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분이 과학자들중에 여자들은 공로가 없다고 쓰신 글이 있더라구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것일 뿐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찾아보면 더 많겠지만 제가 아는 여성 과학자들(이름이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업적을 남긴)을 조금 정리해보죠.
헐리웃 섹스 심볼, CDMA 기술의 어머니, 헤디 라마 
요약
Hedy Lamarr. 1914∼2000
"삼손과 데릴라"의 여주인공으로도 유명한 CDMA 기술의 어머니. 20세기 초 헐리웃에서 가장 유명했던, 또 가장 아름다웠던 여배우. 그녀의 화려한 배우 경력에 가려 과학자와 발명가로서의 위대한 업적은 오늘날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음. 그녀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잠수함의 어뢰를 통제할 수 있는 무선 전파 기술을 발명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CDMA 무선 기술의 모태가 됨. CDMA는 오늘날 상업용 무선 기술의 핵심 중 하나가 되었음에도, 라마는 평생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냄.

사실들

오스트리아 출신, 1933년 "엑스터시(Ecstacy)"라는 영화에 출연해 세계적 배우로 발돋움함. "엑스터시"는 여배우가 전신 누드로 출연한 세계 최초의 영화였음.

1937년 헐리웃으로 진출. "Come Live With Me"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등 25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1930-40년대 "헐리웃 최고의 섹스 심볼" "헐리웃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등의 호칭을 얻게 됨.

대표작 "삼손과 데릴라" 출현 당시 모습.

1940년 세계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 전위 예술가이자 발명가였던 조지 앤사일(George Antheil)과 함께 잠수함의 어뢰를 통제할 수 있는 무선 전파 기술을 발명함. 이 기술은 무작위의 전파 패턴을 이용해 여러 단위의 라디오 주파수를 쏘아 보낼 수 있는 혁신적 발명이었음.

헤디 라마와 앤사일은 이 기술을 단순히 실험용이 아닌, 나치의 잠수함에 대항해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시킴. 하지만 이 기술을 받아 든 미국 해군은 이들의 기술이 구조적으로 현실성이 없다며 이용을 거부함.

“주파수 도약(frequency-hopping)”이라는 명칭으로 업계에 소개된 이 무선 기술은 후에 “주파수 도약 확산 대역(frequency-hopping spread-spectrum)”, FHSS라는 무선 기술로 발전함. FHSS의 코드화 된 전파의 조합 수는 수십 조가 넘기 때문에 보안상으로 지극히 안전했으나 그런 기술의 우수성에 불구하고 FHSS는 향후 10여년 간 사장됨.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발했을 때 무선 통신 보안이 절실했던 미군은 FHSS 기술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FHSS 기술은 마침내 미국 정부의 보안 통신 수단으로 이용됨. 그 뒤로 이 기술을 무선 통신에 도입한 미군 측은 이 확산 대역 기반의 무선 기술을 1980년 중반 일반에 공개했고, 이 기술은 오늘날 CDMA로 발전함.

CDMA 기술의 기본 원리를 발명한 라마의 공적은 1997년이 되서야 세상에 알려짐. 그 해 라마는 미국과 모국인 오스트리아로부터 여러 과학기술 관련 상을 받음.

라마는 자신이 발명한 기술 특허로부터 아무 이득도 얻지 못했으며(라마의 특허권은 1959년 종료됐음), 상을 받은 3년 후인 2000년 마이애미에서 쓸쓸히 혼자 숨을 거둠. 수학자, 프로그래머, 해군제독, 그레이스 호퍼


요약Grace Murray Hopper. 1906년 생.
컴퓨팅 역사상 가장 지대한 업적을 남긴 여성이자,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해군제독. 상업적으로 가장 거대한 성공을 거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인 코볼(COBOL)을 탄생시키고 보급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컴퓨터 버그"의 단어를 만든 장본인.

사실들

아버지는 병 때문에 다리를 모두 잘라낸 장애인이었음. 그러나 진취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던 아버지는 여성도 남자 못지않게 교육을 받아야 하며 수동적인 삶을 사는 구식 여성이 아닌 진취적 여성이 되야 한다고 가르침.

17살의 나이에 대학에 진학. (당시엔 여자가 대학을 가는 일조차 흔치 않았음.)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이후 예일대 대학원에 진학해 수학 박사학위까지 취득.

