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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몽에 대해 말하다

류정희 |2006.07.25 06:53
조회 9 |추천 0


한 때 나의 꿈은 저 불란서의 뒷골목에나 가서 푸른 눈의 女子와 놀다가 객사하는 것 또 한 때 나의 꿈은 아무도 모르는 고장에 가서 포플라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것 또 다른 한 때 나의 꿈은 야간 열차처럼 덜컹거 리는 바람을 타고 노래의 끝까지 가서 술을 마시다 죽는 것 술을 마시며 몽롱한 꿈 속에서만 살다가 죽는 것 죽어서 하루 종일 바다의 음악이나 듣는 것 1 돌을 찾아서 오래간만에 고향에 내려와, 어린 아들과 함께 강가에 갔었네. 딱히 마 음 속에 두었던 돌의 얼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은 하루 종일아이와 함께 강변을 헤맸네. 귀여운 수달이라도 보았던 걸까, 다섯 살 박이 아이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中秋의 햇살이 부서지는 강변에서 나는 하루 종일 침묵하는 돌들을 만났을 뿐이네. 말을 건네면 저만치 달아나던 돌들, 네 흐린 눈동자로 날 쳐다보지 마, 속삭이며 네게서 등을 돌리던 돌들. 등돌린 돌들 일으켜 세우면 돌들은 그들의 껍질 뿐인 몸만을 그곳에 남겨두고, 영혼은 말을 타고 멀리, 영원으로 달아나 버렸네. 강언 덕 나뭇잎 새로 靑色의 어둠이 오고 초저녁 별들 새초롬히 부르튼 발가락을 내밀 때, 배고른 귀가길에서 드디어 만난 먹청석 하나. 푸르고 깊은 밤에 만난 '멍청한 영혼'이라고, 아이와 나는 그 돌을 '멍청석'이라고 불렀지만 먹청석 하나 껴안고 돌아오는 저녁은 다 늦은 꿈길처럼 아늑했네. 2 꿈 이야기 그날 밤 나는 고구려 꿈을 꾸었네. 아주 높은 산 위였는데, 그곳엔 광 활한 평원이 있었고 그곳을 사람들은 고구려라 불렀네. 그 고구려의 중심 부분을 사람들은 集安이라 불렀고, 그 아래 산기슭을 集下라고 불렀네. 나는 集安에서 한 여인을 만났네. 그 여인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 데 그 초대는 은밀하고도 부드러웠네. 集安 촛불이 타오르던 그녀의 방, 나는 그 방에서 하룻밤의 달콤한 잠에 혼곤히 빠져 들었던 것인데, 새 한 마리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소리에 깨어나니 아침이었고, 방은 텅비어 있었고 밖으로 달려나가 사방을 살펴보니, 그곳은, 내가 낮에 주워온 돌 위였네. 3 첫가을 나는 지금 내가 주워온 돌을 보고 있네. 이 돌은 약 삼십 센티미터 정도의 먹청색인데, 돌 한가운데 밝은 갈색의 'ㅅ'자 모양 무늬가 있네. 그 돌무늬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나는 가을을 느끼네. 밝고 넓은 평원, 그러나 고요하고 아늑한 평원. 그 위로 조용히 날아가는 새, 새 주변엔 온 통 밝은 갈색의 풀들이 바람에 고요히 흔들리고, 밝고 넓은 평원 그러나 내 마음에 꽉 들어차 오는 조그맣고 아담한 마을. 나는 돌의 이름을 '고구려의 가을'이라고 붙여보네. 그러자 돌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 속으로도 가을이 오네. 가슴을 설레게 하던 첫사랑의 밀어처럼 밀려와, 하 아득하게 천년만에 처음인, 가을이 오네. 그러다 다 늦은 사랑이어서, 서러운 것들 만이 그런 것들만이 떼지어, 아 아득한 돌무늬로 왔네. 4 쇼몽에 대하여 말하다 쇼몽에 가본 적이 있는가? 쇼몽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말하는 게 아니라네. 쇼몽은 아느날 문득 내게로 왔다네. 그것은 아마 내 마음 의 작은 지도 속에서 왔을 것이네. 쇼몽을 찾아,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네. 부여를 숙신(肅愼)을 발해를 여진을 요(遼)를 금(金)을 홍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네. 그대는 쇼몽에 가본 적이 있는가? 나는 언젠가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네 (아마 전생에서였을 것이네, 낯설지가 않은 걸 보니). 그대는 쇼몽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쇼몽은 파리에서 차를 타고 세 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네. 5 白石行 아무르, 아무르, 이제 첫눈이 오리, 덕적도에, 인천에, 은율에, 정선에, 백석에, 쇼몽에, 격렬비열도에, 늦은 가을바람은 햇살을 뱃고동처럼 물고와서는 그래도는 서럽고 맑은 눈동자들에게 한 짐씩 부리고 간다 음악이 있어서 좋았던 것이다 때죽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 -박정대 Dana ZAMECNIKOVA WAVES II. / GLASS - GRAPHIC hand moulded metalurgic and flat glass 1999, 44 x 52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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