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영화 “괴물”이 기대되었던 것은 봉준호 감독의 연출력 때문도, 깐느에서의 호평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변희봉, 송강호, 박해일이라는 이 시대의 걸출한 배우 트로이카의 연기가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들이며, 그 작품으로 인해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어필한 배우들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들의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화산고”, “시실리 2Km”, “플란더스의 개”에서 보여준 순박한 외모에 비해 다소 위악적인 내면을 소유하고 있는 표리부동의 전형을 확립한 변희봉은 “선생 김봉두” 등에서는 한없이 순박한 한국노인의 전형을 확립하기도 한 야누스적인 캐릭터이다. “넘버3”로 인해 스타덤에 오르고, 그로 인해 다소 고정된 캐릭터를 갖게 된 송강호이지만, “쉬리”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중량감 있는 연기 또한 매우 잘 소화해 냈다. 특히나 송강호는 “반칙왕”을 통해 사회적 약자로서의 소시민을 매우 탁월하게 연기해내 이후 “효자동 이발사”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이들 트로이카의 막내 박해일 역시 “질투는 나의 힘”에서 가능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소년, 천국에 가다”와 “연애의 목적”에서 상당히 안정된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매력적인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르겠다.
영화 “괴물”은 가족주의라는 한국인의 정서적 공감대를 파고 들면서도 제대로 된 크리쳐 스릴러(creature thriller)의 공식을 추수하는 재미있는 상업영화임에 틀림없다. 가히 수작(秀作)이라 할 만 하다.
영화 “괴물”은 말 그대로 한강에 출몰한 괴물이 인간을 포획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는 크리쳐 스릴러-때론 그저 크리쳐 호러일 때도 있었다.-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고(혹여 미8군에서 한강으로 방류한 포름알데히드가 한강 수생생물의 변이를 일으켜 거대성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영화의 내러티브는 이를 친철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독극물 방류와 변이생물체의 일견만이 상황을 유추시킬 뿐이다.), 또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알 수 없다.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보통 인간의 삶을 유린할 따름이다. 이렇게 도시를 구축(構築)하면서 자연을 구축(驅逐)한 인간은 회귀한 자연의 물리적 폭력성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고, 그로 인해 공포가 조장된다. 뒤늦게 인간은 사회라는 시스템을 동원해보지만, 이미 공포에 노출된 개별인간의 개별사건들에게까지 그 시스템의 힘은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열광했던 시리즈 “에이리언”에서처럼, 숱한 인간이 희생되었지만 결국 몇몇 개인이 고난스런 과정을 거쳐 괴물을 퇴치해 스토리를 종결시키듯, 이에 개별 주체들은 맞설 수 없는 것에 맞서고 이를 극복함으로써 위기/갈등이 해소되는 영웅서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당당하게 귀환하게 된다.
여기서 “괴물”이 더 큰 스릴을 조장하는 장치는 바로 한강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근린생활공간인 한강이 교각과 상판구조물, 그리고 콘크리트 구조물로 대상화하면서 매우 낯설고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전혀 낯선 것으로 변하는 순간 공포는 더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콘크리트 구조물이나 철 구조물이 이질적인 생물학적 환경을 조성할 때, 이를테면 에이리언에게 장악된 우주선의 구조물들이나, Sil-“스피시즈”에 나온 반외계인 생명체-이 부화를 위해 숨어든 하수도처럼 생명감이라곤 없던 소재들이 이질적인 생물체와 하나의 환경을 이루어내면서 오히려 단단한 고치, 견고한 성벽, 뛰어넘기 벅찬 해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특히나 크리쳐 스릴러의 경우 폐소(閉所)를 설정함으로써 나약한 인간에게 공간적 제약을 장치함으로써 그 전율스러움을 배가하기도 하는데, 고아성이 분한 박현서는 괴물에게 잡혀가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 ‘저장’된다. 보통 폐소는 감시/억류, 억류/탈출이라는 다소 상반되는 상황이 복합적으로 연계가 되기 때문에 스릴러에서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즉 폐소는 억류자에게는 대단한 가학의 공간이 되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감시자와 동화된다면 그 가학성을 즐길 수 있고, 또 억류자에 동화된다면 그 가학성에 숨막힐 듯한 전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여기에 탈출의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규율위반의 기제에서 동원되는 쾌감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다. 괴물이 토해낸 시체들에서 경찰봉과 옷을 묶어 탈출을 시도하는 현서에게 관객은 동화되고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손에 땀을 쥐며 현서의 탈출을 응원하지만, 다시 잡히고 마는 현서와 도망칠 곳 없는 폐소의 절망스런 상황은 관객으로 하여금 공포를 넘어선 절망의 고통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준다.
“괴물”이 기본적인 내러티브를 크리쳐 스릴러에 맞추고 있다면, 배우들의 개성을 통해 독특한 패밀리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다. 일찍이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가족사랑 미스터리 프로젝트, “Signs”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가족을 위한 SF캠페인, “우주전쟁”에서 보았듯이 감독의 의도적인 가족주의 이데올로기 침잠은 때론 서사 자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전례와 견주어봤을 때 비교적 안정적인 결합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헐리우드의 졸작들이 행복한 결말만을 추구했던 반면, 봉준호 감독은 적당한 비극을 섞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선 “괴물”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부성(父性)을 접할 수 있는데, 변희봉이 분한 ‘희봉’이 하나이고 송강호가 분한 ‘강두’가 다른 하나이다.
