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자가야에서 사케나 한잔 할까?" 라는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 까지 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와인처럼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주나 맥주처럼
친근하지도 않은 술이 바로 사케였으니까.
불과 4~5년전 사케와 생선회, 스시, 꼬치구이등을 앞세워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던 이자카야들을 기억하는지.
그러나 음식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프랜차이즈의 난립과
터무니없이 비싼 기격, 일본 음식 특유의 야박한 양은 푸짐함과
화끈함이 미덕인 한국인들의 음주문화에 부합하지 못해
주당들의 외면을 당했다. 하지만 1~2년 전부터 신사동 가로수길을
시작으로 청담동, 홍대, 압구정동,등의 오뎅바들이 인기를 끌면서
수순처럼 사케라는 술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인들의 커뮤니티가 견고하게 형성되어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자카야가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얼마전 한남동 유엔 빌리지 입구에 오픈한 '다이도코로'는 미식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있는 맛집. 일본어로 '부엌'을 의미하는
다이도코로는 손님들이 '우리 집 부엌'처럼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일본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이자카야다. 다이도코로의 메뉴는
'가정식' 을 표방한다.
이곳의 대표 메뉴이자 반드시 맛봐야 하는 사바(고등어)스시,
마블링이 환상적인 와규(일본산 흑우)로 조리한 안심타타키,
오차쓰케를 부어 마무리해야하는 달콤한 우나메시(장어덮밥)는
1.8L 짜리 병 사케도 부족할 정도로 맛깔스럽고,
'클라우디베이(Cloudy bay)'라는 뉴질랜드 산 화이트 와인에
곁들이면 예술인 바지락 마리니엘과 삼천포에서 공수해온
멍게와 장어사시미는 입에 넣는 순간 '행복해!'라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신선하다. 또 구수한 삿포로 생맥주는
'덴뿌라(튀김)'나 일본식 치킨 그라탕과 함께 마셔주면
세상 시름을 모두 잊을것만 같다.
수란을 곁들인 우동과 오이꼬동(닭살과 계란덮밥)도
반드시 먹어봐야할 추천메뉴들.
"일본에서 직접 들여온 최고급 양념드로가 우리나라의 물 좋은
생선들로 만들어진 담백한 요리가 다이도코로의 자랑이죠.
이 메뉴들은 어린시절부터 제가 즐겨왔던 음식이라
쉽게 질리지 않을 '롱셀러'라고 자신해요.
음식과 술은 맛은 물론 식기나 인테리어 같은 멋,
같이 먹는 파트너까지 3박자가 고루 갖추어져야 진짜죠."
음식과 미학에 대해 남다른 철학이 있는 재일교포 출신의 오너
박정순씨의 설명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어설픈 일본 요리를 찾는 것은 금물이다.
생선회를 초고추장에 찍어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겐
이곳보단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볼 것을 권한다.
장소를 조금 이동해서 이태원으로 가보자.
이태원엔 나의 젊음과 월급과 금요일 밤의 3분의 1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자카야 '천상'이 있고 '에이타로'와 '이츠모'라는
이자카야가 있다. 이 세 곳 모두 새콤한 초고등어회와
튀김이 대표 메뉴. 천상은 식사메뉴부터 생선회까지
두루두루 맛있지만 단골들만 아는'오무소바'(메뉴에는 없다)를
꼭 주문해서 먹어볼 것. 결코 잊지 못할 환상의 맛이다.
따뜻하게 데운 사케에 두부와 배추만 넣고 맑게 끓여낸
온두부의 매치는, 요지야마모토의 담백한 화이트 셔츠 같은
맛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츠모는 나가사키식 짬뽕과
가자미 탕수육, 카레맛 닭날개 튀김이 압권이다.
에이타로는 풍월이라는 전설의 이자카야가 전신이었는데
이름이 바뀐 후로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있어 아쉽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있는 동부 이촌동엔 '미타니야'와
'아지겐'이라는 이자카야가 있다.
미나타야는 덮밥종류가 맛있는데 일반적인 덮밥 말고,
짭쪼름한 연어알이 들어간 연어알 덮밥을 먹어볼 것.
