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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산별노조의 꿈

김순석 |2006.08.03 11:44
조회 34 |추천 0
머나 먼 "스웨덴" - 산별노조의 시대를 맞으며


1. 들어가며.

금속연맹의 산별전환투표를 시작으로 한국 노동운동이 드디어 기업별 노조의 굴레를 넘어 산별노조로의 길에 올랐다. 한때 '진보정당과 민주산별'이 "사회변혁의 양 날개"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형식적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노동·진보세력은 이제 곧 날아오를 준비를 마치는 셈이다. 혹은 차분히 그 날개가 좀 더 자라기를 기다리면 되는 듯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런 낙관은 가능한가, 과연 그런 기대는 얼마나 현실성을 지닐 수 있는가. 실제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단지 날개가 붙어있다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적잖은 난제들이 있다. 밀랍날개로 날아오른 이카루스는 결국 신화 속의 존재이며, 심지어 신화 속에서조차 이카루스의 비행은 완성되지 못했다.

일단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 먼저 한가지 밝혀둘 것이 있다. 그것은 이 글의 필자, 그러니까 나는 현재에도 과거에도 노동운동에 관여했던 경력이 없다.
민주노동당 (일반) 당원이라는 것 외에 노동운동 자체에 대해 완전한 아웃사이더인 필자가 섣부른 첨언을 할 이유라면 그것은 오직 시기의 중대성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노동조합운동에게는 복수노조 전면화를 앞둔 시점에서 산별전환을 시작하고, 그 주요 협력정당인 민주노동당에게는 또 한번의 대선과 총선을 앞둔 시기이다. '다른 한편'에서 그 시기는 비정규직 관련법안 개악시도와 한미 FTA 추진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 체제의 제도적 완결이 시도되는 시기이다.
지난 10년의 경험이 이미 말해주듯, 신자유주의 경쟁국가,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유효한 사회적 세력이 되기 위해, 노동·· 진보진영의 재편과정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주변화 되는 노동자들,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되는 빈곤화된 대중들을 어떻게 포괄할 것인가에 있다. 그것을 위해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에게,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산별전환에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2. 의미심장한 숫자들.

