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들은 다 어디로 갈까?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시간을 지난적이 있다.
대학 졸업반 무렵의 봄이었다 우리는 캠퍼스 한구석의 벤치에 조르르 앉아 꽃이 지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내년 이맘땐 우리 다들 어디에 잇을까?" "그러게 말이야 안그래도 심란한데 꽃은 왜 지고 난리야." 그때 우리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면 아마도 이세상이 너무도 드넓게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지만 속 깊은 곳의 이야기는 아무도 털어 놓지 않는다.나 역시 그사람과의 일에 대하여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때론 타인의 상처를 일부러 건드려 파헤치지 않는것이 이 도시에서 통용되는 우정의 한 방식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오래 떠들고,짧게 침묵했다.
침묵의 찰나는 깊었다.
해마다 어김없이 봄꽃은 피었다 지고, 우리는 여전히 막막하게 흔늘리고 있다. 다시 10년쯤 뒤 우리는 또 어딘가에서 모여 꽃이 지는 이유를 추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모두 조금, 아주 조금씩은 달라져 있겠지. 꽃이 지는 새로운 이유를 발견해 냈겠지. 그렇게 믿어보기로 한다.
재인은 회사에 들어가봐야 한다고 했고, 유희는 병원에 조금 더 남아있겠다고 했다. 나는 지하철을 타는 대신 좀 걷기로 한다. 오후 다섯 시. 하늘은 흐리고, 스산한 바람이 분다. 올봄은 여느해와 달리 도무지 다소곳 하지않다. 행인들의 옷차림도 각양각색이다. 어떤이는 바바리 깃을 여민채 바삐 걷고 있고, 또 다른 이는 팔뚝을 드러낸 반팔셔츠 차림이다. 나는 블라우스에 니트 가디건을 겹쳐 입은 어중간한 모양새다. 비닐봉지가 춤추듯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나는 무감동하게 바라본다.
이런미친 봄날, 사람들은 뭘할까? 옛애인의 결혼식을 저주하며 화장실에서 혼자 코를 풀지도 모르지. 연하의 남자친구가 끓여놓은 김치찌게를 먹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귀가를 서두를 수도 있겠고, 회사에 사직서를 내던진 뒤 스스로에게 하트 목걸이를 선물할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나는? 나는 길을 걷고 있다.처음 방문한 도시를 할일없이 떠도는 게으른 여행자 처럼..........
불현듯 기습적인 허기가 느껴진다.포장마차에의 휘장을 걷고 들어선다. 구부정한 자세로 떡볶이를 먹는다. 별별일이 다 일어났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곤 하는 이 도시에서, 이쑤시게로 떡볶이를 찍어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조그만 여자의 모습은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다. 반투명한 비닐 창 밖으로 거리가 어룽져 보인다.
내곁에 다가왔다 떠난 이들이 나에게서 무엇을 읽고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단 한가지. 그들이 기억하고 있을 그 어떤 나의 얼굴도 오롯한 오은수는 아니라는것. 완전한 오은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여기, 맵고 달콤하고 뜨겁고 말캉한 떡을 묵묵히 씹어 삼키고 있는 나의 심장은 1초에 한 번씩 진지하게 뛰고 있다.
길 건너 스타벅스에 들어가 카페모카를 주문한다. 문득 웃음이 난다.1500원짜리 떡볶이로 저녁을 때운 주제에 후식으로 두배가 넘는 가격의 커피를 마시다니. 통장 잔고를 헤아려 보려다 그만둔다. 창가 자리가 나를 위해 운좋게 비어 있을리 없다. 매장 한구석 작은 원형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는다. 쟁반위에, 머그잔이 달랑 하나뿐이다. 혼자라는 사실이 또렷하게 실감난다.
서른두살. 가진것도 없고, 이룬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수 있을까, 무엇이든?
아스팔트 위로 돌연 굵은 빗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거리를 걷던 행인들이 일제히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쳐 든다. 모두들 오늘의 일기예보를 충실히 숙지한 채 길을 나섰나 보다. 거리는 곧 색색의 우산들로 물결을 이룬다.나에게는 우산이 없다.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사는것은, 오로지 나뿐인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스타벅스의 자동문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다.
곤두박질 치듯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무늬없는 7cm 검정 하이힐이 주저하듯 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내려다 본다.
빗속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아무렇지 않은척,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걷는다. 버스정류장에서 발을 멈춘다. 저녁의 정거장, 길들은 여러갈래로 뻗어있다. 어느쪽으로 가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지는 않을것이다.두 손을 공중으로 내밀어 본다. 손바닥에 고인 투명한 빗물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맛이다.
넘 좋아했던 소설...의 엔딩 부분~!
신문에 첨 연재되엇을때 부터 좋아해서 빠짐없이 읽엇는데 ㅋㅋㅋ
내 나이 이십대 후반이지만 진짜 서른살때쯤 되면 저럴까 하는 의구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