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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과 이지함

이태복 |2006.08.01 19:53
조회 90 |추천 0

토정비결과 이지함


세상사람들이 살아가기가 어렵고 되는 일이 없거나 나라가 어지러우면 운세를 알아보고 싶어한다. 그럴 때 으레 등장하는 것이 토정비결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은 알아도 그 책의 저자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李之涵)은 잘 모른다. 필자는 거꾸로 이지함에 대해서는 늘 관심을 갖고 있지만 토정비결을 본 적은 없다. 물론 억지춘향격으로 까막소에서나 사회에 나와 기가 막히게 내 삶의 발자취와 앞일을 알아맞히는 사람들을 만나본 경험이 있고, 신통한 기운을 갖고 있는 분들도 알고 있지만, 아직 토정비결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으니 무지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왜 이지함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가.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조선중기 16세기 초중반의 처사(處士)였던 이지함(1517~1578)이 주자성리학이 지배하던 시기에 어떻게 해서 백성들 속에 들어가 실제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합리적인 처방을 내리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두 번째는 이지함의 처방이 매우 구체적일 뿐 아니라 상업, 광산, 어업, 국제교역 등 매우 다방면에 걸친 국부증진 방안인데, 이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 세 번째는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다. 이지함은 필자 집안의 선조인데, 자세한 삶의 발자취보다 기인(奇人)으로 알려졌다. 그 학문적 전통이 어떤 경로로 이어져 영조시대의 삼산 이태중으로 이어져 나왔을까 하는 의문에서였다. 호조판서를 지낸 삼산 이태중은 단순한 청백리가 아니라 봉급의 90%를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고 재워줄 뿐 아니라 의술과 천문지리, 풍수에도 밝았고, 10차례 흑산도와 함경도 회령 등에 유배를 당했을 정도로 강직한 선비였다. 이런 의문들은 사실 전문 연구자들이 그 시대의 문집과 간찰을 비롯한 숱한 문서들을 읽고 분석해내지 않는 한 알아내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국사연구가 홀대받는 학계 환경에서 조선시대 중기의 주류주자학 전통에서 벗어난 듯한 한 인물의 사상과 발자취를 온전히 밝혀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얼마 전 토정기념사업회가 발기되고 토정 이지함의 사상에 대한 학술연구회가 열렸다.


토정 이지함은, 공리공론을 일삼고 백성들의 구체적인 생활 안정과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위정자들과 국정의 현실을 비판하고 스스로 백성들 속에 들어가 함께 살고 그들의 궁핍한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고기를 잡아 팔고, 호박을 길러 곡식과 바꿔 굶주리는 백성들을 가르쳤다. 부민(富民)들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보다 백성들이 은광을 개발하고 장사를 하여 전국에 널려있는 해변가에서 소금을 만들어 곡식과 바꾸게 하고 인삼과 도자기를 생산하여 외국과 교역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켜 부국의 기초를 다지자고 주장했다. 흡사 최근에 부자들에게 돈을 걷어 복지에 쓴다는 논리가 그때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토정은 부민의 곡식으로 기민(飢民)에게 나눠주는 것은 농촌의 생산과 소득이 증대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 각종 질병과 역병의 창궐에 대처하기 위해 도가의 신체단련법이자 치료법이기도 했던 돈 안드는 풍욕(風浴)과 단식요법 등을 가르치고 요즈음의 황토집과 같은 토정을 지어 가난하게 살았으며 풍수와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백성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되 근신하고 착한 선행을 많이 하도록 권장했다.


토정의 이런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의 발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흠모하는 백성들의 열망이 토정비결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토정비결의 저자문제는 영조시대의 삼산 이태중 시대에도 실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연구를 중시하는 학문자세가 이어져왔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21세기 오늘에 토정 이지함이 새삼스럽게 위대한 인물로 돋보이는 까닭은 우리사회의 난마처럼 얽힌 여러 문제를 속 시원하게 풀어줄 인물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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