23살에 교육자인 빈센트 호퍼(Vincent Foster Hopper)와 결혼을 하고 대학 강사로 취업. 그러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고, 2차세계 대전에 발발하기 전 둘은 이혼. 자식을 두지 않았던 그레이스 호퍼는 이후 재혼하지 않았고, 전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 호퍼라는 성을 유지.

대학 강사로 일하던 호퍼는 2차 대전 일본의 진주만 폭격이 있은 후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해군에 자원 입대. 당시 호퍼의 나이는 34이었고, 몸무게는 50kg도 나가지 않는 매우 왜소한 체격이었음. 해군에서는 체중 미달을 이유로 입대를 거부했지만, 호퍼는 포기하지 않고 정부 측에 소송까지 내며 입대를 위한 몸무게 제한 취소판정을 받음. 그리하여 1943년 마침내 해군 소위로 임관.

수학자였던 호퍼는 곧바로 미 해군 산하의 연구소에 배치 받음. 이곳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하고 프로그래밍에 눈뜨게 됨. 미 해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연구소 직원들은 하버드 마크(Harvard Mark) I이라는 컴퓨터를 제작.

이후 연구진들은 컴퓨터의 성능을 개량해 하버드 마크 II를 제작. 마크 II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버그"를 탄생시킨 기계였음. 1945년 어느날 저녁, 그레이스 호퍼가 마크 II에서 프로그래밍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계의 작동이 멈추었다고 함. 문제의 원인은 컴퓨터 기기 내부로 날아든 나방이었음. 창문 밖에서 날아든 나방은 마크 II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 컴퓨터에 고장을 일으켰고, 호퍼는 이 나방을 수거해 기록에 남기고 이 나방을 최초의 "컴퓨터 버그(bug: 벌레)," 그리고 나방을 제거한 것을 "디버깅(debugging)" 작업이라고 보고함. ("버그"와 "디버깅"이란 말은 이미 에디슨 시절부터 기계의 사소한 고장과 수리를 가리켜 쓰이던 단어였지만, 컴퓨터에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음.)

세계 최초의 "버그"와 "디버깅" 작업에 관한 기록

하버드 연구소에서 최첨단 컴퓨팅 기술과 프로그래밍 지식을 쌓은 호퍼는 사실상 업계 최초의 직업 여성 프로그래머가 됨.

1952년, 컴파일러(compiler)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한 "컴퓨터의 교육(The Education of a Computer)"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 이후 약 40여년 동안 컴퓨터 프로그래밍 작업을 더 쉽고 효율적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함.

1959년, 펜타곤과 다수의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비즈니스용 프로그래밍 언어, COBOL(Common Business Oriented Language: 코볼)을 완성. 컴퓨터의 상업적인 이용도를 높이기 위해 개발된 코볼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컴파일러를 통해) 어떤 종류의 컴퓨터 하드웨어에서도 작동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래밍 언어였음.

코볼은 그 후 20년간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로 정착돼,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프트웨어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게 됨. 코볼이 이런 성공을 거둔 데에는 호퍼의 노력이 컸음. 호퍼는 기업과 정부 기관을 직접 찾아 다니며 코볼의 효율성을 알렸고, 그들이 코볼을 "표준" 프로그래밍 언어로 사용하도록 설득함.

미 해군의 컴퓨터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와 변함없는 군에 대한 충성에 감복한 미 해군과 정부는 1983년 대통령 특별지시로 호퍼를 해군제독으로 특진 시킴. 호퍼의 특진은 미 해군 역사상 최초의 여성 해군제독의 탄생을 의미함. 또한 호퍼는 1986년 80세까지 군에 복무함으로써 미 해군 역사상 가장 많은 나이에 전역한 사람으로 기록됨.

호퍼는 (당시 선거권도 주어지지 않았던) 여성이었던 데다, 대단한 집안 내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출중한 외모를 타고난 것도 아니던 데다, 비범한 천재성을 보인 인물도 아니었음. 이 왜소한 체격의, 그저 그런 배경의 여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본인의 의지와 노력 때문이었음. 유럽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 수학자, 소피 제르맹


요약
Sophie Germain. 1776-1831.
프랑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독학으로 수학을 배워 18세기 철옹성 같았던 남녀차별의 벽을 뚫고 유럽 제일의 여성 수학자로 발돋움한 천재 여성. 당시 학계의 무시무시한 차별 속에서도 수많은 남성 학자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학 및 초고난이도의 수학 이론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함. 그러나 그녀는 조국 프랑스로부터 그 어떤 보상이나 명예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맘.

