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보는 외국인이 내 앞에 나타나서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어온다면 두말하지 않고 그의 앨범을 손에 쥐어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음악이 우리나라 최고이기때문이 아니다. 음악감상이라는 것은 어쨌건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취미생활이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수는 또
다른 누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객관적인 입장에서 살펴본다고 하여도
이승환의 음악생활과 뮤지션쉽은 동시대의 어떤 뮤지션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많은 부분에서 압도적이리만큼 우수하며 안정된 방향성을 취하고 있다.
이승환의 데뷔는 혁신적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눈길을 끄는 구석은 있었다.
유산을 가불해 스스로 제작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1집 앨범은 당시의 발라드
앨범群에서는 유난히 세련미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물론 그 작업은 그의 오랜
파트너이자 작곡가이며 훌륭한 작사가이기까지 한 오태호의 영향이 컸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작곡가와 가수 이전에 친구이자 동료였으므로 데뷔 앨범
이후 이오공감의 앨범까지는 사실상 그 둘의 조인트 앨범적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음악도 음악이었지만 라이브 무대의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 무명이었음에도 이승환의 라이브 무대에는 유난히 사람들이 넘쳐났는데,
그의 무대를 지켜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제2의 이승철이라는 평가를 서슴치 않았다.
그런데 사실상 제2의 이승철이라는 말은 당시 솔로가수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평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2집 역시 순조로운 인기를 이어갔다. ,
이 계속 히트를 기록했고, 당시 한창 인기를 모으던 신애라의 목소리를 앨범에서들을
수 있다는 것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저 발라드였을 뿐이었던 앨범이
1집이었다면 보다 다양한 장르와 특히 록에 대한 관심이 엿보였던 앨범이
2집이었다. 1집만큼 밀도 있는 구성은 아니었지만 을 리메이크하는 등
음악적인 시도와 욕심이 두드러진 작품이었다. 그런 다양한 시도에 대한 욕심은
오태호와의 조인트 앨범인 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컨셉구성의 독특한 아이디어도 놀라웠지만 발라드와 록을
넘나들며 뛰어난 작곡실력을 선보인 두 사람의 능력은 보통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미 수많은 고정팬을 확보한 이승환은 93년 [The show]라는
라이브 앨범을 선보였고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라이브의 귀재란 칭호 역시 이
시기의 활약에 근거해 나온 것이었다.
1집과 2집, 이오공감등의 앨범이 결코 음악적으로 뒤떨어졌다는 말은 아니지만
93년 발표된 그의 3집 [My Story]는 1,2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퀄리티를 가진
작품이었다. 발라드는 이미 단순한 한국형 마이너 발라드가 아니었고, 외국의
음악과 다를바 없는 컨셉,곡구성,편곡 등이 시도된 음반이 바로 이 앨범이었다.
작곡가 김광진이 만든 최고의 곡으로 기록될 를 타이틀로 대중성과
음악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이 앨범의 또 다른 특징은 오랜 음악적 파트너인
오태호 대신에 공일오비로 주가를 높이던 정석원과의 작업을 시도했다는 점이었다.
명백히 히트공식으로 자리잡았던 오태호 대신에 음악적 색깔의 차이가 분명해
보였던 정석원과의 작업을 택한 것은 이승환으로서는 모험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 둘이 작업했던 곡은 과 등
데이빗 포스터 스타일이 농후한 두 곡 뿐이었지만 그 작업에 대한 팬들의 만족도는
대단했다. 당시 이승환은 진보적인 스타일을 가진 정석원에게 매료되었고 정석원은
공일오비의 객원가수들과는 달리 어떤 곡이던 소화해 낼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진 이승환의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이승환은 그의
최고의 앨범이 될 4집 앨범에 메인 프로듀서로 정석원의 이름을 올린다.
95년에 발표된 그의 4집앨범 [Human]은 어떤 의미에서건 '놀라운' 작품이었다.