손님의 대부분이 일본인인 아지겐은 돈까스를 튀겨내는 내공이
보통이 아닌데 이 튀김 종류들이 술을'부르는' 안주다.
이자카야 같은 '아기자기한' 음주문화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
홍대앞에도 썩 괜찮은 이자카야가 생겼다.
극동방송국 가는 길 언덕 언저리에 위치한 '천하'는 술맛나는
분위기에 솜씨좋은 주방장이 만들어주는 음식과 저렴한 가격이
사랑스러운 곳. 이곳 역시 신선한 초고등어회와 각종 꼬치구이들이
대표메뉴이고 따뜻한 사케와 곁들이는 일본 라면도
한끼 식사로 만족스럽다.
하지만 이 집에선 타코 와사비(와사비에 절인 문어젓갈)에
생맥주를 꼭 마셔야 한다. 이집의 타코 와사비는
'나는 왜 맥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사색을 하게 만드니까.
산울림 소극장 뒤편에 숨어있는 간판도 없는 이자카야인
'와비사비'도 놓치지 말 것. 이 집은 여느 이자카야와는 달리 8시면 영업이 끝난다. 그러니 술보다는 주로 식사를 하려는 손님이 많은 편. 두부스테이크와 낫토 정식, 생강 삼겹살 세트가 맛깔스럽다.
또 따뜻하게 쪄낸 푸른콩이 맛있는 압구정동의 '하이카라야'는
'컬트적인'메뉴들이 포진해 있다. 참치크림치즈육회, 날계란에
찍어먹는 다이쇼풍 스키야키, 두부 찹쌀떡 튀김 같은 일본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독특한 메뉴들을 자랑한다.
천상의 온두부가 요지야마모토라면 하이카라야의 믹스메치된
아방가르드한 메뉴들은 콤 데 가르송 같다.
그밖에도 식도락가들의 입소문 코스인 명동의 '가츠라',
새로운 이자카야 지역을 형성하고 있는 숙대 입구 근처의
'기테야'와 '즈쿠시'도 이자카야 마니아라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
기테야는 뉴욕과 도쿄에서 요리를 배운 여주인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닭살을 넣고 빚은 닭날개교자와
심플한 카레라이스가 맛있지만, 단골들은
"안주는 아무거나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이 집을 제대로 즐기는 주문법이라고 귀띔한다.
이렇듯 이자카야에는 만원 안팎의 가격대로 여러가지 음식들을
맛볼 수 있고, 굽거나 날것 그대로 조리하는 안주들이 대부분이다.
이자카야의 대표메뉴인 생선구이나 꼬치, 두부, 낫또같은
음식들이야 말로 우리가 그토록 목청 높이던 '웰빙푸드'나
건강식 그 자체다. 게다가 모든것이 심플하고 조금 느리다.
바로 그런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이자카야를
찾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고백하건데, 한때 나는 부어라 마셔라 하는 '무모한' 음주문화의
선봉장이었다. 하지만 각 동네마다
단골 이자카야를 만들어 놓은 후부터 진정으로 술을 즐기게 되었다.
낫토나 두부, 생선같은 좋은 음식들과 함께 따뜻한 사케를
천천히 음미하는 즐거움을 알았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같이 술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니 사람들의 말 속에서 가끔
인생의 해답이 들릴 때도 있었다.
우리가 술잔을 나누며 주고받는 수많은 고민, 웃음, 담론,
논쟁, 철학, 농담, 사랑에 대한 상념들이 곧 '삶'이 아닐까.
그러니다이코도로 오너의 말처럼,
음식과 술이란 '사람'과 함께 먹고 마셔야 하는 법이다.
사케 한잔에 너무 큰 의미를 둔다고? 하지만 어쩌랴.
그게 바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사소한 즐거움인것을.
INFO
다이도코로 02-792-7000
천상 02-749-2224
에이타로 02-794-0078
미타니야 02-0797-4060
이츠모 02-796-8743
아지겐 02-790-8177
와비사비 02-324-6669
하이카라야 02-543-8351
가츠라 02-779-3690
기테야 02-795-2868
- HARPER'S BAZAR September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