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연한 사실은 남자들 중 팔할이 '옷을 못 입는다' 는 거다.
바지 가랭이는 두개고 윗도리에는 구멍이 세개니까 어디에 뭘 넣어야 하는지는 알지만, 그것말고는 모르는 부류도 꽤 된다. 옷은 알몸을 가리는 용도라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안 했을 생각을 하는 사람, 아직 있다. 꽤된다. 여기는 한국이니까. 한국이 어디가 어때서?
기초가 없다. 온전히 한국적인 것도, 제대로 격식을 갖춘 서양의 것도, 없다. 서양의 궁전을 차용한 예식장이나 러브호텔 건물을 떠올려보라. 그런 건물이 30년 전 이야기인가? 아니다. 지금도 엄청나게 많이 짓고 있다. 패션? 스타일? 다를 바 없다.
남자들이 무언가 꾸미고 단정하는 일이 조금 자연스러워지긴 했다.
메트로섹슈얼입네, 해서 치장하는 남자들에 대한 시선 자체가 너그러워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이 없다는 건, 언제고 고꾸라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과 같다.
화이트 셔츠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와장창 꽃무늬를 입고 '나는 최신 유행 셔츠를 입은 메트로섹슈얼' 하는 건 구구단 못 외우고 적분 문제 답을 찍어 맞췄음을 자랑하는 것과 비슷하다.
수트를 입었을 때, 양말 색깔은 바지에 맞춰야 할지 구두에 맞춰야 할지 아니면 넥타이에 맞춰야 할지 모르면서 구두 앞코만 거울이 되도록 닦아 신는 판이라면 스타일에 관해서는 아예 함구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잔소리를 해야겠는 건, 해도 너무한 남자들 때문이다.
두산 타워 현관에서 출근하는 남자들을 가만히 살펴본다. 거진 수트 차림이다. 하지만 수트와 셔츠를 맞춰입은, 하다못해 넥타이색과 수트색을 맞춘 남자도 드물다. 수트색깔의 구할은 회색이다. 진한 회색,엷은 회색, 까실까실한 느낌의 회색, 쥐색, 검정에 가까운 회색...
셔츠와 타이를 보면 저절로 입이 다물어진다. 짜기라도 했나? 셔츠도 죄다 회색이다. 가끔 파란색이 있다. 가당찮기는 역시 마찬가지.
타이에 이르면 수습이 불가능이다. 무언가 알수 없는 색깔이 뒤엉켰는데, 금도끼 은도끼풍의 반짝이는 섬유는 왜 그리 섞는 걸까? 비즈니스맨의 행동강령 '상대에게 자신감있게 보여라' 의 방편인걸까? 그 상대가 어떤 심미안을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스타일 점수를 주자면 빵점이다. 펄럭거리지 않게 끝에 네모난 금방울을 매단 타이는 말할 가치도 없다.
요컨대 색깔은 너무 우중충하고 스타일은 혼수상태다. 그건 점잖은 것과도 다르다. 또 셔츠 자체의 퀄리티를 보면 셔츠 밑으로 훤히 비치는 러닝 셔츠가 먼저 박차고 나온다. '멋낸답시고 땀에 젖은 셔츠를 입는게 스타일인가?' 라고 묻는다면 셔츠를 갈아입는게 스타일이라는 답이 있다. 무조건이다. 셔츠속에 러닝셔츠를 입으면 안된다.
그리고 벨트는 왜 배에 차는 걸까? 짐작은 간다. 짧은 다리를 길게 보이려니 바지춤을 올리는 거다. 그때 엉덩이 사이로 빨려들어간 바지 뒷자락은 어떻게 되나? 텍사스에 살고있을 존스 할아버지를 떠올려보라. 거대한 배를 가졌어도 그는 청바지를 입고 배 밑에 밤색 가죽 벨트를 찬다. 그게 맞다.
구두는 또 어떻고? 대부분 사각형 앞코다. 저어새 부리도 아니고 수트의 각진 느낌을 사각형 앞코로 마감하니 로봇이 따로 없다. 앞코는 둥근 게 기본이다.
답답한 마음으로 두산타워를 벗어나면 한국의 패션 판타지가 24시간 지속된다는 동대문 시장이다. 서울 스트리트 패션의 한 정점을 이루는 곳이지만 이곳에도 문제적 남자들은 많다.