사실들

어린 시절 정식 교육 없이 독학으로 수학에 매진해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한 천재였음.

당시 극심했던 수학계의 성차별 피하기 위해 제르맹은 남자 가명을 쓰며 다른 수학자들과 교류를 해야 했음. 그러나 이후 신분이 탄로났지만, 많은 수학자들은 그녀의 재능에 탄복해 적극적인 지원자가 돼 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명인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역시 제르맹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하며 오랜 세월 그녀의 조언자를 자처함.

정수론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제르맹은 당시 100년 가까이 난공불락의 미제로 남아 있던 "페르마의 정리" 해결을 위한 기초 논리를 완성함. 이후 후세 수학자들이 제르맹의 논리를 이용해 페르마의 정리를 하나씩 증명해 나감으로써, 제르맹은 페르마 정리의 증명에 큰 공적을 세운 수학자 중 한명으로 기록됨.

정수론 뿐 아니라 물리학에도 심취했던 제르맹은 "탄성을 가진 평면판의 진동 현상에 관한 연구" 논문을 남김. 이 연구는 현대 탄성물리학의 초석으로, 이후 전세계 수많은 철골 구조물들을 건설하는데 이론적 기초가 됨.

제르맹은 이 논문과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는데 공헌한 점을 인정 받아 프랑스 학회로부터 메달을 받았으며, (독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과학학회의 초청 강연을 맡기도 함.

과거 다른 위대한 여성 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제르맹 역시 평생 독신으로 살았음.

상인의 자녀로 태어나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혼자 힘으로 편견과 역경을 극복하고 당대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거듭난 제르맹. 말년에 그녀는 독일 괴팅겐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로 결정됐으나, 그 소식을 듣지 못하고 55세의 나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남.

프랑스 정부 관리는 그녀의 죽음을 발표하면서 "수학자"가 아닌 "뚜렷한 직업이 없는 독신녀"라고 언급했으며, 이후 그녀의 이름이나 학문적 업적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음.
히파티아 (Hypatia, 355-415)
그리스 아테네와 헬레니즘 시대 살았던 전설적인 여성 철학자, 수학자.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드리아 대학 교수 딸로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제일의 학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함. 그녀는 유창한 강연과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남자 수학자들은 몇 달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다. 뛰어난 미모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히파티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학문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종교 권력이 강해진 뒤, 키릴루스 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학자들을 모두 이교도로 단정, 박해하기 시작함. 이때 히파티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욱 잔혹한 대접을 받았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운명의 그날, 거룩한 사순절 기간 중 피터가 이끄는 야만적인 폭도들은 히파티아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모두 벗기고 교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녀의 살은 날카로운 칼에 갈가리 찢겨나갔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은 불덩이 속에 던져졌다."

밀레바 마리치 (Mileva Maric, 1875-1948)
세계적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아내. 유럽의 "비주류" 민족인 세르비아 계인데다 선천성 관절 이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수학, 물리학, 음악, 미술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여성이 입학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인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 4살 연하였던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둘은 서로의 천재성에 반해 결혼을 하고,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 이론을 비롯한 세계사에 길이 남을 물리학 논문 3편을 공동 저작한다. (특히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나 이론 완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밀레바를 멀리했고, 급기야 자신의 사촌인 엘사와 재혼하기 위해 밀레바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당시 밀레바에겐 2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아인슈타인은 아랑곳 않고 그들은 버린 채 미국으로 망명한다. 버림받은 밀레바는 이후 굉장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아이슈타인이 미국에서 세계적 명성을 높여가는 동안 그녀는 초라한 동네의 피아노 강사와 수학 교사 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두 번째 아들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았고, 자신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년에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얼마 뒤 전도유망했던 이 천재 여성 학자는 73세의 초라한 노파가 돼 쓸쓸히 숨을 거둔다.
에이다 백작부인, 컴퓨터의 어머니


요약
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 1815-1851.
영국의 대문호 로드 바이런의 친딸. 유명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백작부인이 된 상류층 여성으로,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음. 스스로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에이다는 자신보다 먼저 컴퓨터 개발을 시작한 찰스 배비지를 도와 실제 컴퓨터 제작을 주도했으며,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이론에 대한 (수백 년이나 앞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천재 여성은 그러나 "반항적 기질"을 잠재우기 위해 아편을 강제 복용했으며, 말년에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등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음.

