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생 차나무 기르기
우리 자생 차나무는 비전박토에 속하는 자갈밭이나 바위가 많은 산비탈을 좋아한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땅 속 깊은 곳의 원시적 기운을 모아 잎으로 피워내는 차나무에는 비옥한 땅에서 서식하는 여타의 식물에서 취할 수 없는 고귀한 정신이 깃들여 있다. 인류가 오천 년 이상 한결같이 마셔온 음료가 오직 차뿐인 이유가 바로 이 정신에 있는 것이다.
차씨를 심으려면 우선, 음력으로 10월말이나 11월초에 차밭에 나가 차꽃과 함께 달려 있는 동글납작한 씨앗 망울을 겉껍질째 딴다. 따온 차씨는 열흘 이내에 땅에 심으면 좋은데 땅은 검지 길이만큼 파서 그 안에 씨를 심는다. 이때 심은 씨는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비가 내린 뒤에 순이 올라오며, 봄에 심을 경우에는 물에 불려 심으면 싹이 트는 시일을 단축할 수 있고 그대로 심으면 조금 더디게 여름과 가을 사이에 난다.
가정에서 화단이나 화분에 씨를 심었을 때에도 물을 주고 돌보아주면 한두 달 사이에는 차싹을 만날 수 있다. 다원을 조성할 때 경사지에 심을 경우에는 오이를 심듯 구덕을 파서 서너 개의 씨를 넣은 다음 묻고, 평지에 골을 파서 줄을 띄워 심으려면 줄과 줄 사이는 3미터 정도씩 떨어지게 하고 검지 깊이로 두세 개의 씨앗을 30㎝ 정도씩 간격을 두어 파종하면 된다. 대밭이나 뒷산 또는 그 밖의 공지에도 검지 깊이로 한 구멍에 두세 개씩 무작위로 심어놓으면 야생 차밭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겨울 추위를 지나 땅이 부풀 때나 거센 빗줄기로 인하여 씨가 노출되지 않도록 심은 뒤에는 땅을 잘 밟아주는 것이 중요하며 마른풀이나 지푸라기로 위를 덮어주면 더욱 좋다. 더 튼튼한 차나무를 원할 때는 구덕이나 골에 퇴비를 섞은 뒤에 파종을 한다.
우리 한반도에 차나무가 서식할 수 있는 곳은 차령산맥 이남과 지리산 남쪽으로서 겨울에 영하 5∼6도를 벗어나지 않는 곳이라야 한다. 차령산맥 이남이나 지리산 남쪽이라도 해변가나 섬에서는 염기 섞인 해풍 때문에 좋은 찻잎을 얻을 수가 없다. 바다에 가까운 지방은 바다로부터 산능선을 서너 개 넘어 10㎞ 이상 떨어진 곳에 차를 심어야 해풍으로부터 순수한 찻잎을 보호할 수가 있다.
자생 차나무가 좋아하는 곳은 평지나 비옥한 땅보다는 비전박토에 속하는 자갈땅이나 바위가 많은 산비탈이다. 방향은 동남향 정남향 남서향으로서 일조량이 풍부한 곳이로되 키가 큰 낙엽수가 직사광선을 70퍼센트쯤 가려주는 서늘한 환경이 좋다. 인근에 계곡이나 호수가 있어 운무가 서리면 더욱 좋다. 그런 땅이라야 찻잎 중 최고로 치는 작설(雀舌)이라는 참새 혀 같은 자색의 찻잎을 얻을 수 있다. 대밭이나 비옥한 땅에서는 표준치에도 못 미치는 녹색의 찻잎밖에 얻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어떤 식물도 비전박토나 자갈밭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악조건이나 시련이 거듭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척박한 땅에 의지해 뿌리를 내리고 땅 속 깊은 곳의 원시적 기운을 모아 잎으로 피워내는 차나무에는 비옥한 땅에서 서식하는 여타의 식물에서 취할 수 없는 고귀한 정신이 있다. 인류가 오천 년 이상을 한결같이 마셔온 음료가 오직 차뿐인 이유가 바로 이 정신에 있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일하고 평온한 환경에만 길들여진 사람은 결코 시대를 변화시키거나 이끌어갈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수 없다. 그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한 점의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휩쓸려서 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반복되는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일어서는 인간의 모습은 그래서 그 어떤 삶보다도 진중하고 아름답다. 그 진중함과 아름다움의 이어짐이 바로 인류의 역사이며 현실이고 또한 미래이다.