지난 몇 년간 한국 노동운동이 처한 곤경과 위기상황에 대한 자료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중 한국 노동운동이 처한 상황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조직율 11%"라는 통계자료였다. 하지만 어쩌면 더 중요했을 숫자는 "교섭적용범위 14%"라는 또 다른 위기적 지표였을지 모른다.
'역사비평' 2005년 여름호에 실린 신광영 교수의, "사회의 양극화와 노동계급의 현재"에 정리된, 2003년도 기준에서 OECD 회원국의 노동조합 조직률과 교섭적용범위에 대한 자료에 의하면 ("역사비평" 2005년 여름, p.129) OECD회원국의 평균은 노동조합 조직률 34%에 대해 교섭적용범위 60%이다. 한국의 경우 조직률 부분에서는 프랑스(1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으며, 교섭적용범위에서는 통계가 누락된 국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다.
(통계가 누락된 국가를 제외하면) 노동조합의 조직률 대비 교섭적용범위가 가장 작은 그룹은 덴마크, 뉴질랜드, 그리스, 체코 그리고 일본이다. 이 국가들의 경우 조직률에 비해 교섭적용범위가 더 작은 경우이다. 하지만 덴마크의 경우 조직률 74%에 교섭적용범위가 69%인데, 조직률이 상당히 높은 경우에 속하므로 다른 국가들과 같이 다룰 수는 없을 듯 하다. 조직률이 다소 낮은 편인 그 외의 국가들의 경우 뉴질랜드의 경우는 노동조합 조직률 23%에 대해 교섭적용범위는 21%, (이후 "조직률/교섭적용범위"로 표기) 그리스와 체코 (27/25+), 일본 (21/20) 이다. (일본의 경우는 물론 우리나라와 같이 기업별 교섭구조가 주를 이루는 한계가 작용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 외에 조직률에 대해 교섭적용범위가 그리 넓지 않은 국가들 중 하나가 스웨덴이다. 조직률은 두 번째로 높은 79%, 교섭적용범위는 89%, 조직률의 1.13배정도. 물론 이 분야에서 한국이 스웨덴에 앞선다고 기뻐하기에는 농담할 기운도 나지 않는다. 조직률이 '너무' 높아서 발생하는 현상이니까. (조직률 분야 1위는 84%의 아이슬란드이다.)
한국을 제외하고, 조직률이 높지 않으며, 동시에 교섭적용범위도 좁은 대표적인 국가중 하나가 바로 미국 (13/15)이며 영국(31/36)의 경우 조직률은 평균을 약간 밑돌지만, 조직률에 대비한 상대적인 교섭적용범위의 크기는 좁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사실 이 통계자료에는 더 흥미로운 내용이 들어있다. 그것은 한국을 제치고 조직률 10%로 최하위를 기록한 프랑스가 교섭적용범위에서는 무려 95%로 핀란드와 함께 공동 3위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99%로 1위를 차지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37%, 그 외에도 조직률에 대해 교섭적용범위가 큰 국가들은 스페인 (15/80+), 네덜란드 (23/85), 포르투갈(24/80), 오스트레일리아 (25/80), 독일 (25/73) 등이다.
조직률 35%에 교섭적용범위 80%로 나타나는 이탈리아를 포함해서 따지면, 조직률에 대해서는 북구 유럽권 국가들이 가장 강세를 보이고, 한국과 멕시코를 제외하면 미국과 라틴유럽이 약세를 보인다. 반면 교섭적용범위 특히 조직률에 대비한 교섭적용 범위에 있어 특징적인 양상의 하나는 특히 프랑스와 라틴유럽의 강세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이들 국가들 모두 조직률은 평균치를 밑돈다.
덧붙여 OECD국가들의 노동조합 조직률과 교섭적용범위를 모두 포함한 통계가 지닌 한가지 중대한 의미는 다름아니라, 기업별 체계인 한국과 일본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산별노조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3. 산별은 모든 것이 아니다.

분명 노동운동에 있어 산별이 기업별 노동조합에 비해 더 나은 체계임은 부정할 이유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기업별체계가 형성된 한국과 일본의 사례가 문제가 있는 경우에 속한다. 그것은 이들 국가가 갈등적 이해를 사회적 교섭으로 조정하는 대신, 가부장적 국가주의를 배경으로 권위적 온정주의를 내세워 억누르고 또한 - 선별적으로 - 포섭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된 통계가 보여주듯, 산별의 체계 그 자체가 교섭의 과정과 그 효과라는 초보적인 수준에서조차, 계급적 연대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산별체계는 원론적으로 노동운동에게 기업과 업종에 따라 불균등하게 배분되는 조직역량의 격차를 넘어 가용한 조직노동 역량의 효과를 (연대적, 사회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상황이 되는 것에는 조직형식을 넘는 여러 변수들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앞서 길게 OECD통계를 인용한 이유는 산별이라는 체계 그 자체는 시작이지 끝이 될 수 없다는 상식적 문제제기와 더불어, 그것이 산별노조로의 전환과정과 나아가 산별이라는 조건에서 현재 한국노동운동이 직면한 난제들을 해결할 단초가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해 어떤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4. 스웨덴 모델?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좀 뜬금 없이 묻고 싶어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과연 스웨덴/스칸디나비아의 경험이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물론 나는 이 질문을 절대로 '사회민주주의가 우리의 대안일 수 있는가'라는 의미에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 그것도 북구유럽의 사회보장국가를 대상으로 '자본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회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대안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기에는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현실은 너무 각박하다. 게다가 자력으로 붕괴해 버린 구 동구권의 경험을 제외할 수밖에 없다면 현실적으로 당장 내년 대통령 선거 때 공약집을 어떻게 짤 것인지에 대한 참조대상도 사회보장국가의 경험을 빼고는 별로 언급할 것이 없다. 즉 사회민주주의를 이념으로서 찬성하든 아니든 당장의 조건에서 대중정치적으로는 그것과 차별성을 만들 현실적 조건이 없다.