‘희봉’의 부성은 고착된 형태의 부성으로, 당대 사회의 전통적 가치에 의해 기성(旣成)된 형태의 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율적이면서도 헌신적이고, 억압적이면서도 자애롭다. 보통은 사회적 통념에 순응하라는 질서로 작용하는 ‘희봉’의 부성이 위기 순간에는 자신의 몸을 괴물에게 내던지며 자식들을 대피시키는 절대적 부성으로 화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절대적 부성의 발현은 영화 후반부 ‘강두’에게서도 나타나게 되는데, 특히 이와 같은 자기희생적 부성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모성(母性)은 가족 이데올로기의 저변에 위치해 있고, 이는 여러 담론 형태를 취해 유포되고 권선된다.
‘강두’의 부성은 숱한 편부(偏父,)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익히 보아 왔듯이, 자녀에 의해 성장하게 되는 부성이다. 영화 초반 노란색 염색머리의 다소 철이 없이 없는 강두는 벌건 대낮에도 퍼질러 낮잠이나 자면서 꼬마녀석의 좀도둑질도 잡지 못하지만, 종반부 현서가 지켜낸 세주와 함께 살면서 머리색은 검어지고, 밤에도 가족-세주-을 지키는 든든한 아버지로 탈바꿈한다. 가족이 가장 위대한 이유는 부모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이 아니라, 가족이 온존해야만 비로소 그 구성원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이데올로기-실제로 결함가족에 비해 온전한 가족이 더 건강하다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가 관객에게 상당한 수준으로 수용되는 것은 아마도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전통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싶다.
앞에서 언급한 다른 영화들이 가족주의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을 통해 상당히 꼴사나운 영화를 만든 반면, 봉준호의 영화가 호평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봉준호만의 위트 때문일 것이다.
봉준호의 영화 속 세계는 참 어수선하고 투미하다. 전작 “살인의 추억”에서도 집단화된 공권력은 늘상 비능률적이었고, 사고만 치고 다녔다. “괴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대적으로 투입되었다가 바이러스 소동에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철수하는 군, 희생자 합동 위령소에 난입해 들어온 정체불명의 방역반-도대체가 이 양반네들 소속이 궁금하다. 환경청 소속인지, 식약청 소속인지, 보건복지부의 요체라는 보건소 소속인지, 구청소속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의 꼴불견도 그렇거니와 현서와의 전화 통화를 호소하는 희봉 가족의 외침을 뮈하는 경찰관과 의사의 전문성 결여의 꼴불견, 한강변으로 잠입해 들어가는 희봉 가족에게 뇌물을 요구하는 구청 직원의 추태까지, 하나같이 ‘너무 악의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비꼬고 조롱한다. 특히나 강두의 두 번째 탈출에서 보여준 채혈주사기 위협씬은 그 조롱이 극에 달한다.
이런 봉준호의 위트가 절정에 달하는 부분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투미함을 잃지 않는 현실적인 캐릭터-오히려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가 그 절박한 상황에 더 짙은 페이소스를 안겨준다 것이 되겠다. 합동유령소에서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오열하는 희봉 가족의 발광과 그것을 취재하는 언론의 모습을 부감으로 잡으며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지만, 그 뒤안으로 절망스런 그들의 상황을 더욱 각인시킨다. 특히나 현서와의 전화 통화 사실이 무시되는 상황이 코믹하게 그려지면서 강두의 쓰린 속내는 더 처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괴물” 역시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은 역겨울 정도로 서사를 방해하는 뜬금없는 반미적 사고가 그것이다. 미8군에 의한 한강 독극물 방류 사건은 이미 존재하는 사실이기 때문에 도입부의 상황이 다소 과장되었더라도 핍진성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미군에 의한 바이러스 왜곡 사건이라던가, 베트남전에 살포되었던 고엽제 에이전트 오랜지를 방역제라며 살포한다는 설정은 너무 한다 싶을 정도였다.
다음은 디테일의 핍진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 괴물의 생물학적 특이성에 대해서는 굳이 문제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와 관련된 사회 시스템의 작동이 너무나 만화적이라는 것이다. 괴물의 크기와 무게를 감안했을 때 그처럼 민첩한 동작이 가능한가, 또 그만한 크기로 성장하기에 한강의 먹이 환경이 충분한가, 상악과 하악에 의한 저작작용으로 소화를 시작하는 다른 동물과 달리 통째로 먹이를 삼켜 소화하는 괴물이 과연 한 번 삼킨 먹이를 토해놓고 저장하는 습성이 있을 수 있는가, 이미 죽어 부패가 시작된 먹이를 저장해 놓았다가 먹어도 좋은 소화기관을 가지고 있는가, 수많은 인골을 토해내는 장면에서처럼 그런 소화행위는 가능한가라는 다소 생물학적인 고민들은 ‘괴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해도, 계속 인간 사냥을 나가는 괴물을 포획 또는 사살하려는 움직임을 단지 ‘바이러스’가 무서워 그만 두려한다는 설정이 과연 핍진하게 다가올 수 있겠느냐는 반문에는 120분의 러닝타임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결국 서사를 종결시키는 것은 강두 가족의 분전이지만, 결정타를 날린 것은 노숙자의 기름세레였던 것이다. 이런 식의 dues ex machina는 고대 서사에서 대책없이 늘여논 서사를 종결시키기 위해 억지로 가져가는 방식으로 120분의 러닝타임을 종결시키며, 위대한 개인의 성스런 승리를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원된 것은 아닌가 이해되지만, 찜찜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제작비 100억의 초대형 영화 “괴물”이 차차 흥행 신기록을 대체해가고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와 맞물려 부박한 한국영화시장의 빈익빈부익부를 고려해봤을 때, 여전히 대작 영화-헐리우드 자본에 비해 턱없이 작은 영화이지만 말이다.-의 선전이 고무적인 현상인지는 다시금 고민해 보아야 할 듯 싶다는 생각을 해보며 글을 마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