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고 있는’ 9.19 공동성명의 미래
- 위기의 악순환 구조를 평화의 선순환 구조로 바꿔야 한다. -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다시 중국을 찾았다. 힐의 방문이 6자회담 재개와 UN 안보리의 대북 결의안 이후 대북 제재를 중국과 협의하기 위한 방중이라는 언론의 보도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힐의 이번 움직임은 협상의 상대국인 북이 ‘제재는 곧 전쟁’이며, ‘금융제재 해제 없이는 6자회담에 절대 복귀할 수 없다’는 북 최고위층의 발언이 수차례 확인된 상황에서 ‘외교적 노력을 다했다’는 형식적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4강이 한반도 당사국인 남북과 오랜 시간의 협상을 통해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9.19 공동성명은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계속 몽우리진채 기다리고 있다.
9.19 공동성명의 역사적 의미
북핵 공방과 북미 관계 정상화라는 의제로 기싸움을 벌이던 북과 미국은 중국의 적극적 중재와 한국의 평화적 해결 노력을 지렛대로 베이징 조어대에서 회담에 들어가게 된다. 6자회담이라는 거창한 이름이었지만 처음부터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북핵 공방의 역사가 단순하지 않듯, 전쟁 이후 적대적 긴장관계에 있던 북과 미국이 국제 외교에서 최고의 정치적 과제를 가지고 타협하기란 쉽지 않았다. 1년 이상 길어지던 회담은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원치 않았던 미국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통한 국제사회의 화려한 복귀를 원한 북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2005년 9월 19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넓게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상호존중과 평등정신에 기반한 6개항의 합의문을 공동성명 (joint statement) 형태로 발표하게 된다.
2002년 10월 3일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의 방북에 이어 같은 달 17일 미국이 북의 우라늄 농축 핵무기계획을 공표한 이후 35개월간 대결과 대화, 갈등과 협상으로 점철된 제2차 북핵 공방을 연착륙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공동성명은 총 6개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항에 관련 당사국의 실천 행동이 명기되어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복잡하고 민감한 현안이 많지만, 일단 해결 가능한 문제를 동시 행동의 원칙에서 풀어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북은 핵을 폐기하고, 한국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계속 지지하며, 미일 양국은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별도의 포럼으로 논의하면서, 동북아 다자간 경제, 안보협력을 지향해 나가자는 것을 합의하였다.
지난 1년, 불신과 좌절의 북미 공방
60년 정전의 역사와 한반도의 위기를 결정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9.19 공동성명은 회담 직후 크리스토퍼 힐의 종결 발언과 함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한다. 북의 완전한 핵 폐기와 조속한 NPT(핵확산금지조약) 복귀, 그리고 IAEA(국제원자력기구) 안전조치 이행을 촉구하면서, 미국은 핵문제와 별개로 인권, 생화학무기, 테러리즘, 그리고 불법행위 등을 논의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의제 확장을 시도한다. ‘상호존중과 평등정신’이라는 공동성명의 전제를 훼손할 수 있는 이러한 발언이 발표된 다음날, 북은 공동성명의 ‘적절한 시기 경수로 제공 논의’ 부분의 모호성을 활용하여 이후 벌어질 북미간 치열한 협상 과정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재무부는 몇 일후 BDA(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 관련 계좌를 동결해 버린다. 북의 위폐 제조, 유통에 혐의를 두고 전격적으로 취해진 조치는 예상대로 북의 강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이런 와중에 9.19 공동성명의 이행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5차 6자회담은 북미 양국의 불신관계를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북은 미국의 금융제재가 상호 존중과 평등 정신에 기반한 공동성명 위반이라고 주장했고, 미국은 재무부가 독자적으로 진행한 일로 6자회담과 별개 문제라고 맞받았다. 별 소득 없이 끝난 5차 6자회담 이후, 북은 미국에 6자회담과 별도로 금융제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양자회담을 요구하며 2006년 3월 7일 뉴욕으로 날아간다. 이 자리에서 북은 ‘위폐 제조, 유통 혐의가 있다면 증거를 제시해 달라. 관련자를 처벌하고 결과를 미국에 전달하겠다.’고 밝히며, 유연한 자세를 보였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위폐 제조, 유통 혐의를 인정하고 관련 장비를 미국에 넘기라며 북을 압박했다.
