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사진작가 카르티에브레송이 1932년에 선보인 사진집에 《결정적 순간Images la sauvette》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이후 이말은 유행어가 되었다. - 카르티에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이란 렌즈가 맺는상(像)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이 시간을 초월한 형태와 표정과 내용의 조화에 도달한 절정의 순간"이라고 하였다. "카르티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은 이 용어가 생긴 이래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오늘날에 와서는 하나의 사진예술의 미학으로 자리잡았다. ‘결정적 순간’은 원래 그의 사진집 Images à la Sauvette의 영어판 제목이었다. 카르티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엄격한 구성 속에 배치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내용과 구성이 가장 조화로운 순간, 절제된 구성과 기하학적 구도로 귀결되는 최상의 순간을 발견하여 타이밍에 맞추어 이것을 촬영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단순한 시각적 순간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을 뜻한다. 그리고 피사체의 표정, 작가의 의도, 주변 상황 등이 사진 프레임 속에서 완벽하게 구성되는 아주 짧은, 찰나적인 순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카르티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명작 (1932)가 소개된다. 이 작품은 비온 뒤 고인 물 웅덩이를 막 뛰어넘으려는 한 남자를 보여준다. 카르티에-브레송은 공중에 있는 그 남자가 막 물 웅덩이에 빠지기 1000분의 1초쯤 직전의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했다. 그러나 이 남자가 보여주는 아주 분명한 ‘결정적 순간’은 뒤로 하고, 이 작품엔 더욱 결정적인 것이 있다. Y자 모양을 하고 있는 남자의 실루엣과 물에 비친 그의 그림자가 뒷 배경의 생 라자르 역 담벼락에 붙은 서커스단 포스터의 댄서들과 그 동작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단순히 이 남자의 절묘한 순간을 포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와 뒷 배경의 댄서들, 그리고 모든 주변 상황이 완벽하게 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을 포착하는데 있다. 카르티에-브레송이 포착한 결정적 순간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인식하지 못하거나, 놓쳐버릴 수 있는 일상생활의 유머와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결정적인 순간은 물 웅덩이를 막 뛰어넘으려는 특별한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그 자체에 산재해 있다. 존경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파첼리 추기경(교황 비우 12세)을 둘러싼 관중들의 모습(1938)이나 포도주를 끼고 파리 무프타르 골목 모퉁이를 돌아오는 어린 아이의 익살스러운 표정(1952)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결정적 순간이 없다면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Cardinal Retz 난, 다른 아이들처럼, 휴일날 스냅샷을 찍을 때 쓰곤 하던 박스 브라우니로 사진의 세계에 뛰어 들었다. 어렸을 적에도 나는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학교엘 가지 않아도 되는 목요일과 일요일엔 그림을 그리곤 했다. 점차, 나는 카메라를 통해 놀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터득하려고 시도하게 되었다. 박스 브라우니 카메라를 쓰며 카메라를 의식하기 시작한 그 순간 이후 휴일날의 스냅샷 놀이는 끝이 났고, 친구들을 찍어주는 어리석은 사진도 작별이었다. 나는 진지해지고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향취에 취해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그것은 영화였다. 몇몇 유명한 영화들로부터 나는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펄 화이트의 '뉴욕의 미스테리', D.W. 그리피스의 'Broken Blossoms', 스트로하임의 초기작 '탐욕'과,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이런 영화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후에 앗제의 인화물을 소장하고 있는 사진가들을 만났는데, 그 작품들은 뛰어났고 결국 나는 삼각대와 검정색의 호두나무 재질의 번들거리는 3X4인치 카메라를 사게 되었다. 이 카메라는 노출을 주기 위해서 셔터 대신에 렌즈캡을 열었다 닫는 것으로 작동되는 것이었다. 그 훌륭한 디테일 묘사력 때문에 한동안 정적인 세계에 빠져버렸다. 정적이지 않은 피사체들은 너무 복잡하게 여겨졌거나 또는 아마추어적으로 느껴졌다. 이때쯤에서 나는 그런 잡다한 소재들을 무시함으로써, 내가 '예술"에 아주 조금 공헌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다음 난 내 필름들을 직접 현상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모든 프로세스에 능숙하게 되는 일은 꽤 즐거운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인화에 대해서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 어떤 종류의 인화지는 부드러운 묘사를 나타내고 어떤 종류들은 컨트라스트가 높게 나온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이미지가 제대로 인화되지 않을때마다 늘 화가나서 반쯤 미쳐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술적인 면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1931년, 스물 두살 무렵, 나는 아프리카로 갔다. 아이보리 해안에서 생전 처음 보는 미니어쳐 카메라를 샀는데, 그것은 Krauss라는 프랑스 회사의 제품이었다. 그것은 스프로켓 구멍이 없는 35밀리 필름을 썼다. 약 일 년 간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필름들을 현상,인화했는데, 그것은 1년 동안 고립된 수풀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불가능했던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서야 카메라가 습기에 노출되었고, 거대한 곰팡이들이 내 사진들을 망쳤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흑수열에 걸렸는데, 프랑스에 돌아와서는 서서히 호전되고 있었다. 마르세이유에서 약간의 수입으로 즐겁게 작업했었다. 그때 라이카를 알게 되었다. 라이카는 내 눈이 되었고, 나는 라이카 카메라를 발견한 이후 한번도 그것과 떨어져본 적이 없다. 나는 라이카와 더불어 언제든 셔터를 누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삶의 순간들을 포착하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도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삶 속에서 어떤 상황의 본질을 통째로 단 한 컷의 사진에 포획하기를 간절히 열망했던 것이다. 사진에 메세지를 담는다는 포토그래픽 르포르타주의 개념은 즉, 일련의 사진들을 통해 사진가가 개입되지 않은 채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르포르타주에 대해 훗날 내 동료들의 작업들을 보면서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 때는 카메라로 르포르타주를 어떻게 만드는지, 어떻게 사진으로 스토리 텔링을 하는지에 대해 조금씩 깨닫게 되는 과정중의 일부였다. 나는 비록 여행하는 법을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간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보통 한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기 전에 그동안 본 것을 소화할 수 있도록 시간을 충분히 갖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일단 한 곳에 도착하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내기 위해 그 곳에 정착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난 절대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여행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1947년,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프리랜서 사진가들이 모여 "매그넘 포토"라는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수많은 나라의 잡지에 사진과 이야기를 제공하고 있다. 뷰화인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지도 벌써 25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자신을 아마추어로 간주하고 있다. 비록 이젠 더이상 취미파 사진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