자생 차나무 기르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차나무에 절대로 비료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차나무에 비료나 농약을 주는 것은 우선은 나무를 잘 자라게 하고 대량 수확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차나무가 본래 지닌 독특한 정신이 상실되어 차나무의 진정한 생명을 종식시키는 일이 된다. 자생 차나무는 비료를 단 한 번만 주어도 직근이 썩어서 횡근이 발달한 변종 차나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변종 자생차는 다시는 순수 자생차로 돌아갈 수 없다. 한번 썩어버린 직근은 다시 회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겨우 남아 있는 극소수의 자생 차밭이나 야생 차나무에 비료를 준다면 그로 인하여 본래의 귀한 가치를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자생차 밭 그 자연과 생명의 삶의 공동체
차씨를 심고 봄에 차싹이 돋아나 땅 위로 고개를 내민 뒤 8월말쯤이 되면 차나무 주변의 잡초를 베어서 차나무 밑에 깔아준다. 깔아준 마른 잡초와 베어버린 자리에서 다시 겨울까지 자라난 어린 풀은 자생 차나무가 겨울을 나는 데 꼭 필요한 보온막이 된다.
보온막이 되는 마른풀 위에 짚이나 톱밥 또는 낙엽 등을 더 덮어주면 더욱 좋으며 이것들은 다음해 차나무가 자라는 데 필요한 양질의 거름이 된다.
어린 차나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칡넝쿨이나 억새풀이며 땅가시나 산딸기나무 등도 계속해서 철저히 제거해주어야 차나무는 안심하고 잘 자란다.
다음해가 되면 3∼4월쯤에 웃자란 잡초를 베어 땅 위에 깔아주고 8월말쯤에는 전년과 같이 풀을 베어 또 한 해의 월동 준비를 시작한다. 이렇게 하기를 7∼8년쯤 반복하면 어느새 어린 나무는 장성해서 찻잎을 채취하기에 적당한 차나무가 된다. 잘 자란 뒤, 찻잎을 따기 전 3∼4월에 잡초를 제거해주는 것은 찻잎을 따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자생차밭은 차나무와 벌레들과 잡초가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삶의 공동체이다. 자생차밭의 잡초는 생산의 협조자이며 은혜로운 지원군이다. 그들은 벌레들의 왕성한 식욕의 대상이 되어 찻잎에게 살신성인하는 군자의 모습을 보인다. 제초제나 살충제의 강도는 찻잎에 치명적 영향을 주고 그것은 고스란히 사람에게 돌아온다. 그러기에 대자연의 법칙대로 모든 생명이 공존하게 하는 것이 현명한 삶이다. 모든 행위는 서로 그물코처럼 전체 속에서 얽혀 있다.
곡식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차나무를 심은 뒤에는 늘 자주 가서 돌아보고 보살펴주는 것이 좋다. 차나무를 심어두고 첫해 두해를 지나는 어린 나무의 자라나는 모습은 두세 살 먹은 아기의 모습처럼 귀엽기 그지없다. 특히, 봄날 아지랑이 속에 땅으로부터 자색을 띤 자생차의 어린 순이 힘차게 무거운 땅을 뚫고 차밭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는 즐거움은 그 어떤 기쁨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야부기다종 차나무나 변종 자생 차밭의 잡초는 차밭에 출현하기가 무섭게 농약이나 예초기로 섬멸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찻잎을 위해 뿌려준 비료를 잡초가 먼저 흡수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자생 차밭의 잡초는 좋은 찻잎을 효과적으로 생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협조자이며 은혜로운 지원군이다. 3∼4월에 여린 찻잎을 채취하고 나면 나무에 남아 있는 찻잎은 묵은 찻잎이 되어 단단해져서 6∼7월부터 알에서 깨어 나오기 시작한 벌레들은 뻣뻣한 묵은 찻잎은 먹지 않고 차나무 곁에서 자라나는 부드러운 잡초를 먹게 된다. 잡초는 차나무를 에워싸고 은밀하게 사는 자연 속의 벌레들이 겨울잠을 깨어 생동하는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왕성한 식욕의 대상이 되어 찻잎을 벌레로부터 보호한다. 찻잎 대신 벌레의 먹이가 됨으로써 살신성인하는 군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대자연에서는 만물이 공존 공영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욕구를 위해 조성된 차밭이지만 그 차밭도 자연 속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차나무를 돌보는 사람만의 것이 아닌, 차나무와 벌레들과 잡초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두의 터전이다. 그 터전이 인간의 것이라는 생각은 단지 사람들만의 독선적인 아집일 뿐이다.
사람들은 차나무에서 찻잎을 더 많이 생산하려는 욕심 때문에 잡초와 벌레를 죽이려 하지만 잡초와 벌레의 생명력도 만만치는 않다. 예를 들면 그해의 벌레에게 충분한 살충제는 그 다음해에는 충분하지 않아서 더 강하게 해야 하고 또 그 다음해에는 강도를 더한층 높여가야만 차밭에서 벌레를 제거할 수 있다. 비료나 제초제도 이와 같다. 이렇게 강도를 높여갔을 때 벌레와 잡초는 죽겠지만 제초제나 살충제의 강도는 찻잎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그 찻잎이 받은 영향은 사람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그러기에 대자연의 법칙대로 모든 생명이 공존하게 하는 것이 현명한 삶이라 할 것이다. 모든 행위 하나는 그 하나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그물코처럼 전체 속에서 얽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