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fine
fine
[명사] 악곡의 끝을 나타내는 말. 도돌이표나 달 세뇨 기호 때문에 반복하여 연주하다가 곡을 끝내는 위치를 표시할 때 쓴다.
" 꼭, 내가 필요해?"
그의 까ㅡ만 눈동자를 직시한 채로, 숨을 멈추고 내뱉듯이 말한다.
사실은 대답도 이미 알고 있는데, 결국은 그의 입술로 나오는 그 한 마디를 듣기가 두려워서, 혹시나 하고 또..혹시나 하고...
"...뭐..?"
흔들리는 목소리로, 그가 되물었다.
잠시 그 깊은 눈에 파문이 인다. 앞으로 다가올 그 대답과는 별개로, 그는 당황하고 있다. 아주 많이.
내가 이런 질문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런식으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치 '오늘 날씨 좋죠?'하고 일상적인 질문을 던지듯, 갑작스레 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 꼭 나이어야만해? "
알고는 있지만, 그의 마음에 결국은 일어나고만 커다란 일렁임까지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실히 파도를 만든다. 아직도 ' 어쩌면.....'해 버리고 마는 나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 더 이상은 안된다는 내 결심의 끝을 보기 위해서.
커다란 파도는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작은 일렁임으로 변한다.
마침내 그 일렁임마저 멈추고, 잔잔하게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고요히 흐른다.
" 스이."
그의 조금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불리워지는 내 이름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전에도 그는 자주 내 이름을 부르고는 했었다. 따뜻한 햇살 아래에 나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그 위로 녹음이 잔뜩 우거진 나무가 바람에 스쳐 바스락 하는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렇게 부드럽게 나의 이름을 부르고는 했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을 무척 좋아했고, 내 이름을 부를 때 나오는 듣고 있노라면 어딘가 눈물이 나올만큼 찡해져 버리는 그의 그 목소리도 역시 같은 만큼 좋아했다.
같은 목소리 일텐데도, 지금은 그 목소리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어느 먼 공간에서 울려퍼지는 소리 같은. 금방이라도 흩어져 스러져 버릴 듯한 목소리....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듯한. 나의 이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라기 보다는 서로가 가져온 이 상황에 대한 어색함과 애절함으로 우리는 한참이나 마주 본채, 그렇게 서 있었다. 옆으로 잔잔히 흐르는 한강과 이따금 무서운 소리를 내며 지나쳐 가는 도로 위의 자동차와는 동떨어진 채. 정지한 모노 영화 화면의 한 컷 처럼, 우리는 그렇게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보고 있느냐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고, 오히려 그 뒤에 있는 풍경을 멍하니 직시하고 있다고 하는 게 맞았다. 서로를 똑바로 바라 보기에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었으니까.....
딱 차가 한 대 지나갈 만큼 떨어져 있는 우리 사이로, 한 차례 시원한 강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짧은 머리카락이 살짝 '안녕;하듯 흩날리고, 나의 딱 어깨를 조금 넘는, 아직 파란 바다색의 염색기가 은은히 도는, 머리카락도 그에 답하듯 어깨 발치에서 잠시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 앉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소설 속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아주 진부한,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읽고나면 눈물을 펑펑 쏟아내게 하고야 마는 그런 삼류 소설.
이 상황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풋'하고 조금 실소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미묘한 대치 상황은 끝이 났다.
" 대답은 이미 알고 있잖아..?"
조금은 슬픈 눈으로 그가 말한다.
미안한 걸까? 아니면..안타까운 걸까?
" 응. 그래서 물어본거야. "
" .............어째서..?"
망설임 없는 나의 대답에,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어 온다.
" 쥰... 처음부터 내가 말했잖아? "
호흡을 고르고, 조급하지 않게 차근차근히 말한다.
단어 하나하나를 기억 속에서 꺼내어 마치 조각 맞추기를 하듯 세심하게 연결시키고, 딱 듣기 좋을 만큼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부탁했었잖아.
내가, 꼭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때가 아니라면, 그런 확신이 드는 때가 아니라면,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말아달라고. 했었잖아."
분명, 그로부터 처음 사귀자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렇게 부탁했었다. 그는 그 때도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또 어딘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한 것은 그 때 딱 한 번 뿐이었지만, 그가 잊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말은 확실히 아직도 그의 마음 속에 정확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고, 결국에는 그도 그 말의 의미와 나의 생각을 느끼고 - 안다기 보다는 -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그와 적당히 즐기듯이 사귀자라는 가벼운 생각 따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느 쪽이냐하면 그 반대로 그와의 인연이 소중했고, 어딘지 모르게 애달팠고, 가능하다면 계속 보물처럼 숨겨두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말이란 것은 참 허무해서, 입으로 나오고 나면 금방 공기중에 흩어지고 만다.' 라는 생각은 예전부터 줄곧 하고 있었던 거였고, 또 그 무렵의 나는 처음 사귀어 본 사람으로 부터의 상처 - 사람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리는 데서 오는 -로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무엇인가가 전부 소진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아' 라는 자기 방어 같은 거였던 거라고 지금에야 생각한다.
무엇이 사랑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금방 변해 버린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이러다가는 전혀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리고 사랑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나는 외롭고 불안했고 또 슬펐다. 무척.
마음 속 깊은 곳에 나락과도 같은 불안을 감춘 채, 어디에도 매달릴 수 없어서 방황하고 있던 나날.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아무렇지도 앖고, 늘 방긋 웃으며 사람들을 대하고 또 살아가지만 사실은 버려진 채 야옹야옹 울고 있는 고양이처럼 누구도 믿지 못하고, 나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다고, 아니 사실은 나 자신을 가장 믿을 수 없다고 그렇게 끝없이 생각하던 그 때.
그로 부터, 고백을 받은 것은 딱 그 무렵이었다.
2006. 8.10 by. ich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