죄(無罪)와 원죄(原罪)라는 문제로 고민해 왔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이 원래 선인가 악인가를 따지는 일에 정면으로 맞붙어 왔다. 플라톤은 갓난아이의 마음은 전생에서 살던 상태의 기억으로 가득 차있다고 생각했다. 로크는 갓난아기의 마음은 백지이고, 그 위에 사상(思想)으로 개념화될 온갖 인상들을 감각이 써넣는다고 보았다. 신학자들은 모든 유아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더럽혀져 있으며, 원죄는 오직 올바른 영성체(領聖體)로써만 씻길 수 있다고 한다. 윤회론의 견해는 모든 인간이 진정 죄의 유산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지어 놓은 죄이지 아담과 이브의 죄라는 따위의 비유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며, 죄는 과거의 자신의 행위에서 생기기 때문에 세례나 교회의 어떤 의식 -물론 그런 의식에는 그 나름의 상징적 가치나 목적은 있다. - 으로 씻길 수는 없다고 본다.
원문내용(작성자:최희윤)-----------------------------------
인생은 재미있는 소설의 줄거리처럼 그 모순과 투쟁 때문에 흥미가 깊은 것이다. 원시인에게는 투쟁이 주로 자연의 여러 가지 힘에 대한, 그리고 다른 인간에 대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진화함에 따라 그 투쟁은 차츰 내적 요인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이 내적 투쟁은 각 시대에 따라 선과 악, 영과 물질, 이성과 감성, 양심과 충동,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의 대립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런 묘사에는 모두 어느 만큼의 진리가 담겨 있지만, 윤회론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투쟁의 설명은 되어 있지 않다. 윤회론에서 보면 투쟁의 근본 원인은 인간이 스스로를 물질적 차원의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저지르게 되는 잘못에 있는 것이다. 하긴 인간은 스스로를 진화시키기 위해 그 물질을 통해 자기를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그릇된 인식이 이기적이고 차별적인 행동을 낳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보복의 카르마를 작동시키게 되는 것이다. 카르마의 작용은 인간의 그릇된 행위를 객관화 시킨다. 인간은 그 속에 갇혀 자유를 잃고 만다. 이 자유의 상실이 인간의 정신적 고뇌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지운 그 보이지 않는 감옥인 속박과의 투쟁이 내적 갈등의 기본형이다.
케이시 리딩은 이 밖에 또 하나의 투쟁원인이 있다고 밝혀준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카르마에서 보복과 연속이라는 두 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연속성 때문에 많은 부조화와 충동이 계속 이월되면서 인간의 내면세계에 새로운 갈등의 원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리딩에 따르면, 충동이란 뭔가 과거생의 경험에서 나오는 강한 욕망이나 욕구를 말한다. 모순되는 욕구로 생긴 투쟁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충동이 완전히 진정되지 않은 때이다. 많은 경우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충동과 그 교정의 불완전이라는 이 개념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는 다음의 경우일 것이다.
이 사람의 성격에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모순이 있다. 첫째는 이 사람이 어떤 때는 은둔적이고 내향적이며, 침묵·냉담·비사교적·학구적·초세간적인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아주 상냥하고 외향적이며, 명랑하고 솔직하며 관능적이라는 것이다. 리딩은 이 기묘한 분열이 두 가지의 분명한 경험의 흐름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비사교적 경향은 영국의 수도원에서 수도승으로 살았을 때에 형성되었으며, 그의 명랑하고 솔직한 성질은 중세의 십자군 전사였던 전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성격상의 이런 이상한 이중성은 대개 사람들이 싫어하기 마련이다. 오늘은 솔직하고 내일은 냉담하고 무뚝뚝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까이 하기를 주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