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울린다. "Hello?" 괜히 머쓱해진다.
하지만 난 용기를 내서 뻘쭘한 분위기를 풍기며 "여보세요?" 라고 되묻고는 나 문기야... 라며 웃음짓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담담하다. 마치 좀 있다가 만날 것처럼... 마치 학교 어딘가에 있다는 듯이... 그녀는 이미 도착한지 하루가 지났다고 한다. 갑자기 전화가 안 온다고 고민하고 신정이와 진욱이한테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던 것이 쪽팔리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군대간 후의 P도 그랬다. 입대한 후 50일만의 전화 통화... 목소리... 설레임을 가지고 무척이나 떨리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수화기를 들고 있던 내게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단조롭고 평화로웠다. 그녀는 반가움보다도 바쁨이 감정의 대부분을 껴안고 있었다. 순식간에 난 좌절했고 그 이후로 그녀에게 전화를 자주 하지 안핬다.
하지만 그녀는 아닐 것이다. 단지 어머님과 만나서이고 너무도 바쁘고 낮설어서 전화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해본다.
담배를 입에 문다. 담배때문에 맨날 목상태가 더 이상 짜증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난 또 담배를 입에 문다. 가끔 이런 날이 있다.
담배가 너무도 잘 타는 날... 몇 번 피운 것 같지도 않은데 순식간에 필터만 남는... 공기가 나 몰래 내 담배를 피우는 듯한 그런 속도의 타들어감... 영화에나 나올듯한 '트드득' 하는 소리가 그럴때면 정말로 들린다. 이런 날이면 담배를 피고도 못내 아쉬워한다. 몇 번 안 빨았는데... 젠장... 왜 일케 담배가 짧은거야...
밥을 먹다가 급한 일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숟가락을 놓으 듯... 똥을 만족스럽게 배설하지 못한 듯... 키스를 하려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의 여건으로 볼에다가 뽀뽀를 한 듯... 그렇게 찜찜한 기분이 든다. 만족스럽지 못한... 그런...
지금은 도서실이다. 내 옆자리의 남자는 불안신호를 보내고 있다. 아까부터 계속 씩씩 거리며 한 책을 5분 이상 보지를 못한다.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책 넘기는 소리로 나의 신경을 계속 거슬리게 한다. 무언가 잘 안 되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씨X, 나가서 책 보던지, 아니면 하나만 조용히 보던지.. 아니면 공부를 떼려치던지... 짱나서 옆에 앉을 수가 없네."
오늘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내키지는 않는다. 맨날 과거만을 이야기하고 과거밖에 공유하지 못한 그런 상태와 그것을 주제로 한 술자리는 언제나 내 취향이 아니다. 맨날 겉도는 이야기, 농담 따먹기, 성적 농담... 지저분한...스트레스는 풀리지만 그것은 베고프니까 우유를 먹어 잠시 시간을 버는 것정도 밖에는 되지 못한다.
지하철을 이용해서 난 안암역에서 부천역까지 가야만 한다. 안암역에서 전철을 타고 동묘역에서 내려 인천행 열차를 기다린다. 이상하게 전철이 안 온다. 이런 퇴근시간에는 전철이 자주와야 정상이고, 좀 안 온다 싶으면 어김없이 도착하는 열차는 만원열차이다. 아우성, 불평, 짜증, 열기, 냄세가 진동하는 가장 지옥에 근접한 장소...
출근열차와 퇴근열차... 그나마 출근은 좀 낫다. 모두 아침의 상쾌한 공기와 작렬하는 태양을 보고 기분을 새롭게 단장했으니까... 왠만한 일을 넘길 줄 안다. 하지만 퇴근은 다르다. 온갖 기운을 다 쏟고 자존심과 몸을 바쳐가며 돈을 위해 살아온 하루가 퇴근하는 이들에게 여유라는 단어를 앗아간다. 그래서 퇴근열차는 더욱 힘든 곳이다. 또 더욱 끔찍한 곳이다.
여하튼 이럴때는 다 쌩까고 좋아하는 책에 푹 빠지는 것이 최고이다. 그러면 어느새, 원하는 역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 난 예전부터 그것이 너무 좋았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목적지인 그 시간의 점프... 그게 좋아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는 항상 책을 들고 다녔다. 결국 병점행 전철을 탔기 때문에 나는 용산에서 전철을 갈아타야만 하였다. 용산에서 동인천역 직통열차를 기다리는데 역시 아무리 시발역이라도 줄이 꽤 길었다. 한 5번째인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전철이 도착하더라...
서서히 줄을 맞춰 들어가고 있는데 어떤 나보다 어리거나 혹은 좀 많다고 판단되는 여성이 날 밀치고 새치기를 하더니 기어코 자리를 잡고만다. 또 그 뒤를 한 아줌마가 따라 나서 또 나를 밀치고 먼저 전철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난 그네들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전철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그 여자아이의 얼굴을 봤다. 그 여자아이는 웃음을 짓고 있다. 양심과 도덕성과 자기 인격을 다 팔아먹고 차리한 자리가 그렇게도 좋았는지 연실 싱글벙글데고 있는 꼴이 입을 찢어서 평생을 웃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 그 여자아이도 책을 들고 있었다. 영어 어쩌구 저쩌구... 책이 저런 아이의 손에 이 전철안에서 잡혀 있는 것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들은 사라졌다. 나의 책으로 인해...
제발 훗날 나의 집에 함께 살 이들이 얼굴이 못 생겨도 좋고, 돈이 없어도, 머리가 멍해도 좋으니, 전철에서 새치기를 해서 엉덩이를 먼저 들이대서 기어코 자리를 잡고 씩 웃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