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개최 중인 국제노동기구(ILO) 아시아·태평양 총회가 정부와 노동계의 대립으로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30일 오전 이상수 장관이 기자들과의 조찬간담회에서 "노사관계 법ㆍ제도 선진화 방안에 대해 노사정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9월7일께 입법예고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노동계가 환경이나 안전 분야 등 직무에 따라 노조 전임자를 인정하는 방안과 필수공익사업장의 직권중재를 폐지하되 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해 대체근로를 허용하고 최소업무를 유지토록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해 노사정이 논의를 하고 있다"고 로드맵 논의 내용을 일부 소개했다.
이 장관이 밝힌 사안중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와 복수노조 문제, 공익사업장의 대체근로 허용 등은 사실 노사간 합의를 이루지 못해 이미 협상 결렬 가능성이 점쳐져 왔던 것들이다. 노사정은 그동안 수 차례에 걸친 노사정 대표자회를 통해 로드맵의 전체 40개 과제 중 25개 과제에 대해 의견접근을 봤으나 이들 핵심 쟁점에서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잖아도 정부 당국의 입장이 강경해서 로드맵의 성과를 기대하지 못하던 차에 노동부 장관의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 입법예고 강행 방침을 밝힘에 따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울고 싶던 차에 뺨맞았다는 듯이 강력히 반발했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30일 ILO 아태총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노사 로드맵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인 가운데 이상수 노동부 장관이 로드맵 논의 내용을 공개하고 입법예고 강행방침을 밝혔다. 장관이 아태총회 중에 공개적으로 노동계 의사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된다. 이는 정부가 노동계를 대화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 바, 한노총은 총회에서 전면 철수할 것이다"라는 성명과 함께 총회에서 전격 철수했다.
국제행사 중에 주최국 노동계 대표 중 하나인 한국노총이 ILO 총회에서 전면 철수를 결정한 것은 상당한 파문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이번 아태총회는 당초 작년 10월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 노총이 비정규직법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개최 시기가 올해로 연기됐기 때문에 이번 사태는 두고두고 망신살이 뻗치게 될 것 같다. 잔치판을 주최측이 깼다는 비난을 의식한 듯 이용득 위원장은 “한국노총의 전면 철수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이상수 장관의 행동 역시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정부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고 총회 철수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또한 "정부가 노동조합을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앞으로 대화와 협상을 있을 수 없다"면서 2일로 예정된 노사정대표자회의 거부 여부에 대해 "내일이나 모레 한국노총 산별대표자회의를 거쳐 거부 여부를 최종 결정할 것이며, (이 같은 행동과 관련해) 노동계 측의 또 다른 대표인 민주노총과 사전에 논의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한국노총의 총회 철수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예정대로 9월1일까지 열리는 ILO 아태총회에 참여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혀 일단 더 큰 파장은 막았다. 그렇지만 민주노총 관계자는 "ILO 일정은 원래 계획대로 소화할 예정이지만 정부가 로드맵을 일방적으로 입법예고하면 총파업 등 강경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향후 노사관계가 험난한 국면을 맞이할 것이 분명해졌다.
ILO 아태총회는 아시아, 태평양지역 노사정 대표들이 국제 노동 현안을 논의하는 국제회의로 지난 29일 부산 벡스코(BEXCO)에서 개막되어 내달 1일까지 진행된다. 결국 국제회의 손님을 초청해 놓고 주최측은 집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한 상황, 내지는 잔치를 벌여 손님을 초대해놓고 주인들이 싸운 꼴이니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는데....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국제사회 노사정 대표들이 모인 공식 석상에서 한국이 ‘노사관계 후진국’이라는 점을 세계 만방에 과시한 쾌거(?)였다. 그것도 노사가 유례없는 협조적인 방법으로 試演한 것이다. 협조적 노사관계를 그다지도 강조하더니 결국 협조적인 모습을 보인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한 번의 협조를 끝으로 향후 노정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될 것으로 보인다.
3일 밖에 안 되는 국제대회 기간도 참지 못하고 쌈박질이나 해서 잔치판을 난장판을 만든 것은 그만두더라도 한노총의 노사정 대화 불참으로 당초 노사정 대표자 회의를 통해 내달 4일까지 노사 로드맵 합의안을 도출할 것으로 기대되던 노사 로드맵에 대한 막판 합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은 정부의 노동정책에 치명적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그동안 ILO 아태사무소가 있는 태국 방콕에서만 열렸던 아태총회를 국내에 유치함으로써 국제 노동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크게 올라갈 것이라고 홍보해왔으나 한국노총의 철수로 총회 초반부터 머쓱해졌다.
또 각종 노동현안을 사회적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파업, 행사장 철수 등 실력 행사로만 해결하려는 우리 노동계의 후진적인 모습도 국제사회에 또 한 번 드러낸 것도 볼썽 사납지만 이번 사태의 파문이후 노정간 갈등은 더욱 격화될 전망이라는 점에서 정부와 한국노총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주된 책임은 정부 측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로드맵 입법예고 강행 방침은 이미 공개된 상황이어서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장관이 `막후 협상' 내용을 일부 공개한 것은 협상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타협과 설득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잔치 분위기를 빌어 공개적인 자리에서 압박하여 해결하려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현 정권의 아마추어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동부는 이같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대해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이번 ILO 아태총회의 주최자 중 하나인 한국노총도 손님(국제 노동계 인사)을 남겨놓고 감정적으로 돌출 행동을 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이용득 위원장은 국내 노동계의 수석대표로 역할을 수행하던 중이어서 ILO 폐막일인 9월1일까지 우리나라는 노동계 수석대표 없이 남은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게 됐다.
