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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나주 광산마을에서

장영희 |2006.08.24 14:32
조회 733 |추천 0


                                  Vincent van Gogh1880년경

 

 33살의 늦은 나이에 첫아이를 사산한 그의 어머니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는 첫아이의 기일이 고흐의 생일까지 이어졌다. 어린 고흐는 생일인데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두 살 때 태어난 누이 안나 네살때 태어난 테오때문에 고흐는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했다 유년기의 거듭된 실망은 고흐의 마음 깊은 곳에 무의식적인 절망의 저수지를 이루었다. 반 고흐의 집안은 유서 깊은 네덜란드 가문으로,그 혈통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흐의 다섯 숙부 중 한명은 해군 장성이었고 세명은 화상으로 크게 성공했다. 역시 이름이 빈센트인 고흐의 할아버지는 큰 교회의 목사로 이름을 떨쳤다.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루스만이 예외적으로 비교적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했다. 테오도루스는 여섯 아들 중 유일하게 빈센트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었지만, 목사 노릇을 하기엔 말주변이 없어서 평생 작은 시골 교회의 목사로 살았다.  벨기에 국경 부근의 작은 마을 그루트 준데르트에 정착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흐가 태어난 것은 그후 몇년 뒤의 일이었다.

16살 즈음 가족들은 헤이그에 있는 숙부 빈센트의 화랑에 수습 사원으로 불렀다. '센트'라고 불렸던 숙부 빈센트는 작은 미술품 매매점을 유럽에서 가장 큰 구필화랑으로 키웠다. 

 

어느날 부터인가  홀연 지저분한 옷을 입고 나타나 젊은 여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괴팍한 남자와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화랑 손님들을 매료시켰던 남자는 동일한 인물이다. 고흐는 열심히 일하면서 구필화랑의 유능한 직원으로 자리잡았다.  상사 테르스테크는 입에 침이 마르게 고흐를 칭찬했고,고흐는 4년 뒤 헤이그 지점에서 런던 지점으로 승진했다.

 

고흐는 하숙집 딸 유제니 로이어에게 마음을 빼았겼다. 유제니는 딱 잘라 청혼을 거절하면서 이미 다른 사람과 남몰래 약혼한 상태라고 털어놓았다. 고흐는 유제니의 대답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후 화랑에서도 마음을 잡지 못한 그는 결국 구필화랑에서 1876년 1월 고흐를 해고했다. 이후 고흐는 평범한 직장을 다시는 성공하지 못했고,죽을 때까지 가족의 골칫덩어리로 남아 있었다.

테오도로스는 고흐가 신학교에 입학 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고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울 수 없었다. 아니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가정 교사 멘데스 다 코스타에게 저 유명한 질문을 던졌다.

"멘데스 선생님,이 지긋지긋한 것(그리이스어 동사)이 제가 정말 원하는 일,그러니까 불쌍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히 여길 수 있도록 하는데 꼭 필요할까요? 입학 시험을 반쯤 준비했을 때,멘데스와 고흐,그리고 테오도로스 모두 시험을 포기하는데 합의했다. 브뤼셀의 복음학교는 3년밖에 안되었으나 3개월 실습과정에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6개월간 무보수 조수로 보리나주에 갈 수 있었다.

 고흐는 벨기에의 남부 산업 도시인 보리나주에서 디킨슨 소설에서 읽었고 런던에서 엿보았던 열악한 노동자 계급의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  광부들은 끝도 없는 노동과 아동 착취,각종 질병,그리고 갱도 안의 폭발로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폭발이 일어나면 지하에는 가스가 차고 축대가 무너지면서 불이 났다. 그 와중에 수백명의 사상자가 났으며 끔찍한 화상을 입거나 다치는 이들도 많았다.

 

고흐의 공식적 임무는 목사를 도와주고 프로테스탄트회의실에서 설교하며 광부의 집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었지만,그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광부들에게  음식과 옷을 주고 그들을 간호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심지어 자신의 옷을 찢어 올리브 기름과 밀랍을 담갔다가 광부들의 화상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어린 소년이 궁핍한 생활속에서 한덩이의 빵을 얻기위해 어두운 갱도안에서 차가운 물속에서 7일간 일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소년대신 일해주고 그를 먹이며 그를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단순히 광부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던 광부들과 함께 생활했던 것은 아니었다. 고흐는 자신과 자신이 섬겨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을 없애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갱에도 들어가보고 광부들이 사는 허름한 오두막집으로 이사도 했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석탄을 묻히고 다니기도 했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하숙집 여주인이 볼 때에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녀는 테오도루스에게 급히 보리나주로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테오도로스는 고흐의 빈민굴 생활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테오도루스가 네덜란드로 돌아가자마자 후로는 다시 험난한 고행을 했고,결국 로셰듀의 분노를 샀다. 복음학교 위원회가 볼 때 고흐의 임무는 광부가 되는것이 아니라 광부를 신에게 인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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