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귀비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양귀비는 피난 중에 죽었을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도피하였을까?
일단은, 양귀비가 마외역에서 죽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구당서≫에는 '현종이 진현례를 위시한 금군 장군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결국 양귀비에게 불당에서 목을 메어 죽도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당국사보(唐國史補)≫와 ≪자치통감≫에는 '고력사가 불당의 배나무 아래에서 양귀비를 목 졸라 죽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양귀비의 죽음을 부인하는 흥미로운 의견들도 적지 않다.
먼저, 일본의 학계와 민간에서 널리 알려진 설이다. 즉, 마외 병변(兵變)에서 목을 메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양귀비가 아니라 양귀비의 시녀였다는 설이다. 당시 금군의 지휘관 진현례는 양귀비의 미모를 아깝게 여겨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고력사와 모의하여 시녀를 대신 죽였다. 그후, 사람을 보내 양귀비를 도피시켰다. 양귀비는 지금의 상해 부근에서 배를 타고 일본의 구곡정 구진(久谷町 久津)에 도착하였다. 안사의 난이 평정되자 현종은 방사들에게 구진(久津)으로 가서 양귀비에게 두 개의 불상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양귀비도 옥비녀를 주며 이에 답하였다. 하지만 양귀비는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서 생을 마쳤다.
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의 도일(渡日)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과 양귀비 관련 유적도 많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양귀비 묘의 오륜탑(五輪塔), 양귀비에게 바쳤다는 십삼탑, 양귀비 관음당, 양귀비 관음상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적들은 모두 일본의 명승고적으로서 관광가이드에도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유평백(兪平伯)이라는 학자가 백거이의 를 분석하여 제기한 견해이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양귀비는 마외역에서 죽지 않았으며, 그 근거로는 현종이 피난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외역을 지나게 되었는데 당시 그곳에서 양귀비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유평백은 그후 양귀비가 기녀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은 더욱 놀라운 추측이다. 즉 양귀비의 도미설(渡美說)이다. 이것은 대만의 학자 위취현(魏聚賢)의 ≪中國人發現美洲≫라는 책에 언급된 내용인데, 양귀비가 마외역에서 죽지 않고 사람들에 의해 미국으로 데려가졌으며,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귀비의 죽음에 얽힌 추측은 무성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하나의 미스테리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