내가 굳이 '스웨덴'을 걸고넘어지는 이유는 다만 낮아도 50% 이상, 높으면 7-80%의 조직률을 지닌 노동조합과, 그에 기반 해 노동조합/조직노동자의 정치적 교섭기구인 것이 기본적인 계급대표성과 국민적 정치세력으로서의 지위로 연결되는 좌파정당이 존재하는 북구유럽의 경험이, 노동조합 조직률 11%, 교섭적용범위 14%의 노동운동과, 조직노동자와 미조직, 비정규, 불안정 고용 노동자의 이해를 통합하는 문제가 노동운동 뿐 아니라 좌파정당까지 두통거리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현실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즉, 스웨덴과 같은 북구유럽의 경험은 '2006년 - 한국'의 우리들에게 사회발전, 사회적 대안의 한 참조적 모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상태를 만들기 위한 '운동'의 모델이 되어줄 것 같지는 않다.

당연히 그 누구도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50, 60, 7-80%가 될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직률 11%'라는 수치'만'으로 흔히 (부적절하게) 표현되어 왔던 한국 노동운동의 곤경과 위기에는 역사적 정세의 효과, 즉 객관적, 구조적 요인이 존재한다. (이는 물론 노동운동주체들 의식적 실천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 주지는 않는다. 그동안 민주노총을 위시한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지적들은 그 객관적 조건을 배경으로 할 때 좀 더 심각한 이야기가 될 것이므로.) IMF이후 극적으로 강화된 자본의 현장통제력과 노동시장의 위계적 분할이 그것이다.


5. 기회는 기회일 뿐.

분명 산별체계는 기업별 체계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할 기회를 준다. 그러나 기회라는 말의 일반적 의미가 그렇듯이,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산별노조는 대체로 모든 경우에 있어 기업별 노조보다 나은 것이다. 나아가 기업별체계는 현재와 같은 시기일 수록 노동운동에게는 더욱 불리하고 취약한 조직형태인 것이 분명하다. 여기까지이다.
하지만 산별노조라고 해서 노동조합의 조직과 교섭력에 영향을 미치는 일반적 조건들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전반적인 노동의 탈 안정화 속에 고용과 직무의 형태, 숙련과 성별, 인종에 따른 분할과 차별의 증대라는,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난제들은 동시에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서구를 비롯한 여러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을 역시 괴롭혀 온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중 적잖은 나라들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전국적인 산업별 노동조합을 지니고 있다.

즉, 산별로의 전환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의 노동자운동이 겪는 도전에 대한 해답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위상이 다른 문제이다. 산별노조의 시대에도 비정규, 불안정고용 노동자들의 조직화는 역시 정규고용 노동자의 경우보다 더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실업 노동자들의 문제에까지 이르면 곧장 만만치 않은 전사회적 투쟁의 문제가 될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자. '80년대 말 노동운동의 폭발적 고양 속에는 '60년대 이래의 제조업의 국제적 재배치와 냉전의 정치-군사적 구도 속에서 진행된 한국자본주의의 급격한 팽창과 더불어, 사업장 단위의 파업투쟁과 '민주노조'가 노동자 대중에게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험의 전파가 존재했다.
현재 한국의 실업노동자들에게는 아예 조직이 없다. 대부분의 비정규직, 불안정고용 노동자들의 경우에 조직률은 극히 낮으며, 그 조차 정상적인 교섭창구를 갖지 못한 조건이다. 그들에게는 노동조합을 통해 권익을 옹호 받은 것은 너무 오래 전의 기억이거나,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래 아직 단 한번도 그 경험을 갖지 못한 이들이다. 게다가 노동조합의 체계가 산별이건 기업별이건 자신이 일하는 사업장에서는 여전히 "비정규직 조합원"이다. 나아가 그들 중 적잖은 이들은 작으면 몇 명이 고용되어 일하는 소규모 사업장에 있다. 즉 대다수의 비정규, 불안정 고용 상태의 노동자들이 지니는 고용형태의 취약성은 산별노조의 시대에도 여전히 조직역량 구성의 불리함으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고용형태의 취약성 때문에 조직화되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산별노조로 조직하기 위해서는 산별노조가 비정규직, 불안정 고용상태의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방패가 되고 우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본가들에게 산별로 교섭하도록 하는 것, 산별의 범위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협약을 쟁취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6. "강하게 정치화된 노동운동".