이후 4월에 도쿄에서 열렸던 동아시아협력대화(NEACD)는 6자회담 당사국이 모두 모이는 기회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당사국들이 해법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와 김계관 부상은 서로 악수 한 번 하지 않고 헤어졌다. 이후 장외에서의 치열한 외교적 언술 공방이 펼쳐졌고, 미국은 금융제재 강화, 인권문제 확대 제기, 태평양에서의 연이은 대규모 군사 훈련 등으로 북을 압박하였고, 북미관계 정상화에 의지가 없다는 것을 최종 판단한 북은 7월 5일 미사일 시험 발사를 통해 미국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게 된다.
6자회담 재개를 통한 9.19 공동성명 이행. 가능한가?
미사일 시험 발사 이후, 미국과 일본의 요구로 통과된 UN안보리의 대북 결의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기폭제가 된다. 미국의 안보리 결의안 동참 요구에 굴복한 중국은 북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관계가 서먹해 진 상황이며,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인도적 지원 중단 결정을 내렸던 한국은 남북관계 경색 상황을 맞게 되었다.
미국은 ‘악의적 무시’ 정책으로 일관하며 금융제재, 인권 공세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외교적 해결 없이 북이 스스로 자연사(自然史)할 때까지 상황을 방치하겠다는 것이다. 북의 미사일 시험발사에 대응해 요격미사일 시험도 마친 상황이다. 대북 압박을 지속하겠다는 미국의 속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북은 ‘추가적 자위력’을 높여 나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핵실험설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으며, 이에 대응한 전면적인 대북 압박을 미국과 일본이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처럼 북미간 핵실험설과 금융제재, 그리고 요격미사일 발사 등의 공방은 현 시기 한반도가 1953년 정전 이후 ‘총성 없는 전쟁’ 중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의 위기상태임을 말해준다. 게다가 이러한 악화일로는 그 출구의 부재로 인해 ‘최절정의 위기’에 다다를 수도 있다.
한반도의 위기는 주변국들이 외교 테이블에서 쉽게 내릴 수 없는 남북한 민중의 생존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 위기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한 한국 정부의 과감한 결단과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현재 한반도는 위기지수가 높아지고 있기도 하지만, 역으로 평화지수를 높일 수 있는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 미국의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패배가 예견되는 가운데 의회 내의 대북 정책 변경 목소리 증대, 차기 총리로 유력한 일본 아베 신조의 대북 직접 상대 의지, 북의 수해 위기 상황에서 남측의 지원 재개, 추가적인 미국의 대북압박 정책에 대한 중국의 확실한 반대 입장 등은 실타래를 풀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문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해 준다.
한국 정부는 이 틈새를 활용해야 한다. 먼저 상황 악화 방지를 위해 남북 관계를 시급히 복원해야 한다. 특사 파견, 인도적 지원 재개, 남북 대화 복원 등을 활용하여 남북 신뢰 지수를 높여야 한다. 또한 6자회담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는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여 미국의 추가적인 대북 압박 정책을 반대하는 공동의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의 유연한 대북 정책 변경을 아주 분명히, 단호하게 요구해야 한다. 문제를 풀어 가는 과정은 9.19 공동성명에서 확인한 ‘동시행동’ 원칙을 잘 활용해야 한다. 금융제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미 양자 협상의 시작과 6자회담 재개 선언을 동시에 진행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지수를 높여가야 한다. 가능성을 유쾌한 현실로 바꾸는 신뢰감 있는 정치외교 행위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2006.09.07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