한국노총이 총회를 떠날 때 민노총이 자리를 지키는 게 그나마 가상타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도 속내가 따로 있음을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우선 한국노총과는 달리 총회철수를 하지 않은 민노총 역시 총회전부터 비난거리를 자초한 면이 없지 않았다. 총회전 포항건설노조 조합원 고 하중근 씨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등에 대한 문제해결에 대해 정부가 빠른 시일 안에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내 놓지 않을 경우 29일부터 열리는 ILO 아태총회에서 쟁점화시킨다는 방침을 천명하며 잔치판을 뒤집으려는 행태를 보인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건 전주곡에 불과했다. 민주노총을 안다면 그들이 총회 철수를 하지 않은 이유를 찾으려 했어야 했다. 민주노총은 1일 "한국의 노동 현실은 ILO정신과는 전혀 상이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정부를)노조 탄압과 노동기본권 억압에 대해 ILO에 제소했다"고 밝힘으로써 결정타를 메긴 것이다. 총회 폐막을 앞둔 이날 오전 ILO아.태지역총회가 열리는 부산 해운대 벡스코(BEXCO)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서 민주노총은 정부가 한 것과 똑같은, 아니 더욱 비열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정부에 역공을 가했다. "불안정한 노동에 내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 노조로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대화를 거부당한 채 사무실 폐쇄와 공무원노조 조합원 탈퇴 강요가 횡행하는 이 현실 등이 바로 ILO아태지역 총회를 유치한 한국정부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특히 (한국정부는)전국의 공무원노조 사무실에 대한 폭력적 강제 폐쇄 조치는 ILO총회에 개의치 않고 자행되고 있다. 행정자치부 장관은 모든 공무원노동자들에게 공무원노조를 탈퇴할 것을 강요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민주노총은 "지난 3월 ILO는 한국정부에 대해 공무원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법 개정을 권고했다. 민노총과 공공연맹, 공무원노조는 다시 한번 한국정부의 노동 탄압에 대해 결사의 자유 원칙 침해로 ILO에 제소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 ILO 제소는 한국정부에 대한 공공부문을 비롯한 한국 노동자들의 경고이며 또한 포고문이다. 공공연맹, 공무원노조와 함께 국제노동계와 연대해 헌법과 국제노동기준으로 보장된 노동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히 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쟁을 선포했다.
윤영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등 4명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ILO측 관계자들을 방문, 정부의 노조탄압, 공무원노조 직장 폐쇄 등의 내용이 담긴 정부 제소 자료를 전달했으며, ILO측 관계자는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한국정부가)가 제소됐다. 제소자료는 공식 제소 절차와 심의를 거치게 된다. 이와 함께 한국정부의 의견 등을 검토한 뒤 위원회가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사정 대화를 통해 원활히 해결되길 바란다"고 덧붙이는 ILO관계자의 말이 조롱으로 들리는 것은 나뿐일까.
그렇게 축제는 끝이 났다. 어느 잔치집치고 싸움 없이 끝나는 거 봤느냐는 말이 그냥 있었던 게 아닌가 보다. 노정관계는 이래서 안되는가 보다. 아무리 선진적이라 해도 노정관계는 그게 한계인 것이다. 그래서 사용자측이 빠진 자리든, 사용자측이 있는 자리든 노사관계에 정부가 끼면 이 모양이 되기에 정부는 제3자라고 하는가 보다. 순진한 정부(?)가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민주노총까지 칼을 들이댄 마당에 더 이상 무슨 대화가 있겠는가?
9월2일로 예정된 제10차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로드맵에 대한 노사정 간 이견을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조급증에 얽매여 도발적 태도를 보인 점이나 그것을 빌미로 한국노총이 국제회의 중 철수한 것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상대방을 안심시킨 뒤 비수를 꽂아넣어 숨을 끊은 민주노총의 행동은 전술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야비하고 치졸한 작태라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총회는 첫날부터 파행운영이 불가피했고 마지막에는 파국으로 끝이 났지만 노정 어느 쪽도 진정 그런 것에 관심이나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막바지 노사관계 로드맵 협상을 앞두고 있는 노정 관계 역시 그저 노사관계에 있어서 흔히 나타나는 정도의 경색이 아니라 그 자체가 치명적 위기에 처한 게 아닌가 싶다.
결국 당사자간 대화와 타협이 기본이 되어야 할 노사관계에 정부가 지나치게 깊이 개입하여 노정관계라는 구시대적 행태를 만들어 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력 행사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는 구시대적 행태까지 가미된 양대노총의 작태가 맞장구를 침으로써, 국제 신인도 하락은 물론 한국 경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결국 노정 양측 모두 중요한 손님을 초대해놓고 그 판을 악용해 자기 측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