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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일제시대 황국신민화에 대한 저항

이성도 |2006.08.10 15:15
조회 74 |추천 1
(황국신민화에 대한 저항)

1932년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에 전국적으로 3개밖에 없었던 사범학교는 학비가 면제되고 직장이 보장되어 경쟁자도 많았고 입학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대구사범하교 시절에 박정희의 학창생활은 모범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사격, 나팔, 육상, 교련 등에 뛰어 났지만, 학업성적은 좋지 못했다.


그의 학업성적에서의 꼴찌는 이유있는 꼴찌였다는 평가가 있다. 당시 대구사범의 분위기는 황국신민화교육의 선봉자로서 식민지교육이 강화될수록 학생들 사이에서 민족적 의분심이 심화되면서 '무저항적 반항'이 많아졌다. 박정희는 소설도 일본인 작품보다는 세계문학전집을 읽었고, 신문도 조선, 동아일보를 구독하였다. 사회주의자 현준혁 교사의 '독서회 사건'(이 사건 관련자 31명이 항일운동에 관계했다는 명목으로 퇴학당함) 이후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고, 이후 김영기 국어교사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국사강의가 이루어졌는데, 박정희의 동기생이었던 27명의 중퇴자들은 대부분 항일활동과 사회주의서적을 읽은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민족의식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박정희가 사범교육과정에 대하여 선별적으로 적응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최하위 학업성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교련 성적은 사범학교의 황민화를 목적으로 한 학과교육을 포기하고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군사교육에 열중하였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이 시기에 박정희가 어떤 방면의 책을 접하고 영향을 받았는지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세계문학전집을 많이 읽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그리고 월간지 '개벽' 등을 읽었으며, 특히 민족의식의 상징이었던 이광수의 '성웅 이순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식민지치하의 2등 국민으로서 민족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적어도 민족의식은 키워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대구사범학교에 1932년 입학해서 1937년 졸업할 때까지 박정희는 만 15세에서 20세로 인격형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동안 박정희는 사범학교의 황국신민화강조와 민족교육 탄압속에서 그에 적응하기보다는 민족차별 교육에 무저항의 저항으로 적응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그는 전통적인 교육이 아닌 근대화된 교육을 받아 전통적 사고와 이중성을 보이는 일본제국주의의 지향의 사고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군인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하였다. 교사 박정희는 대구사범에서 배운 전인교육을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실천하려고 했고 김영기 등 조선인 교사들로부터 민족혼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려고 했다.

그는 교사로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민족으로써 민족주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만주군관학교 역시 사범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차별이 심해서 박정희의 민족감정은 부추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만주군관학교시절1기생 이기건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민족을 위한 적극적 활동이 없는 가운데 만군 장교로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국가의 힘이 없으면 국민이 구차해진다는 것을 체험했던 그는 해방이 몰고 온 모순과 곤혹과 갈등을 또 다시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형성된 그의 힘과 국가를 토대로 한 민족주의 신념은 그의 정책 결정과 추진의 바탕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독립운동을 했다 는 것은 신빙성은 없으나, 다만 박승환과 최창륜을 매개로 조국의 독립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인간적 접촉을 지속했다는 것은 여러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로 여겨진다.



발췌: 권장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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