사실들

1815년 오거스타 에이다 바이런(Augusta Ada Byron)이란 이름으로 태어남. 그녀의 처녀 성(maiden name)은 바이런으로, 영국이 낳은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인 바이런(Lord Byron)의 친딸이었음.

에이다의 어머니는 바이런과 합법적인 혼인 관계를 맺은 유일한(최소한 영국에서는) 여성이었음. 그러나 바이런과의 결혼은 그녀에게 금전적, 정신적 고통만 안겨준 채 1년 만에 끝나고 맘.

대문호였던 아버지와 수학에 조예깊던 어머니의 지적 혈통을 물려받은 에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방탕한" 기질은 이후 그녀를 곤경에 몰아넣음.

어릴 때부터 모든 학문에 천재적 재능을 발휘, 주변으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천재 소녀로 유명해 짐.

우연히 어머니의 친구를 통해 불세출의 발명가인 찰스 배비지를 만나게 됨. 찰스 배비지가 만든 원시적인 컴퓨터 형태인 "미분기"는 에이다에게 굉장한 영감을 심어줌. 에이다는 베비지가 발명한 미분기가 지금까지의 기계적 계산기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한눈에 알아봄.

이후 에이다는 배비지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미분기에 대한 의견을 나눔. 배비지는 에이다의 수학적 통찰력에 탄복, 다음과 같은 글을 남김. "이 여성은 내가 발명한 기계에 대해 오히려 나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기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이 여성은 나보다 몇 배는 더 탁월했다."

당시 배비지의 발명품의 가능성을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은 에이다였음. 천재적 수학 능력을 타고난 이 여성은 평생 배비지의 후원자로서, 그의 발명품을 세상을 알리고, 개발 자금을 모으며, 동시에 직접 개발에 관여함.

19살에 킹 러브레이스 백작(Lord King, Baron of Lovelace)과 결혼해 "에이다 오거스타 킹, 러브레이스 백작부인(Ada Augusta King, Lady Lovelace)"이라는 호칭을 얻음.

1842년 오늘날 컴퓨터의 원형이 된 "해석기관"에 관한 책, "배비지의 해석기관에 대한 분석(Observations on Mr. Babbage"s Analytical Engine)"을 출간. 이때 에이다가 작성한 배비지 해석기관에 대한 설명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래밍 역사의 기원이 됨.

이 책에서 해석기관에 대한 설명, 해석기관이 완성돼야 하는 이유, 그리고 해석기관이 보여 줄 수 있는 여러 놀라운 기능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 특히, 100년이나 앞서 현대 프로그래밍의 기초적인 개념을 모두 만들어냄.

이때 고안된 것이, 서브루틴(subroutine), 루프(loop), 점프(jump)와 같은 프로그래밍 트릭들이었음. 뿐만 아니라 계산 과정에서 어떤 특정 조건이 들어맞을 경우, 현재 공식에서 지정된 다음 공식으로 넘어가는 "if" 구문을 고안함. "If" 구문의 개발은 기계가 단순히 계산만 하는 것을 뛰어 넘어, 주어진 조건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논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음.

이런 프로그래밍의 기초를 가장 먼저 고안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에이다였고, 그녀가 남긴 기록은 이후 현대 프로그래밍의 시초가 됨.

흥미롭게도 이 책에서 인공지능의 가능성까지 기술함. "if" 구문에 의해 기계가 논리를 수행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인간처럼 지능을 갖출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었음. (시대를 100년이나 앞선 에이다의 경이적인 통찰은 앨런 튜링에 의해서 재발견됨.)

언제부터인지 에이다는 극심한 도박 중독증에 시달리기 시작. 나중에는 남편 집안의 패물을 훔쳐 도박 자금을 마련하는 수준으로 발전함. 남편의 패물까지 저당 잡히고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던 에이다는 친정 집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할 절박한 상황까지 몰림. 도박으로 인한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에이다는 설상가상으로 자궁암까지 걸려 결국 3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함.

에이다의 업적은 그로부터 100년 뒤, 1950년대가 되서야 세상에 알려짐. 이후 에이다에겐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호칭과 함께, 1979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ADA" 프로그래밍 언어가 탄생함.