산별노조의 발걸음을 시작한 한국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연대를 이루고,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앞당기는 현실적인 힘이 되기 위해서 현재의 조건에서 출발해서 어떤 과정을 구상할 수 있는가, 무엇을 선차적인 목표로 삼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은 어떤 관계를 이룰 때 가장 효과적일 수 있을까.

부정할 수 없는 당장의 현실은 당장 한국 노동운동은 11% 남짓한 조직률을 통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스웨덴 모델', 즉 한국의 현재 조건에 비교하면 '이상적 상태'에 해당하는 구조는 적어도 가까운 미래까지는 한국의 상황에서 그 자체로서 절대로 작동될 수 없다. (노동운동의 관료화에 의해 노동운동의 중앙조직이 현장의 요구와 크게 괴리되지 않는 이상적인 상태를 가정한다고 해도) '노동조합이 이미 조직된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고 정당은 그 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한다'는 무난한 교과서적 구도를 되풀이해 말하는 것만으로는, 현재 한국 노동·진보진영의 최대의 고민거리, 즉 노동운동과 그것에 기반 한 진보정치가 사회적으로 고립될 위험을 피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노동자운동이 정치세력화를 도모하건, 산별노조로 전환을 추진하건, 그 기본적 목표는 가능한 한 보편적인 범위에서 노동자대중의 일상 이해를 직접적으로 대변하고, 그 노동운동과 그에 결연 된 진보정치세력이 전사회적 범위에서 노동대중의 이해를 관철하는 사회적 압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 계급적, 전 사회적 범위에서 노동자운동과 그에 기반 한 진보정치가 유효한 사회적 압력을 형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더 기본적인 지표는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아니라 그 "교섭적용범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직률도 높다면 더 좋겠지만, 조직률의 성장에는 정세적인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조건들은 물론이요, 해당 국가의 산업과 고용의 구조의 영향까지 받는, 좀더 객관적인 결과이다.

다시 한번 앞서 인용한 OECD통계로 되돌아가 본다.
높은 조직률과 높은 교섭적용범위로 이루어진 북구유럽과는 다른, 조직률을 크게 상회하는 교섭적용범위로 특징지어지는 프랑스와 라틴유럽국가들의 특징이 나타난다.
10% 조직률의 프랑스 노동운동이 95%의 교섭적용범위를 관철시키는 핵심적인 근거의 하나는 공공부문과 주요산업체에 대한 영향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형식적 가능성이며, 심지어 당장의 상황에서도 한국의 노동운동 역시 지니고 있는 조건이다. 형식적인 가능성만을 따진다면 민주노총 혼자의 힘만으로도 대한민국을 거의 멈출 수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한가지 역사적 사실은 프랑스와 라틴유럽이 이전 서유럽 공산당들의 주요 근거지였고, 그 이전에는 전투적 생디칼리스트 운동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 국가에는 오랜 기간 매우 '강하게 정치화된 노동운동'의 전통이 존재했던 것이다. (기억을 잠시 되짚어 보면, 한때 한국에서도 전노협 등의 전투적 노선을 '생디칼리즘 적'이라고 비난했던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역시 한국노동운동에게도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비교적 친숙하게 느껴질 조건일 수 있다.


7. "전노협 정신"의 실체.



