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박하우스 Wilhelm Backhaus (독일 1884 -1969)
우리가 아는 거장들은 대부분 독일계 작품들을 잘 연주했지만 박하우스는 특히 독일 고전파의 연주에서 거의 타고났다고 평가받은 독일계의 전형이었다. 독일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가 그를 처음으로 가르쳤다. 1891~99년 7년동안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알로이스·레켄도르프(Aloys Leckendorf)에게 사사한후 다시, 저명한 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의 제자였고, 정평 있던 베토벤 해석가로 작곡과 연주에 전념하고자 제자를 두지 않았던 외제느·달베르(Eugene d'Albert)에게 찾아갔고, 달베르는 그의 자질을 보고 단번에 제자로 삼았으니, 그는 달베르의 유일한 제자였던 셈이다. 달베르의 가르침을 받은후 16세 되던 해 박하우스는 런던에서 최초의 콘서트를 가졌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과 19세의 나이로 맨체스터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된다. 1900년 연주 여행을 시작했으며 니키쉬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호평을 받으며 세계 기록 하나를 세우는데 그가 이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그리그 협주곡이 세계 최초의 녹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의 명성은 1905년 8월 파리에서 열린 루빈슈타인 콩쿠르 우승 이후 세계로 퍼져 나갔는데, 피아니스트로 여기에 참가했던 대작곡가 벨라·바르토크(Béla Bartók)가 그의 연주에 대해 "박하우스는 정말로 아름답게 연주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뉴욕 데뷔는 1912년 1월 5일이었는데, 그는 '황제' 협주곡을 연주했으며 미국 어디에서나 거장으로 환영받았다. 음반으로 남아 있는 1954년의 카네기·홀 리사이틀 외에, 최후의 미국 연주 여행은 1962년이었다. 그가 미국에 연주 여행했을 때, 어느 비평가는 "그의 테크닉은 신과 흡사하다. 그는 고도프스키를 포함한 몇을 합쳐 놓은 정도의 대·피아니스트다"고 단언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의 기교적인 완벽함은 거의 전인미답 수준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주, 그 중 독주뿐이었다. 실내악을 즐겼다는 증거도 별로 없으며, 녹음도 둘 뿐이다. 교육자로서의 경력은 극히 짧고 솔딜스하우젠 음악원, 왕립 맨체스터 음악원(1905), 미국의 커티스 음악원(1925~26) 등 몇 안 되며, 지금까지 박하우스의 제자라는 유능한 연주자는 들어 보지 못했다. 1차 대전 때 병역에 복무한 시기를 제외하고, 그는 모든 시간을 무대 연주와 녹음에만 집중했으며, 나치의 통치도 그의 연주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그 덕에 나치 협력자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시간의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 콘서트를 통한 연주활동이었다. 자그마치 4000회 이상 콘서트에 출연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자주 '완벽한 기교, 다소 빠른 템포, 직설적, 힘'으로 묘사되어 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매력 포인트는 부드럽고 고귀하기까지 한 음색과 깊은 서정이다. 그의 음색의 아름다움은 의심할 바 없이 동시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도 일류이다. '건반의 사자 왕'이란 별명에 걸맞게 박하우스의 연주는 강인하면서도 완벽한 테크닉으로 큰 스케일의 연주를 특징으로 하는데, 극단적인 표현에 얽매이지 않고 예리한 분석력과 작품에 대한 공감, 완벽한 균형감으로서 작품을 해석하고 연주하였다. 그는 독일 음악에 강세를 보였는데 베토벤, 브람스, 슈만이 그의 장기였다. 특히 그는 베토벤연주의 권위자로 알려졌으며, 그의 베토벤 소나타는 일종의 교과서적인 음반으로 인정받고 있다.(그는 전 곡을 모노럴과 스테레오로 두 번 녹음했다.DECCA) 또한 한스·슈미트·이세르슈테트가 지휘한 빈·필과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 음반도 명반으로 꼽는다. 그의 최후의 연주회는 1969년 6월 28일에 있었으며(다행히도 실황녹음으로 있다), 7일 후 심장마비로 오스트리아 필라흐(Villach)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후 유해는 쾰른(Köln)에 안장되었다.
그의 집에는 아주 슬퍼 보이는 광부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왜 그런 그림을 갖고 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내가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일이 그보다는 힘들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라 대답했다고 한다.
첨부파일 : Wilhelm Backhaus 01(4975)_0400x0488.sw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