정석원과 함께한 이 앨범에서 그는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장르를 시도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작업을 해외에서 마무리 짓는 등 작업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3집앨범까지 남아있던 '한국적'인 스타일은 없어지고 대신 영미의 팝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웠다. 편곡은 실로 거대해졌다. 의 멜로디는 사실상
소박한 것이었지만 이 노래는 가요 역사상 가장 스케일이 큰(누구처럼 몇십인조
현세션을 무대에 끌어올린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발라드였다. 빅밴드를
기용한 스윙 넘버이 있는가 하면 70년대 디스코의
전성기를 떠올릴만한 , 프로그레시브 록 등이 바로
우리나라 가수 이승환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발라드 가수의 외도','백화점 확실히 [Human]은 이승환이 보여줄 수 있는 컨셉과
장르상의 '끝'에 있던 앨범이었다. 이 후 발매된 5,6집은 어쨌건 [Human]적인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는 5,6집에서
비슷한 다른 곡들로 대체되었다. 여러 가지 퀄리티와 노하우는 일신되었지만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97년 발매된 5집앨범 [Cycle]이 평론가들이 상반된 평가를 얻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Cycle]은 결코 [Human]에 비해 모자란 앨범이 아니었다.
새롭게 프로듀서로 기용된 유희열은 많은 평론가들로부터정석원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차세대 주자로 거론된 신진 뮤지션 중에서도 핵심 인물이었고
(정석원 스스로도 김동률과 유희열, 정재윤을 차세대 주자 3인방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Human]의 구조를 넘겨받은 곡 하나하나의 완성도도 결코 뒤지는 것은 아니었다.
을 연상시키는 을 타이틀로 내세우지 않고 잔잔한 발라드/합창곡인
을 내세운 것도 이승환의 면밀한 계산에 이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미 [Human]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Cycle]은
결코 '놀라운'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보다 새로운 음악적 컨셉을 모색하는
이승환의 노력은 정규 앨범의 발매를 늦춘 대신 두 장의 비정규 앨범을 만드는데
모아졌다.
팬서비스 차원으로 만들어진 [유치뽕]과 발라드 곡들의 리메이크/ 컴필레이션작인
[His Ballade]가 그것이다.
[유치뽕]은 이 당시 그의 작업파트너로 새롭게 합류한 MGR(박용찬)에 영감을 얻은
모던한 댄스 뮤직 앨범이었고, [His Ballade]는 그와 유희열이 새롭게 선보이는
편곡법들을 정규앨범에 앞서 실험한 작품이었다.
음악적으로 손색은 없는 작품이었지만 이 앨범의 영향은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들의 의도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고,
정규 앨범이 늦춰지는 것에 대해 그의 '한계'를 의심하는 말들이 오갔다. 물론
그것은 '기우'였음이 드러났지만..
99년에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정규작인 [The War in Life]는 적어도 사운드적
퀄리티에서 [Human]을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앨범이었다.
편곡의 치밀함과 다양함은 단연 독보적인 것이었고 새롭게 시도된 '동양적 정서'역시
유행을 선도하는 측면이 엿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앨범을 통해 그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새로움'에 대한 부담이었다.
앨범의 여러곡들이 예전의 곡들과 그저 비슷할 뿐이라는 우려가 쏟아졌고,
앨범에서 내세운 컨셉의 설득력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나날이 늘어만 가는
사운드적 완성도는 그에게는 만족스러운 것이었지만 팬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좋게 말하면 돋보이는 앨범이었지만 그저 그만이
만족할 수 있는 앨범이 된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는 모든 우려와 기대를 무시한채(적어도 겉으로는) 자신만의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무적전설]이라는 ego-centric한 제목의 라이브 앨범이
발매되었고 그의 모든 작업을 총정리하는 초호화 팬서비스 종합선물세트인
[Long Live Dreamfactory]는 마치 무슨 '왕조'를 연상케 할 정도로 자신만만하다.
단언하건데, 앞으로 그의 어떤 정규앨범도 형식적으로 난해함이나 파격성을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공일오비의 독보적인 시도나 신해철의 파격성이
대중들에 의해 어떻게 철저히 외면당했는지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지나친 실험성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이승환이라는 뮤지션에게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그는 알고 있다.
그의 존재자체가 이미 '독보성'을 가지고 있음을. 그의 타겟은 어디까지나
40여만명 이상을 육박하는 그의 '고정팬'이다. 그는 결코 팬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