민주노총 금속연맹이 산별전환을 통해 단일 금속노조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금속노조, 금속연맹의 전신은 전노협이었다. 일각에서 '양치기 소년'이라는 악평까지 들었던 내실 없는 총파업이 끝날 때마다,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한 소홀함이 비판 될 때마다 적잖은 사람들은 '전노협 정신, 전노협의 연대와 투쟁의 정신'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이 '정당방위대'로 상징되던 전노협의 시대를 그대로 복원하자는 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를테면 '전노협'은 당시의 역사적, 정세적 조건 속에서 노동자운동이 할 수 있는 한계의 지점까지 고양된 '정치성'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전 십 년 이상 이어진 '현장이전' 흐름들, 투쟁의 경험 속에서 조직된 선진노동자들의 역량이 결집된 산물이었다.
조직적 실천 속에서 구현되는 '정신'은 그에 합당한 물질적 실천의 산물이다. 그것이 사회적 실천에 관한 것인 이상 외치는 것으로 '복원'될 수 있는 정신은 없다. 전노협이 보여주었던 '계급적 연대와 투쟁의 정신'은 전노협을 통해 미래의 민주산별 뿐 아니라 심지어 미래의 노동자정당까지 꿈꾸던 '정치적으로 급진화된 노동운동 역량'의 힘에 근거한다.

그동안 '노동운동의 위기', 정확히는 대기업과 정규직에 기반한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여러 처방들이 여러 각도에서 제출되어 왔다.
그중 결국 노동운동을 순치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들을 솎아내고 따진다면,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형식적 선결과제로 기업별 노동조합(체계와 의식)의 극복과 '계급적 연대성, 사회공공적 연대성의 강화'라는 것이다. 자, 이제 산별노조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다른 - 더 중요할 - 한가지 과제를 이제 그 "본명"으로 불러주어야 할 때이다. :노동조합운동의 계급적 연대성, 사회공공적 연대성은 무엇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 비록 노동자 대다수를 조직하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그 잠재적 역량을 작동한다면 자본 전체의 이익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는 있는 한국 노동운동이 어떻게 스스로의 잠재력을 분할과 차별 속에 고통받는 한국 노동계급의 계급적 연대를 실현하는데, 강요된 빈곤과 배제에 대항하는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가능한 해답의 "본명"은 결국 '정치적으로 강화된 노동운동', '정치적으로 급진화된 노동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노동자계급이 겪고 있는 위계적 분할과 차별의 현실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의 유효한 계급연대적 실천이 지도부 몇몇의 의지나, 근사한 사업기획 몇 가지로 가능할 수는 없다. 결국 핵심은 무엇을 하든 그것을 현실적인 힘으로 만드는 것은 현장에서부터 축성된 역량의 문제, 궁극적으로 대중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이 내부로부터 얼마나 정치적으로, 사회의식적으로 강화되는가의 문제이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전략 아래에서 모든 차별과 배제는 새로우며 동시에 더욱 폭력적인 양상으로 다가온다. 성공한 여성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는 반대편에서는 비정규, 불안정 고용의 대다수가 여성노동자인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그것은 '왕들의 왕, 족장들의 족장'으로서 이를테면 '제국적 질서'의 참 모습이다.)
'연대'는 사회적 고통의 차별적인 경험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 공통의 기원에 대항하는 행위이다. 단기적 실리의 기계적 합산과 절충이 '작동할 수 있는 연대'를 만들었던 경우는 없었으며, 분할과 배제, 빈곤과 차별에 대항하는 연대는 언제나 아래로부터 치고 올라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눈앞의 실리 혹은 손실을 넘어, 더 낮은 자의 이름으로, 더 빈곤한 이들의 이름으로 모두에게 약속된 불안과 공포의 미래에 저항하는 행위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것이다.


8.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그리고 "조합원-당원".

그러나 아쉽게도 이 문제에 대해 사실 딱히 뾰족하다고 할만한 해법은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논의의 중심대상이 '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중이 알아서 급진화 할 만한 (생활조건, 이데올로기적 상황 모두를 포함하는) 정세적 조건이라도 배경으로 삼지 않는 이상, '역량'의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법은 나올 수 없다. 역량의 구성은 결국 일상적 실천과 그 경험, 그에 대한 의미화를 축적하는 과정의 문제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그것에는 왕도가 없다.