속칭 '동대문 보이 스타일'은 디스퀘어드와 돌체&가바나적 뉘앙스에 아베크롬비나 일본 스트리트 패션, 그리고 각종 빈티지풍과 저급한 액세서리가 맞물려 양푼비빔밥으로 아수라가 된 스타일이다.
그들의 차림은 차라리 공식이다.
주머니가 너덜너덜한 카고바지, 프린트가 요란하고 피팅이 심한데다 목부터 'V' 자로 끝도 없이 파내려간 티셔츠, 쥐며느리처럼 땅에 찰싹 붙은 스니커즈,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차앙을 구부른 트러커스 캡, 고글형 선글라스, 거기에 벨트색까지 두르면 완벽한 '동대문 보이'가 탄생한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김봉법은 이렇게 말한다.
"잘라 말하면, 자신을 잘 몰라서 그래요. 대문짝만한 로고가 박혀
으면 자신이 그 브랜드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마음은 일면
귀엽지만, 생각해보세요, 다 큰 남자애가 '나는 구찌 너는 아르
마니' 이러는게 패션이고 스타일이겠어요?"
제일 평화 시장 2층은 동대문식 트렌드가 시작되는 곳. 남성복도 꽤 있다. 그러나 그 디자인의 무자비함이란, 코는 누구 걸 갖다 붙이고, 눈은 누구 걸 갖다붙인 성형수술과 비슷하다. 절제라고는 없다. 심지어는 그곳의 판매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거 디스퀘(디크퀘어드) 이미(이미테이션)인데요. 깔별(색깔별)
로 신상(신상품) 다 나왔어요. 조인성이 입었던 거 그대로 카피 떴
어요(했어요)."
그럴 때 쉰 시금치 토장국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는 걸 그들은 모르는 걸까? 당장의 문제는 부지기수인데 해결책을 짚어보자니 까마득한 일, 지금 서울 남자들의 옷 입기도 여기에 속한다.
의 강지영 패션 디렉터는 말한다.
"돈 없고 괜찮은 몸매 없고 감각 없는건 다 두번째 문제에요.
문제는, 취향이 없다는 거예요. 어려서는 엄마가 사다준 브렌따노
와 이랜드, 커서는 아내가 사다준 파크랜드와 울시를 '받아입는' 처
지에 취향이 어디서 나오겠어요. 그러니 옷 좀 입는다는 사람들도
탁구경기 관중처럼, 핑퐁 핑퐁 움직이는 '유행의 공' 따라가느라 목
부러질 지경인거죠.
셔츠 하나를 입어도 버튼을 몇개 여느냐에 따라 그토록 달라지는 것
이 스타일이지만 취향이 없고서는 다 남의 나라에서 지진 나는 소리
죠. 막막하면 스타일의 아이콘을 한명 정해서 그의 옷차림을 따라하
는 것부터 시작하면 돼요. 티셔츠를 크리스 마틴처럼 입고, 셔츠는
휴 그랜트처럼, 진팬츠는 루이스 가렐처럼 입는, 그런거죠. 이윽고
훔친 취향도 내 것이 되는 날이 오겠죠. 단 그게 양질의 것이어야 하
겠지만."
또 패션 디자이너 서상영은 자신감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자신감이 없으니까 그렇죠. 옷을 못 입는 사람일수록, '그게 유행이다','이게 유행이야' 같은 말에 약하거든요. 자신에게 어울리는지를 판단할 새도 없죠. 심지어 어떤게 어울리는지도 몰라요.
다만 다른 사람 보기에 무리 없는 것을 택하죠. 가로 스트라이프는
뚱뚱해보인다고들 하잖아요? 그런 건 다 거짓말이에요. 사람마다 다르고 스트라이프에 따라 달라요. 방법은 단순해요. 해보는 거. 시행착오를 겪는거. 반드시 패셔너블할 필요가 뭐 있어요?"
당신의 옷입기에 취향은 있는가? 자신감은? 기초는?
패션계에서 클래식과 스포츠에 정통한 가장 확실한 답을 들려주는
디자이너 랄프 로렌은 말한다.
"당신의 옷장에 감색 수트가 있습니까? 화이트 셔츠는요? 밤색 구두와 양말은요? 흰색 피케 셔츠는요? 베이지색 치노 팬츠는 있나요? 벨트는 어떻죠? 혹 오렌지색 포켓 치프는 있나요? 없다면 대체 당신 옷장엔 뭐가 들어있죠?"
스타일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전제는 하나. 제대로 갖추고 싶다면 말이다.
-GQ 05' 7월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