다만 나는 가능한 한가지 추가적인 접근경로에 대해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 가능한 추가적인 접근경로는 바로 노동운동과 적잖은 직·간접적인 연관을 지닌 좌파정당, 즉 "민주노동당"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민주노동당의 민주노총에 대한 태도 일반이나, 혹은 정당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정책적인 외적인 정치활동영역에 대해 '또' 말 할 생각은 별로 없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할 만한 이야기는 이미 모두 했다고 생각한다. 민주노총에 대해서도 할말은 하라던가, 노동의제의 중심을 비정규직 문제에 두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반영 하라던가 등등, 날선 비판이던, 우호적인 조언이든 이미 나올 이야기는 다 나왔다. 결국 문제는 그것을 실천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에는 단순히 지도부 대 지도부의 입장에서 민주노총의 입장을 복창하는 것을 넘어, 노동자운동과 관계 맺을 '물질화 된 기반'이 필요한 것이다.

2006년 오늘, 한국 노동운동의 화두는 단연 비정규직 문제, 즉 노동자 계급의 위계적 분할에 기반한 자본의 축적전략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차별을 멈추기 위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지금의 한국 노동운동이 그 단어의 의미에 걸 맞는 실질적인 위력을 지닌 총파업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는 별로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궁극적으로 조합원의 힘으로 말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궁극적으로 파업과 교섭으로 말해야 한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말하는 여론에서의 고립조차도 사실은 결국 어느 순간인가는 대중의 자기확신과 조직된 힘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때문에' 거꾸로, 거의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이름만의 총파업은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가끔 한다. 다만, 무엇을 하건, 그것이 이를테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실질적인 총파업의 준비과정'으로 모두에게 받아들여 질 수 있으면 된다. 단체교섭에서 가능한 한 계급연대적 선택을 하는 것, 어려운 조건 속에서 결사적인 장기 투쟁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투쟁, 지원활동을 가능한 한 대중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런 투쟁 속에서 발생한 해직자, 구속자, 부상자 등을 위한 구호활동을 대중적으로 하는 것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한 최대한을 지향하는 일상적인 계급연대적 실천을 가능한 대중적으로 만들어 가며 대중운동의 수준에서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것이면 된다.
핵심은 무엇을 하던, 그 개별 행동들의 수준이 높던 낮던,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과반수가 극도의 고용불안정과 빈곤화에 고통받고, 나아가 모든 노동자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겪어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착취전략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그 투쟁을 상승시켜나가는 연속된 과정으로 대중 속에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자, 여기까지는 노동운동 자체의 이야기, 그것도 상층의 태도나 정책의 이야기보다는, '현장'의 대중운동 차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민주노동당을 말하는가?
일상적 접촉 속에서 개개의 활동들, 실천들에 대해 일관된 의미부여를 해줄 공식-비공식적 유대 망 밖에서 정치적 의미, 정치적 태도는 축적되고 발전될 수 있는가? 답은 물론 '아니오'이다. 그럼 일상적인 활동을 통한 계급연대적 태도와 의식은 어디에 축적되는가? 그것이 바로 '전노협의 시대'에 자주 말해지던 '선진노동자'가 아닌가? 선진노동자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노동조합의 집행 혹은 대의체계가 곧 선진노동자의 존재형태인가? 아니면, 이른바 현장조직인가? 과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과연 지금 민주노총 사업장들의 이른바 현장조직들이 모두 노동자운동을 계급적, 정치적으로 강화하는 거점인가? 나아가 현장조직들과 노동조합 간부들을 축으로 한 이른바 현재의 노동운동 정파들은 충분히 노동자운동의 계급적, 정치적 강화를 책임질 수 있는 상태인가? 이 질문에 답이 만일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하거나 나아가 부정적이라면 대체 노동운동의 현장 대중운동 역량이 강화될 근거지, 가능한 개입경로는 현재 노동운동의 공식, 비공식적 체계 속 어디에 남아 있는가?

그럼 반대로 접근해 보자. 지금 노동운동의 현장 대중 속에서 보다 명료하고 보다 일관된 진보적 대중의 가장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존재형태는 무엇인가? 다른 대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첫 번째 후보를 민주노총만 해도 민주노동당 당원의 40% 를 점하는 "조합원-당원"에서 찾는다. (어쨌든 최소한 '당비'는 조합비보다 비싸다!)
당연히, 가능한 가장 좋은 시나리오의 하나는 바로 민주노동당의 조합원-당원조직이 노동운동 내에서 대중운동의 "정치적 백본Backbone"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한가지 더 첨언한다면, 설령 비슷한 사람들이 그 주요 출연자라 해도 민주노동당내의 정파적 경쟁은 적어도 지금 노동운동 내에서의 지분 경쟁에 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눈들의 시선을 받으며, 훨씬 더 많은 정당화의 명분이 동원되어야 하는 무대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에서 민주노동당의 "조합원-당원"은 민주노총은 물론이요, 민주노동당 자체에서도 정치적으로는 거의 부재 하는 존재이다. 다른 조직도 아닌 정당에서 의사결정구조, 특히 대의기구와 유리된 범주의 조직대중은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범주이기 때문이다.
즉 언제나 도마 위에 오르던 민주노동당의 "노동부문 할당"체계가 거꾸로 민주노동당이 노동운동에 대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여지를 축소하는 것이다. 그 명칭을 무엇이라 부르건, 핵심은 그것이 물경 정당의 조직임에도 그 대의체계에 일정한 권리를 지닌 것이 아닌 당원조직이 잘 작동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역시 그동안 자주 거론되어왔던 주제인 민주노동당의 부문 할당제 개선문제, (즉 소수자 할당의 확충과 더불어 함께 요구되던) 노동부문에 비정규할당을 도입하고, 나아가 그 대의원을 조합원-당원/현장 당원들이 직접 선출한 대표자가 되게 해야 한다는 일련의 문제제기는 단지 민주노동당 내부의 문제이기보다는 조금은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다.

물론 이미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것이 뭔가 신묘한 효력을 발휘해주는, 대단한 처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의 조건 속에서 노동운동이 노동자 전체의 기본적인 계급적 이해를 담지 하고, 나아가 한국사회를 더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사회적 압력을 형성하는 주체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그것이 "강하게 정치화된 대중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주노동당이라는 공간에 대해, 그것이 노동자운동과 맺는 연관의 방식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사고를 해볼 여지도 있지 않을까.


9. 맺으며

한국 노동운동의 '내일'이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오늘'의 모습은 조직률 11%의 노동조합이 우리가 지닌 것이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조직이라는 최소한의 교섭자원조차 지니지 못한 조건에서 얼마나 보편적인 효과를 획득할 수 있는가가 한국 노동운동의 내일을 결정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심각한 고민거리로 삼기에 2006년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은 너무도 야만적이다. 그러나 그 야만적 현실이 또한 운동의 동적 과정에서 박제화된 '스웨덴 드림'을 잠시 지우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양날의 칼이 될 복수노조 전면화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시작된 산별전환. 계급 내적으로 보편적인, 그렇기에 사회 보편적인 진보의 힘이 될 노동운동의 전망을 이런 저런 이름으로 돌려 말할 여유도 더는 없어 보인다. 이제 그 본명을 말할 때이다. 가능한 모든 경로를 통한,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강화된 노동운동의 재구축.

조금 늦었지만, 금속산별노조의 출범을 축하한다. 그것이 차별과 분할의 신자유주의 지배전략에 맞서는 계급적 연대, 사회적 연대의 보루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진보정당과 더불어 평등과 진보를 향해 비상하는 날개, '민주산별'의 옛 꿈을 되찾는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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